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교주점/김유미
사내는 백화점 쇼윈도에 눈이 베인 구름을 만났다
이 곳이거나 저 곳 어디든 거처가 되는 구름과의 포옹을
사람들은 익숙한 만남이라 불렀다
만남 후 구름이 사랑하지 못할 여자와 아이가
골목을 서성이는 꿈을 자주 꾸었다
빛바랜 안내문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사내,
여자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
구름은 질투하는 구름이 될 텐데
둘을 떠나는 버스에 태워 보내고
사내는 손을 흔드는, 고개를 숙이는
정류장으로 남아야 되나
구름과 사내가 앉아 술을 마시는 육교의 계단
그들의 대화가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구름은 자신을 쫓아와
일과 집과 사람들을 빼앗아 간 제 울음을 말한다
구름은 언젠가 제 울음을 수소문하는
발길이 되었을 때 숨이 차오른다 하고
사내는 울음소리를 내며 육교 밑을 지나가는
앰블런스가 숨이 차오른다 한다
오징어대신 빨갛게 튼 손을 펼쳐
천 년 전의 얼음 같은 여자와 아이를 세워 놓고
이목구비를 뗐다 붙이곤 하는 구름
육교는 다양한 울음들이 오가며 성황을 이루었다
가끔 구름의 울음이 먼발치에서 육교를 바라보다 되돌아갔다
구름과 사내는 모르는 척, 안 아픈 척하며
서로의 지병을 다스리자는
밀약을 했다
- 2014년 <시와반시> 신인상 당선작
■ 김유미 시인
- 전남 신안 출생
- 시집 < 창문을 닦으면 다시 생겨나는 구름처럼>
《 심사평 》
새로운 시를 찾습니다.
절실하나 낯선 언어
낯설되 뜨거운 언어
뜨겁되 신선한 언어
시 너머의 시를 기다립니다.
<시와반시> 신인상 공모의 문구이다. 이런 문구는 기실 신인들에게만 요구되는 사항이 아니라 시인들 모두에게 요구되는 엄격한 시의 조건일 터이므로 신인상에 응모된 작품을 읽고 심사를 하는 일은 힘들고 어려울뿐더러 마음이 무겁다. 그런 한편 또 새로운 시인들의 등장을 기대하는 설렘 또한 쉽사리 숨겨지지 않는 것이이기도 하다. 예선을 거쳐 넘어 온 작품들은 <육교주점> 외 5인의 45편이었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기존의 시가 가진 문법과 언어들에서 탈피해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새로운 언어와 어법을 갖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와반시>라는 시 전문 계간지의 제호 때문이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시도들은 그동안 <시와반시>의 신인상에 응모하는 작품들에서 느낄 수 있는 공통된 경향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새로운 시, 라는 강박관념에 얽매인 탓인지 난삽하거나 혼란스러운 언어유희에만 치우친 작품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즉 낯설되 절실하지 않고 또 뜨겁되 낯설지 않으며 신선하되 뜨겁지 않는 시들을 만나는 일은 곤혹스럽다. 그 재기발랄한 언어들 속에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넉넉하고 날카로운 인식의 징후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물론 이는 새로운 시를 창조하는 일이 그만큼 어렵고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걸 반증하는 일이기도 할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만치 않은 상상력과 형상을 가진 작품들을 만나는 일은 기쁘고 행복한 일이기도 하다.
5인의 작품들을 오래 읽고 심사숙고한 결과 <육교주점>외 9편을 응모한 김유미씨의 작품을 집중해서 읽기도 했다. 김유미씨의 작품들에서 호감을 가졌던 건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시각, 즉 현실인식에 관한 부분이었는데 이 분이 가진 당대의 현실에 관한 인식과 그 인식을 나름대로 형상화하는 힘이 녹록치 않다고 생각된 때문이었다. 김유미씨가 투고한 작품들은 크게 두 개의 시각으로 나누어진다고 보았는데, <육교주점>, <골목의 효능 >,<밀고하는 사람>,같은 경우 당대의 현실에 관한 나름의 해석과 묘사였고<안부를 묻는다>,<베란다라는 가명>,<자루>등은 현대인의 일상과 개인의 내면에 관한 묘사였다. 이는 이 분의 언어과 시각이 개인의 내면에만 폐쇄적으로 갇혀있지 않고 세상과 개인이 두루 열려 소통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김유미씨의 작품들 속에는 구름과 나무와 바람과 빗방울이라는 전형적인 자연의 이미지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를 현대사회의 일상으로 끌어와서 부박하거나 남루한 삶의 편린들을 신선한 감각으로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점들이 인상적이었다. 언어를 장황하게 소비하지 않고 절제하면서 시의 구조를 단단하게 구축한 점, 현실에 단단하게 발을 디디고 있으면서도 그 현실을 비교적 자유롭게 상상하고 해석하는 조곤조존한 어조도 읽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점이었다. 직장과 가정을 잃고 도시의 이곳저곳을 떠돌다‘육교’라는 지상에서 한 뼘 들려진 공간에서 만나는 이들을 감정과 감상에 치우치지 않는 차분한 어조로 풀어낸 <육교주점>, 아이와 대립하는 아침식탁의 엄마가 자신의 엄마를 불러내어 속 깊은 대화를 나누는<안부를 묻는다>, 고함과 흐느낌과 의자와 창문으로 벽을 쌓아올린 골목이라는 공간에서 이 벽들을 허물어버리는 상상을 하며 소멸과 확장에 관해 사유하는 <골목의 효능>같은 작품에서 개인과 사회를 보는 만만치 않은 안목들을 엿볼 수 있었던 점도 신뢰를 갖게 했다. 응모한 작품 10편의 수준 또한 고른 편이었고 그 시편들마다 인상적인 비유와 해석이 있었던 점도 좋았다. 선정된 시 외에도 ‘관계들은 깨물고 오므리고 감추고 펼쳐보는 손가락의 방향으로 걸려있다’, ‘자루 때문에 내 팔이 길어졌네’, ‘아이스크림 같고 불안 같고 오래 같은 세상의 모든 바람 속 계단’등의 발견들이 있는 다른 시편들은 대상의 표피를 너머 깊숙한 바닥까지 내려앉을 수 있는 시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투고한 시편들이 가진 완성도가 지나치게 안정적이어서 오래 시를 수련한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더불어 거칠지만 힘 있는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신인을 기다리는 <시와반시>의 바램을 충족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기우이기를 바란다. 이 분의 시에서 느껴지는 염결성, 즉 한 편 한 편의 시에서 느껴지는 삶을 진지하게 인식하고 사유하는 태도에 신뢰를 보낸다. 이런 점들이야 말로 혼탁한 세상을 견뎌내며 시를 쓰고자하는 시인이 가져야 할 최선의 마음가짐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모처럼 만만치 않은 시적 깊이를 가진 시인 한 분을 만나게 될거라는 예감을 가져본다. 모쪼록 묵묵히 시의 길을 수행하며 큰 정진을 가져오게 되기를 기대하며 마음으로 축하를 보내는 바이다.
- 심사위원: 김형술, 조말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