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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동학,증산 스크랩 동학이 꿈꾸는 근대의 길
멩이 추천 0 조회 42 08.01.23 22: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글쓴이 : 박맹수
** 실린곳 : 녹색평론 11-12월호

서구적 근대의 신화

최근 들어 부쩍 우리의 근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담론이 여기저기서 활발하다. 이들 담론 가운데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일제 식민지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이다. 종래, 식민지 시대를 바라보는 입장은 수탈론(收奪論) 일색이었다. 수탈론이란 일제의 식민지배체제는 기본적으로 식민지 모국의 모순을 피식민지에 전가하는 체제였으며, 식민지 모국의 경제적 발전을 위해 조선 민중들의 희생과 부담을 강요하는 수탈적 성격이 그 기조를 이루고 있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같은 수탈론은 적어도 19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확고부동한 정설로 정착되어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역사학 분야에도 포스트모더니즘이 도입 소개되어 국사(國史) 또는 민족(民族)이라는 일국사적 관점의 분석틀이 식민지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구체적 일상과 삶의 경험들을 박탈해 왔다는 반성이 일어나고, 그 결과 일국사적 관점의 편협성을 넘어 동아시아라는 열린 관점에서 우리의 역사상을 재검토하려는 연구자들이 등장하면서 종래의 수탈론은 새로운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수탈론을 비판하는 대표적 견해가 바로 식민지 근대화론(植民地 近代化論)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식민지시대에 철도와 도로․공장 등의 인프라가 정비되어 경제가 꾸준히 성장하였고, 영양 및 위생수준의 향상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식민지시대를 수탈의 측면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또한 식민지시대 일제에 의해 정비된 철도와 도로․공장 등의 인프라 덕분에 1960년대 이후 한국이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식민지 시대에도 숫자상으로 보면 경제가 꾸준히 발전하고 있었고, 인프라도 많이 정비되었으며, 인구가 늘어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사실만 보자면, 식민지 근대화론자의 주장은 일견 타당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견해가 지금도 일본 안에서 되풀이되는 식민지지배 긍정론자들의 주장과 매우 닮아 있다는 점, 식민지 시대에 이루어진 경제성장과 인프라 정비가 지닌 역사적 성격, 즉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검토의 여지가 많다.

최근에 이루어지고 있는 또 하나의 대표적 담론은 바로 ‘근대성(近代性)’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우리들이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근대라는 개념은 본래 우리 고유의 개념은 아니었다. 근대라는 용어는 당초 서구사회를 모델로 성립된 개념이었다. 이 근대라는 용어가 우리에게 수입된 것은 19세기 서세동점(西世東漸)의 시대였으며, 탈아입구(脫亞入歐)를 표방한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 그런데 서구로부터 수입된 근대는 1백년 이상 우리들에게 지고지선(至高至善)의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다. 즉 근대는 무조건 좋은 것이고 바람직한 것이기에 반드시 실현해야 할 절대적 가치를 지닌 개념으로 이해해 왔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에게 근대는 하나의 신화(神話)로 정착하기에 이른다.

근대를 제일 먼저 신화화한 측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었다. 그들은 19세기 한국은 근대가 결여된 정체된 사회라고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조선지배야말로 한국에 결여된 근대를 실현하기 위한 일본인들의 ‘은혜’라고 강조하였다. 이 같은 논리는 정체된 조선사회를 근대화시키려는 일제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확립된 조선=정체사회(미개), 일본=근대사회(문명)라는 논리는 일제에 의해 식민지시대 내내 우리의 뇌수 속에 강제적으로 각인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근대를 실현하지 못한 것이 바로 일제로부터 식민지배를 당하게 된 결정적 원인이라는 착각을 부동의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1945년 8월 일제는 패망했다. 일제의 패망은 곧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가 정당하다는 식민지배의 논리도 함께 파탄에 이른 것을 의미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식민지배 논리도 함께 파탄에 이른 만큼, 1945년 이후 당연히 19세기 우리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해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식민지시대 내내 주류의 식민사학에 맞서 민족 주체적인 역사상 확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우리 역사가들에게 해방조국과 민중들은 식민사학자들의 논리를 뛰어넘는 새로운 역사해석을 요구했다. 그 결과 1960년대에 이르러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內在的 發展論)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이 싹트게 된다. 내재적 발전론이란, 한 마디로 일제 식민지배의 주된 논리였던 조선=정체사회라는 등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견해를 말한다. 즉, 종래 식민사학자들은 조선사회를 정체된 사회라고 강조했지만 그것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조선에서도 이미 18세기 무렵부터 서구 근대사회에서나 확인되는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있었으며, 전근대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신분제도 타파를 주장하는 실학자(實學者)들이 등장함으로써 근대사회를 지향하려는 움직임이 일제의 식민지배 훨씬 이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내재적 발전론은 우리의 근대는 민족 내부의 주체적 역량에 의해 충분히 실현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라는 외세의 침략과 지배에 의해 철저하게 저지당했다고 하는 수탈론과 그 맥을 함께 하기에 이른다. 1960년대 내재적 발전론은 수탈론과 맞물리면서 식민사학자들의 논리를 제압하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내재적 발전론을 통해 오랜 세월동안 일제에 의해 강요된 이른바 식민지배의 논리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즉, 조선의 19세기는 일본의 고대사회 수준과 다름없을 만큼 정체되어 있었다(정체성론), 조선 사람은 늘 갈라져서 싸우기를 좋아한다(당파성론), 조선은 반도라는 지리적 이유 때문에 역사적으로 언제나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에 의해 지배당해 왔다(지리적 결정론)는 일제 어용학자들의 주장을 일거에 타파하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내재적 발전론 역시 근대라는 문제의식에 매몰되어 있었다. 내재적 발전론이 말하는 근대는 어디까지나 서구적 근대를 뜻했으니, 그것은 당연히 서구 근대사회의 특징인 자본주의의 발달, 국민국가의 확립, 사회 신분제의 폐지 등의 내용이 우리에게도 있었다거나, 아니면 형성되고 있는 중이었다는 식의 논리를 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조선후기에 등장한 새로운 농업형태인 광작(廣作) 또는 경영형 부농(富農)을 자본주의의 맹아로 파악하는 견해이다. 조선후기 광작이나 경영형 부농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18세기부터 이미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있었으니, 우리도 서구사회와 마찬가지로 근대를 실현하려는 움직임이 이미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사회는 결코 정체된 사회가 아니었으며, 우리도 자체 역량으로 충분히 근대를 실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오늘날, 전지구상에 만연하고 있는 위기현상의 심층에 서구의 근대에 확립된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와 국민국가라는 정치체제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하나의 상식이 되어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이 땅의 내재적 발전론자들에게는 이 같은 어두운 현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서구적 근대를 성취하려는 움직임을 우리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자신들에게 부여된 역사적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요컨대, 내재적 발전론자들 역시 근대라는 신화에 푹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근대에 대해 1980년대부터 우리 학계에서 조심스런 문제제기가 시작되었다. 이 같은 문제제기는 곧 식민지시대 내내 식민사학자들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던 근대의 부재, 그리고 실학사상과 광작․경영형 부농 등을 근거로 하여 서구적 근대를 실현하려는 움직임이 우리 내부에도 이미 엄연하게 존재하였음을 증명함으로써 식민지배의 논리를 타파하고자 하였던 내재적 발전론자들의 문제의식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서구적 근대에 대한 문제제기는 국내에서는 정창렬 교수, 일본에서는 재일동포 출신인 조경달 교수에 의해 제기되었다. 두 사람은 모두 한국근대사 가운데서도 동학과 동학혁명연구에 오랜 기간 천착해온 역사가들로, 1894년 동학혁명의 성격을 구명하기 위한 연구 과정 속에서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와 국민국가를 큰 특징으로 하는 서구적 근대를 반드시 실현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서구의 역사와는 본질적으로 성격이 다른 조선사가 추구해야 할 근대를 왜 하필이면 서구적 근대에서 찾아야 하는가?”에 의문을 품고 서구의 근대와는 다른 ‘비서구적 근대’의 모델을 동학혁명연구를 통해 해명하고자 했다.(정창렬, 1982; 조경달, 1982)

비서구적 근대, 아래로부터의 길 동학

역사가들은 근대를 실현하는 길을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눈다. 위로부터의 길과 아래로부터의 길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19세기 조선의 개화파(開化派)가 주도했던 갑신정변(1884)과 갑오개혁(1894),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가 주도했던 상소운동(1870-1880년대)과 의병전쟁(1890-1900년대)을 위로부터의 길이라 한다. 여기에 대해 수운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과 그 동학의 사상과 조직이 기반이 되었던 1894년 동학혁명을 아래로부터의 길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데, 기존 연구자들은 아래로부터 근대를 실현하려 했던 동학과 동학혁명 과정에 나타난 근대적 지향을 서구적 근대와 다름없는 것으로 파악해왔다. 그 같은 기존의 통설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 이들이 바로 앞에서 말한 정창렬과 조경달이다. 일본의 민중사상․민중운동연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교수는 “19세기 중반 이후의 근대세계는 자본주의적 세계구조, 국민국가, 민중의 생활세계라고 하는 각각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또한 확연히 구별되는 이 세 가지 차원에 초점을 두고 분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상황 속에서 되돌아보면, 자본주의적 세계구조가 기본적인 동력이며, 민중의 생활세계도 국민국가도 그것에 희롱당하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나, 하지만 그러한 일은 없다. 민중의 생활세계는 자본주의적 세계구조에 의해 규정되면서도 독자적인 논리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으며, 세계구조가 그것을 완전히 제어할 수는 없다 ”고 말한 바 있다. (야스마루 요시오, 2003) 야스마루 교수의 견해를 빌린다면, 동학과 동학혁명은 바로 자본주의적 세계구조에 의해 규정되지 않은 조선 민중의 독자적 생활세계를 반영한 역사적 소산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 민중의 독자적 논리를 반영하고 있는 동학과 동학혁명에서 우리는 무엇을 확인할 수 있을까? 여기서 동학의 3대 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 수운 최제우(1824-1864), 해월 최시형(1827-1898), 전봉준(1855-1895)의 행적과 사상을 통해 동학과 동학혁명에 나타난 조선 민중들의 독자적 논리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최제우의 동학, 유무상자의 공동체를 지향하다

먼저 수운 선생의 경우를 보자. 수운은 21세(1844)부터 구도생활을 시작하여 37세(1860)에 종교체험을 통해 상제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동학을 창도한다. 1년 뒤인 1861년 6월부터 포덕(布德; 가르침을 펴는 활동)을 시작하고, 다시 1년 뒤인 1862년 12월에는 경상도 각지에 접(接)이라는 공동체 조직을 만든다. 그러나 동학은 중앙조정으로부터 사도(邪道)로 간주되어 수운은 1863년 12월에 체포되어 이듬해 3월에 처형된다.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지 3년 만에 수운의 공적인 생애는 마감되지만, 수제자 해월에 의해 동학은 조선팔도로 퍼져가게 된다. 그러면 수운의 동학에 담긴 독자적 논리는 무엇이었을까? 지면 관계상 여기서 자세한 설명을 할 여유는 없다. 한두 가지만 예를 들고자 한다. 첫째로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동학(東學)’의 의미이다. 수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동쪽(조선)에서 태어나서 동쪽에서 도를 받았다. 내가 받은 도는 하늘=상제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비록 천도(天道)라고 할 수 있지만, 학(學)이라는 입장에서 말한다면 동학이라고 할 수 있다.”(동경대전, 논학문) 이 글에서 우리는 수운이 말하는 동학이 ‘조선의 학문’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조선의 현실에 기초한 주체적 학문을 지향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동학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접 조직을 중심으로 한 동학의 공동체적 성격이다. 수운이 한창 동학의 가르침을 펴고 있을 때, 유생들은 동학 배척과 탄압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동학 배척과 탄압은 조선의 추로지향(鄒魯之鄕; 유학의 본고장)을 자부하던 경상도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각지의 서원(書院)에 통문(通文)을 보내 연통하면서 대대적인 동학 탄압에 나서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남긴 동학배척 통문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구절이 들어 있다. “귀천이 같고 등위에 차별이 없으니 백정과 술장사들이 모이고, 남녀를 차별하지 아니하고 유박(帷薄; 포교소)을 세우니 과부와 홀아비들이 모여 들며, 재물과 돈을 좋아하여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이 서로 도우니(有無相資) 가난한 자들이 기뻐한다.”(「동학배척통문」, 1863) 이 내용 속에서 우리는 창도 초기의 동학 조직이 신분과 남녀차별을 뛰어넘는 평등한 조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동학 조직이 처음부터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이 서로 돕는(有無相資)” 공동체적 조직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최근, 일부 한국경제사 연구자들이 자본주의가 도입되기 이전 우리 경제에 대해 유무상자 또는 유무상통(有無相通)의 호혜경제체제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동학이야말로 경제적 측면에서 우리의 전통적 호혜경제체제를 계승 발전시키려 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이 같은 호혜경제체제는 서구적 근대가 가져온 자본주의 경제체제와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약하자면, 수운의 동학은 조선의 주체적 학문을 표방하면서, 신분과 남녀의 차별을 뛰어넘고, 유무상자의 공동체 실현을 지향함으로써 서구적 근대와는 다른 독자적인 근대를 지향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한국의 간디 해월, 수입품을 금하다

1864년 3월 수운이 처형되자 동학은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해월이란 성실한 계승자에 의해 동학은 무너지기는커녕 오히려 조선 팔도로 널리 퍼져 간다. 해월 역시 1898년에 스승이 간 길을 따라 체포․처형되지만 그가 38년간 동학의 최고지도자로서 보여준 생애는 만인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해월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스승 수운의 충실한 계승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스승이 1863년에 자신에게 부여해준 ‘북도중주인(후일에는 북접주인)’이라는 직함을 평생토록 간직하였고, 죽는 순간까지도 그 역할에 충실했다. 스승의 가르침과 지도를 직접 받았다는 것을 평생의 긍지로 삼고 살았던 것이다. 충실한 계승자 해월이 수행한 역할은 많다. 예를 들면, 경전(『동경대전』과 『용담유사』)집성 및 간행, 의례의 정비 및 확립, 정기수련제도의 시행, 순회포덕의 실시, 직제(육임제, 포접제)의 제정과 실시, 지역별 지도자 양성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히 계승하는 한편 그것을 널리 실천하고 사회화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수운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확대 발전시켜 베 짜는 며느리도 하늘님이고, 어린 아이도 하늘님이며, 집에 오시는 손님도 하늘님이고, 공중을 나는 새도 하늘님이라고 가르쳤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내용들이다. 여기서 강조할 것은 스승이 가르친 유무상자의 호혜적 전통이 해월에게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해월 선생은 1861년 6월 동학 입도부터 시작해서 1898년 6월에 처형되기까지 38년간을 이른바 수배자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선생의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1983년부터 지금껏 선생의 발자취를 찾고 있지만 아직도 선생의 생애를 충실히 복원하기에는 찾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그동안 찾아낸 자료 가운데 지금껏 전혀 주목되지 못한 1880년대 후반에서 1890년대 초에 해월 선생께서 발송한 통문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기로 한다.

<1>
무릇 우리 동학 사람들은 같은 연원(최제우)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니 마땅히 형제와 같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형은 굶고 있는데 동생만 배부를 수 있을 것이며, 동생은 따뜻하면서 형은 추위에 떨어서야 되겠는가. (중략) 크게 바라건대 모든 군자(동학신자)들은 자신이 소속된 접안에서 여유가 있는 사람들끼리 각각 서로 힘을 합해서 마음에 여유가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 해를 어떻게 보낼까 걱정하는 마음을 면하도록 하시오.(『해월문집』, 1888)

<2>
같은 소리는 서로 호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하는 것이 예로부터의 이치이니 지금 우리 동학에 이르러서는 그 이치가 더욱 크게 드러나야 할 것이다. 환난을 서로 구제하고 빈궁을 서로 보살피는 것 또한 선현들의 향약에 들어 있는 것인데 우리 동학에 이르러서는 그 정의가 더욱 막중하다고 하겠다. 그러니 우리 동학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약속을 지켜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와서 규약에 어김이 없도록 하시오.(『해월문집』, 1892)

<3>
하나, 생선과 고기, 술과 담배는 도인들의 기혈과 정신을 상하게 하는 것이 있어서 조금도 이익 됨이 없으므로 일체 금지할 것.
하나, 무릇 사치스러운 물건은 방탕한 자들이나 좋아하는 바요, 마음을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들 이 취할 바가 아니다. 도유(道儒; 동학 신자)들의 사치를 좋아하는 폐단을 금하고 막을 것.
하나, 우리 동학의 도유들은 통양(通樣) 갓, 서양 비단(洋紗), 당목(唐木), 채단(綵緞) 등을 일체 금지하며 오직 녹포(鹿布)와 녹목(鹿木)만을 입을 것.(『해월문집』, 1892)

위의 내용들은 1993년에 전북 부안 천도교 호암수도원에서 발굴해 낸 『해월문집』에 실린 통문들 속에 들어 있다. 『해월문집』은 1880년대부터 동학혁명 직전까지 해월 선생께서 전국 각지의 동학 접주와 신자들 앞으로 발송한 통문을 모아놓은 자료인데, 이 자료를 통해 우리들은 동학 초기의 유무상자의 전통이 해월 선생시대에도 충실하게 계승 실천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당시의 동학이 일반신자들의 생활규범 문제까지 다룰 만큼 매우 제도화되고 조직화되어 있었음도 확인하게 된다. 놀라운 일이다. 더욱 놀랄 일은 해월선생께서 수입품인 서양비단과 당목 사용을 금지하고 국산품인 녹포와 녹목 사용을 권장하는 통문을 각지의 동학지도자와 일반신자들에게까지 보냈다는 점이다. 1876년 개항 이래의 조선사회는 세계자본주의체제에 강제적으로 편입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조선경제가 파탄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조선경제를 가장 위협했던 서양 상품 중의 하나가 바로 서양에서 수입되는 포목 즉 당목의 문제였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1890년대 동학교단 안에서 서양 수입품 사용을 금지했다는 것은 금시초문의 일이다. 또 인도의 간디가 물레를 돌리면서 영국의 식민지배와 서양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맞서 싸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만, 해월 선생께서 수입품을 금하고 국산품을 쓰도록 통문을 발송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아마도 우리의 근현대사의 전개과정이 서구적 근대의 신화 속으로 매몰됨으로써 우리 자신의 전통에 무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뿐이 아니다. 해월 선생은 1898년 음력 4월 5일 강원도 원주 송골에서 관에 체포되는데, 당시 해월 선생을 옆에서 모시고 있었던 임순호라는 제자가 『천도교회월보』에 남긴 수기에 따르면, 체포되기 전날 밤까지도 새끼를 꼬며 일을 했다고 한다.(임순호,「해월선생의 은도시대」, 1931년 8-9월호))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까지 일하시는 해월 선생의 모습 속에서 물레를 돌리며 인도 독립운동을 했던 간디를 다시 떠올린다. “왜 우리는 한국의 간디를 만들지 못했을까. 아니 왜 찾으려 하지 않았을까? 이 역시 서구적 근대의 신화 탓 아니겠는가.”

녹두 전봉준, 반세계화운동의 선봉에 서다

수운과 해월이 실현하고자 했던 동학의 꿈은 동학혁명을 통해 극적으로 표출된다. 그 꿈의 구체적 내용들이 동학군들이 정부에 제출한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폐정개혁안은 현재까지 다섯 종류가 알려져 있다. 오지영의『동학사』에 실려 있는 12개조, 정교의 『대한계년사』에 실려 있는 13개조, 김윤식의『속음청사』에 실려 있는 38개조(중복을 제외하면 29개조), 『동경조일신문』명치 27(1894)년 7월 24일자에 실려 있는 13개조, 동 신문 명치 28년 5월 7일자에 실려 있는 27개조 등이 그것이다. 이들 폐정개혁안은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에 걸쳐 다양한 내용의 개혁조항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들 개혁안의 성격을 요약하자면, 반봉건(反封建)과 반침략(反侵略), 그리고 반개화(反開化)적 성격의 개혁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반개화라는 말은 세계자본주의 경제체제에 강제적으로 편입된 조선조정이 수행하고 있던 당시의 개화정책, 즉 근대화정책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19세기말에 이미 반세계화운동이 동학군들에 의해 선구적으로 실천되고 있었던 것이다. 동학군에 의한 반세계화 운동의 원형은 1892년에서 3년까지 두 해 동안 조선 각지에서 진행된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이다. 교조신원운동이란 억울하게 처형당한 동학교조 최제우의 원한을 푸는 종교적 운동의 이미지를 지닌 것이었지만, 이 운동은 단순히 교조의 억울한 한을 푸는 운동에 그치지 않고, 당시의 정치․경제․사회적 모순을 함께 해결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 구체적 증거를 우리는 동학신자들이 1892년 10월의 공주집회 때 충청감사에게 제출한 「각도동학유생 의송단자(各道東學儒生 議送單子)」의 다음과 같은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왜국 상인들은 각 항구를 통행하며 무역의 이익을 제멋대로 함으로써 돈과 곡식이 말라 백성들이 지탱하기 어려우며, 심복과 같이 좋은 땅과 인후와 같이 중요한 지역들의 세관과 장터의 세금과 산과 연못의 이익이 모두 오랑캐들에게 돌아가고 있으니, 이것 역시 저희들이 손을 어루만지면서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는 바입니다.(규장각 소장, 『동학서』)

이 내용을 통해 동학신자들이 개항이후 조선경제가 파탄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남아 있는 기록들에 따르면, 전봉준 장군이 우리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시기가 바로 이 교조신원운동 때로 확인된다. 그는 공주집회의 후속 집회로 열린 1892년 11월 전라도 삼례집회에서 커다란 활약을 하는데, 삼례집회 때도 역시 공주집회에서 제출한 것과 똑같은 내용의 의송단자가 전라감사에게 제출된다. 공주집회와 삼례집회의 목표가 똑같았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봉준 역시 세계자본주의 경제체제에 강제로 편입된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정부로 하여금 척왜양(斥倭洋) 운동, 즉 반개화(반세계화) 정책을 펼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동학신자들의 신원운동 대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전봉준은 후일의 동학혁명을 지도하면서 신원운동 과정에서 표출된 동학신자들과 일반 민중들의 반개화적 요구를 그가 직접 작성한 각종 포고문과 격문, 폐정개혁안 등에 담아 정부에 제출한다. 전봉준이 혁명과정에서 제출한 반개화적 요구 조항의 일부를 확인해 보자.

하나, 각 포구에서 허가받지 아니하고 사적으로 쌀을 거래하는 것을 엄히 금지할 것
하나, 각국 상인들은 개항장에서만 사고팔게 하고 도성(서울)으로 몰래 들어와 장을 여는 것을 금할 것이며, 각지를 허락 없이 제멋대로 출입하며 행상을 하는 행위를 금지할 것
(『동경조일신문』명치 27년 7월 24일, 「동학당의 소식」)

이 「동학당의 소식」 이라는 기사 속에 등장하는 전봉준의 폐정개혁안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1880년대 해월의 통문에서 확인되는 수입품 금지운동이 신원운동 과정을 거치는 동안 더욱 반개화(반세계화)적 요구로 발전하고, 그것이 다시 동학혁명 과정을 통해 폐정개혁 요구로 확대 발전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아래로부터 조선의 새로운 미래를 열고자 했던 동학의 독자적 근대의 길이 창도 초기부터 갑오년 동학혁명에 이르기까지 단절됨 없이 줄기차게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주체적 학문인 동학의 사상과 조직을 기반으로 유무상자의 공동체, 즉 서구의 근대와는 다른 조선 민중의 생활세계에 바탕한 독자적인 근대의 길을 열려 했던 동학혁명은 실패로 귀결되었다. 서구적 근대의 무차별적 공세 앞에서 조선 민중의 독자적 근대의 길이 처절하게 좌절당하고 만 것이다. 그 결과, 이 땅에는 서구적 근대를 향한 질주가 시작된다. 1905년 동학이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서구적 근대의 첨병 일본 제국주의와 일정하게 타협하는 것이 가장 역설적인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야스마루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조선 민중은 결코 자신들의 독자적인 논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조선 민중들은 갑오년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다. 증산 강일순(1871-1909)과 소태산 박중빈(1891-1943)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증산 선생과 소태산 선생의 생애와 사상, 실천 속에 담겨 있는 조선 민중의 독자적 근대지향에 대해서는 후일을 기약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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