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桂苑筆耕集序 / 序 / 校印桂苑筆耕集序[洪奭周]
記有之。曰酒醴之美。而玄酒明水之尙。貴五味之本也。黼黻文繡之美。而疏布之尙。反女功之始也。古之君子。必重其本始如此。吾東方之有文章而能著書傳後者。自孤雲崔公始。吾東方之士。北學于中國。而以文聲天下者。亦自崔公始。崔公之書傳于後者。唯桂苑筆耕與中山覆簣集二部。是二書者。亦吾東方文章之本始也。吾東方以文爲尙。至我朝益煥以融。家燕許而戶曹劉。以詩若文成集者。無慮充棟宇矣。而顧鮮有知崔公之書者。余嘗見近代人所撰東國書目。有載中山覆簣集者。徧求之。終不可得。唯桂苑筆耕二十卷。爲吾家先世舊藏。自童幼時。知珍而玩之。然間以語人。雖博雅能文而好古者。亦皆言未曾見。然則是書也幾乎絶矣。使是書不行于東方。是玄酒不設于太室。而疏布不羃于犠罇也。豈所以敎民不忘本哉。世或謂公文皆騈儷四六。殊不類古作者。公之入中國。在唐懿僖之際。中國之文。方專事騈儷。風會所趨。固有不得而免者。然觀公所爲辭。往往多華而不浮。如檄黃巢一篇。氣勁意直。絶不以雕鏤爲工。至其詩平易近雅。尤非晩唐人所可及。是蓋以明水疏布之質。而兼有乎酒醴黼黻之美者。豈不彌可珍哉。公在中國。取科第入軍府。亦旣已聲施當時矣。而一朝去之如脫屣。及歸東方。躋翰苑。貳兵部。以至阿飡。阿飡者。新羅大官。其顯用方未已也。而顧又自放於山林寂寞之濱。以終老其身而不悔。蓋度其時之皆不可有爲也。士君子立身蹈道。莫有大乎出處之際。出處而不失其時。非賢者。不能也。賢者之作。固不可使其無傳。況其文傑然如彼。而又爲東國文章之本始者哉。湖南觀察使徐公準平。卽余所稱博雅能文而好古者也。聞余蓄是書。亟取而校之。捐其俸搨以活字。得數十百本。用廣其傳曰。不可使是書絶于東國也。嗚呼。不忘本始。敎民厚也。表章賢人。勸民善也。徐公之用心也如此。其所以爲政於湖南者。亦可知已。役旣完。徐公屬余曰。子實傳是書。今不可以靳一言。余辭不能得。若崔公之蹟行本末與是書之可備攷證者。徐公之序詳之矣。余無所復贅云。甲午九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豐山洪奭周。序。
계원필경집 서 / 교인 계원필경집 서문〔校印桂苑筆耕集序〕[홍석주(洪奭周)]
《예기》에 이르기를 “단술이 맛이 좋긴 하지만 제사 때에 현주와 명수 같은 물을 윗자리에 놓는 것은 물이 모든 맛의 근본임을 중시하려고 해서이다. 각종 화려한 무늬의 옷감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제사 때에 거친 삼베로 동이를 덮는 것은 부녀자들이 하는 길쌈질의 시초를 돌아보고 귀하게 여기려 해서이다.〔酒醴之美 而玄酒明水之尙 貴五味之本也 黼黻文繡之美 而疏布之尙 反女功之始也〕”라고 하였다. 옛날의 군자(君子)가 그 근본과 시초를 반드시 중하게 여기려 한 것이 이와 같았다.
우리 동방에 문장이 나와서 글을 지어 후세에 전할 수 있게 된 것은 고운(孤雲) 최공(崔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리고 우리 동방의 선비로서 북쪽으로 중국에 유학(遊學)하여 문장으로 천하에 명성을 떨친 것도 최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최공의 글 가운데 후세에 전하는 것으로는 오직 《계원필경(桂苑筆耕)》과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2부(部)가 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이 2부의 서책이 또한 우리 동방 문장의 근본이요 시초라고 할 것이다.
글을 숭상하는 우리 동방의 풍조가 아조(我朝)에 이르러서는 더욱 빛나고 무르익어 집집마다 연허(燕許)와 조유(曹劉)가 배출되면서 시와 문으로 문집을 이룬 것이 집을 가득 채울 정도로 엄청나게 많았다. 하지만 최공의 글을 아는 사람은 드물기만 하였다.
내가 일찍이 근대 사람이 편찬한 《동국서목(東國書目)》을 보니 《중산복궤집》이 실려 있기에 널리 구해 보았지만 끝내 얻지 못하였다. 다만 《계원필경》 20권은 우리 집안에서 대대로 소장해 왔으므로 내가 어려서부터 진귀한 글로 알고서 음미해 왔다. 그러나 간혹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비록 박아(博雅)하고 글을 잘하며 옛것을 좋아하는 자라고 할지라도 모두 그 글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러고 보면 이 글이 거의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 글이 동방에 전하지 않게 된다면, 이는 현주(玄酒)를 태실(太室)에 진설하지 않는 것과 같고, 거친 삼베로 제사용 술동이를 덮지 않는 것과 같게 될 것이니, 어떻게 백성에게 근본을 잊지 말라고 가르칠 수가 있겠는가.
세상에서는 간혹 공의 글이 모두 변려(騈儷) 사륙문(四六文)으로서 옛 작자(作者)의 글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비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이 중국에 들어가서 활동한 것이 당(唐)나라 의종(懿宗)과 희종(僖宗) 연간이었는데, 당시에 중국의 글이 변려문을 전문으로 일삼았던 것을 감안할 때 공이 그 풍조에 따랐던 것은 원래 어쩔 수 없는 점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공이 지은 글을 보면 왕왕 화려하면서도 들뜨지 않은 것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가령 황소(黃巢)에게 보낸 격문(檄文) 1편만을 보더라도 기운이 굳세고 뜻이 곧으니 결코 교묘하게 아로새기려 한 것이 아니요, 그가 지은 시 역시 평이(平易)하고 우아(優雅)하니 만당(晩唐)의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더욱 아니라고 할 것이다. 이는 대개 명수(明水)와 거친 삼베 같은 바탕 위에 단술의 맛과 화려한 옷감의 아름다움을 겸한 것이라고 할 것이니, 이 어찌 더욱 보배로 여겨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공이 중국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군부(軍府)에 들어갔으니 이것만으로도 벌써 당시에 명성을 떨쳤다고 할 것인데, 공은 하루아침에 그만두고 떠나오면서 마치 헌 신발을 벗어버리듯 하였다. 그 뒤 동방에 돌아와서는 한원(翰苑)에 오르고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거쳐 아찬(阿飡)에 이르렀는데, 아찬은 신라의 대관(大官)이었다. 게다가 현달(顯達)할 길이 바야흐로 끝나지 않았는데도, 공은 또 스스로 산림(山林)의 적막한 곳으로 나아가 배회하며 그 몸을 마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는 대개 그 시대가 모두 뜻있는 일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사군자(士君子)가 몸을 세우고 도를 행함에 있어서는 출처(出處)를 어떻게 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출처에 있어서 그 때를 잃지 않는 것은 현자(賢者)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현자가 지은 글이라면 당연히 세상에 전하지 않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인데, 더군다나 그 글이 저토록 걸출하고 또 동국(東國) 문장의 근본과 시초가 되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호남 관찰사(湖南觀察使) 서공 준평(徐公準平 서유구(徐有榘))은 바로 내가 박아하고 글을 잘하며 옛것을 좋아하는 자라고 칭한 그 사람이다. 내가 이 글을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얼른 가져다가 교열(校閱)한 뒤에 자기 봉록(俸祿)을 털어 활자로 인쇄해서 수십 백 본(本)을 만들어 널리 전파하려 하면서 “이 글이 동국(東國)에서 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아, 근본과 시초를 잊지 않는 것이야말로 백성에게 후덕함을 가르치는 것이요, 현인(賢人)을 표장(表章)하는 것이야말로 백성에게 착한 일을 권면하는 것이다. 서공(徐公)의 마음 씀이 이와 같으니, 그가 호남에서 행하는 정사(政事)가 어떠할지를 또한 알 수가 있다.
이 일이 완료된 뒤에 서공이 나에게 부탁하기를 “그대가 바로 이 글을 전하였으니, 지금 한마디 말을 아껴서는 안 된다.”라고 하기에, 내가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최공의 행적의 본말(本末)과 이 글의 고증(攷證) 자료 등에 대해서는 서공의 서문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내가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다.
갑오년(1834, 순조34) 9월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풍산(豐山) 홍석주(洪奭周)는 서문을 쓰다.
[주-D001] 단술이 …… 해서이다 :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나온다.[주-D002] 연허(燕許) : 당 현종(唐玄宗) 때의 연국공(燕國公) 장열(張說)과 허국공(許國公) 소정(蘇頲)을 병칭한 말이다.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당시에 연허대수필(燕許大手筆)이라는 칭호를 얻었다.[주-D003] 조유(曹劉) : 후한 시대 건안(建安) 연간의 시인인 조식(曹植)과 유정(劉楨)의 병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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桂苑筆耕集序 / 序 / 校印桂苑筆耕集序[徐有榘]
桂苑筆耕集二十卷。新羅孤雲崔公在唐淮南幕府時公私應酬之作。而東還之後。手編表進于朝者也。公名致遠。字海夫。孤雲其號也。湖南之沃溝人。幼穎慧絶倫。年十二。從商舶入中原。十八。擧進士第。久之。調溧水縣尉。任滿而罷。時値黃巢之亂。諸道行營都統高騈開府淮南。辟公爲都統巡官。凡表狀文告。皆出公手。其討黃巢檄。天下傳誦。奏除殿中侍御史。賜緋魚袋。後四年。充國信使東歸。事憲康王,定康王。爲翰林學士兵部侍郎。出爲武城太守。眞聖時。挈家入江陽郡伽倻山以終焉。葬在湖西之鴻山。或謂公羽化者妄也。夫以海隅偏壤之産。而弱齡北學。取科宦如拾芥。終以文章鳴一世。同時賓貢之流。莫之或先。豈不誠豪傑之士哉。若其居幕數載。知高騈之不足有爲。呂用之,諸葛殷等之誕妄必敗。超然引去。去三年而淮南亂作。則又有似乎知幾明哲之君子。其人與文。要之可傳不可泯者也。據進表。是集之外。復有今體賦一卷。今體詩一卷。雜詩賦一卷。中山覆簣集五卷。唐藝文志則稱桂苑筆耕二十卷。文集三十卷。而他皆不傳。唯是集屢經鋟印。板刻舊佚。搨本亦絶罕。癸巳秋。余按察湖南。巡到武城。謁公書院。裵徊乎石龜流觴臺之間。俛仰遺躅。有餘嘅焉。會淵泉洪公以是集寄曰。此近千年不絶如線之文獻耳。子其無流通古書之思乎。余如獲拱璧。懼其愈遠而愈佚也。亟加証校。用聚珍字擺印。分藏諸泰仁縣之武城書院,陜川郡之伽倻寺。嗟乎。名醞之坊。必題杜康。良劍之鍔。必標歐冶。爲其不忘本始也。我東詩文集之秖今傳者。不得不以是集爲開山鼻祖。是亦東方藝苑之本始也。庸詎可一任其銷沈殘滅而不之圖哉。東還後著作。散逸無傳。唯有梵宮祠墓之間。披林藪剔苔蘚。尙可得十數篇。彙附原集。剞劂壽傳。余竊有志而未遑云。按史稱中和二年正月。王鐸代高騈爲諸道行營都統。五月。加高騈侍中。罷鹽鐵轉運使。騈旣失兵柄。復解利權。攘袂大詬。上表自訴。言辭不遜。上命鄭畋草詔切責之。今考集中。有謝加侍中表。巽辭引咎而已。無一語激忿勃謾。又有謝賜宣慰表云。仰睹綸音。深嘉秕政。師徒輯睦。黎庶安寧。其假借慰獎也。若是之慇摯。史所謂草詔切責者。無乃非當時實錄也歟。又按中和紀年。止於四年。而公進表年月。系以中和六年。蓋公以中和四年十月浮海。翌年春始抵國。又翌年編進是集。而前一年之改元光啓。容或未聞知也。歲在閼逢敦牂中元。達城徐有榘。書于湖南布政司之觀風軒中。
계원필경집 서 / 교인 계원필경집 서문〔校印桂苑筆耕集序〕[서유구(徐有榘)]
《계원필경집》 20권은 신라의 고운(孤雲) 최공(崔公)이 당나라 회남(淮南) 막부(幕府)에 있을 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응수하여 지은 것으로서, 동방으로 돌아온 뒤에 직접 편집하여 조정에 표문(表文)을 올려 바친 것이다.
공의 이름은 치원(致遠)이요, 자(字)는 해부(海夫)요, 고운은 그의 호(號)이다. 호남(湖南) 옥구(沃溝)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나이 12세에 상선(商船)을 타고 중국에 들어가서 18세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으며, 한참 뒤에 율수 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다가 임기를 마치고 그만두었다.
그때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났는데, 제도행영도통(諸道行營都統) 고변(高騈)이 회남에 막부를 열고는 공을 불러 도통순관(都統巡官)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표(表)ㆍ장(狀)ㆍ문(文)ㆍ고(告) 등 모든 글이 공의 손에서 나왔는데, 그중에서도 황소의 죄를 성토한 격문(檄文)은 천하에 전송(傳誦)되었다. 공의 공적이 조정에 보고되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제수되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다.
그로부터 4년 뒤에 국신사(國信使)에 충원되어 동방으로 돌아와서 헌강왕(憲康王)과 정강왕(定康王)을 섬기며 한림 학사(翰林學士)와 병부 시랑(兵部侍郞)이 되고 외방으로 나가 무성 태수(武城太守)가 되었다. 진성왕(眞聖王) 때에 가족을 이끌고 강양군(江陽郡)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생을 마쳤는데, 그의 묘소는 호서(湖西)의 홍산(鴻山)에 있다. 어떤 이는 공이 신선이 되었다고도 하나, 이는 허망한 말이다.
대저 바닷가의 외진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중국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살이하는 것을 마치 지푸라기 줍듯이 하였으며, 끝내는 문장으로 한 세상을 울리면서 동시(同時)에 빈공(賓貢)한 사람들이 아무도 앞을 다투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어찌 참으로 호걸스러운 선비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막부에 몇 년 동안 거하면서 고변이 뜻있는 일을 하기에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과 여용지(呂用之)와 제갈은(諸葛殷) 등이 허탄하고 망녕되어 반드시 패망하리라는 것을 알고서 초연히 인혐(引嫌)하며 떠나갔는데, 떠나간 뒤 3년 만에 회남 지역에서 난리가 일어났고 보면, 공이야말로 또 기미(幾微)를 미리 알고 대처하는 명철한 군자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그 인격으로 보나 그 문장으로 보나 후세에 전해지도록 해야만 할 것이요 절대로 그대로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라왕에게 올린 표문에 의거하면, 이 문집 이외에 금체부(今體賦) 1권, 금체시(今體詩) 1권, 잡시부(雜詩賦) 1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 등이 또 있다. 그리고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따르면 《계원필경》 20권과 문집 30권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 다른 것들은 모두 전하지 않고 오직 이 《계원필경집》만 여러 차례 인행(印行)되었는데, 판각(板刻)은 오래전에 잃어버렸고 탑본(搨本) 또한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계사년(1833, 순조33) 가을에 내가 호남을 안찰하며 순시하다가 무성(武城)에 이르러 공의 서원을 배알(拜謁)하고는 석귀(石龜)와 유상대(流觴臺) 사이를 배회하면서 유적을 둘러보노라니 감개가 새로웠다. 그때 마침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홍공(洪公)이 이 문집을 부쳐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천 년 가까이 끊어지지 않고 실처럼 이어져 온 문헌이다. 그대는 옛글을 유통시킬 생각이 없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큰 구슬을 얻은 것처럼 기쁜 한편으로, 시간이 오래 흐를수록 잃어버릴 가능성이 더 커질까 걱정되었다. 그리하여 얼른 교정을 하여 취진자(聚珍字)로 인쇄한 뒤에 태인현(泰仁縣)의 무성서원(武城書院)과 합천군(陜川郡)의 가야사(伽倻寺)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아, 명주(名酒)가 있는 동네에는 반드시 두강(杜康)의 이름을 내걸고, 명검(名劍)의 칼날에는 반드시 구야(歐冶)의 이름을 표기하니, 이는 그 근본과 시초를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전해 오는 우리 동방의 시문집들은 이 문집을 개산(開山) 비조(鼻祖)로 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문집이 또한 동방 예원(藝苑)의 근본이요 시초라고 할 것이니, 어찌 이 문집이 닳아 없어지는 대로 그냥 놔두고서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않아서야 될 일이겠는가.
공이 동방으로 돌아온 뒤에 저작한 글은 흩어져 없어져서 지금 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 범궁(梵宮)과 사묘(祠廟) 사이에서 수풀을 헤치고 이끼를 긁어내면 그래도 십여 편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을 분류해 원집(原集)에 붙여서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인쇄해 보고 싶은 생각을 내가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으나 미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역사를 상고해 보면, 당 희종(唐僖宗) 중화(中和) 2년(882, 헌강왕8) 정월에 왕탁(王鐸)이 고변을 대신하여 제도행영도통(諸道行營都統)이 되었고, 5월에는 고변을 시중(侍中)으로 올리고서 염철전운사(鹽鐵轉運使)를 파직하였는데, 고변이 병권(兵權)을 잃은 데다가 이권(利權)까지 잃게 되자, 팔을 걷어붙이고 크게 매도하면서 표문을 올려 스스로 호소하였는데 그 언사(言辭)가 불손하였으므로, 상이 정전(鄭畋)에게 명하여 조서(詔書)를 작성해서 준열히 꾸짖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문집에 나오는 〈시중에 올려 준 것을 감사하는 표문〔謝加侍中表〕〉을 보면, 겸손한 말로 인구(引咎)했을 뿐이요, 격분하거나 발만(勃謾)한 언사는 한마디도 없다. 또 〈선위하는 조서를 내린 것을 감사하는 표문〔謝賜宣慰表〕〉을 보면 “우러러 윤음을 살펴 보건대, 신의 부족한 정사를 매우 가상하게 여기시어 군사들이 단합하고 백성들이 편안하다고 하시면서〔仰睹綸音 深嘉秕政 師徒輯睦 黎庶安寧〕”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해하고 위로하며 장려해 준 것이 이처럼 은근하고 진지하기만 하였으니, 그렇다면 역사에서 말한 바 “조서를 작성해서 준열히 꾸짖게 하였다.〔草詔切責〕”라고 한 것은, 당시의 실록(實錄)이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또 상고해 보건대, 중화(中和)의 기년(紀年)은 4년으로 끝나는데, 공이 신라왕에게 표문을 올린 연월(年月)을 보면 중화 6년으로 되어 있다. 이는 대개 공이 중화 4년 10월에 배를 타고 항해하여 이듬해 봄에 비로소 신라에 도착하였고, 또 그 이듬해에 이 문집을 엮어 올렸던 사정을 감안할 때, 그 1년 전에 광계(光啓)로 개원(改元)한 사실을 어쩌면 듣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갑오년(1834, 순조34) 7월 보름날에 달성(達城) 서유구(徐有榘)는 호남포정사(湖南布政司)의 관풍헌(觀風軒)에서 쓰다.
[주-D001] 두강(杜康) : 주(周)나라 때에 술을 최초로 빚었다는 사람의 이름이다.[주-D002] 구야(歐冶) : 명검을 잘 만들었던 춘추 시대 월(越)나라 사람으로, 월왕(越王)을 위해 담로(湛盧)ㆍ거궐(巨闕)ㆍ승사(勝邪)ㆍ어장(魚腸)ㆍ순구(純鉤)라는 다섯 자루의 칼을 만들고, 초왕(楚王)을 위해 용연(龍淵)ㆍ태아(泰阿)ㆍ공포(工布)라는 세 자루의 칼을 만들었다고 한다.[주-D003] 당 희종(唐僖宗) …… 한다 : 《구당서(舊唐書)》 권182 〈고변열전(高騈列傳)〉과 《신당서(新唐書)》 권224 하(下) 〈고변열전〉에 이 내용이 나온다.[주-D004] 황제가 …… 않겠는가 : 당 희종이 정전(鄭畋)에게 조서를 작성하여 질책하도록 한 것은 사실은 고운(孤雲)이 지어 올린 표문 때문이 아니라, 고변의 다른 막료인 고운(顧雲)이 올린 표문이 불손했기 때문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55 〈당기(唐紀) 71 희종(僖宗)〉 중화(中和) 2년 5월 조에 보면 “회남 절도사 고변의 직위를 올려 시중을 겸하게 하고 염철전운사를 파직하였다. 고변이 이미 병권을 잃은 데다가 다시 이권까지 잃게 되자, 팔을 걷어붙이고 크게 매도하면서 그의 막료인 고운으로 하여금 표문을 작성하게 하여 스스로 호소하였는데, 그 언사가 불손하였다.〔加淮南節度使高騈兼侍中 罷其鹽鐵轉運使 騈旣失兵柄 又解利權 攘袂大詬 遣其幕僚顧雲草表自訴 言辭不遜〕”라고 하고는 그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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桂苑筆耕集序 / 序 / 桂苑筆耕序
淮南入本國兼送詔書等使前都統巡官承務郎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遠進所著雜詩賦及表奏集二十八卷具錄如後
私試今體賦五首一卷五言七言今體詩共一百首一卷雜詩賦共三十首一卷中山覆簣集一部五卷桂苑筆耕集一部二十卷
右臣自年十二。離家西泛。當乘桴之際。亡父誡之曰。十年不第進士。則勿謂吾兒。吾亦不謂有兒。往矣勤哉。無隳乃力。臣佩服嚴訓。不敢弭忘。懸刺無遑。冀諧養志。實得人百之己千之。觀光六年。金名榜尾。此時諷詠情性。寓物名篇。曰賦曰詩。幾溢箱篋。但以童子篆刻。壯夫所慙。及忝得魚。皆爲棄物。尋以浪跡東都。筆作飯囊。遂有賦五首詩一百首。雜詩賦三十首。共成三篇。爾後調授宣州溧水縣尉。祿厚官閒。飽食終日。仕優則學。免擲寸陰。公私所爲。有集五卷。益勵爲山之志。爰標覆簣之名。地號中山。遂冠其首。及罷微秩。從職淮南。蒙高侍中專委筆硯。軍書輻至。竭力抵當。四年用心。萬有餘首。然淘之汰之。十無一二。敢比披沙見寶。粗勝毁瓦畫墁。遂勒成桂苑集二十卷。臣適當亂離。寓食戎幕。所謂饘於是粥於是。輒以筆耕爲目。仍以王韶之語。前事可憑。雖則傴僂言歸。有慙鳧雀。旣墾旣耨。用破情田。自惜微勞。冀達聖鑑。其詩賦表狀等集二十八卷。隨狀奉進。謹進。
中和六年正月日。前都統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遠。狀奏。
桂苑筆耕集一部二十卷
都統巡官侍御史內供奉崔致遠。撰。
계원필경집 서 / 계원필경 서문〔桂苑筆耕序〕
회남(淮南)에서 본국에 들어오면서 조서(詔書) 등을 보내는 사신을 겸한, 전(前) 도통순관(都統巡官)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 사(賜) 자금어대(紫金魚袋) 신 최치원은 저술한 잡시부(雜詩賦) 및 표주집(表奏集) 28권을 올립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5수(首) 1권
오언칠언 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30수 1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1부(部) 5권
《계원필경집》 1부 20권
신은 나이 12세에 집을 나와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배를 타고 떠날 즈음에 망부(亡父)가 훈계하기를 “앞으로 10년 안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마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을 기울여라.”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엄한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감히 망각하지 않고서 겨를 없이 현자(懸刺)하며 양지(養志)에 걸맞게 되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실로 인백기천(人百己千)의 노력을 경주한 끝에 중국의 문물(文物)을 구경한 지 6년 만에 금방(金榜 과거 급제자 명단)의 끝에 이름을 걸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정성(情性)을 노래하여 읊고 사물에 뜻을 부쳐 한 편씩 지으면서 부(賦)라고 하기도 하고 시(詩)라고 하기도 한 것들이 상자를 가득 채우고 남을 정도가 되었습니다만, 이것들은 동자(童子)가 전각(篆刻)하는 것과 같아 장부(壯夫)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라서 급기야 외람되게 득어(得魚)하고 나서는 모두 기물(棄物)로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뒤이어 동도(東都 낙양(洛陽))에 유랑하며 붓으로 먹고살게 되어서는 마침내 부 5수, 시 100수, 잡시부(雜詩賦) 30수 등을 지어 모두 3편(篇)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뒤 선주(宣州) 율수 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는데, 봉록은 후하고 관직은 한가하여 배부르게 먹고 하루해를 마칠 수도 있었습니다마는〔飽食終日〕, 벼슬을 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학문을 해야 한다〔仕優則學〕는 생각에 촌음(寸陰)도 허비하지 않으면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지은 것들을 모아 문집 5권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산을 만들 뜻을 더욱 분발하여 복궤(覆簣)의 이름을 내걸고는 마침내 그 지역의 명칭인 중산(中山)을 맨 앞에 얹었습니다.
급기야 미관(微官)을 그만두고 회남의 군직을 맡으면서부터 고 시중(高侍中)의 필연(筆硯)의 일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군서(軍書)가 폭주하는 속에서 있는 힘껏 담당하며 4년 동안 마음을 써서 이룬 작품이 1만 수(首)도 넘었습니다만, 이를 도태(淘汰)하며 정리하고 보니 열에 한둘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어찌 모래를 파헤치고 보배를 발견하는 것〔披沙見寶〕에 비유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기왓장을 깨뜨리고 벽토를 긁어 놓은 것〔毁瓦畫墁〕보다는 나으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계원집》 20권을 우겨서 만들게 되었습니다.
신은 마침 난리를 당하여 군막에 기식(寄食)하면서 이른바 여기에 미음을 끓여 먹고 여기에 죽을 끓여 먹는〔饘於是粥於是〕 신세가 되었으므로, 문득 필경(筆耕)이라는 제목을 달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왕소(王韶)의 말을 가지고 예전의 일을 고증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몸을 움츠린 채 돌아와서 환호작약(歡呼雀躍)하는 이들에게 부끄럽긴 합니다만, 일단 밭을 갈고 김을 매듯 정성(情性)의 밭을 파헤친 만큼, 하찮은 수고나마 스스로 아깝게 여겨져서 위에 바쳐 올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에, 시(詩)ㆍ부(賦)ㆍ표(表)ㆍ장(狀) 등 문집 28권을 소장(疏狀)과 함께 받들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중화(中和) 6년 정월 일에 전(前) 도통순관(都統巡官)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 사(賜) 자금어대(紫金魚袋) 신 최치원은 소장을 올려 아룁니다.
《계원필경집》 1부 20권
도통순관 시어사 내공봉 최치원 지음
[주-D001] 현자(懸刺) : 현두자고(懸頭刺股)의 준말로, 졸음을 쫓기 위해 한(漢)나라 손경(孫敬)이 상투를 끈으로 묶어 대들보에 걸어 매고, 전국 시대 소진(蘇秦)이 송곳으로 정강이를 찔러 가며 각고(刻苦)의 노력을 기울여 공부했다는 고사를 말한다.[주-D002] 양지(養志) :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봉양하는 효도라는 뜻으로,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하는 등 육신만을 위해서 봉양하는 구체(口體)의 봉양과 상대되는 말인데,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상세한 내용이 나온다.[주-D003] 인백기천(人百己千) : 남이 백 번 하면 자기는 천 번 한다는 뜻으로,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할 때의 결의를 표현하는 말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20장의 “남이 한 번에 잘 하면 나는 그것을 백 번이라도 하고, 남이 열 번에 잘 하면 나는 그것을 천 번이라도 할 것이다. 과연 이 방법대로 잘 행하기만 한다면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밝아지고, 아무리 유약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果能此道矣 雖愚必明 雖柔必强〕”라는 말을 전용(轉用)한 것이다.[주-D004] 동자가 …… 일이라서 : 전각(篆刻)은 조충 전각(雕蟲篆刻)의 준말로, 벌레 모양이나 전서(篆書)를 새기는 것처럼, 미사여구(美辭麗句)로 문장을 꾸미기나 하는 작은 기예라는 뜻의 겸사이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권2 〈오자(吾子)〉에, “동자(童子)의 조충전각과 같은 일을……장부는 하지 않는다.〔童子雕蟲篆刻……壯夫不爲也〕”라는 말이 나온다.[주-D005] 급기야 …… 여겼습니다 : 과거 급제라는 목적을 달성하고 나서는 그동안 예행 연습으로 지었던 시문들을 모두 폐기 처분했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생각하지 않게 되고……토끼를 잡고 나면 그물을 잊게 마련이다.〔得魚而忘筌……得兔而忘蹄〕”라는 말이 나온다.[주-D006] 배부르게 …… 있었습니다마는 : 《논어》 〈양화(陽貨)〉에 “배부르게 먹고 하루해를 마치면서 마음을 쓰는 곳이 없다면 딱한 일이다.〔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라는 말이 나온다.[주-D007] 벼슬하면서 …… 한다 : 《논어》 〈자장(子張)〉에 “벼슬을 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학문을 하고, 학문을 하고서 여가가 있으면 벼슬을 한다.〔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라는 말이 나온다.[주-D008] 복궤(覆簣) : 흙 한 삼태기를 부어 산을 만들기 시작한다는 말로 적소성대(積小成大)의 뜻과 같다. 《논어》 〈자한(子罕)〉의 “비유하자면, 산을 만들 적에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을 붓지 않아 산을 못 이루고서 중지하는 것도 내 자신이 중지하는 것과 같으며, 평지에 흙 한 삼태기를 부어 산을 만들기 시작해서 점점 만들어 나가는 것도 내가 해 나가는 것과 같다.〔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往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주-D009] 모래를 …… 것 : 남조(南朝) 양(梁)나라 종영(鍾嶸)의 《시품(詩品)》 권1에 “반악(潘岳)의 시는 비단을 펼쳐놓은 것처럼 찬란해서 좋지 않은 대목이 없고, 육기(陸機)의 글은 모래를 파헤치고 금을 가려내는 것과 같아서 왕왕 보배가 보인다.〔潘詩爛若舒錦 無處不佳 陸文如披沙簡金 往往見寶〕”라는 말이 나온다.[주-D010] 기왓장을 …… 것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말이다.[주-D011] 여기에 …… 먹는 : 공자(孔子)의 선조인 정고보(正考父)의 솥〔鼎〕에 “대부 때에는 고개를 수그리고, 하경(下卿) 때에는 등을 구부리고, 상경(上卿) 때에는 몸을 굽히고서, 길 한복판을 피해 담장을 따라 빨리 걸어간다면, 아무도 나를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리라. 나는 여기에 미음을 끓여 먹고 여기에 죽을 끓여 먹어 내 입에 풀칠을 하면서 살아가리라.〔一命而僂 再命而傴 三命而俯 循牆而走 亦莫余敢侮 饘於是 鬻於是 以餬余口〕”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昭公7年》[주-D012] 왕소(王韶)의 …… 것입니다 : 전거 미상이다.[주-D013] 중화(中和) 6년 : 이는 고운(孤雲)의 착오로, 서유구(徐有榘)의 〈서문〉 마지막 부분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