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창문 외 1편
김상미
나는 어제의 사람.
어제의 여자, 어제의 사랑.
모든 내일의 그림들을 끌어 모아
어제의 벽에 붙이는 사람.
언제나 어제 속에만 기거하는 사람.
함께 노는 사람들도, 시도, 음악도, 놀이터도, 책도
모든 게 다 어제의 것들뿐.
아무리 오늘의 태양 아래 나를 발가벗겨 세워 놓아도
나를 비추는 건 오늘의 태양이 아니라 어제의 남은 빛들.
어제의 꿈, 어제의 이야기들.
나는 내일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피투성이 암흑 속을 걷고 또 걸어
오늘의 수돗물에 피 묻은 몸을 씻고
어제의 꿈들로 내 몸을 소독하는 사람.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내일의 열렬한 정사(情事)에도
오늘 불붙어 타오르는 열정에도
누군가의 뜨겁고 지독한 훈수에도 상관없이
묵묵히 피투성이 암흑 속을 걷고 또 걸어서 어제로 가는 사람.
가고 또 가도 그 길이 그 길이고
세상 최악의 불청객인 내일의 빛들이
불타는 내 희망 속에 숨죽인 꿈들을 산산조각 내어도
나는 그냥 어제처럼 왈츠나 추며
쓰러진 자들은 손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고
목마른 자들에겐 내 피를 마시게 해주고
벌벌 떠는 자들에겐 내 외투를 벗어주고
길 잃은 자들에겐 친절한 길을 가리켜주며
계속되는 4분의 3박자의 그 리듬 속에서
그 리듬이 열어 보이는 새 봄과 푸른 꽃으로 뒤덮인 초원과
목숨이 아홉 개인 길고양이들이 몇 백 년 된 탄식의 나무 위에서
어제의, 어제의, 어제의 숙녀들처럼 환히 웃는 걸 바라볼 거야.
한껏 몸을 부풀리며 스텝을 밟으면서.
내일의 피투성이 문명은 죽은 자들의 뼈 위에서 끊임없이 세워질 테고
오늘의 피투성이 사랑은 그것을 토해낸 자들의 입술 위에서 다시 태어날 테니
나는 그저 어제의 그 리듬대로 왈츠나 출 거야.
검은 시간의 유리잔 안에 들어 있는 죄 많은 모래 알갱이들이
날마다 ‘내일’이라는 환상을 퍼 올리다 주저앉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하염없이 쏟아지는 걸 바라보며.
어차피 내일이란 뼛속까지 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
그들과 상관없이 나는 어제로 가는 사람.
언제나 가파른 어제의 층계를 오르내리며
이 세상 모든 지나간 꿈들을 모아 왈츠를 추는 사람.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그대들이 가차 없이 닫아버린 어제의 창문.
다시 한 번
- 성묘 가는 길
엄마, 내일은 엄마에게로 갈 거야.
애야, 무슨 말인지 다시 한 번 말해주겠니?
내가 그쪽으로 갈 거야.
애야, 무슨 말인지 다시 한 번 말해주겠니?
엄마가 없는 도시는 너무 쓸쓸하고 캄캄해.
애야, 무슨 말인지 다시 한 번 말해주겠니?
이곳엔 온통 연인들뿐이고, 부부들뿐이고, 형제자매들뿐이야.
한 사람은 크고, 한 사람은 작아서, 어디에, 어느 기준에
내 키를 맞춰야 할지 도통 모르겠어. 너무 힘들어.
애야, 무슨 말인지 다시 한 번 말해주겠니?
바다가 보고 싶어. 파도치는 백사장에서 엄마를 꼭 끌어안고 싶어.
애야, 무슨 말인지 다시 한 번 말해주겠니?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모든 것이 다 젖었는데
내 마음에 뜬 별들과 달빛은 젖지 않았어.
애야, 무슨 말인지 다시 한 번 말해주겠니?
엄마를 회상하는 내 마음속엔 언제나 별들이 반짝이고, 달빛이 환해.
애야, 무슨 말인지 다시 한 번 말해주겠니?
엄마에게로 가려고 가방을 싸고 있어. 기차표도 예약했어.
애야, 무슨 말인지 다시 한 번 말해주겠니?
엄마는 내게로 올 수 없으니 내가 그쪽으로 갈게.
바다로 갈 배표도 사놓았어.
애야, 무슨 말인지 다시 한 번 말해주겠니?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은 엄마가 좋아한 말.
엄마가 그리울 때마다 그 단어를 떠올려.
거짓말 같은 그 단어,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애야, 무슨 말인지 다시 한 번 말해주겠니?
이제는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는 엄마의 그 말.
아무것도,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는 미안함에
짐짓 잘못 들은 척, 다시 묻고 또 묻으며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으로 아프게 시간을 끌던 엄마.
내일은 정말 엄마에게로 갈 거야. 꼭 갈 거야.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는 엄마의 무덤 앞에서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모든 걸 다 내려놓을 거야.
엄마도 나도 좋아한 별빛들이 달빛들이 무덤 위로
환하게 쏟아지는 걸 바라볼 거야.
영원처럼 허무처럼 부질없는 인간사처럼.
그러니 엄마, 다시 한 번 나를 안아줘.
애야, 애야, 네가 왔구나.
그리운 네가 내게로 왔구나.
그렇게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말해줘.
이곳은 너무 춥고, 쓸쓸해.
힘껏 껴안을 게 하나도 보이지 않아.
엄마에게로 달려갈, 다시 한 번 달려갈
눈물 나는 회상의 길 외에는.
김상미
1957년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 여름호로 등단.
시집으로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외 3권.
박인환 문학상, 시와표현 작품상, 지리산문학상, 전봉건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