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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점검87: 조주의 무자 화두
조주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조주스님이 말했다.
“없다.”
“위로의 모든 부처에서 아래로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는데, 개에게는 어째서 없습니까?”
조주스님이 말했다.
“그에게 업식성(業識性)이 있어서이다.”
또한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있다.”
“이미 있다면 무엇 때문에 저 가죽자루 안으로 들어가겠습니까?”
“알고도 고의로 범한 것이다.”
趙州因僧問。狗子還有佛性也無。師曰無。曰上至諸佛下至螻蟻。皆有佛性。狗子為甚麼卻無。師曰。為伊有業識性在又問。狗子還有佛性也無。師曰有。曰既有。為什麼入這皮袋裏來。師曰。知而故犯。
예로부터 선(禪)에서는 이 조주선사의 무자 화두를 참구할 것을 권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이 화두에는 어떤 특별한 효험이 있기라도 하듯이 이것을 참구해 일찍이 조사관문을 활짝 열어 제친 분들이 유독 많아서 일 것이다.
근래에도 여기에 대한 많은 평들이 있지만, 몇 가지만 간추려보면 이러하다.
어떤 큰 스님은 말하였다.
「이 ‘무자’에 대해서 있다 없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없다, 허무(虛無)다, 이와 같이 이리저리 두 갈래로 분별하지 말고 능소(能所)가 끊어지고 상대도 없이 다만 홑으로 “어째서 ‘무(無)’ 라고 했는고?” 하고만 생각해라. 여기에는 공(空)도 또한 거둘 수 없으며 유상(有相)·무상(無相)을 붙일 것도 없다. 필경 알 수 없는 의심 하나만이 남으니 이것만 추켜들어라. “조주 스님은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
또한 어느 불교학자는 말하였다.
「불성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분별은 모두 그림의 떡일 뿐이다. 헛것에 지배되지 않고 무자가 무기로서의 본질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궁구해야 무기가 될까? 빈틈없이 타오르는 불길과 같이 의식에 또렷해야 어떤 생각도 파고들어 올 틈이 없이 무자를 드는 것이 요령이며, 혹시라도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별다른 도리에 의지하지 말고 단지 무자를 다시 들면 된다. 이 화두는 마치 빈틈없이 타오르는 불길과 같이 의식에 또렷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잡념이 일어날 경우 바로 태워 없애는 거센 불길이 되면 화두를 밀치고 다른 생각이 들어설 여지가 점점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결국 이 화두를 두고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아서 마음이 더 이상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도 할 도리가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 상황은 화두가 타파되기 직전의 조짐으로 나타난 것이며, 무자가 모든 의지처를 쳐부수는 무기로서의 효용을 충분히 발휘한 결과라 하겠다.」
여기에 대해 총평을 해보겠다.
‘능소(能所)가 끊어지고 유상(有相)·무상(無相)을 붙일 것도 없다’고 했는데, 참 좋은 말씀이다. 능소(能所)란 곧 주체와 대상으로 능(能)은 주체가 되고 소(所)는 대상, 객체가 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참으로 무자를 참구하려면 먼저 능소(能所)와 유상(有相)·무상(無相)이 무엇인지를 깊이 살피고 살펴야 할 것이다. 만약 깊이 살피지 않는다면 오직 자신의 눈높이만큼만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유(有)이고 무엇이 무(無)인가? 이 두 글자가 삼라만상을 모두 담고도 남는다는 것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일체법이 모두 이 두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대승백법(大乘百法) 내지는 오위백법(五位百法) 즉 색법, 심법, 심소법, 심불상응법, 6무위법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알지 못하고서 살핀다면 저 무(無) 자가 자신만의 무자는 될 수 있어도 결코 저 옛 사람들의 무(無) 자가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저 저 무자만을 들고서 길을 가는 것은 흡사 대추를 통째로 삼키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어찌 대원경을 짓고 닦는 것으로 조사관문을 뚫는다고 하겠는가? 만약 그랬다면 저 신수(神秀)가 벌써 석가의 의발을 받았으리라.
일찍이 한 스님이 육조께 물었다.
“누가 부처의 의발을 받겠습니까?”
이에 육조께서는 말했다.
“불법을 아는 자이다.”
“화상께서는 어떻습니까?”
“나는 받지 않는다.”
“어째서 받지 않습니까?”
“나는 불법을 모른다.”
부처의 참성품이 있음을 보든 없음을 보든 모두가 눈멀고 귀가 먼 자라는 것을 살필 수 있어야 하리라.
저 스님이 조주선사를 뵙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와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했는데, 결국 이 스님은 무엇을 확인하고 점검하고자 한 것일까? 이 스님에게 어찌 불성이 나에게 있다는 견해가 없었을 것인가? 만약 나에게 있다면 일체 중생에게도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여기에서 묻지 않을 수 없겠다. 도대체 저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은 곧 부처의 가르침을 통해서이며 또한 부처의 가르침은 바로 저 크게 원만한 거울과 같은 지혜에서 비롯한 것이다. 따라서 저 스님은 저 지혜를 흠모하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겠다. 때문에 옛 사람은 말하기를, ‘그는 다만 작은 흠을 찾아내고자 했는데, 문득 조나라 벽옥과 맞닥뜨렸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또한 어떤 스님이 ‘개에게 불성이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으니, 이에 조주선사께서는 ‘있다’라고 답하였다. 불성이 있다고 아는 것이 곧 유상(有相)이다. 여기에 상(相)이란 견해, 생각이라는 의미로 곧 마음에 그런 모양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불성이 있다는 모양을 그리는 것이 유상(有相)이라면 불성이 없다는 모양을 그리는 것이 무상(無相)인 것이다.
『육조단경』에서 ‘무념위종(無念爲宗) 무상위체(無相爲體) 무주위본(無住爲本)’라고 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무념으로 종을 삼고, 무상으로 체를 삼고, 무주로 근본을 삼는다는 뜻이다. 이 열두 글자를 잘 살필 수 있다면 어찌 유와 무의 도리에 걸림이 있을 것인가? 그런 자라면 틀림없이 장차 수미의 세 계단에서 춤을 추고 푸른 파도 위에서 바른 법령을 펼치고 거두게 될 것이다.
저 스님이 ‘개에게 불성이 있겠습니까?’라고 한 것은 그에게는 없다는 견해가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가 만약 참으로 조주의 뜻에 계합을 얻는 자라면 어찌 있다! 없다! 라고 해서 입을 어지럽게 썼을 것인가? 결국 그런 말도 젖은 옷을 입지 않고서는 하기 어려운 일인 것이다.
무수한 스님들이 조주선사를 찾아와서 개의 불성을 물었겠지만, 결국 크게 요약하면 있다! 없다! 라는 두 가지 대답으로 돌아갈 것이다. 때문에 어록에서는 이 두 가지 일화만을 적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스님처럼 불성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결국 어떤 자일까? 『벽암록』에서 천평스님은 주장하기를, ‘불법(佛法)을 알았다고 말하지 마라. 그것을 말하는 사람을 찾아도 찾을 수 없다.’라고 하며, 무리를 이끌고 여러 선방을 휘젓고 다녔다.
세존께서 염화하시니 가섭이 미소하였다. 후에 아난이 가섭존자에게 물었다.
“세존께서 금란가사를 전하신 것 외에 따로 무슨 법을 전하셨습니까?”
가섭이 말했다.
“아난아!”
아난이 대답했다.
“네!”
가섭이 말했다.
“(절)문 앞의 찰간(剎竿: 장대)을 꺾어라.”
찰간이란 당시 부처님 회상의 출입문 앞에 세워진 대나무 장대를 가리킨다. 이 장대에는 ‘여기는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라는 상징이 새겨진 깃발이 걸려 있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본래무일물’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물건이 무엇인지부터 두루 살펴야 할 것이다. 그저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몇 가지만 살펴보고서 다 아는 것처럼 여긴다면, 몹시도 자만하는 자이고 거만한 자라고 할 것이다. 두루 살피고 살펴서 빈틈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어찌 한 올의 쌀알을 가볍게 여길 일이리오. 그 한 알이 곧 백천의 쌀알을 짓는 것이다.
저 불교학자는 말하기를, ‘불성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분별은 모두 그림의 떡일 뿐이다.’라고 했는데, 불성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분별이 모두 없어져도 어찌 부처의 손바닥을 벗어났을 것인가? 이 일은 자세히 잘 살펴야 할 일이다. 눈앞에 닥치는 대로 생각과 잡념을 모조리 부수고 태워버린다고 해도 어찌 스스로를 부수고 태우는 일만 하리오.
저 조주선사의 손에 떨어진 검은 예사로운 검이 아니니, 검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검이 아닌 것이다.
때문에 『무문관』에서 무문선사는 말하기를, ‘이것은 마치 관우장군의 대도(大刀)를 빼앗아 손에 넣는 것과 같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생사의 장대 끝에서 대자재를 얻고, 육도사생(六道四生: 지옥, 아귀, 아수라, 축생, 인간, 천상 그리고 난생, 태생, 습생, 화생) 가운데에서 유희삼매(遊戱三昧)을 하리라.’라고 한 것이다.
이 ‘무문관(無門關)’이란 곧 조사관문을 꿰뚫고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오직 그런 자만이 비로소 저 옛 사람들과 함께 유희삼매를 지으리라. 바로 여기에 이르러 ‘조사관(祖師關)을 꿰뚫어야 오묘한 깨달음이다.’라는 뜻이 있는 것이다.
무문혜개 선사는 무문관』에서 말했다.
“참선은 반드시 조사관(祖師關)을 꿰뚫어야 오묘한 깨달음이다. 요컨대 마음의 길이 끊기는 것을 궁구했어도 조사의 관문을 꿰뚫지 못했다면 마음의 길이 끊긴 것이 아니다. 모두가 풀을 의지하고 나무를 붙들고 있는 정령이다.
자 말해봐라, 무엇이 조사의 관문인가? 오직 이 하나의 무자(無字)가 바로 종문(宗門)에 이르는 하나의 관문(關門)인 것이다. 마침내 이것을 가리켜 선종(禪宗)의 무문관(無門關)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꿰뚫고 지나가는 자는 조주를 친견할 뿐만 아니라 곧장 역대의 조사들과 함께 손을 잡고 함께 간다. 눈썹을 맞대고 동일한 하나의 눈으로 보고 동일한 하나의 귀로 듣는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으리오.
관문을 꿰뚫고자 하는가? 삼백육십 개의 뼈마디, 팔만사천의 털구멍에 이르기까지 온몸으로 의단(疑團: 의심덩어리)을 일으키고, 저 무자(無字) 참구하기를 밤낮으로 하여야 하며, 허무(虛無)로 알아서도 안 되고 유무(有無)로 알아서도 안 된다.
(이 무자 화두는) 마치 저 뜨거운 철환(鐵丸: 쇠구슬)을 삼킨 것과 같아 토하려고 해도 토하지 못하는데, 이전의 악지악각(惡知惡覺: 나쁜 앎, 나쁜 깨달음)이 다 풀어지도록 오래도록 (불에) 삶고 익히면, 자연히 안팎으로 타성일편(打成一片: 한 조각을 이루다)을 이룰 것이다. 이것은 마치 벙어리가 꿈을 꾸지만 (남에게 그 꿈을 말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만 아는 것과 같다. (그러다가) 곧장 (쇠구슬을) 타발(打發: 쳐내다, 뱉어내다)하면,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드니, 이것은 마치 관우장군의 대도(大刀)를 빼앗아 손에 넣는 것과 같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생사의 장대 끝에서 대자재를 얻고, 육도사생(六道四生: 지옥, 아귀, 아수라, 축생, 인간, 천상 그리고 난생, 태생, 습생, 화생) 가운데에서 유희삼매(遊戱三昧)을 하리라.”
그리고는 송하였다.
개의 불성이여
온전히 법령을 폈다.
잠시라도 유(有)와 무(無)를 건너서는
몸을 잃고 목숨을 잃는다.
拘子佛性 全提正令 纔涉有無 喪身失命
‘잠시라도 유(有)와 무(無)를 건너서는’라고 한 것은 유와 무의 도리에 미혹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유와 무의 도리를 깊이 살피고서 여기에는 참된 본질이 없음을 깊이 꿰뚫을 수 있어야 한다는 당부가 들어있는 것이다. ‘건넌다’는 곧 가로 질러 지나간다는 말이다. ‘몸을 잃고 목숨을 잃는다.’는 결국 죽은 자라는 것이다. 어째서 죽은 자를 이루는가?
여기에 대해 옛 사람들을 노래하였다.
조주의 입 안에는 자황(雌黃: 유황비소의 독)이 있으니
구절 아래에서 누가 (조주의) 길고 짧음을 보았을까.
우습구나, 얼마나 빈번히 흙덩이를 쫓는 개였는가?
깊은 밤 공연히 빈 당(堂)을 향해 짖는다. (자수 심)
趙州口裏有雌黃。句下誰人見短長。
堪笑幾多逐塊狗。夜深無故吠虛堂。(慈受深)。
어째서 빈 당을 향해 짓는가? 이것은 흡사 저 ‘노파소암’의 화두에서 노파가 암주를 쫓아내고 암자를 불태운 것과 흡사하다고 하겠다.
말 가운데에서 핵심을 말했으니
있다고 말하고 없다고 말함은 연나라 황금이며 조나라 벽옥이다.
다시 포삼(布衫: 무명적삼)이 일곱 근이어서는
천상과 인간계에서 값을 매기지 못한다. (지장 은)
言言中的。話有話無燕金趙璧。
更有布衫重七斤。天上人間無價直。(地藏恩)。
‘포삼(布衫: 무명적삼)이 일곱 근’ 운운한 것은 ‘청주포삼’ 화두를 일컫는다. 한 스님이 물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이에 조주선사께서 대답하였다. “노승이 청주(青州)에 있으면서 포삼(布衫: 무명삼베)을 한 벌 지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
이 ‘청주포삼’ 화두를 꿰뚫을 수 있어야 비로소 조주선사께서 개의 불성에 대답한 뜻에 다가가고 문수노인이 ‘전삼삼후삼삼’을 말한 뜻을 아는 것이다.
업식이 있다는 말이여
(그) 뜻이 깊지 않다고 누가 말하는가?
바다가 마르면 결국 바닥을 드러내지만
사람이 죽으면 (그) 마음을 알지 못한다.
言有業識在。誰云意不深。
海枯終見底。人死不知心。(真淨文)。
‘뜻이 깊지 않다고 누가 말하는가?’라고 한 것은 업식을 그저 교학적으로 아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당부인 것이다. 어째서 저 죽은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가? 귀신도 적(聻)을 두려워한다.
개의 불성을 물으니
조주는 없다고 답했다.
곧장 오랑캐족을 멸해도
오히려 대장부가 되지 못한다. (경산 고)
有問狗佛性。趙州答曰無。
言下滅胡族。猶為不丈夫。(徑山杲)。
누가 참으로 대장부인가? 검을 가로로 잡고 길을 마주한 자이다.
개에게 불성이 없음이여
자비로움이 바다의 깊이 만큼이다.
말과 구절에서 찾고 더듬어서는
장부의 마음을 파묻으리라. (소산 여)
狗子無佛性。慈悲似海深。
尋言逐句者。埋沒丈夫心。(疏山如)。
어째서 자비로움이 바다의 깊이라고 했는가? 낙양(洛陽)에서 말로 길을 다투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뜻을 말과 구절에서 찾는다면 결국 저 옛 사람을 눈앞에서 놓치리라. 무엇을 말이라고 하고 무엇을 구절이라고 하는가? 은산철벽이 천겹만겹이다. 장부의 마음을 파묻는다는 것은 저 조주의 마음을 놓쳤다는 것이다.
조주의 개에게 불성이 없음이여
허공에 진나라 거울을 끄집어냈다.
광채가 찬란하여 별들도 보이지 않고
위아래 사방으로 환히 비춘다. (수암 연)
趙州狗子無佛性。當空掘出秦時鏡。
光明渾不見星兒。上下四維俱徹映。(誰菴演)。
‘허공에 진나라 거울을 끄집어냈다.’는 것은 곧 허공에 저 거울을 걸었다는 것이다. 왜 하필 진나라인가? 그리고 어떤 거울인가? 남면하여 북두를 본다.
개에게 불성이 없음이여
복숭아나무로 만든 부적을 문 위에 못질한다.
천 가지 삿됨이 모조리 들어오지 못하고
백 가지 괴이함이 다 없어진다. (송원 악)
狗子佛性無。門上釘桃符。
千邪俱不入。百怪盡消除。(松源岳)。
어째서 하필 복숭아나무인가? 이것은 곧 앞에서 젖은 옷이라고 한 뜻과 같겠다. 무엇을 천 가지 삿됨이라고 백 가지 괴이함이라고 하는가? 산에 막히고 물에 막히는 것이다. 허공을 나는 학은 그림 밖이 아니고 봄날의 햇살에 흰 설산은 와해빙소이다.
개에게 불성이 없음이여
간장(干將)은 초나라 조정에 들어가
(간장검을) 한 차례 휘둘려 세 개의 머리를 떨어뜨려
천고(千古)에 헛된 명성을 얻었다. (천봉 완)
狗子無佛性。干將入楚庭。
一揮三首落。千古得虛名。(千峰琬)。
세 개의 머리란 전설에 의하면 간장이 아버지를 죽인 초나라 왕의 머리를 칼로 베고 다시 협객이 간장의 머리를 베니 항아리 속에서 서로 다투었는데, 여기에 다시 협객이 가해하여 스스로의 머리를 베어서 이 셋이 항아리 속에서 녹아 없어진 일화를 말한다. 어째서 헛된 명성을 얻는다고 했는가? 대장부는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한 자 적는다.
개의 불성이여
얼마나 길에서 길을 다투었던가?
만겹의 산이 고경(古鏡)을 감추고
한 화살이 신라를 지난다.
고림선원에서 취산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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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알고도 고의로 범한 것이다ㆍ
합장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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