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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 배달족 종합지리서 《산해경(山海經)》
중국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적 중에 《산해경(山海經)》은 ‘괴이함(怪)’으로 유명하다.
그 중의 괴이한 사건, 괴이한 물건은 무수한 학자들의 흥미와 상상을 이끌고 자극했다. 그러나 이 괴서(怪書)가
어떤 책인지에 대해서는 명인들의 관점이 매우 일치하지 않는다.
《산해경》이라는 이름은 《사기 대완열전(史記 大宛列傳)》에서 가장 먼저 보이지만, 사마천(司馬遷)은 이를
황당무계하고 대아지당(大雅之堂)에 오르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그 문장이 전아하지 않아 진신선생도 말하기
어려워했다(其文不雅馴, 縉紳先生難言之)”고 하여 이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유향(劉向), 유흠(劉歆) 부자가 《산해경》을 정리하여 이를 세상에 공개하고 대우(大禹)와 백익(伯益)이 홍수
를 다스리던 시기에 기록된 것이라 생각하였다.
반고(班固)는 유흠의 《칠략(七略)》에 의거하여 《한서 예문지(漢書 藝文志)》를 지어 《산해경》을 ‘수술략
(數術略)’ 중에서 지역 사람 물질 등의 형상을 탐구하여 그 길흉과 귀천을 분별한 ‘형법류(刑法類)’의 으뜸에
놓았는데, 이것이 《산해경》의 성질에 대한 가장 이른 설명이다.
동한(東漢)의 왕경(王景)이 치수할 때 명제(明帝)가 《산해경》, 《하거서(河渠書)》, 《우공도(禹貢圖)》를
하사하여 《산해경》은 실용적인 지리서로 여겨졌다.
《수서 경적지(隋書 經籍志)》에 이르러 《산해경》은 ‘지리류(地理類)’의 으뜸으로 올라섰고,
이후의 《구당서 경적지(舊唐書 經籍志)》, 《신당서 예문지(新唐書 藝文志)》등은 모두 이를 지리서에 귀속
시켰다.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산해경》은 지리서라는 게 거의 정설이 되었다.
그러나 명대(明代)에 이르러 호응린(胡應麟)이 이의를 제공했다. 그는 《소실산방필총(少室山房筆叢)》에서 “
《산해경》은 고금 어괴의 시조(《山海經》, 古今語怪之祖)”라고 했다. 그의 견해는 물론 뛰어난 점이 있지만,
이 책의 확실한 성격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청대(淸代)에 편수한 《사고전서(四庫全書)》는 《산해경》을 ‘소설(小說)’로 간주하고 ‘소설 중 가장 오래된 것’
이라 여겼다. 여기서 가리키는 ‘소설’은 중국 고대의 광의의 소설로 오늘날 말하는 소설이 아니다.
《산해경》을 형법, 지리, 어괴, 소설류에 포함시키는 것을 제외하고도 도교도(道敎徒)들은 이를 황로(黃老)의
말로 간주하여 《도장(道藏)》에 수록하였다.
20세기 초 이래로 학자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산해경》을 고찰하기 시작했다. 노신(魯迅)은 《중국소설사략
(中國小說史略)》의 《신화와 전설(神話與傳說)》편에서 “《산해경》은……아마도 고대의 무서이다.(《山海經》
……盖古之巫書也.)”라고 지적하였다.
모순(茅盾)은 신화학의 각도에서 《산해경》은 “난잡하여 조리가 없는 신화 총집이다(一部雜亂無章的神話總集)”
라고 지적하였다. 노신의 관점은 매우 크게 영향을 주어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현재 학술계의 《산해경》의 성격에 대한 견해는 주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것이 무격(巫覡), 방사(方�)의 책으로 고대인이 무술(巫術)을 행할 때 참고하던 책이라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이들은 비록 이것이 산천과 이역(異域)을 기술하였으나 대부분 전하여 들은 말로
사실을 고증하기가 매우 힘들며 이는 결코 지리를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므로 실용적인 지리서로
간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비록 후세의 지괴소설(志怪小說)에 크게 영향을 주었지만 그 자체는 결코 소설작품이라 할 수 없다.
둘째는 《산해경》이 지리서라는 전통적인 관점을 견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역사지리학자이다. 역사지리학자이면서 고대 종교와 신화에 정통한 고힐강(顧頡剛)은 “이것은 무술적 성격의
지리서(這是一部巫術性的地理書)”로 무서(巫書)와 지리서를 겸하여 고려하는 효과를 노렸다고 지적했다.
《산해경》의 작자는 비록 서한(西漢)의 유수(劉秀(歆))는 요(堯) 순(舜) 시기의 우(禹)와 익(益)이 기록한
것이라 언급하였고 동한(東漢)의 왕충(王充)도 이렇게 생각했지만, 사실과는 매우 거리가 있다.
책 중에 우와 익 이후의 많은 일들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우부(禹父)’에 대해 진술하고 ‘우언(禹言)’을
인용하였으며 진한(秦漢) 군현의 지명을 언급하였고 철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이에 대하여 수(隋)나라의 안지추(顔之推)는 “모두 후세 사람들이 첨가한 것이지 원래 문장이 아니다(皆由後人
所羼, 非本文也)”라고 설명하였으나, 이렇게 많은 단락을 첨가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현재는 일반적으로 《산해경》이 비록 우와 익이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 재제의 출처는 분명 매우 오래전으로
처음에는 구전되어 전하다가 유전되는 과정에 부단히 증가되고 변화하여 마지막에야 문자로 정착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게다가 이 책은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완성된 것이 아니고 한 때에 완성된 것도 아니며 한 지역에서만 나온 것도
아니다. 어떤 학자는 목차별로 출판 시기, 지점과 작자를 판단하는데, 기본적으로 출판 연대는 전국시대 초기
에서 한대 초기까지의 시기로 확정하긴 하지만 문제의 해결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또 어떤 이는 《산해경》이 그림에 근거하여 기술한 것이라 생각한다. 일찍이 남송(南宋) 때의 주희(朱熹)는 “
《산해경》에는 여러 기이한 물건과 날짐승 들짐승 류가 기록되어 있고 ‘동향’을 많이 말하거나 혹은 ‘동수’를
말하며 의본은 그림에 근거하여 기술하였다.(《山海經》記諸異物飛走之類, 多云‘東向’, 或云‘東首’, 疑本依圖畵
而述之.)”고 지적하였다.
훗날 명대의 호응린, 양신(楊愼)과 청대의 필원(畢沅)도 모두 《산해경》은 《산해도(山海圖)》의 문자설명이
라고 생각했다. 중국 고대에 매우 일찍부터 산천의 지도를 그렸다는 기록에 근거하고, 1973년 마왕퇴(馬王堆)
고분에서 출토된 지형도를 증거로 하여 《산해경》이 출판될 때 산천의 길과 마을, 신인(神人)과 기이한 물건
을 그리고 기록한 그림이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산해경》속의 몇몇 문자도 확실히 마치 그림을 설명한 것 같다. 그러나 전체 《산해경》이 모두 그림의 문자
설명인지 아니면 단지 일부분인지에 대해서는 역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가 오늘날 보는 산해경도(山海經圖)는 모두 《산해경》이 출판된 이후에 그려진 삽화이다.
도연명(陶淵明)의 “산해도를 유유히 바라보네(流觀山海圖)”라는 시구가 있지만, 도연명이 말한 산해도는 일찌
감치 소실되어 그것이 언제 그려진 것인지는 고증이 불가능하다.
또 《사기 대완열전(史記 大宛列傳)》에 근거하면, 한(漢) 무제(武帝)는 고 도서(古圖書)에 근거하여 곤륜산
(昆侖山)을 정하는데 이 고 도서에 바로 《산해경》이 포함된다면 이때에는 마땅히 《산해경도(山海經圖)》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세트가 최초의 산해도인지 아닌지, 혹은 한나라 때에 한 세트의 산해도가 있었고
《산해경》이 출판될 때 또 한 세트가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소양(瀟揚))
네이버에서 산해경에 대한 백과사전에는 이렇게 정리되어 있다.;
작가는 하(夏)나라 우왕(禹王) 또는 백익(伯益)이라고도 한다. 실제는 BC 4세기 전국시대 후의 저작으로,
한대(漢代:BC 202∼AD 220) 초에는 이미 이 책이 있었던 듯하다.
원래는 23권이 있었으나 전한(前漢) 말(BC 6세기)에 유수(劉秀)가 교정(校定)한 18편만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그 중 <남산경(南山經)> 이하의 <오장산경(五藏山經)> 5편이 가장 오래 된 것이며,
한(漢)나라 초인 BC 2세기 이전에 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다음으로 <해외사경(海外四經)> 4편, <해내사경(海內四經)> 4편이 이어졌고, 한대(漢代)의 지명을 포함하였
으며, <대황사경(大荒四經)> 4편, <해내경(海內經)> 1편은 가장 새롭다.
<오장산경>에서는 천하의 명산을 산맥을 따라 기술하고 산과 산의 거리 ·산물(그 산에 사는 怪獸와 鳥類)등을
적었으며 보옥(寶玉) ·동철(銅鐵) ·약초 등의 산물이 기술되어 있으므로 전국시대에서 진(秦)시대에 걸쳐 성행
하였던 방사(方士)의 연단술(鍊丹術)과의 관련을 생각할 수 있다.
<해외경(海外經)> 이하에서는 먼 나라의 주민과 그에 관한 신화 ·전설을 많이 실었다.
이 책은 고대 중국의 자연관을 아는 데 귀중하며 신화의 기재(記載)가 비교적 적은 중국 고전 중 예외적 존재로
서도 중요시된다.
그러나 ㅐ煐?纛?번역한 산해경은 실로 위 내용과는 사실적 관계가 너무 다르다.
오히려 산해경은 중국 신화가 아니라 동이족 신화의 집대성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아시아 신화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산해경>'해외동경'
君子國在其北 衣冠帶劍 食獸 使二大虎在旁 其人好讓不爭 有薰華草 朝生夕死 一曰在肝楡之尸北
[ 군자국이 북쪽에 있는데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칼을 찬다. 짐승을 먹고 두 마리 큰 호랑이옆에 둔다. 그 사람들
은 양보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다. 훈화초라가 있는데 아침에 생겼다가 저녁에 죽는다]
*「산해경(山海經)」<해외동경>에
'군자국이 그(대인국) 북쪽에 있다. (그 사람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으며 짐승을 잡아먹는다.
두 마리의 무늬 호랑이를 부려 곁에 두고 있으며 그 사람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다투지 않는다.'하였고,
동서 <대황동경>에 '동구산이 있다. 군자국이 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찬다.
(有東口之山 有君子之國 其人衣冠帶劍)'고 했다.
흔히 사찰의 대웅전 뒷켠에 있는 삼신각은 본래 불교의 것이 아니라 우리 고유 신교의 유산인 삼신상제를
모시던 유습이 습합된 흔적인데, 바로 이 삼신각에 그려져 있는 탱화아닌 탱화에 바로 호랑이를 곁에 둔 신선
노인이 바로 「산해경(山海經)」<해외동경>에 언급된 호랑이를 곁에 두고 있는 군자국의 조상모습이다.
靑丘國在其北 其狐四足九尾 一曰朝陽北 [청구국이 북쪽에 있는데 그 곳의 여우는 네 개의 발과 아홉 개의
꼬리가 있다. 혹은 조양의 북쪽에 있다고 한다]
<산해경>'해오서경'
白民之國在龍魚北 白身被髮有乘黃 其狀如狐 其背上有角 乘之壽二千歲 [백민국은 용어의
북쪽에 있는데 몸빛이 희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있다. 승황이라는 집승이 있는데 모양은 여우 같으나 등 뒤에
뿔이 있다. 타고 다니면 이천살을 산다]
肅愼之國在白民北 有樹名曰雄常 先八代 帝 于此取之 [ 숙신국이 백민의 북쪽에 있다. 나무가 있는데 웅상
이라 부른다. 앞선 8대(先八代 )임금이 이 나무에서 자리를 취했다.
此는 웅상이란 나무고 之는 八代帝이니 웅상아래서 제위를 취했다고 해석된다]
*「산해경(山海經)」<해외서경>에 보면 웅상(雄常)이라는 나무 아래에서 성인이 대를 이어 즉위하는 숙신
(肅愼)국에 대해 나온다.
정재서 역주에 정 인보 ,안 재홍 제 씨는 중국 고서에서 출현하는 주신(珠申), 식신(息愼), 직신(稷愼)과 마찬
가지로 조선(朝鮮)을 음사(音寫)한 별종의 표기로 파악했다 하였다.
또한 이 숙신국이 바로 단군 조선임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바로 「환단고기」<단군세기>에 보인다.
즉, '경인 원년에 11세 단군 도해(道奚)가 5가에게 명하여 열두 명산 가운데 가장 훌륭한 곳을 골라 국선 수두
(蘇塗)를 세우게 하였다.
수두에는 단수(檀樹)를 빽빽하게 둘러 심고 그 가운데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환웅상(桓雄像)을 모셔 지내며
나무를 웅상(雄常)이라 이름하였다.'
* 환단고기에도 웅상이라는 말이 여러 곳에서 등장한다.
- 화랑의 임관식에는 큰 나무를 세워 웅상(雄常)이라 했는데 이는 환웅의 신상이다. 상(常)은 항상 있다는
뜻이다.
- 소도가 도처에 세워졌는데 산마루에 산상(山象)과 웅상(雄象)을 세웠다.
- 국선소도에는 단수(檀樹)를 둘러 심고 가장 큰 나무를 환웅형상으로 삼아 웅상이라 불렀다.
- 삼한에는 10월 상순에 제사를 지내는데 둥근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모난 언덕에서는 땅에 제사를
지내며 산에는 웅상을 세우고 조상제사는 나무를 다듬어 썼다. 이것도 이미 고대부터 나무와 연관지어
환웅을 뜻하는 웅자와 상자를 썼다는 것이 된다. 어쨌든 웅자는 진작부터 쓰여 진 것이다.
蘇塗와 山像雄常의 정체가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우선 한단고기를 번역한 임승국님의 말을 들어보자
(한단고기 201쪽 참조)....전략 "안호상 박사는 다음과 같이 산해경의 기록을 잘라 말하였으니 참고할만 하다.
즉 '北有樹 名曰雄 常 先八代帝 於此取之' 라고 雄과 常을 갈라놓고 '북에 나무가 있는데 이를 雄 이라 한다.
늘 앞서는 8대의 임금들이 여기서 이를 취해갔다'로 한 것이다... 중략 .... '산 형상의 웅상을 보게 되었다'
(可見山像雄常)는 좀체로 이해하기 힘든 구절이다. 언젠가는 雄常의 참뜻이 한국학에서 밝혀질 날이 있을것
으로 기대 한다" 라고 했다.(구길수 글)
東胡在大澤東 [동호는 대택의 동쪽에 있다]
夷人吊胡東 [이인이 동호의 동쪽에 있다]
貊國在漢水東北 地近于燕 滅之 [맥국이 한수의 동북쪽에 있어 연나라에 가까운데 그것을 멸하였다]
<산해경>'대황동경'
有白民之國 帝俊生帝鴻 帝鴻生白民 白民銷姓 使四鳥虎豹熊[백민국이 있는데 제준이 제홍을 낳았고 제홍이
백민을 낳았다. 백민은 성이 소씨이고 네 종류의 새를 부리고 호랑이, 표범, 곰을 부린다]
大荒之中 有山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대황의 한가운데 불함산이 있고 숙신의 나라가 있다]
有靑丘之國 有狐九尾 [청구국이 있는데 여우가 있어 꼬리가 아홉 개이다]
<산해경>'해내북경'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개국이 거대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의 북쪽에 있는데 왜는 연나라에 속한다]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조선이 열양의 북쪽에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
<산해경>'해내경'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 天毒 其人水居 他人愛之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어 이르기를
조선 천독이라 한다. 그 사람들은 물에 살고 남을 가까이 하고 사랑한다]
고조선, 천독, 숙신국, 묘민국, 고죽국, 그리고 전욱을 낳은 조운국(朝雲國)과 사체국, 그리고
전욱의 자손이 세운 숙촉국, 숙사국(淑士國),
강씨의 국가라는 북제국(北齊國), 소호와 관련 있으며
제준의 자식이 세운 계리국(季釐國), 백민국(白民國),
제준이 낳은 중용국(中容國),
염제의 후예가 세운 불여국(不與國), 우려국(牛黎國), 흉노국(匈奴國)
이 모두 한(韓)민족인 동이족이 세운 국가 입니다.
<산해경>'해내경'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 朝鮮天毒 其人水居 外人愛之[동해지내 북해지우 유국명왈 조선천독 기인수거
외인애지]
*<산해경>의 기록을 살펴보면 북해는 발해만을 동해는 황해를 의미하므로 조선이 북해와 황해내륙에 있었다
는 해석입니다.
또 맹자는 백이숙제는 북해에 살았다 했고
강태공은 동해변에 살았다고 했으므로
조선은 발해와 황해사이의 대륙에 있었던겁니다.
산동성 환국(청구국)시대와 그 이후의 은(殷)왕조 주도세력과 노나라, 제(齊)나라의 95%이상이 한(韓)민족
세력권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조선천독이 대륙을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록은 바로 동이족들의 강역과 문화가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보여주며,
설화적 관계 또한 중국의 설화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참고 서자부 마을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桓雄에 대한 역사적 기록으로 중 일련이 쓴 삼국유사에 桓國(因)의 서자庶子 桓雄이란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庶子라는 글자를 우리나라 학자들이 무식하고 게으름으로 인하여 첩실의 자식이라 해석을 하는 경향이
대부분인데, 이는 참으로 부끄럽고 엉뚱하다고 아니할 수가 없다.
위에서 말한 중국의 辭源이라는 대백과사전격인 책에는 중국의 古語, 古史를 잘 설명해 놓고 있다. 여기에
庶子란
1. 첩의 아들,
2. 많은 아들,
3. 옛부터 있는 높은벼슬 이름을 가르키는 3가지 뜻이 있음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羅 唐연합에 협력하여 백제 멸망에 공을 세운 당나라 사람 유인궤劉 仁軌는 웅진도독부雄津都督府 (공주, 마한-
익산, 東明, 金漣, 덕안-恩津)를 거느리다가 귀국해서 좌서자左庶子의 벼슬을 받는다.
당시에는 右庶子라는 벼슬도 있었다. 그 당시 王世子의 스승같은 공이 있는 이 에게도 庶子의 벼슬을 내려
주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역사의 진실과, 진실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 고서 桓雄을 桓國(因)의 첩실자식이라
해석하고, 여기에도 모자라 그 옛날 당시 지배계층 사회의 남녀관계가 어지러워서 그렇게 될수 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설명을 덧붙이고 있으니, 이 한심함을 바로 잡고자 한다.(최태영 박사)
유웅국이 환웅국의 제후국인 것은 사마천의 사기에서 보듯이 중국역사는 황제헌원에서 시작하고 있어서 결코
중화족의 제후국이 될 수 없으며 당시의 종주국 환웅국의 제후국이 될 뿐인데,
「산해경(山海經)」에 3황5제 모두(常先八代帝於此取之) 숙신(조선)에서 배출되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환웅국 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大荒地中 有山名曰不咸 有肅愼之國 在北白民有樹(樹人物指稱)名曰雄 常先八代帝於此取之)
(참고: 《상서대전(尙書大傳)》에서는 3황을 수인(燧人)· 복희(伏羲)· 신농(神農),
《사기(史記)》 에서는 5제를 황제(黃帝)· 전욱· 제곡· 당요(唐堯)· 우순으로 말한다)
*전통적으로《산해경》의 저자를 우(禹) 임금과 백익(伯益)이라 고 한다. 우(禹)임금이 위(位)에 있었던 것이
기원전 2183∼2175년의 9년 동안이므로 [동작빈(董作賓)의 연표학(年表學)에 의함]
《산해경》은 지금으로부터 4,200여 년 전 우리나라 상고의 단군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 <천부경>이 서양에서 폭넓게 연구되고 있는 유대인의 신비 철학인 '카발라(kabbalah)'와의 밀접한 연관성을
통해 <천부경>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다.
천부(天符)란 하늘의 인장을 의미하는데, 하늘의 인장이란 우주, 존재계의 심벌(상징)을 가리키는데,
그것을 '카발라'의 '생명나무'라고 말하고 있다.
'카발라'를 연구해 온 많은 사람들은 카발라의 기원을 이 세상의 문명의 시원에 두고 있다.
지상의 모든 종교, 철학, 사상이 카발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할 정도다.
그럼 '카발라'라는 단어는 어디서 왔는가?
저자는 환웅 1세의 이름인 거발환(kaballhan)을 카발라(kabbalah)의 어원으로 보고 있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는 '거발환'이 환인 1세의 이름이라고 함).
"오랜 후 천재 환인이 나와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그를 안파견 또는 거발환이라 불렀다. 소위 안파견이란
하늘을 계승하여 일어선 아버지라는 뜻이 이름이다.
소위 거발환이란 천지인(天地人)을 하나로 정한다는 뜻의 이름이다."
이는 '거발환'이 천제의 호칭이면서 그 자체에 철학적 의미까지 함축되어 있음을 알게 해준다.
또한 세상의 모든 종교, 철학, 사상이 천부경과 카발라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도 둘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천부경'의 비밀을 파헤치다 [서평] 조하선의 <베일벗은 천부경>
*‘사고전서․경부’ ‘우공추지(禹貢錐指)’ 4권에는 “동이 9족(族)을 우이(嵎夷)로 보고 우이를 고조선으로 본다”는
견해가 실려 있다. 우이라는 말은 ‘서경’ 요전(堯典)에 나온다(堯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우이는 바로 요(堯)
당시 존재했던 동양 고전의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이’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면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동이 9족의 뿌리요 원류라는 이야기가 된다.
“ ‘후한서’와 ‘두씨통전(杜氏通典)’에 다 동이 9종(九種)을 우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땅이 한(漢)의 낙랑(樂浪)․
현도군(玄菟郡)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경’ 우공(禹貢)에 청주(靑州)를 설명하면서 맨 먼저 우이를 언급한
것을 본다면 조선(朝鮮)․구려(句麗)등 여러 나라가 우(禹) 임금시대에 실제 다 청주지역에 있었다(朝鮮句麗諸
國 禹時實皆在靑域)”.
이것은 ‘경패(經稗)’ 3권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자료는 구이(九夷)가 우이(嵎夷)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오례통고(五禮通考)’ 201권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현도․낙낭 두 군(郡)이 다 옛
‘우이’의 땅으로서 청주(靑州)지역에 있었다”는 것과 “연(燕)과 진(秦)이 경략(經略)했던 조선은 대체로 우공
(禹貢)의 우이지역이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우리는 우이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현도․낙랑으로 변화된 고조선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또 연(燕)․진(秦)시대의 조선과 한무제가 설치한 현도․낙랑이 모두 오늘의 한반도가 아닌 옛 청주지역,
즉 산동성과 요녕성 하북성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사실을 이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
‘사고전서․사부’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29권에는 “당(唐)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신라와 백제를 우이의 후예국가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沈伯綱(국립대만사대 및 중국연변대 대학원 역사학 박사)
(安原田 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