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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집(玉垂集) 조면호(趙冕鎬)생년1803년(순조 3)몰년1887년(고종 24)자조경(藻卿)호옥수(玉垂), 이당(怡堂), 능계거사(菱溪居士), 삼연노인(三硏老人)본관임천(林川)특기사항김선(金䥧), 김정희(金正喜)의 문인. 박규수(朴珪壽), 신석우(申錫愚), 홍종응(洪鍾應) 등과 교유
玉垂先生集卷之十二 / 詩 / 雨中拉申用賓,金友濂。踰嶺到金季芝書所。得硯樓詩。今日能言詩一句分韻賦。
x申命觀 | 1674 | 1736 | 申始旭 | 平山 | 用賓, 用孚 |
和風歸蕙上。宛宛朱明臨。閒人善起居。雲日載晴陰。樂與數君子。振策陟崇岑。崇岑縱云勞。美景當千金。翛翛入林越。選聲多異禽。溪水自東西。激石響瑤琴。天然小茅茨。髣髴畫境尋。中有讀書子。俯仰得古今。
是我太丘家。季芝犀園先生孫玄史之子圖。
後來尙德音。瑟瑟玉而成。祈招式愔愔。促膝藹有喜。圖史且娛心。阮宣豈無錢。又可沽酒斟。神意忽以曠。放眺一快襟。樓臺富餘春。烟雨時淺深。懷哉孰與歸。余亦能高吟。
杞園集卷之十六 / 書 / 答申用賓 命觀
玉垂先生集卷之十三 / 詩○寶武山房藁存 小叙○戊辰 / 玄圃五峰歌
屬意于近詩社諸君金季芝綺秀,金友濂洛鎭,申用賓觀朝,徐殷卿相雨,洪致三晉裕。
고종 | 6 | 1869 | 기사 | 同治 | 8 | 67 | 12월, 再娶 茂松尹氏의 상을 당하다. |
고종 | 7 | 1868 | 무진 | 同治 | 7 | 66 | 寶武山房藁存 小叙○戊辰 |
我夢昨遊玄圃西。玉氣一上明月如。月之所射嶙峋碧。化作五峰高天齊。一峰混混蹲磅礴。往往彌綸烟霧噓。季芝。 又有一峰開面目。嵌竇橫皴忽扶踈。友濂。 又有一峰始嶻𡺼。得之亢爽屢曲折。用賓。 一峰欲撑天柱攲。蟠胚融融精神結。殷卿。 又有一峰玉芙蓉。倒挂蒼松翩虬龍。致三。 萬有皆有無不有。猉獜在左鳳凰右。窅然喪我我不知。彷徨問路得宛酉。異哉我夢非眞是其眞。擧手一揖來仙人。仙人謂我尙齷齪。三洗髓能返汝神。乃見五峰競秀相環抱。對此穆穆亦旼旼。九點齊烟生脚下。麻姑坐愁桑海塵。
1 | 徐孝源 | 1839 | 1897 | 挽詞[申觀朝] | 挽詞* | 申觀朝 | 石澗集 | |
2 | 張錫龍1 | 1823 | 1908 | 挽章[府使申觀朝] | 挽詞* | 申觀朝 | 遊軒集 |
玉垂先生集卷之二十一 / 詩 / 金友濂摺扇瓛齋書蹟。幷小叙。
瓛齋相國每誦圃隱先生聞韶樓六言詩。輒嗚咽不成聲。擊節感慨。情露語言之外。今瓛齋騎箕。邈若前塵。昨見金友濂。袖有一扇。扇寫此詩。乃瓛齋往年書也。冕覽讀。不覺淚涔霪承睫。遂成古軆一則。以示友濂。
瓛齋亟說圃隱公。公乎公生吾大東。於戱聖祖日星諭。英廟御製善竹橋碑。道德精忠亘萬古。泰山高節圃隱公。 道德精忠無比隆。眞傳理學關氣數。憬憬三段文在中。當時已斂黼黻手。後人誰測雲夢胸。珪昔持斧嶺外去。聞韶郡樓登怱怱。載拜敬讀壁祔字。四十八字光戎戎。公豈學作詩人事。蹇驢背上憂思忡。草色桃花眼 缺 到。紗薄酒濃情所窮。吾儕去公五百載。頑懦亦且聞下風。像公精魄歸何處。爲雲爲霧盤層穹。瓛所積有高山仰。乃可以得此折衷。冕亦甞於樓上讀。竹橋崧院屢鞠躬。瓛所仰者冕所仰。好是秉彜孰無同。惜也瓛且騎箕久。寥寥點犀何地通。今見友濂摺疊扇。瓛之在日留墨叢。知非嗜有塗鴉癖。他人便面不欲工。摩挲卷舒思復憶。死生一轍都夢夢。擧頭漠漠天更遠。碧簾修竹靈雨濛。此扇不是尋常好。願將此好要始終。
운양집 제6권 / 시(詩)○환조후시고(還朝後詩稿)
신열릉이 청송에 우거하는데 지금 82세로 기력이 아직 강건하여 우편으로 시를 부쳐 왔기에 차운하여 화답한다〔申洌陵寓居靑松年今八十二氣力尙强郵便寄詩次韻和之〕
관직 인연으로 동향에 집을 정했는데 / 桐鄕卜宅是官緣
물과 대나무 그윽한 동네에 자리하였네 / 水竹淸幽占洞天
건필의 먹빛은 젊은 날 그대로인데 / 健筆淋漓如少日
친지들 영락했으니 흘러간 세월 느끼네 / 親知零落感流年
언제쯤 촛불 심지 자르며 고금을 논하고 / 何當剪燭論今古
장차 술잔 들고 탁주 청주 즐길까 / 且可銜盃樂聖賢
천리 밖에서 우편으로 아름다운 시 부쳐주니 / 千里郵筒傳綺語
정신의 사귐은 본디 산천에 막히지 않는다오 / 神交元不隔山川
[주-D001] 신열릉(申洌陵) : 신관조(申觀朝, 1827~?)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용빈(用賓), 호는 열릉이다. 1865년(고종2) 식년시에서 진사 1등으로 급제하였다. 청송 부사(府使)를 지냈는데, 청렴하고 덕이 있어 선정을 폈다 한다. 청송의 산수를 좋아하여 은퇴 후 이곳에 살았으며, 문학과 덕망으로 고을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한다.[주-D002] 동향(桐鄕) : 옛날 수령의 은혜로운 정사를 잊지 못하고 있는 고을을 의미한다. 한(漢)나라 주읍(朱邑)이 젊었을 때 동향(桐鄕)의 관리로 있었는데, 동향에서 그를 못내 사모하자 죽어서 그곳에 장사 지냈던 고사가 있다. 《漢書 卷89 循吏傳 朱邑》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이지양 (역) | 2013
담정유고(藫庭遺藁) 김려(金鑢)생년1766년(영조 42)몰년1821년(순조 21)자사정(士精)호담정(藫庭), 담사(藫士), 담수(藫叟), 담옹(藫翁), 담원류자(藫園纍子), 한고류자(寒皐纍子), 귀현자(歸玄子), 해고(海皐)본관연안(延安)특기사항이옥(李鈺), 김조순(金祖淳) 등과 교유
藫庭遺藁卷之十 / 叢書題後 / 題石見樓詩卷卷後
李石見詩。亦近世之絶調。然余自㓜小時同鉛槧。熟知其淺深厚薄。盖石見涉躐多而硏究少。故其發而爲詩者。斤兩比犀園,竹莊諸公。有遜焉。此可與知者道。不可與不知者道。屐園李公序其詩曰。閑遠澹泊。天機淸妙。往往似玄暉門中語。淵泉洪成伯太史以爲王右丞,韋蘓州輩口中語。二公皆當世之鴻儒鉅匠。而其推詡如是。則石見之詩。不待疣說而可知其爲希世之寶。豈不盛哉。
이주황(李周璜)은 …… 있습니다 : 이주황이 1797년(정조21) 10월 자기 친척인 충청도 신창(新昌)에 사는 김신국(金信國)의 아들과 천안(天安)에 사는 김종억(金宗億) 집안 딸과의 혼사를 성사시키기 위해 김신국과 함께 천안에 갔다가 강이천(姜彝天)의 집에서 5일 동안 묵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바다의 섬에 진인(眞人)이 있다고 한 강이천의 주장과 강이천이 주문모(周文謨) 신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는데, 김신국이 자신의 사촌 김정국(金鼎國)을 통해 강이천을 고발하였다. 그 결과 그해 11월 강이천은 제주에, 강이천의 친구인 김려(金鑢)는 부령(富寧)에, 강이천의 제자인 김이백(金履白)은 흑산도에 정배되었다. 1801년(순조1) 3월 주문모 신부가 자수하여 강이천 등을 만난 사실을 진술했기 때문에, 강이천 등이 천주교와 관련이 있는지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주황 등도 추국을 받은 것이다. 《正祖實錄 21年 11月 12日》 《推案及鞫案 卷25 罪人姜彝天等推案》
강이천(姜彝天) : 강세황(姜世晃)의 손자로, 1779년(정조3) 12세 되던 해부터 임금의 총애를 받고 궁궐에 출입하면서 응제시(應製詩)를 지어 올렸다. 이기설(理氣說)을 토대로 하는 당시의 보편적 학문 성향을 탈피하고 고증학(考證學) 연구를 통하여 새로운 사실들을 구명(究明)하는 데 전념하여 전도가 촉망되었다. 1797년 바다의 섬에 진인이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주문모 신부와 관계를 맺은 혐의로 11월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어 1801년 신유사옥 때 천주교와 관련 있는지를 조사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던 중 3월 29일 물고(物故)를 당하였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 : //people.aks.ac.kr 검색일 : 2014. 1. 5.》 《推案及鞫案 卷25 罪人姜彝天等推案》
김건순(金建淳) : 원문은 ‘金健淳’인데, 《한국계행보(韓國系行譜)》 〈안동 김씨(安東金氏)〉와 한국문집총간 294집에 수록된 《대산집(臺山集)》 권10 〈족증조증소선생묘지명(族曾祖橧巢先生墓誌銘)〉 등에 의거하여 ‘健’을 ‘建’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김건순은 산림(山林) 김양행(金亮行)의 손자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입양되었다. 1797년(정조21) 8월 김려(金鑢)ㆍ김선(金䥧) 형제의 집에서 강이천(姜彝天)을 만난 뒤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여러 차례 만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801년(순조1) 3월 주문모 신부가 자수하여 김건순과 접촉한 사실을 자백하는 바람에, 국문을 받고 4월 20일 사형당하였다. 《推案及鞫案 卷25 罪人姜彝天等推案》
《관연록(觀燕錄)》은 1804년 동지사(冬至使)의 일행으로 중국의 북경에 다녀온 아산의 선비 김선민(金善民, 1772~1813)주-D001이 이듬해인 1805년에 정리한 대청 사행 기록이다.주-D002 현재 원본은 미국 의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원문을 일반에 서비스하고 있다.
《관연록》은 상하 2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권에는 1804년 10월 16일부터 그해 12월 30일까지 견문한 것을 기록하였고 하권에는 1805년 1월 1일부터 그해 3월 17일까지 보고 들은 바를 정리하였다. 그런 만큼 상권에는 행로의 여정과 세밑의 북경 풍경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고, 하권에는 본격적으로 유람한 북경의 진면목과 귀로의 여정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주-D003 5개월 남짓 진행된 대청 사행 경험 전반을 시간과 공간의 축 위에 견문과 감상을 얽어 놓는 사행 기록의 일반적인 형식〔日錄〕을 그대로 따르되, 여정과 견문을 주로 담은 산문과 감상을 주로 실은 한시를 적절히 배치하여 글 전체를 균형감 있게 구성하였다. 상권 첫머리에는 아우인 김선신(金善臣)주-D004이 쓴 두 편의 서문이 실려 있고,
하권 말미에는 벗 서원(犀園) 김선(金䥧, 1772~1833)주-D005이 쓴 짧은 발문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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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金䥧, 1772~1833)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 자는 사홍(士鴻), 호는 서원(犀園)이다. 담정(藫庭) 김려(金鑢, 1766~1821)의 아우이다. 1797년 강이천(姜彛天)의 비어사건(飛語事件)에 연루되고, 1801년 신유옥사 때 초산(楚山)에 유배되는 등 김려와 함께 많은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1820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지에 이르렀다. ‘담정 그룹’의 일원인 김선신, 이복현(李復鉉, 1767~1853) 등을 통하여 추사 김정희는 물론 추사 집안사람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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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연록 권하 / 1805년(순조5, 을축)
17일 맑음
고향에 돌아왔다.
문장은 이무기와 용처럼 정해진 형세가 없고 시는 철발(鐵撥)처럼 새로운 소리를 변주한다. 그것을 보면 아리땁고 구불구불하며 빙빙 돌고 어렴풋하며 깨끗하고 빼어나 푸른 규룡(虬龍)이 여의주를 희롱하고 옥사자(玉獅子)가 공을 던지는 것 같다. 그것을 들으면 뻥 뚫린 계곡과 드넓은 하늘에 옥소리가 진동하고 빠르게 움직여 짙은 안개에 북이 섞여 있고 자욱한 연기에 비파가 엉겨 있는 듯하다. 그래서 푸르면서도 황백색(黃白色)과 유황색(駵黃色 검은색과 노란색의 간색)을 띠는 것은 색상(色相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의 형상)이 미칠 바가 아님을 비로소 알았으니, 육수의(六銖衣)와 칠양(七襄 직녀가 짠 아름다운 비단)을 어찌 저울로 달고 자로 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노(魯)나라에 군자가 없다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것을 취했겠는가?영산법회(靈山法會)에서는 비록 비구니(比丘尼 여자 승려)와 우바이(優婆夷)라 할지라도 삼승(三乘)을 말하지 않는 이가 없다. 당 태위(黨太尉)의 가기(家妓)가 오히려 금박을 입힌 휘장을 기억한 것과 같은데, 부귀의 상(相)을 작은 마을의 미인이 어찌 얻을 수 있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하늘이 혜해(慧解)를 정하지 않고 영식(靈識)을 주지 않았다면, 또한 어찌 능히 동서(東序)를 보고도 놀라지 않고 지현(地縣)에 대해 듣고도 달려가지 않았겠는가? 정묘년(1807) 중춘(中春)에 서원(犀園)이 쓰다.
[주-D001] 철발(鐵撥) : 현악기를 연주할 때 사용하는 쇠로 만든 활〔撥〕을 말한다. 당나라 단안절(段安節)이 지은 《악부잡록(樂府雜錄)》 〈비파(琵琶)〉에 “개원 연간에 하회지(賀懷智)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악기를 돌로 조(槽 비파의 바탕나무)를 만들고 곤계(鵾雞)의 힘줄로 현(絃)을 만들어 쇠로 만든 활로 연주하였다.[開元中有賀懷智, 其樂器以石爲槽, 鵾雞筋作絃, 用鐵撥彈之.]”는 기록이 보인다.[주-D002] 육수의(六銖衣) : 불가의 용어로 수의(銖衣)라고도 하는데 도리천(忉利天)에서 입는 매우 가벼운 옷이다. 보통 선인(仙人)의 옷을 지칭할 때에도 사용된다. 수(銖)는 극소(極小)의 중량 단위로, 24수가 1냥(兩)이다.[주-D003] 노(魯)나라에 …… 취했겠는가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가 제자인 자천(子賤)을 군자답다고 칭찬하면서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러한 일을 취했겠는가?[魯無君子者, 斯焉取斯.]”라고 말한 데서 따온 것이다.[주-D004] 영산법회(靈山法會) :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던 때의 광경을 상징적으로 재현하는 의식이다.[주-D005] 우바이(優婆夷) : 불교에서 여자 신도를 말한다. 남자 신도는 이보새(伊蒲塞) 또는 우바새(優婆塞)라고 하며, 근사남(近事男), 근선남(近善男), 청신남(淸信男), 청신사(淸信士) 등으로 의역된다.[주-D006] 삼승(三乘) : 수레를 뜻하는 승(乘)은 불가에서 중생을 열반에 이르게 하는 부처의 교법으로 비유된다. 삼승(三乘)은 부처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능력에 따라 설한 세 가지 가르침, 즉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을 말한다.[주-D007] 당 태위(黨太尉)의 …… 같은데 : 당 태위는 중국 송나라 때 사람으로 태위(太尉) 벼슬을 지낸 당진(黨進)을 말한다. 일찍이 학사(學士)인 도곡(陶穀)이 당진의 집에서 가기(歌妓)를 데려온 뒤에 정도(定陶)를 지나다가 쌓인 눈을 떠서 차를 끓이며 “당 태위의 집에서는 응당 이런 것을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黨太尉家, 應不識此.]”라고 자랑하자, 그 가기가 “그분은 멋이 없는 분이시니, 어찌 이런 정경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금박을 입힌 따뜻한 휘장 아래서 제가 조금씩 술을 따르고 나직이 노래하면 양고(羊羔)라는 좋은 술을 마실 뿐이었습니다.[彼粗人也, 安有此景? 但能銷金煖帳下, 淺斟低唱, 飮羊羔美酒耳.]”라고 대답하니, 도곡이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고사가 전한다. 《녹창신화(綠窗新話)》 〈상강근사(湘江近事)〉에 보인다.[주-D008] 동서(東序) : 중국 하나라 때 태학(太學)으로 이곳에서 국로(國老)를 봉양하기도 하였다.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하후씨가 국로를 동서에서 봉양하였다.[夏后氏養國老於東序.]”는 구절이 보인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박은정 이홍식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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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犀園) 김선(金䥧, 1772~1833)주-D005이 쓴 짧은 발문이 실려 있다. 했는데 발문이미지가 생략되었다。
*관연록 권하 / 1805년(순조5, 을축)
17일 맑음
고향에 돌아왔다.
문장은 이무기와 용처럼 정해진 형세가 없고 。。。。。。정묘년(1807) 중춘(中春)에 서원(犀園)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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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집(玉垂集) 조면호(趙冕鎬)생년1803년(순조 3)몰년1887년(고종 24)자조경(藻卿)호옥수(玉垂), 이당(怡堂), 능계거사(菱溪居士), 삼연노인(三硏老人)본관임천(林川)특기사항김선(金䥧), 김정희(金正喜)의 문인. 박규수(朴珪壽), 신석우(申錫愚), 홍종응(洪鍾應) 등과 교유
玉垂先生集卷之十六 / 詩 / 感詩絶句 幷序
喟余生晩。猶及白社典型謦欬于諸老宿。頤頦纔竪。附尾同輩。極有生世之娛。今遅暮瓠落。烟霜禪而山河邈。每中夜寤歎。纏綿悱惻。繹其津筏之始。象其旗鼓之列。幷繫詩境。一同岑大。不可以不記也。遂有夐㴑之什。與元遺山,王漁洋論詩絶句。亦近時人懷人絶句一例語也。畧有開注。無忘前時偉迹。不以詩事詩論相關者不與焉。亦編序不以窮達尊卑。特尙其齒而已。讀之可詳。凡五十九首。壬申小重陽。玉垂冕鎬自題。時年七十。
고종 | 8 | 1871 | 신미 | 同治 | 10 | 69 | 4월, 신미양요가 발발하자 그 전 과정을 그린 〈後西事雜絶〉을 짓다. ○ 5월, 掌樂院 正이 되다. |
고종 | 9 | 1872 | 임신 | 同治 | 11 | 70 | 壬申小重陽。玉垂冕鎬自題。時年七十。 소중양(小重陽) : 중양절(重陽節)인 9월 9일의 다음날을 가리킨다. |
寅菴古軆得箕裘。漢魏門中眞力求。今日種蘭蒼雅色。倉山別檢又名流。寅盦金駿淵。犀園子也。得家庭學善詩。又喜作古軆。甞與余同居一屋。惜其早世。不得展可慨。其子綺秀號倉山。後來英秀也。方仕蔭塗爲別檢。可期碩果也。
玉垂先生集卷之一 / 詩 / 謝蘭人示寅庵 金駿淵,桐江 李壽民。
山家少事晝關扉。掃地焚香日午時。細雨江淸人去後。落花流水客來遲。沈疴煩悶排無計。中酒情懷料不知。聞道東陽消瘦盡。應憐何遜舊題詩。
향산집 제1권 / 시(詩) / 수신사 김 영 기수에게 주다〔贈修信使金令 綺秀〕
손으로다 부상 가지 꺾어 들고는 / 手折扶桑枝
해가 뜨는 나라 가는 사신 되었네 / 爲賓日出方
패궐에서 곱디고운 무지개 일어 / 文虹起貝闕
바다 파도 일렁이게 하지 않으리 / 不使海波揚
[주-D001] 김 영(金令) : 김기수(金綺秀, 1832~?)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지(季芝), 호는 창산(蒼山)이다. 서울 출신이며 김준연(金駿淵)의 아들이다. 1875년(고종12)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인 1876년에 수신사(修信使)로 임명되어 근대 대일 교섭(對日交涉)의 첫 사절이 되었다. 사절 단원 76인을 인솔하고 4월 4일 서울을 출발하여 5월 7일에 요코하마〔橫濱〕에 입항하고, 열차 편으로 도쿄(東京)에 도착하였다. 그 뒤 20일간 체류하면서 개화한 일본의 문물을 둘러보았다. 그의 일본 견문기는 《일동기유(日東記游)》, 《수신사일기(修信使日記)》에 나타나 있다. 이후 관직이 참판에 이르렀으며, 문명(文名)이 높았다.[주-D002] 수신사 …… 주다 : 《향산전서》 상(上) 권1에는 이 시가 2수 실려 있는데, 빠진 1수는 ‘玉水闡吾道 遺風大可觀 嗟余井見 徒切望洋歎’이다.[주-D003] 부상(扶桑) : 해가 뜨는 동쪽 바닷속에 있다는 전설상의 신목(神木) 이름이다. 여기서는 일본으로 사신을 가기 때문에 끌어다가 쓴 것이다.[주-D004] 패궐(貝闕) : 물의 신인 하백(河伯)이 사는 용궁(龍宮)을 가리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10
승정원일기 > 고종 > 고종 18년 신사 > 12월 28일 > 최종정보
고종 18년 신사(1881) 12월 28일(병술) 맑음
18-12-28[39] 2차 정사에서 정희섭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2차 정사를 하였다. 정희섭(丁喜燮)을 경모궁 영으로, 이교석(李敎奭)을 인의로 삼았다. 증 좌찬성 서유돈(徐有敦)에게 영의정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증 이조판서 서무수(徐懋修)에게 좌찬성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우의정 서당보(徐堂輔)의 양대(兩代)이다. 증 이조참판 김우현(金宇鉉)에게 이조 판서와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증 이조참의 김재원(金在源)에게 이조 참판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증 사복시정 김두추(金斗秋)에게 이조 참의를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형조 판서 김영수(金永壽)의 3대이다. 고 통덕랑 김준연(金駿淵)에게 이조 참판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고 대사성 김선(金䥧)에게 부제학을 추증하고, 고 현령 김재칠(金載七)에게 사복시 정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형조 참판 김기수(金綺秀)의 3대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안정 (역) | 1998
미산집 제7권 / 서(序) / 곡산 부사로 가는 김계지에게 주는 서문〔贈金季芝宰谷山序〕
처음은 어렵지만 뒤에 쉬운 일은 쉬운 것이고, 처음은 쉽지만 뒤에 어려운 일은 어려운 것이다. 부절(符節) 하나를 잡고 깊은 바다를 건너 만 리길 속을 알 수 없는 오랑캐와 교통하는 것과, 높은 수레를 타고 무거운 봉록을 먹으며 가만히 앉아 한 고을의 사람들을 부리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험한가? 공자는 ‘사방에 사신 가서 군주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을 칭찬하였고, 한 무제(漢武帝)는 조서를 내려 절역(絶域)으로 사신갈 수 있는 자를 구하였으니, 선비가 벼슬함에 예로부터 전대(專對)하는 일을 어렵게 여겼다. 계지(季芝)는 그 어려운 일을 쉽게 하였으니, 그 나머지 일도 패연(沛然)하여 막힘이 없으리라. 그러나 이웃 나라와 잘 지내는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함에 있고 소부(疏附)는 분주(奔奏)보다 앞서니 아랫사람의 정을 윗사람에게 전달하고 윗사람의 은혜를 아랫사람에게 이르게 하는 것은 오직 관리의 일만이 그러하니 도리어 중요하지 아니한가! 금년엔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았고 서리도 일찍 내려 사방에 먹을 것이 없어서 백성들이 바야흐로 신음하는데, 자애롭게 어루만지고 요역과 세금을 재촉하며, 장리(長吏)를 질책하는 모든 일들이 계지에게 모이니 수고롭지 않겠는가?
계지가 조정에 벼슬한 지 겨우 몇 년인데, 한 번 나가자 남녘의 백성들이 그의 청렴함을 칭송하였고 두 번 나가자 서쪽 지방의 선비들이 그의 공정함에 탄복하였으며, 세 번나가자 이웃 나라가 그에게 신뢰를 품었다. 재주가 완비된 자는 가는 곳마다 이롭지 않음이 없으니, 백리되는 땅을 다스리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지난 번 내가 경사에 가서 해외로 사신 나가는 계지를 송별하며 ‘돛단배에 부는 바람이 오두미(五斗米)보다 상쾌하다’라고 말했을 때, 계지는 수긍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나의 수고로움을 알 것이다. 나는 공무에 매여서 관외(關外)에 머무느라 계지가 일을 마치고 돌아왔는데도 수개월 동안 만나지 못하였다. 이제 외직으로 나가 상산(象山 황해도 곡산군의 별칭)을 다스린다고 들었으나 또 도성 문에서 전별하지 못하기에, 슬퍼하며 이 말을 써서 멀리서 이별을 한다.
[주-D001] 김계지(金季芝) : 김기수(金綺秀, 1832~?)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지(季芝), 호는 창산(蒼山)이다. 준연(駿淵)의 아들이다. 1875년(고종12)에 현감으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응교에 오르고, 이듬해인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후 예조 참의로 수신사에 임명되니 근대 대일 교섭의 첫 사절이 되었다. 1877년 황해도 곡산 부사(谷山府使), 1879년 덕원 부사(德源府使), 1881년 대사성, 1883년 감리의주통상사무(監理義州通商事務) 등을 역임하고, 1893년에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나갔을 때 황간(黃澗)ㆍ청풍(淸風)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되었다. 이후 관직이 참판에 이르렀으며 문명이 높았다.[주-D002] 공자는 …… 칭찬하였고 : 공자가 “몸가짐에 부끄러움이 있으며 사방에 사신으로 가서는 군주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선비라 이를 만하다.〔行己有恥, 使於四方, 不辱君命, 可謂士矣.〕”라고 하였다. 《論語 子路》[주-D003] 전대(專對) : 타국에 사신 가서 외교 관련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공자가 “《시경》 삼백 편을 외더라도 정사를 맡겨 줌에 제대로 하지 못하며, 사방으로 사신을 가서 독단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비록 시를 많이 왼들 어디에 쓰겠는가?〔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亦奚以爲?〕”라고 하였다. 《論語 子路》[주-D004] 소부(疏附)는 분주(奔奏)보다 앞서니 : ‘소부(疏附)’는 아랫사람을 거느려 윗사람을 친애함을 말하고, ‘분주(奔奏)’는 덕으로 효유하고 명예를 펴는 것을 말한다. 곧 지방관으로서의 일이 위정자의 덕을 밖으로 펴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시경》 〈면(綿)〉에 “우(虞), 예(芮)가 분쟁을 질정하러 오거늘, 문왕이 그 흥기할 세를 동하시니, 내 말하기를 소부(疏附)하는 자가 있으며, 내 말하기를 선후(先後)하는 자가 있으며, 내 말하기를 분주(奔奏)하는 자가 있으며, 내 말하기를 어모(禦侮)하는 자가 있다.〔虞ㆍ芮質厥成, 文王蹶厥生, 予曰有䟽附, 予曰有先後, 予曰有奔奏, 予曰有禦侮.〕”라고 하였다.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백승철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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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의 블로그석견루시초石見樓詩鈔 128
今日석견루시초 읽기. 오늘408 今日 (금일)
오늘 환갑 맞은 이 몸이 지난날엔 한 살배기였지 今日六甲子(금일육갑자) 昔日一歲兒(석일일세아)
지난날엔 말도 할 줄 몰랐는데 오늘은 시를 지을 줄 아네 昔日未學語(석일미학어) 今日能言詩(금일능언시)
[역주] 408. 오늘 : 저자가 61세 때인 1827년(순조27)에 지은 시이다.
석견루시초 : 石見樓詩鈔
원서명 石見樓詩鈔
저/편자 이복현 (李復鉉 , 1767 ~ 1853) 지음
저작시기 18~19 세기
분류사항 집부(集部) 시문평류(詩文評類)
번역대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역자 조창록 (曺蒼錄 , 1967 ~ )
이성민 (李聖敏 , 1970 ~ )
김채식 (金菜植 , 1967 ~ )
이상아 (李霜芽 , 1967 ~ )
해제작성 안대회(安大會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색인/탈초작성
번역주관기관 성균관대학교출판부
발행지 서울
발행처 성균관대학교출판부
발행년도 2019
초판발행년도 2019
형태사항 30, 610 p. ; 24 cm
ISBN 979-11-5550-328-7 94340
총서사항
번역형태 완역
원문수록방식 조판원문
판형 신국판 (225×152)
번역문형태 한자병기
번역서본문(면) 600
원문(면)
주석(개) 1,213
기타 일러두기, 차례, 해제(석견루 이복현(李復鉉)의 시 세계), 감사의 말씀, 찾아보기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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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4
해제_석견루(石見樓) 이복현(李復鉉)의 시 세계[안대회]-5
석견루시초
서序
석견루시집 서문 石見樓詩集序[홍석주 洪奭周]-1
[홍석주 洪奭周]-3
석견루시집 서문 石見樓詩集序[이만수 李晩秀]-5
발跋
석견루집 발문 石見樓集跋[김이도 金履度]-8
[김려 金鑢]-10
[김선 金䥧]-12
[이익회 李翊會]-14
[이익회 李翊會]-18
[서영보 徐榮輔]-20
[신위 申緯]-21
[신위 申緯]-23
[김유근 金逌根]-24
[이낙수 李洛秀]-25
[이지연 李止淵]-27
[김정희 金正喜]-28
석견 노인의 60세 자서전 老石六十\叟自傳[이복현 李復鉉]-32
시권의 끝에 쓰다 書詩卷末[이복현 李復鉉]-33
극원유고(屐園遺稿) 이만수(李晩秀)생년1752년(영조 28)몰년1820년(순조 20)자성중(成仲)호극원(屐園), 극옹(屐翁), 서소주인(書巢主人)본관연안(延安)시호문헌(文獻)특기사항김재찬(金載瓚), 남공철(南公轍) 등과 교유
屐園遺稿卷之一○原集 / 詩 / 和呈石見樓 景慕宮令李復鉉
盛什諷讀累過。蒼欝得之杜韓。閒遠出自韋柳。必自有一副性情。是豈襲以取之哉。莊周氏曰嗜欲深者天機淺。公於嗜欲殆遠矣夫。昨夜扶老暫看橋月。轉由宮門前路。想寒齋雪牎。松影入坐。有何佳句否。謹和霜落江楓赤。聊寄情素。
曩屈王人問。那期野老居。相逢元素契。留話得窮廬。骯髒烏紗
。闌珊皓髮踈。無人識樓集。玄草子雲如。
여유당전서(定本 與猶堂全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
次韻李淸風(復鉉)秋日相過之作 | 1832년 가을 | 李復鉉(石見, 老石, 原字 見心, 1818년 무렵 淸風府使) | 규장각본 권18 | 申綽, 〈答李淸風復鉉〉/洪顯周, 《海居齋詩抄》 권3 〈拈放翁韻與石見〉 |
송애집(松崖集) 김경여(金慶餘)생년1596년(선조 29)몰년1653년(효종 4)자유선(由善)호송애(松崖)본관경주(慶州)시호문정(文貞)특기사항김장생(金長生)의 문인.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과 교유
松崖先生文集卷之六 / 附錄[二] / 賜祭文 純祖朝 [知製敎安策製]
維崇禎百八十九年歲次丙子六月三日。國王遣淸風府使李復鉉。致祭于副提學贈領議政文貞公金慶餘之靈。惟靈。天佑大東。篤生儒賢。文敬高弟。寧陵盡臣。有松特挺。歲寒之操。有崖壁立。千仞之標。藉手事君。文章經術。孝源百行。淸勵一節。鶴立群鷄。蘭茁衆卉。平生資用。一部陽秋。逮在圍城。國步蒼黃。受命督戰。雪涕誓衆。孤城力竭。一劍忠仗。時哉罔極。天地震盪。與其志屈。無寧身退。湖海滔滔。萬折東注。甘旨怡愉。德隣切磋。卿有勁膝。不屨虜庭。郵館恩勘。匪罪伊榮。皓髮入覲。時維涒灘。爲舊服素。於禮卽然。沐浴而告。言可質神。義不尊秦。忍書僞號。薇採首陽。菊寫栗里。孝廟嗣服。薪膽卽事。俾野無遺。起我群哲。垂拱初載。茹連茅拔。卿在其間。幄籌密勿。忍痛含冤。生不如死。鞠躬盡瘁。國耳忘家。琅函屢罄。玉音如響。陰雨湖藩。烈士氣增。耿耿如結。齎志不伸。臨簀草疏。義直辭懇。疇與同歸。石室華陽。無地可讀。下泉匪風。槩卿平生。維孝維忠。的其淵源。扶我綱常。舊甲重回。緬焉增愴。世降人遠。大義誰講。伻官致侑。英考是述。酒淸肴腆。靈庶鑑格。
松崖先生文集卷之五 / 附錄[一] / 松崖先生年譜
丙子一百八十九年。純祖成孝大王十六年
六月。遣禮官致祭。
禮曹佐郞代。淸風府使李復鉉。大祝兼典祀官。靑山縣監任照。諸執事。永同縣監元錫玄。燕岐縣監李百膺。懷仁縣監李在謙。都預差。恩津縣監柳仁根。◑七代孫尙義。除齋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