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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陽文化保存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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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동+......☜ 스크랩 대마도對馬島에서(2016. 6.9.-6.11.) / 오태동
금수산 오태동 추천 0 조회 96 17.07.29 17:15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대마도(對馬島)에서

 

 

201769일에서 11일까지 부산에서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를 다녀왔다.

3일간 머물며 한일 두 나라의 지정학적 관계를 생각해보았다.

서로 영향을 주고 영향을 주고,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역사의 아픔을 언제까지 가져가야 할 것인지,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도 고민의 하나였다.

 

부산에서 49.5km, 후쿠오카에서는 138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섬.

인구 32,500명 (2015년)면적은 708평방km(부속도서 포함).

1시간 10분의 뱃길, 일본의 섬이지만 오히려 한국에 가깝다.

사람들 생김도 같고 출입국관리며 세관에서부터 한국말 안내와 여기 저기 한글 안내문이 있어 잠깐 외국이라는 사실을 잊을 뻔 했다. 가까운 이웃이다.

 

이 섬은 89%가 산림이라 주로 산 아래 해안선을 따라 마을이 있다.

주민의 대부분이 옛날부터 산과 바다에 의존하며 살아왔다.

지금은 한국인들로 인한 관광수입이 이 지역 수입의 사분의 일 정도는 되는 모양이라고 가이드가 말한다.

 

일본의 신화에 의하면 신들이 일본 최초의 섬으로 만든 땅이다,

역사상 일본과 한국의 사이의 중계지로서 역할을 했다. 섬은 원래 하나였으나 중앙부의 아소만과 인공 수로(1672년) 오호나고시라는 운하를 만들어 상도(上島)와 하도(下島)로 나누었다. 서로 마주보는 암수의 말처럼 보인다하여 대마도(對馬島)라고 불렀다.

 

대마도와 한반도의 관계는 신라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고려시대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1,2차 정벌에 나섰던 곳이다.

조선 초에도 2차에 걸친 대마도 정벌이 있었다. 이후 조선의 통신사들이 찾아간 곳도 여기다.

 

대마도는 조선시대까지 줄곧 조선의 영토로 기록되어 왔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며 영향력이 약화되었고 구한말(1860년 이후)에 일본이 자기네 영토로 편입했다. 이승만정부 때 대마도 반환요구를 했으나 연합군 사령부의 저지로 무산되었다.

 

영토 분쟁의 여지는 남아있다 하지만 일본인이라며 그 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어떻게 하나? 지금 시대에 과거의 지도 한 장 들고 그 땅과 살고 있는 주민을 분리할 수 있을까?

 

삼일 간 그 다다미방에서 자며 그 댁 오바-(할머니)이 해주는 미소시루를 마시며 오사게와 오차를 즐겼다. 가능하면 역사의 굴레에 갇히지 않으려고 앞으로 살아갈 두 나라의 관계를 생각하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찍어온 사진이 몇 장 있어 펼쳐본다.


갈 때는 부산항에서 이즈하라 항까지 여객선으로 2시간 10분,  

올 때는 히타카츠항에서 부산항까지  1시간 10분의 거리에 두 나라가 있다.    


이즈하라 항구(바다를 깨끗이 지킵시다.)


조선통신사 대마도 초청 200주년 기념벽화

조선통신사는 1607년에 시작하여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외교사절로 방문했다.


이즈하라 시가지 중심에 흐르는 개울의 모습, 고기가 살고 있었다.  


수선사:백제 도래인(渡來人)이 세웠다는 수선사(修善寺)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가 있는 사찰이다. 

 

최익현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74세의 나이로 직접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다.

1906년 일본으로 압송되어 대마도에 감금되었고 일제가 주는 음식을 거절하고 단식을 하다 1906년 11월 17일 74세로 순국하셨고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 3일간 이 절에 모셔졌다.

1982년 선생을 기리는 한국인 황수영, 정영호씨등과 일부 일본인들의 뜻이 모아져 순국비를 세웠다.

 

 일본을 체험해보겠다며 온 한 젊은 한국여성을 '나카라이 토스이 기년관'에서 만났다.

 어차피 이웃으로 살아가야할 관계라면 보다 적극적으로 그들의 삶을 이해해보겠다는 거다.

 대단하다.



토스이 기념관의 서재


팔번궁신사(八幡宮,하치만구神社)

소위 삼한을 정벌했다는 신화속의 인물인 신공황후를 모신 신사이다


신에게 비는 소원을 적어서 걸어두었다.


이 신궁에서는 말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대마도와 관련이 있다.


천신신사(天神神社)

제신, 안덕천황(安德天皇), 관원도진공(菅原道眞公)


천신신사의 돌계단


"문화8,1811년도 조선통신사막부접우의 땅"

 역사적인 이 땅에 지금은 이즈하라에서 가장 큰 수퍼마켓 Red Cabbage가 서있다.


조선통신사의 비

통신사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선린우호를 위한 국가외교의 사절이며, 문화사절이기도 하였다.

때로 5백명에 이르는 使行은 그 행렬이 장렬했다. 외교적 목적외 학문과  예술을 전해 주었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

덕혜옹주는 고종과 양귀인 사이의 외동딸. 서녀라는 이유로 일본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 

1931년 5월 대마도주 소오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 1955년 이혼하였다. 1962년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에서 혼자살다가 1989년 76세에 돌아가셨다. 

비석은 한 때 뽑혀서 방치되었다가 2001년 현재의 자리에 복원되었다.  




일반 가정의 정원에 서 있는 개인 가미다나(사당).  

이 집에서는 고양이를 모시고 있다.


3일간 신세를 졌던 대마시청옆 민박집 두산(民宿 豆酸, 쓰쓰)

미소시루의 맛과 비올 때 선뜻 우산을 내준 오바상을 잊을 수 없다. 보기보다는 실내가 충실했다.


이 도시는 화재방지를 위해 개인 집의 울타리로 두꺼운 돌담을 많이 활용했다. 


가미자카 공원의 전망대






러일전쟁에 대비하여 마련된 포대였으나 실제로 사용한 바는 없었다고 한다.




당시 고려군사들이 몽고의 요구에 의해 앞장서면서 많은 죽음을 가져왔다고 한다.

그 사실은 적혀있지 않지만.



원나라와의 승리 700년을 기념한 비석

이 신사에선 당시에 죽은 일본인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신사 뒤 해변엔 몰려온 쓰레기를 주워서 분류해두었다. 



소무전빈신사(小茂田浜神社, 코모다하마진쟈),

일본에서 전몰군인을 모시는 신사로는 야스쿠니(靖國)신사(도쿄)와 코모다하마신사(대마도)뿐이다.


돌지붕: 이시야네(石屋根, 돌 지붕) 섬의 89%가 산림지역으로 식량의 자급자족이 불가능했던 쓰시마는 식량보존을 위해 바람과 화재, 그리고 습기에도 강한 고상식(高床式 : 기둥을 세워 바닥을 지면에서 높이 올려 설치하는 가구 구조)형태의 창고를 짓게 되었다.

평평한 돌(혈암頁岩)로 지붕을 이은 건축 형태는 쓰시마 시이네(추근椎根)지방에서만 볼 수 있다.






쓰쓰자키는 쓰시마 서남단에 위치하고, 대한해협 서수도와 동수도의 경계에 있다.

이 주변은 조류가 빨라지고 암초가 많아 예로부터 험한 항로로서 잘 알려져 있다.

 굴지의 어획장이다.  날씨가 좋으면 남남동 방향의 규슈본토를 볼 수 있습니다.



소나무 제선충이 와서 곳곳의 소나무들이 모두 말라 죽었다.



바다가 좋다.



먼저 다녀간 한국 사람들이 바위에 이름을 남겼네. 어디에서든지~


낚시꾼 여러분에게 이 부근 바다에는 공동어업권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어업조합원이외의 사람이 전복. 소라. 성게 등의 수산동식물을 채취하는 것은 금지입니다. 채취할 경우, 관계 법령에 의거 20만엔(약 200만원)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이 부근 해역은 자원보호의 일환으로 어협에서 치어 등을 방류하고 있으므로, 먹이를 뿌려 낚시하는 것은 금지한다.


아유모도시 자연공원(鮎점모도시 자연공원 : 은어가 돌아오는 자연공원, 銀魚의 回歸本能) 쓰시마의 남쪽 세가와강 유역을 포함한 다테라야마(龍良山) 원시림의 산기슭 약 26ha가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으로 정비되어 있다.

공원입구 세가와강(瀨川뇌천, 여울 뢰) 위에 걸쳐 있는 구름다리에서 강을 내려다보면 계곡 전체가 천연의 화강암으로 둘러싸인 웅대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아소우만(淺茅灣) 왜구의 소굴이었던 곳,

깊숙히 내해로 들어와 있고 해안선이 복잡하다. (리아스식 해안)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토요타마히메노미코토의 무덤과 당(堂)나무 (豊玉姬之墳墓)








일본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와 토요타마희매노미코토를 모시는 해궁으로 해신을 모시는 신사로는 가장 오래된 신사.

5개의 도리이가 바다를 향해 있으며 만조때에는 2M정도 바다에 잠기는데 일본 신사의 도리이로는 드물게 서쪽인 한국을 향하고 있다. 이 신사가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민박집 이웃 한 민간주택의 담장에서 예쁘게 핀 수국을 봅니다.

꽃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서로 만나면 세상이 좀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아침에 본 이즈하라 마을입니다.




1996년 7월 준공



주변의 해안선


한글로 번역해 놓은 게 어디서나 마음에 걸리니~







클래식카] 포드 100G의 설명 이 헨리포드차는 1905년에 제작되어 금년까지 108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이 車는 明治의 원훈 일본국 초대총리대신 이등방문이 죽기바로전까지 타고 다녔던 차량으로 일본에서 커다란 유품이라고 할 수 있다. 10년전까지 사용이 가능 했으나 어느날 갑자기 작동이 멈춰, 이등박문의 후손인 후쿠오카현 福津市에 소재 伊藤熊彦氏로 부터 양도받았던 것으로 대단한 보물입니다. 80만엔을 투자하였으나 작동되지 않아서 폐사는 여러분들에게 사진 촬영을 위해 여기에 전시하오니 즐기시길 바랍니다 社長 武末 聖子















朝鮮國譯官?從者殉難靈位(조선국역관병종자순난영위) 正譯 韓天錫 副譯 朴世亮 외 28인 기타 1703년 2월5일(음력) 殉難한 百十二位의 靈諱를 알지 못하여 1991년에 百十二個의 靈石으로 순난비를 건립하였다. 최근 "宗家文庫史料" 중에서 "渡海譯官?從者姓名"의 墨書小冊子가 발견되어 오늘 순난삼백주기를 맞이하는 날에 "조선국역관병종자순난영위"를 새겨 기리 追悼하고자 한다.





* 군데군데 답사에 함께 하셨던 권진순선배님의 글과 사진을 빌려오기도 했고 참고로 했습니다.

  선배님께 양해를 구하며 감사드립니다.

  뜻깊은 답사에 함께 했던 선배님과 후배님들께 다시 한 번 인사를 드립니다. 즐거웠습니다.

  (단양 금수산에서 / 2017년 7월 30일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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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7.07.29 18:12

    첫댓글 몇 군데 수정합니다.
    1)도입부분의 글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영향을 주고'는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고로'.
    2)사진 설명 중 고침: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토요타마히메의 무덤과 당(堂)나무 (豊玉姬之墳墓)"
    3)사진 설명 중 고침: "일본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히코호호데미와 토요타마희매를"

  • 17.07.31 08:57

    잘보았습니다. 자세한 설명도 좋았구요. 감사

  • 17.08.03 20:01

    너무잘봤읍니다...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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