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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암 박태준 기념관
[2] 기장문화예절학교
▣ 2025,4,12. 방문기념.
🇰🇷 학정 작성
▪️100/100
[1] 청암 박태준 기념관
*️⃣ 위치 :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해변
봄맞이 , 씀바귀 외
*️⃣ 기념과 방문을 기뻐하며, 기념관 주변의 봄꽃들도 쪼쫏이(자세히. 제주방언)살폈다.😄
방문자
민들레
병아리꽃
부산시 기장군 지도
*️⃣ 박태준 선생의 아호 청암은 호암 이병철 선생이 지어줌. (이병철은 17세 선배)
▪️대기업 선배이며, 연세가 17년 연상이며, 와세다대학 선배이기도 한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포철을 방문하여,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힘차게 나아가는 박태준 회장님을 형제 대하듯 친밀감을 가지고 격려하였다.
자신의 아호가 호암(湖巖)이듯이, 청암(靑巖)이라는 아호를 주었으며. 박회장은 기꺼이 받았다.
기념관 정문
*️⃣ 2015년 박성빈 유족대표가 기념관 터 (생가 터) 기부로 기념관이 조성됨.
*️⃣ 기념관은 외관이 웅장하지도 않고, 미관이 화려하지도 않고, 소박하다. 선생의 청렴검소했던 성품과 닮아 있었다. 외벽도 제철보국의 정신을 상징하여 철벽이다.
수정원(물의 정원)
*️⃣ 개잎갈나무(히말라야시다, 설송)
포스코기업 社木
수정원, 물의 정원
해국 햇순이 자란다.
해국은 가을에 이렇게 꽃 핀다.
*️⃣ 2021년에 기장군수가 기념식수했으니, 이 즈음 완공됐나보다.
* 기장군이 2011년 건립사업을 추진
2021. 12.14. 정식 개관
생가는 개인 사유재산으로 출입 불가, 그 생가 옆에 기념관 조성
소장 유물 1,200점
철의 제왕 상징, 좌석도 철광석인듯.
*️⃣ 관람은 무료이고, 매주 월요일은 휴관.
▪️ 생애, 2027~2011, 향년 84세
🟫 박태준 약력
▪️1927.9.29.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출생
▪️1933. 6세때 부친 따라 일본에 감
▪️1945. 18세로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 입학
▪️1948.7. 21세, 육군사관학교 제6기 졸업
▪️1950. 23세, 한국전쟁 참전,충무무공훈장,화랑무공훈장 등 4개 무공훈장
▪️1954. 27세, 육군대학 수석 졸업, 국방대학 책임교수, 국방부 인사과장
▪️1963.12. 36세, 육군소장 예편
▪️1964. 37세, 대한중석광업주 사장
▪️1968.4. 41세, 포항종합제철주 대표이사 사장
▪️1973. 46세, 제1고로 첫 출선 성공
▪️1981.2. 54세, 포항종합제철주 대표이사 회장
▪️1981.3. 54세, 국회의원 제11대(계속 13대, 14대, 15대)
▪️1985. 58세, 포항공과대학교 개교
▪️1987. 60세, 베서머 금상수상(영국 금속학회), 철강계 노벨상 같음.
▪️1992.10. 65세. 포항종합제철주 명예회장
▪️2000.1. 73세, 국무총리
▪️2001. 74세, 포스코명예회장
▪️2011.12.13. 향년 84세, 별세
▪️2012.6. 철강명예의 전당 등재(미국).
🟫 기념비
전쟁터에서는 용맹한 장수. 일터에서는 기적의 경영인, 나라에서는 큰 정치인으로 이 시대 머릿돌이 되시니
무쇠를 녹이는 열정이 천년의 가난을 쫓고 불에 달군 강철의 의지가 만년의 번영을 열었도다.
우리가 지금 높은 베개를 베고 잠 들 수 있는 것은 철의 공장에 쏟은 님의 피와 땀이 있었음이여.
품에 아이를 안고 사람마다 내일의 꿈을 키우는 것은 학교를 세워 지식의 텃밭을 넓히신 님의 덕이었나니.
나라가 가정을 지킨 한 어버이의 사랑에서 시작되고 천지가 마을을 잇는 한 이웃의 정에서 열리게 된 것을.
님을 따르고 또 배우니 비로소 알겠노라 큰 강물이 잔 하나 띠우는 샘물에서 흘러온 것을.
이제 님은 가는 자의 영광이요 오는 자의 희망이시니 누구나 한 핏줄이 되어 영생의 향불 앞에 서노라.
2012.6.26.
이어령 글을 짓고
조수호 쓰다
청암기념관을 찾아서
이재익
달음산 암봉 올라서 바라보는 동해바다
고리 원전과 임랑해수욕장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저 곳에
한 영웅 소년이 태어났으니,
수평선 연두빛, 구름도 푸르고
무서운 물보라가 바위를 치는데,
큰 배는 유유히 격랑을 헤치고 나아간다
굳센 의지, 신앙은 철, 제철보국(製鐵報國)이다
전쟁, 기업, 정치 다 이겨냈으나,
영일만 모래밭과 싸우며,
폐에 쌓인 규사를 오히려 감사하며,
마지막 집 한 채도 기부하고 빈손으로 갔다
우린 지금 선각자를 잊는 망각의 늪에서
조국을 바로 보지 못하는 시련을 겪는다
임들의 자취 더듬고, 절망하지 않는다면
씩씩하고 아름다운 노래 다시 부르리라.
달음산 암봉 올라서 바라보는 동해바다
고리 원전과 임랑해수욕장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저 곳에
한 영웅 소년이 태어났으니,
수평선 연두빛 구름도 푸르고
무서운 물보라가 바위를 치는데,
큰 배는 유유히 격랑을 헤치고 나아간다
굳센 의지, 신앙은 철, 제철보국(製鐵報國)이다
*️⃣ 철강계의 노벨상 베서머금상 수상
(1987)
▪️영국 금속학회에서 매년 수여하고 있다.
▪️대표적인 수여자로 19세기 철강황제라 불리는 엔드류 카네기가 있다.
▪️청암은 1987년 현직 철강인으로는 세계 최초로 베서머 금상을 수상하였다.
🟫 쇳물은 멈추지않는다. 기획전시
製鐵報國정신
*️⃣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출생
1927.9.29.출생
*️⃣ 건설노동자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감. 1933년 경, 6세때. 학창시절은 일본에서 보냄.
*️⃣ 일본에서 학창시절, 유도 운동, 강인한 체력을 키웠다.
초중고,대학 학창시절을 다 일본에서 보냈다.
왜 놈들 나하고 붙어 볼테야?
당당한 힘으로 맞섰다.
*️⃣ 먼저 대한중석 사장이 되어 개혁하고 나서 포항제철을 건설함.
*️⃣ 1968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창업식/ 제철소 착공은 2년 후 1970년.4월. 1일
*️⃣ KISA도 거부, 세계은행(IBRD)도 차관 거부
*️⃣ 1969.12.3. 대일청구권기금 일부 사용. 한일기본협약 체결.
*️⃣ 사원들에게 다그친 말씀
"우리 선조들 피의 대가인 대일청구권자금으로 짓는 제철소요. 실패하면 역사와 국민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 모두 저 영일만에 몸을 던저야할 것이오."
*️⃣ 1973.6.9. 첫 쇳물이 흘러나왔다.
만세를 부르는 감격
🟫 우리는 후세 위해 희생하는세대
▪️2011년 9월 19일 포스코 한마당체육관 입구로 청암이 들어섰다. 과거 함께 근무했던 현장 근로자 400여명과 만났다. 호랑이 같은 모습을 보이던 청암은 체육관 단상 위에서 입가를 떨더니 눈가에 눈물을 맺은 채 말했다.
"미안합니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버린 직원들은 이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청암은 이어 말했다.
"여러분 뵈니까 눈물부터 나옵니다.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중략) 우리가 영일만 모래벌판에서 청춘을 보내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없지만 우리는 후세들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 희생하는 세대였습니다. 대한민국이 눈부신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동력은 여러분의 피땀이었습니다."
🟫 막장탄부처럼 살다갔다. ⬆️
▪️'철의 사나이'로 불린 박태준은 2001년 물혹 제거 수술을 받았다. 3.2kg의 물혹은 실제로 모래의 주성분인 규사 덩어리였다.
▪️5년 뒤인 2006년, 또다시 병상에 누운 박태준은 일흔아홉의 나이에 다시 통증 제거 시술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다시 5년 뒤인 2011년 11월, 청암은 아예 왼쪽 폐를 제거하는 수술을 9시간에 걸쳐 받았다. 병명은 '흉막섬유종'으로, 이때에도 폐에서 규사 성분이 검출되었다.
"잠깐 입원해 치료받으면 좋아질 거야." 그렇게 말하며 수술대에 올랐던 청암은 이번엔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그해 12월 13일 별세했다. 그의 나이 84세였다.
▪️청암과 가까웠던 소설가 조정래는 "그의 폐에서 나온 규사는 포항제철을 건설할 때 마셨던 모래 먼지 때문"이라며 "그는 대한민국을 위해 막장의 탄부처럼 살다 가셨다"라며 안타까워했다.
1989년 레지옹도뇌르훈장 수훈(프랑스 정부)
🟫 레지옹 도뇌르 훈장(1989.12.12.) ⬆️
▪️"귀하의 여러 경력에서 드러나는 것은 한마디로 '한국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한국 정부가 군대를 필요로 했을 때 귀하께서는 장교였습니다.
한국이 현대 경제를 건설하기 위해 기업인을 찾았을 때 귀하께서는 기업인이 되셨습니다.
대한민국이 미래의 비전을 필요로 할 때 귀하께서는 정치인이 되셨습니다."
ㅡ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축사 중에서
▪️프랑스 정부로부터 받은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 는 매우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만 수여되는 권위 있는 훈장이다.
🟫 철의 오케스트라 ⬆️
▪️사진 ; 개척독신료 점검(1969.7.3.)
▪️청암은 군 지휘관의 지휘봉을 늘 손에 들고 다녔다. 포항제철을 방문한 외국 회장들이 군 지휘봉을 언급하자 청암은 '오케스트라 지휘봉' 이라고 응수했다.
▪️각각의 다른 악기가 지휘자의 지휘로 혼연일체가될 때 아름다운 곡이 나오는 것처럼 청암은 포항제철 경영을 오케스트라 지휘자에 비유했다.
▪️"포항제철은 종합제철소입니다. 한마디로 철의 오케스트라 입니다. 저는 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서 지휘봉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기계가 고유의 기능을 가진 것처럼 수천 명의 종업원 개인마다 특성이 있으므로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 기계를 효과적으로 조화시키기 워해 지휘봉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 저의 신앙은 鐵입니다. ⬆️
▪️사진; 크레인 위에서 청암(1972.4.2.)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와세다 대학교 선배,경제계 선배로서 청암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이병철 회장이 청암을 만나 나눈 얘기가 있다.
여보, 박 사장! 당신의 신앙은 무어요?'
"네, 저의 신앙은 철(鐵)입니다."
이병철 회장은 청암의 대답을 듣고 참으로 아쉬워했다고 한다.
"저런 사람이 우리 삼성을 이끌어야 하는데..., 박태준이 철을 신앙으로 알고 일하듯이 삼성을 신앙처럼 알고 헌신할 인재가 없을까?"
▪️그 후 이병철 회장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과묵하고 선이 굵으며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청암에 대한 얘기를 자주 하였다고 한다.
🟫 덩샤오핑 "박태준을 수입하면 되겠군요"
▪️사진 ; 건설현장 점검(1984.5.23.) ⬆️
▪️포철 3기 준공식이 있던 1978년, 청암은 은인들을 초대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신일본제철의 이나야마 회장을 불렀는데, 축하 분위기 속 묘한 말을 건네었다.
"박 사장, 중국에 납치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이나야마 회장은 덩샤오핑이 신일본제철을 방문한 이야기를 꺼내며 당시 포철 이야기를 꺼내더니 중국에도 포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전했다.
▪️이나야마 회장이 중국에는 박태준 회장과 같은 인물이 없어 포철을 지을 수 없다고 말하자, 덩샤오핑이 "그러면 박태준을 수입하면 되겠군요."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청암은 이에 대해 "조국이 나를 버려도 나는 조국을 버릴 수 없어!'라는 말을 남겼다.
🟫 김호길 초대총장과 청암(1985.8.17.)
⬆️
▪️청암은 '기업은 사람이다'라는 신념으로 인재 양성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대학 설립 추진팀이 업무를 진행할 무렵, 청암은 포항공대(포스텍)의 모델로 칼텍(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을 점찍은 상태였다. 연구 중심 대학에다, 산학연 협조 체제가 모범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모델도 찾았고 대학 설립을 전담할 조직도 갖췄으니, 다음은 유능한 초대 총장을 구할 차례였다. 마침,한 인물이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김호길 박사. 미국 메릴랜드 물리학과 교수. 전자고리가속기 권위자.
청암은 일단 김박사를 포항으로 모셔 오게 했다.
▪️"만약 내가 총장을 맡으면 포철 소속 포항공대가 아니라 포항공대 부설 포철이 될 텐데 괜찮겠느냐."
김박사는 조건을 내걸었고, 청암은 흔쾌히 승낙했다. 포항공과대학은 그렇게 1986년 12월 총 9개 학과 249명의 신입생을 시작으로 개교하였다.
🟫 포항공과대학 방문(1989.5.1.) ⬆️
▪️오늘날 포스텍 '무은재 도서관' 앞작은 광장에는 여섯 개의 좌대가 있다. 네 개의 좌대는 아인슈타인, 에디슨, 뉴턴, 맥스웰의 흉상으로 이미 주인이 자리하고 있다.
▪️남은 두 좌대는 '미래의 한국 과학자를 모시기 위해 비워둔 것이다.
청암은 그 자리를 포항공대에 몸담은 한국 과학자 중 노벨상을 받거나 그에 필적할 만한 업적을 이룩할 때 주도록 했다.
🟫 청암의 淸廉 ⬆️
▪️"청암의 도덕성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분의 리더십 근간은 청렴결백(淸廉潔白)이었다."
ㅡ 황경로,포스코 2대 회장
▪️포항제철 사장 시절, 아버지가 "문중 사람들을 좀 써주면 안되겠냐"고 하자 청암은 그대로 방을 나와 회사로 돌아갔다.
▪️1962년 서울 북아현동 집을 마련하기까지 8년 새 15번 전셋집을 전전했다.
▪️38년간 살던 집을 2000년에 팔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하고 73세에 다시 전세살이를 했다. 청암이 사후에 남긴 재산은 전무했다.
청암선생과 서도
[君子憂道不憂貧] ⬆️
▪️"군자는 도를 바르게 실천하고 있는지만
걱정하지, 가난을 걱정하지 않는다."
(논어,위령공편)
▪️논어, 위령공편의 전체 문장은 이렇다.
"군자는 도의 향상에 마음을 두지 어떻게 먹을지를 격정하지 않는다. 먹을 것을 구해 농사를 지어도 거기에는 굶주림이 있을 수 있다. 도에 헌신하여 학문을 하다 보면 그 속에 사회적 성공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군자는 도를 바르게 실천하고 있는지만 걱정하지, 가난을 걱정하지 않는다
(子日, 君子謀道不謨食. 耕也, 餒(주릴,뇌)
在其中矣 學也, 祿在其中矣, 君子憂道
不憂貧.)
공부를 통한 자기 향상이 현실적 이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사회적 성공까지 보장한다는 뜻이다.
▪️ 청암선생은 이 구절을 특히 좋아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1989년 봄, 여름, 가을의 여러 계절에 걸쳐 같은 구절을 각기 다른 분위기로 표현한 작품이 남아 있다. 청암선생의 작품은 행서보다는 이렇게 반듯한 해서가 더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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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盡人事候天命]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 전력을 다한 뒤 성공 여부는 하늘에 맡긴다는 뜻이다.
▪️어떠한 일을 성취하려면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 곁과 뜻한 대로 성공을 거둘 수는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왕왕 있게 된다. 그런데 진정으로 의미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성공 여부에 지나치게 좌우되어서는 안된다.
▪️공자는 "안되는 줄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하는사람(是知其不可而爲之者)" 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것은 재야 지식인의 공자에 대한 풍자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실천하고 성패의 여부를 하늘에 맡기는 공자의 도심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으로 표현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기다릴 대(待)를 기다릴 후(候 ; 기다릴, 염탐할, 철즉계절)자로 바꾸어 표현하였다.
▪️기다릴 待 대신에 들을 청(聽)자로 바꾸어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候를 侯로 써서 오자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한문 표현에 용인되는 가차자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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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백지조
청암선생이 1988년 戊辰년 추석에 쓴 작품
▪️눈이 내린 뒤라야 송백의 지조를 비로소 안다(始知)는 구절을 비로소 분별한다(始分)고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선가에서 애용하던 구절로서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구절은 고상한 지조와 대장부다운 기개를 잊지 말자는 자기 다짐으로 쓰였다.
▪️<<논어>> 자한편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 것을 알게 된다.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 라는 구절과 통한다.
[* 彫=凋 ; 시들조/ 彫 ; 새길조,시들조 ]
▪️추사 김정희는 이러한 '논어,의 가치관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歲寒圖라는 명작을 남긴 바 있다ㆍ⬆️ ⬇️
박태준 끝
[2] 기장문화예절학교
2025.4.12. 방문자
박태기나무꽃
복숭아꽃
산딸기꽃
산벚나무꽃
역시, 동백꽃
죽단화(겹황매화)
*️⃣ 황매화는 홑꽃이지만, 비슷하나 죽단화는 조금 늦게 피고 겹꽃이다.
모과꽃
팬지
영산홍
겹벚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