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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시절 나는 [문제아]였다!
☞ 수업을 빼먹고 ‘경주 신라문화재’ 구경을 간일이나 수학여행 정산 후 남·여 학우들과 야간 파티를 벌인 일 등 나는 고교시절 문제아였다.
그 시절 버스에서 감미롭게 흘러나오던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과 함께 추억을 소환합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가정형편상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였다.
약골이었던 관계로 시골 길 20리가 너무 멀다며 초등학교도 한해 늦게 입학했는데…….
결국은 2년이나 늦어지게 되었다.
봄이 되고 담배 밭에 일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깔끔한 교복을 입은 친구들이 등교를 하는 것이 보였다.
참 부러웠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느낌의 부러움이었다.
부모님을 도와서 열심히 농사일을 한 덕분에 재수를 한 그해는 다행히 농사가 잘되었다.
고향부근에는 경북 북부지역에서 가장 명문고인 ‘안동고등학교’가 있다.
그곳에 가고 싶었지만 하숙이나 자취를 해야 하는 탓으로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통학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진보농고’에 진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해는 2:1이라는 높은 경쟁률이 문제였다.
이제까지 그렇게 경쟁률이 높은 적이 없었는데 내가 입학을 하려니 그렇게 경쟁률이 높았다.
재수생 입장인 나로서는 바짝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경야독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이듬해에는 진보농고에 진학을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에 늦게 입학했는데 고교마저 늦게 진학한 입장이라 동년배에 비하여 2년이나 늦어진 형편이 되었다.
농사일을 돕던 그해 여름은 엄청 더웠다.
칠팔월 푹푹 찌는 폭염은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 염천에 담배 밭에서 김매기를 하면서 장래를 생각해보았다.
‘이렇게 힘든 일을 평생 동안 할 자신이 없다.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방법이 없을까?‘
들에서 일을 하면서 나는 장래 계획을 세밀하게 세웠다.
이때 세운 계획들을 실천하기 위하여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엔 무척 노력을 하였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운동회 날 달리기에서 한 번도 상을 받은 적이 없다.
머리를 써야 하는 ‘구구단 맞추기’나 ‘낱말카드 맞추기’ 등에서는 예외였지만…….
그만큼 체력이 약했다.
그러나 고교에 진학을 한 후 부터 자전거통학을 한 덕분인지 모르지만 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어서 축구에 열중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자 축구를 할 기회가 많았다.
남․여 공학의 60명 단설 학급인 우리학교에서 1학년 때의 시합은 주로 상급학년과 이루어졌다.
하교 길에 우리들은 급우인 박 군 댁에서 TV를 시청했다.
‘박스컵축구대회’나 ‘킹스컵축구대회’ 같이 큰 대회가 있는 날이면 옹기종기 모여서 시청을 하던 일이 어제일 같다.
그 무렵 ‘무하마드 알리’의 권투시합을 보는 것 또한 엄청 재미가 있었다.
당시 아버지가 면장님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박 군 댁은 어마어마한 대저택이었다.
마음씨 착한 박 군은 그런 이벤트가 있는 날이면 기꺼이 우리들에게 장소를 제공해주었다.
우리 집에는 물론 TV가 없을 때였다.
형편도 되지 않았지만 그 시절 우리 동네에는 아예 전기도 들어오지 않을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회택, 박이천, 김정남, 이세연 골키퍼 등이 활약한 당대의 국가대표 ‘청룡팀’의 축구경기는 환상적이었다.
축구를 본 다음날에는 우리도 축구시합을 벌였다.
진 팀이 이긴 팀에게 짜장면을 사주는 내기 시합이었다.
월전 참막에 Sh, 진안에 Yc, Gh, 시량에 Kj, Jd, 흥구에 Yg와 입암에 Dj등 우리학년에는 축구에 소질이 있는 쟁쟁한 멤버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1학년이지만 상급학년과 붙어도 승률이 높았다.
나도 축구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학초기에는 주전으로 참여를 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결석을 하는 바람에 나는 대타로 출전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죽을힘을 다해서 열심히 뛴 결과 다음 시합부터는 주전으로 인정을 해주어 정말 기분이 좋았다.
어느 날은 인근 [영양고등학교]와 [청송고등학교]로 가서 원정시합도 하였다.
우리보다는 체력이 월등하게 좋은 ‘월전’에 주둔하고 있던 [전투경찰]팀들과도 시합을 한 적이 있었다.
아직 자라는 단계인 고등학생인지라 전투경찰 형들과의 몸싸움에서는 정말 힘이 들었다.
이때 익힌 축구는 군입대후에도 부대대항 축구시합에서는 항상 주전으로 참여하여 젊음을 발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자전거로 통학을 한 덕분에 하체가 엄청 발달했다.
덕분에 경상북도 도민체전 출전 사이클 고등부 청송군대표로 까지 선발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객관적인 전력 평가 결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선수들과 겨루어 승산이 없다는 군 체육회의 결정에 따라 최종적으로 도민체전에 결국 참여는 하지 못하였다.
군복무중인 어느 날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대를 하면 평생을 교직에 종사해야 된다.
선생님들은 배구를 주로 하던데 지금부터는 배구를 배우는 게 맞을 것 같다.’
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용하지 않는 낡은 위장막으로 배구네트를 만들었다.
부대 내 공터에 네트를 설치하고 운동에 소질이 있는 후임을 물색했다.
그 후임의 도움으로 시간이 날 때 마다 ‘스파이크’연습을 했다.
그 덕분에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한 대학시절에는 학반대표로 활약을 했었다.
발령을 받은 후 교직현장에서는 퇴임 때까지 학교대표로 활약을 했었다.
선생님들의 체육대회는 배구가 주 종목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단위학교의 책임자로 부임을 한 퇴임 무렵에는 직원들과 1주일에 한, 두 번씩은 배구를 즐겼다.
대학이나 중등학교에는 자기가 맡은 수업이 끝나면 건강관리 차원에서 테니스나 탁구 등의 운동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초등학교에서는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중등학교에서는 하는데, 유독 초등학교에서만 못하는 일을 한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
때마침 우리 학교에는 운동을 할 수 있는 체육관이 있었다.
그리하여 수업이 모두 끝난 후에 업무에 지장이 없는 직원들과 배구를 부지런히 하였다.
그렇게 다져진 체력은 나중에 엄청 도움이 되었다.
정년퇴임 기념으로 실시한 재직 마지막 년도에 실시한 [필리핀 여행]시에 요긴하게 실력을 발휘하였다.
[스마트 폰]을 날치기 당한 일이 있었는데 날치기 범을 추격하여 잡은 일이 바로 그 일이다.
놈은 청년이었지만 아직도 내게는 그 놈을 잡을 힘이 있었던 것은 퇴임 무렵까지 열심히 활동한 배구 경기의 덕분이었다.
대학 재학 중에는 테니스에 관심을 가지고 대학 내 테니스동아리를 결성하는데 크게 관여를 한 후 학내대회에서 단식과 복식까지 제패 하는 결과를 얻었다.
고교시절 나의 목표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응시요강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가슴둘레가 신장의 1/2이 넘어야 한다.」
는 조항이다.
고민이 되었다.
자전거 통학을 3년 동안 하는 바람에 다리 근육은 엄청 발달하였지만 상대적으로 상체발달이 저조하여 이 조항을 만족하지 못하였다.
누군가가 조언을 했다.
“가슴둘레를 발달시키는 데는 ‘평행봉 운동’이 제일 좋다.”
그리하여 수시로 평행봉에 매달려 운동을 하였다.
조금씩 결과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마음속으로만 좋아하고 있었던 여학생이 오는 것이 보였다.
“옳지 좋은 기회다.”
나는 열심히 평행봉에 매달렸다.
그러나 우찌 이런 일이???
너무 무리를 하는 바람에 보기 좋게 땅바닥으로 쳐 박히고 말았다.
다행히 큰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그 후론 평행봉이 쳐다보기도 싫었다.
겁이 났기 때문이다.
이 일이 있은 후 ‘육사’는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른 길을 찾았으니 군인의 길이 나와는 인연이 없었던 셈이다.
‘조심 좀 하지…….’
새삼스럽게 추억을 소환하는 이유는 초등학교 시절 나는 소위 말하는 ‘약골’이었다.
그래서 운동회 6년 동안 달리기에서 단 한 번도 상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을 하니 결과도 좋아지더라!’
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편, 그 시절에는 무척 책을 읽고 싶었다.
하지만 집에는 읽을 책이 없었다.
책을 읽고 싶은 욕망과 경제적인 이유로 나는 학교도서실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농업고등학교인 우리학교는 모범적이나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 4명을 [근로 장학생]으로 선발해서 경제적인 혜택을 주었다.
젖소의 젖을 짜고 관리하는 곳 2명(박 군 외 1명), 매점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곳에 1명(박 양), 그리고 나머지 1곳이 도서실에서 책을 대여하는 일이었다.
다른 분야보다도 도서실 근무가 가장 인기가 있어서 경쟁이 치열한 곳이었다.
왜냐하면 70년대 초반 시골형편이 모두가 그렇고 그런 편이어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사 볼 형편이 못되었다.
반면에 그 곳에서 근무를 하면 좋은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나는 도서실 근무를 하게 되어 기분이 매우 좋아져서 정말로 열심히 근무를 하였다.
그러는 한편 빌려온 책을 거의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하여 하룻밤에 1권씩의 책을 읽게 된다.
이때가 아마 나의 생애에서 가장 독서열이 왕성했던 때라고 여겨지며 이때의 독서경험이 내 인생의 등대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다.
3학년이 되자 나는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였다.
첫째, 기필코 ‘1등’을 해보는 것이다.
당시 우리들은 시험을 친 후에는 석차를 내어서 통보를 하였다.
둘째, 사회성을 높이기 위하여 ‘학반실장’에 도전하는 것이다.
셋째, 농고 유일의 동아리인 ‘4-H연합회장’에 도전하는 것이다.
회장이 되면 [한미농업후원 재단]에서 3만원의 장학금이 수여되었다.
1기분 공납금이 2,3천원 정도였으므로 이 액수는 농고 3년분의 공납금에 해당되는 큰 액수의 장학금이므로 어려운 가정형편상 내게는 꼭 필요한 장학금이었다.
넷째, ‘영농학생회장’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 동아리는 농고 생들의 전국적인 모임으로 지부형태의 교내 단체 회장이다.
다섯째, 발전된 장래의 나를 위해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다.
예비고사를 통과해야 정규 대학입시를 치를 수 있었던 당시 제도 하에서 우리 같은 농고 생들이 진학을 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목표를 정해두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나는 정신없이 뛰어 다녔다.
결과는 신기하게도 다섯 가지의 목표를 모두 성취하게 되었다.
다만 1등은 공동 1등을 한번 밖에 하지 못했다.
권양, 배군, 김군, 정군 등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가기가 힘이 든 수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장역할을 맡게 된 그해 봄이었다.
어렵게 학교 측의 허락을 받아 당일치기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다.
당일치기로 가까운 경주에 가는데도 경제적인 여건으로 참여를 못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먼 곳에 가서 1박을 하는 등으로 추진을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만 해도 시골에는 관광버스가 없었다.
궁리 끝에 안동에 있는 「시외버스」 회사에서 당일에 운행을 하지 않는 버스를 섭외하였다.
그렇게 추진한 당일치기 수학여행이 무사히 끝이 났다.
정산을 해보니 얼마간의 돈이 남았다.
참여자에게 나눠주기에는 너무 작은 금액이었다.
“이 돈을 어떻게 한다.”
임원단과 의논을 해 보았다.
“명색이 수학여행인데 우리는 1박도 하지 못했다.
우리도 이 돈으로 야간 파티를 하자!”
누군가가 제안을 하였다.
그렇게 결정이 되었다.
밤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야간파티를 하기로 하였다.
“예산이 너무 빠듯한데…….”
“예산을 줄이려면 안주는 다른 안주 일절 필요 없이 장터에서 식당을 하는 친구 집에서 [단무지]를 구해서 하면 된다.”
라고 한 친구가 제안을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구입한 막걸리와 단무지 안주를 실은 리어카를 끌고 양정냇가에서 젊음을 발산했다.
양정냇가는 지금 청송 북부교도소가 들어선 바로 그곳이다.
낙동강의 상류인 반변천이 돌아서 흐르는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강 주변에는 아찔한 바위 절벽이 있는데, 이 절벽이 교도소가 들어서는데 일조를 한 자연환경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파티를 하던 그 시절에는 교도소가 들어서기 전이었다.
따라서 주변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진 천혜의 요새인 이곳을 장소로 택한 것이었다.
야외전축도 있었던 것 같다.
남. 여 고등학생들이 야간에 함께 어울려 놀았으니 틀림없이 문제행동이다.
그렇게 그날 밤 단무지 안주만으로 새벽까지 마신 막걸리 덕분에 나는 지금도 단무지는 질려서 절대 먹지를 않는다.
아무튼 위험한 야간 파티는 정말로 아무런 문제없이 무사하게 끝이 났다.
그런데 그 다음날이 문제였다.
등교를 하니
“고3 실장은 학생과장에게 오라!”
는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이지?”
하며 교무실에 들어서니 대머리 학생과장 선생님은 엄청 화가 나 있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함께 벌인 야간 파티의 자초지종을 추궁 받았다.
별수 없이 사실대로 말씀을 드린 후 엄한 질책을 받았다.
사연인즉 그날 밤 야간파티에 참여를 하지 않은 누군가가 학생과장에게 고자질을 한 것이었다.
참으로 오래된 소중한 추억이다.
가을이 되었다.
Jh군과 시량에 Jd군은 교실 짝꿍이다.
저희 둘이서는 거사를 실행하기로 뜻이 통한 후 한마을 짝꿍인 나에게 어느 날
“요즘 경주에 가면 「신라문화재」행사를 한다.
공부도 하기 싫고 구경거리가 많다는데 같이 가자!”
라고 한다.
“학교는?”
“땡땡이 치고 가자!”
그리하여 우리 셋은 땡땡이를 치고 시외버스에 올랐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우리들은 재미있게 구경을 하였다.
한참 구경에 열중인데 서울에서 온 누나들을 만났다.
교복을 입고 구경을 하는 우리들이 귀엽게 보였는지 사진촬영을 함께 하자고 제안을 했다.
우연하게 인연이 이어진 우리들은 한나절을 함께 보냈었다.
나중에 사진을 찾은 김 군 왈
“너희 둘은 나보다 나이가 좀 많다고 예쁜 누나들을 차지하고 나는 제일 못생긴 누나와 짝꿍이 되었다.”
고 볼멘소리를 한다.
“Jh야!
짝꿍은 우리가 결정 한 것이 아니고 누나들이 정했데이!”
과연 그러고 보니 내 짝꿍 누나가 제일 이쁘다. ㅋㅋㅋ
Jh짝꿍 누나는 사진을 촬영하느라고 사진 상에서는 보이지를 않네!
그 누나들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한편 수원에 있는 ‘서울대학교 농대’에서 벌어진 전국농업계고등학생들의 단합대회인 ‘제2회 영농학생 정진대회’에 학교대표로 김 군과 배 군과 함께 참여를 하였다.
개통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고속버스’를 처음 타보는 행운도 누렸다.
또한 농고 생들의 각종 실기 경연대회에 학교대표로 참여를 하여 나의 좁은 시야를 넓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당시 경북에는 16개의 농업계 고등학교가 있었는데 우리학교는 시설 면이나 교세에서 가장 열악하였다.
명색이 농고인데 농기계는 낡은 경운기 1대가 고작이고 우리들은 주로 삽으로 땅을 파는 실습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대회 출전을 위하여 경운기 운전을 배우는 중이었다.
학교 서편 테니스 장 위쪽에는 교실사이로 돌아가는 좁은 길이 있다.
그 길에서 속력을 못 줄이고 그냥 통과하다가 경운기가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재빠르게 뛰어내려서 다친 곳은 없었지만 경운기는 하늘을 보고 ‘달달’거리며 누워있다.
다행히 크게 파손이 되지 않고 본체와 화물적재함이 연결된 ‘핀’만 부러진 상황이었다.
운동장에서 뛰어 놀던 중학생 후배들이 몰려오고 교실에서는 창문을 통하여 모두가 재미있다며 구경을 하던 일은 지금도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농고라지만 우리학교에는 [트랙터]가 없었다.
할 수없이 김〇수 선생님과 함께 선생님의 모교인 [영덕농고]로 가서 트랙터 운전을 배웠다.
그러나 하루 배운 실력으로는 겨우 시동을 거는 정도 밖에는…….
그런 실정이니 대회에 출전했지만 입상을 하지 못했다.
필기시험은 잘 쳤지만 배점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실기시험 점수가…….
이렇게 다양한 활동에 열중하다 보니 3학년 2학기를 맞이하였다.
어느 순간에 ‘아차’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하다가는 대학교 문 앞에도 못가 볼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여러모로 궁리한 결과 담임 선생님께
“대학진학을 위해서는 공부에 전념해야 한다.”
는 이유를 말씀드리고 어렵게 차지한 ‘실장’역할을 사표로 마감하고 말았다.
♣ 사연이 있는 노래 –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
졸업 무렵이 되었다.
졸업을 하면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과 졸업과 동시에 입대를 해야 할 처지에 있는 53년생들의 환송회를 한다는 핑계로 엄청 어울려 다니며 놀았다.
한마을에서 같이 다닌 나와 박 군은 1월 21일에 군 소집영장을 받아 둔 상태였다.
졸업은 1월 중순이고…….
성격이 활달한 김〇규군이 주선을 하였다.
월전리 참막 ‘서시천’ 건너 얕은 언덕위에 거주하던 자기 집을 처음 제공하였다.
이후 어천에 박군, 세장에 정군, 흥구에 성〇, 이촌에 배군, 청송에 김군, 시량 송이골에 박군 집들을 방문하면서 우리들의 흥겨운 파티는 계속되었다.
당시 고3 신분이었으므로 요즘 기준에서 보면 우리들은 분명히 [문제아]들이었다.
그러나 입대를 앞둔 아들 친구들의 방문에 친구 어머님들은 기꺼이 환영을 하며 방을 내어 주시고 식사도 차려 주셨다.
당시에는 노는 방법이 아주 간단했다.
교련복을 입고 소풍을 갔을 때다.
당시엔 소풍이라고 하지 않고 행군이라고 했다.
별다른 음향기기가 준비되어 있는 것도 아닌 우리들은 경치 좋은 ‘비봉산 계곡’에서 함께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며 손뼉을 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군 입대를 위한 환송회 때도 소풍 때와 마찬가지로 방에서 막걸리 파티를 하면서 돌아가면서 육성으로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섭외력이 뛰어난 친구가 있는 동네에서는 마을 처녀들을 섭외해서 함께 손뼉을 치며 놀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송’에 있는 김〇본군 댁을 방문하는 길이었다.
급행버스를 타고 가는 중이었다.
요즘엔 '급행버스'가 없지만,
당시 분류 기준으로는,
1) 완행버스 : 세우는 위치가 100% 수요자 중심이다.
어디서나 타고 내릴 수 있지만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2) 급행버스 : '면' 또는 '읍' 단위 정류소에서만 주,정차를 하는 시스템이다.
3) 직행버스 : 목표지점 운행시 직통(장거리 경우 출발지에서 논스톱으로 목표지점까지 운행은 못했지만...)은 아니지만 요즘의 직통운행과 비슷 함) 지금 기준에서 보면 완행버스가 없어졌다.
정해진 정류장에서 승.하차가 가능한 당시의 급행버스는 오늘 날 ' 시내버스' 시스템이다.
없어진 급행버스의 추억은 또다른 추억을 소환한다.
버스에서는 때마침 경쾌한 경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전자오르간 연주로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 노래는 엄청 매력적이었다.
아마도,
'곧 졸업을 해야하고 그러면 이별을 해야 한다!'
는 사실이 노래 가사와 어울려 더 깊이 각인이 된것 같다.
이때의 느낌은 70이 된 오늘도 생생하게 추억 저편에서 소환이 된다.
하고 싶은 말들이 쌓였는데도
한마디 말 못하고 헤어지는 당신을
이제와서 붙잡아도 소용없는 일인데
구름 저 멀리 사라져간
당신을 못잊어 애태우며
허전한 발길 돌리면서
그리움 달랠 길 없어 나는 걸었네
♩♪♬ ~ ♩♪♬ ~
수많은 사연들이 메아리 쳐도
지금은 말 못하고 떠나가는 당신을
이제와서 뉘우쳐도 허무한 일인데
하늘 저 멀리 떠나버린
당신을 못잊어 애태우며
쓸쓸한 발길 돌리면서
그리움 참을 길 없어 나는 걸었네
♩♪♬ ~ ♩♪♬ ~
이 노래를 들으면서 그 시절 막걸리 파티와 함께 했었던 친구들을 생각해 봅니다.
수업을 땡땡이 치고 경주로 [신라문화재]구경을 간일과 수학여행 후 여학생들과 [야간 파티]를 했으니 나는 분명히 ‘문제아’였다.
늦은 감이 있지만 광명을 찾기 위하여 이제라도 자수합니다.
“자수하여 광명 찾자!”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젊음을 발산할줄 아는 자신의 목표가 뚜렸한 문제아 아닌 우등생 이였네요.
자식들이 그렇게만 커 준다면 부모는 보람이지요.
가정 형편상 우여곡절로 대학까지 마친걸 보면 ,목표가 확고한 멋쟁이 입니다.
박수 보냅니다.
코로나로 답답한 일상이 계속되는 바람에 고교시절의 추억을 소환해 보았습니다.
우째보면 다른 사람들에겐 씰~데 없는 넋두리이지만 제겐 추억속 친구들을 회상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누리님도 잘 계시지요?
빠른 일상 회복을 고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