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에게 부활의 몸을 보여주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게 된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계속 무덤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20장 17절에서는『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핲투)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핲투는 붙들어서 끌어안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는 예수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다. 그리스도께서 아직 아버지 집으로 아직 가지 않으므로 붙잡지 말라는 것이다. 당분간 마리아와 제자들과 세상에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를 만나서 대화를 했지만, 자신의 부활의 몸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요한복음 20장 19-20절에서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제자들이 마리아의 말을 듣고 부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놀란 것이다. 분명히 문을 닫았는데 예수님이 벽을 뚫고 제자들에게 들어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체는 이 세상의 육체와는 다른 몸인 것이다.
요한복음 20장 24-25절에서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가 자리에 없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말하였지만, 자명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돌 무덤에 묻힌 죽은 이가 눈 앞에 나타났다는 동료들의 말을 도마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간의 경험과 지식 안에서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는 일은 불가한 일이었기에 도마는『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한다. 부활은 인간이 보고 생각하는 인식체계를 넘어서는 신비이기에 도마가 아닌 누구라도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부활은 신비다. 물리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이고 신비다. 물과 성령으로 난 자들도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경험과 지식의 문을 닫고, 하나님의 신비를 향해 나아갈 때 시작된다. 부활하신 하나님의 신비를 향해 문을 활짝 열었을 때, 부활 안에서 육의 몸은 죽고, 영의 몸으로 태어나게 된다.
요한복음 20장 26-27절에서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했다. 그런데, 누가복음 24장 38절에서는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를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αὐτός ψηλαφήσατέ με καὶ ἴδετε ὅτι πνεῦμα σάρκα καὶ ὀστέα οὐκ ἔχει καθὼς ἐμὲ θεωρεῖτε θεωρεῖτε ἔχοντα』다시 번역해 보면, 『그는 나를 만지고 영의 몸이라는 것을 보았고, 나는 뼈를 가진 너를 보듯이 뼈가 없다.』 도마가 본 것은 예수님의 죽은 상태에서 있었던 못자국과 창자국이 아니라, 그 자국들이 변신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는 모습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놀라고 기뻐한 것은 도마와 같이 그런 부활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한글 개역개정은 마치 예수님이 살이 있고 뼈가 있는 것처럼 번역이 되어서, 이전의 몸으로 돌아갔구나 라고 착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몸은 영의 몸(πνεῦμα σάρκα 프뉴마 사르카)이다. 그리고 뼈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사람이 움직이기 위해 뼈가 필요하듯이 그런 몸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죽기 전의 육체의 몸은 죽어야 할 사람의 몸이다. 죽어야 할 사람의 몸을 성경은 죄의 몸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는 첫사람 아담의 몸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6장 6절『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죄의 몸은 거룩한 몸으로 될 수 없다. 죄의 몸은 죽어야 하고, 새생명인 영의 몸이 태어나는 것이다. 새생명은 부활생명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하늘로 부터 난다. 하늘로부터 난 자를 거룩한 자라고 베드로는 말을 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16절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διότι γέγραπται · ἅγιοι ἔσεσθε, ὅτι ἐγὼ ἅγιος.) γενεσθε(게네스데)는 γίγνομαι(기그노마이:태어나다, 생산되다 라는 의미)의 2인칭 수동태로서 『거룩으로 태어나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번역하면,『나는 거룩이니, 너희들은 거룩으로 태어나라(거듭나라)』는 의미다.
로마서 6장 8절『 만일(에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아페다노멘)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쉬제소멘)을 믿노니(피스튜오멘πιστεύομεν)』εἰ δὲ ἀπεθάνομεν σὺν Χριστῷ, πιστεύομεν ὅτι καὶ συζήσομεν αὐτῷ,(헬라어 성경)
에이(εἰ)는 가정법 접속사이다. 어떤 사실이 일어난 것으로 간주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라는 것이다. 아페다노멘(ἀπεθάνομεν)은 아오리스트 시제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순간적으로 죽었다는 말이다. 쉬제소멘(συζήσομεν)은 우리가 함께 새생명이 된다 라는 미래시제다. 쉬(함께)와 자오(살다)의 합성어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유한 존재(공생관계)가 된다. 성령을 받을 때 순간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성도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태어나 거룩한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비록 죽어야 할 육신이 있어도 영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