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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 충신각은 충무공 이순신의 선봉으로 부산포 몰운대 앞바다에서 일본수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정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681년(숙종 7) 그가 출생한 마을 입구에 세운 건물이다. 충신 정려 자체는 아래의 정려 현판 명정 기록에서 보듯이 만력 36년, 즉 1608년(선조 41)에 내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각주1)
정려 현판의 명정 기록
충신 증 가의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행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정운지려
만력 36년 10월, 명정
현재의 충신각 건물은 1985년 10월에 옮겨와 세운 것이다. 정운의 12대손 정홍채의 중수기 현판이 충신각 안에 걸려 있다. 정운 충신각은 1985년 2월 15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되었다.
충신각 입구 충신문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충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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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 충신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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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사와 충신각(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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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 장군 초상과 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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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사
정운 충신각 바로 옆에 사당 충절사가 있다.각주2) 정운(鄭運, 1543~1592)의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창진(昌辰)으로 전라남도 영암(현재의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서 출생했다. 28세 때인 1570년(선조 3)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봉사, 금강도 수군권관, 함경도 거산찰방을 지냈다. 1583년 함경감사 정언신의 천거로 웅천현감을 지냈으며 제주판관으로 재직할 당시 제주목사와의 불화로 파직되기도 했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옥포해전, 당포해전, 한산해전에 참가했고, 부산포해전 당시 수군절도사 이순신의 우부장으로 선봉에 서서 싸우다가 1592년 9월 1일 몰운대 앞바다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조정에서는 정운의 전공을 기려 병마절도사를 제수하고 고흥군 녹도에 사당 쌍충사를 세웠다.각주3) 그 후 숙종 임금 때 이곳 해남의 사당을 ‘충절사(忠節祠)’라고 사액했으며 정조 임금은 정운에게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충절사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충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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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보국
정운은 어려서부터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정충보국(貞忠報國)’의 네 글자가 새겨진 보검을 들고 다녔다. 그때부터 국가에 충성으로 보답할 것임을 다짐하곤 했다.
정충보국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정운 충신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