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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농월정, 청천동문 가족등반대회 / 2018.10.21. 학정 이재익 시인, 오늘 친구들에게 발행 배부한 송국유존 94호 표지 [시] 남계서원 명성당에 앉아서 이재익(李宰益, 學亭) 명성明誠 명성, 붉은 배롱나무 꽃. 한 마리 좀, 부셔져도 좋을 이 몸2) 두류산 맥추麥秋의 길, 크고 빛나는 무궁화 한 송이 1) 함양 정여창의 남계서원 중심 건물 강당인 명성당 ‘明誠’의 의미 1. 아름다운 정경 2. 이 페이지 전 사진은 모두 농월정 일원의 계곡이다. 3. 농월정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월림리 4. 여기 농월정은 조선 중기 때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낸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傅, 1571~1639)공이 1637년에 세웠다. 정자옆 바위에 지족당장구지소(지족당이 산책하던 곳)라는 글귀도 새겼다. 지족당은 인조 반정 후 예조참판과 강릉 도호부사 등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왕이 불러도 벼슬길에 나가지를 않고 1637년 농월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5. 박명부 참판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새로 지은 정자로 몇 차례 중수를 거쳐 1899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건립되었다. 6. 계곡의 위쪽으로 황석산 등산로가 시작된다. 7. 거연정에서 농월정까지 6km의 선비을 걸어봤다. 8. 농월정. 弄月亭이라는 명칭은 ‘달을 희롱한다’ 라는 뜻으로 선조들의 풍류사상이 깃든 곳. 농월정 앞 넓게 자리하고 있는 반석을 달바위(月淵巖)라 부르는데 바위 면적이 정자를 중심으로 1,000여 평이 된다. 9. 농월정은 1899년 중수했고, 2003년 10월 9일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인하여 농월정이 전소. 12년 뒤. 2015년 9월 12일 복원했다. 10. 농월정 11. 농월정. 2015년에 복원했다. 13. 농월정 13. 농월정. 이 화림계곡물은 안의면 금천리에 이르면 비단금자 錦川으로 불린다. 14. 농월정. 화림계곡은 8담8정이라하였으나, 현재는 정자를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 4곳만 볼 수 있다. 15. 거북바위같아 거북바위라고 해 두자. 그 너머로 숲속에 휘장이 쳐져 있다. 오늘 우리 청천(동아고) 동문 행사장이다. 저 숲 속에는 아주 큰 고목 왕버들이 많다. 16. 안의는 옛날에는 거창, 함양과 대등한 독립현이었으나 현재는 함양에 속해 있다. 산청과 안의는 원래 산음, 안음으로 불렸다. 그런데 영조 때 산음에서 7세 여아가 애기를 낳았다. 지명에 陰자가 붙어 음기가 세서 그렇다고 하여 산음은 산청으로, 안음은 안의로 지명을 바꾸었다. 17. 화림동 계곡에 1993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농월정국민관광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18. 농월정. 함양은 상림이라던가 곳곳에 물레방아를 설치한 물레방아 고장이다. 물레방아는 원래 우리나라에 없었다. 연암 박지원(1737~1805년)은 44세 때 친척 형 박명원이 청에 사신으로 갈 때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갔다와서 <열하일기> 라는 기행문을 썼다. 박지원이 55세 때 1792년 부터 안의 현감으로 5년간 근무하면서 청에서 견문한 물레방아를 함양에 설치하였으며, 물레방아는 그 후에 전국적으로 보급 됐다. 19. 북학파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서울 사람이었지만 그의 유적이 없다. 유일하게 남은 흔적이 안의 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연암 박지원 선생 사적비> 이다. 안의 초등학교 자리가 박지원이 근무한 안의현청이 있었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20. 농월정을 찾아 보세요. 숨은 그림 찾기 21. 함양군은 옛날에는 교통 오지였지만 지금은 대전통영 고속도로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지나가고,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는 88올림픽고속도로가 지나가면서 함양 한 가운데서 함양 ic로 십자로 교차한다. 22. 함양 곶감이 유명하다. 23. 함양 북쪽 서상면에는 논개묘가 있고, 서하면에는 용추폭포가 있다. 서하면~안이면에 걸쳐 선비길이 있다. 동쪽에 지곡면 수동면에 걸쳐 일두 정여창 고택, 남계서원, 청계서원이 있다. 중앙부에 함양읍, 상림 학사루가 있고, 남부 마천면에는 지리산에 접하여 칠선계곡, 백무동계곡, 벽송사,서암석불이 있다. 24. 농월정. 다음의 선비에 대한 언급은 정민 교수가 어느때, 삼성문화재단의 <<문화와 나>> 잡지에 기고한 <선비의 향기>에서 참고하여 씁니다. 25. "대쪽같은, 꼿꼿한, 올곧은, 꼬장꼬장한, 지조있는 ~선비" "선비는 문화적 의미를 띠는 일종의 정신적 가치다. 양반정신이란 말은 없지만 선비정신이란 말은 있다." 26. "선비는 아래로 농부에서 위로는 왕공 귀인이 될 수있다. 하지만 언제 어디에 있든지 그 마음 가짐은 한결같다." 27. <화림동 월연암> 바위에 새겼다. 28. "사랑을 남에게 미루어 확산하는 어짊, 옳고 그름을 냉철하게 가르는 판단력, 들 때 들고 날 때 날 줄 아는 올바른 몸가짐, 이것을 익혀 실천하는 전인적 인격을 선비 또는 군자라 불렀다. 이것이 가치 지향으로 불릴 때 선비정신이 된다." 29. 1190m. 황석산 속에서 정유재란 때 조종도 곽준 등 의병장 예하 다수의 의병들이 전사했다. 1714년 숙종 때 사당을 지었다. 이들을 비롯하여 3,500 여 명의 선열들을 추모하고자 농월정 부근 도로변에 황암사黃巖祠라고 하는 호국의총을 2001년에 정화했다. 30. "선비는 한자로 士에 해당한다. 주자의 성리학을 따르고 실천한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존재로만 봐서는 안된다." 31. "공자는 <궁해도 의로움을 잃지 않고, 현달해도 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窮不失義 達不離道) 것> 라고 말씀하였다. 선비의 바른 몸가짐에 부합한다. 맹자는 이 말에 <궁하면 홀로 그 몸을 바르게 하고, 달하면 천하를 아울러 바르게 한다. (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고 화답했다." 32. 다음은 권호문(1532~1587)의 시조다 출出하면 치군택민治君澤民 처處하면 조월경운釣月耕雲 明哲君子 는 이럴사 즐기나니 하물며 富貴 위기危機라 빈천거貧賤居를 하오리다. 쉽게 풀어 보면, 기회를 얻어 세상에 나가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내 몸 헌신한다. 알아주는 이 없어 묻혀지내면 공연히 주색잡기로 인생을 탕진하거나, 불평불만을 늘어 놓는 대신,달과 구름을 벗삼아 자연 속의 삶을 즐거워 한다. 부귀는 위험을 불러오는 기틀일 뿐이니, 빈천의 삶을 기쁘게 살겠노라 했다. 이것이 선비가 가는 길이다. 권호문은 과거 합격했으나 연달아 부모가 돌아가시자 벼슬을 단념하고 초연히 선비로 살았다. 33. 선비의 길은 대부분 득의의 길이 아니다. 가시밭 길이다. 정의는 늘 불의 앞에 무력하다. 아첨하고 남 헐뜯는 말은 듣기에 달콤하고, 곧고 바른 말은 귀에 늘 거슬린다. 34. 농월정 진입로 다리 저 다리처럼 우리는 사회의 길이 되어야 한다. 그 길은 선비정신의 길이다. 35. 농월정 진입로 다리. <윤선도(1587~1671) 시조> 슬프나 즐거우나 옳다 하나 외다 하나 내 몸의 해올 일만 닦고 닦을 뿐이언정 그 밖의 여나믄 일이야 분별할 줄 있으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