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절정을 지나서 여름이 무성한 오뉴월이 되면 울 밑에서 봉선화(봉숭아)가 만발하기 시작한다. 눈길을 앗을 만큼 자태가 화려하지도 않고 크지도 않아서 여염집 꽃밭이나 길가나 양지바른 담벼락 아래에서 혼자서 조용히 피고 지는 소담스런 모습이다. 건강히 생육하면 서리가 내릴 때까지 그 꽃을 볼 수도 있다. 한 번 발아해서 꽃이 피고 씨앗이 떨어지면 해마다 그 자리에서 봄을 맞는 한해살이 순정의 꽃이기도 하다.
봉선화는 홑꽃과 곁꽃이 있고 빨강, 분홍색, 흰색, 보라색, 주홍색 등의 빛깔을 띤다. 우리 민족과 유구히 친숙했던 꽃색은 빨간색과 분홍색이며 특히 손톱 끝에 꽃물을 들이는 빨간색 봉선화는 꽃 빛깔이 짙고 맑아 요즘에는 관상용 화초로도 널리 애용되고 있다. 토종 봉선화의 양태는 성장한 키가 50~70cm 정도이며 흔히 볼 수 있는 꽃 색깔은 빨간색이 많다. 봉선화의 빨간색을 유심히 살펴보면 매혹적이지도 천하지도 않은 그냥 곱디고운 누님의 예쁜 입술 같은 아름다운 선홍색이다. 꽃은 줄기와 샛가지 사이에서 피며 그 모양새가 봉(鳳)을 닮았다고 해서 봉선화라는 이름이 붙었다.
봉선화가 우리 민족에게 오랫동안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봉선화는 삼국시대부터 이 땅에 있었지만 우리 겨레의 정서에 깊은 애수를 드리운 것은 아마 일제강점기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인 봉선화가 이 세상에 첫선을 보인 때도 3.1운동 다음해인 1920년이었다. 홍난파(홍영우ㆍ1898~1941)는 가사가 없는 바이올린곡인 '애수'를 작곡하여 성악가 김형준(1885~몰ㆍ미상)이 봉선화의 노래가사를 담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1925년 곡만 있고 노래가사가 없던 애수의 선율에 봉선화라는 애절한 동요 싯구가 얹혀져서 불멸의 국민 저항 가요가 탄생했다.
봉선화를 대중 앞에 처음 부른 사람은 일본 유학생 소프라노 김천애(1919~1995)였다. 그것도 일제 치하 서슬퍼런 일본땅 한복판에서였다. 동경에 있는 무사시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김천애는 1942년4월 동경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전일본 신인음악회에서 하얀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봉선화를 불러 행사장에 모인 재일 교포들과 유학생들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홍난파 사후 1년이 지난 때였다. 나라 잃은 복받친 설움과 타국에서 밀려오는 진한 애수가 봉선화의 구슬픈 음색과 어우러져 간장을 도려내는 애잔한 민족 가요로 등장하는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불세출의 국민 가곡이자, 국민 동요인 봉선화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울 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 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장독대가 놓여있는 울타리 밑에서 반겨줄 이가 아무도 없는 비운의 시대에 순정의 빨강 꽃을 아름답게 피워낸들 어찌 그 모습이 처연하지 아니할까. 어여쁘신 우리님이 금수강산에 있었다면 가련한 너를 어찌 반겨주지 아니할까. 김형준은 빼앗긴 조국에서 처량하기 이를 데 없는 민족의 신세를 봉선화에 빗대어 가사를 토해 민족의 가슴을 깊이 달래고 파고 울렸다. 아마 한민족의 신세가 저 봉선화와 다름이 없었으리라. 이천만 우리 동포가 나라 잃은 설움과 시름을 봉선화로 달래며 위로하며 울며 불렀으리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이역만리 남의 땅 해란강 강가에서 말을 달리며 풍찬노숙하며 숱한 밤을 지새우며 별을 보고 달을 보며 울분에 찬 가슴으로 구슬프게 봉선화를 읊조렸으리라. 봉선화는 7~8월 뙤약볕에도 흐드러지게 피고 지고를 지속할 만큼 강인한 우리 민족성을 그대로 빼닮았다.
유년시절 고향 분강촌 삽지껄 울 밑에는 여름철이면 유난히도 봉선화가 많이 피었다. 청순한 자태가 연민을 자아내어 넋을 잃고 보노라면 어느덧 내 영혼도 봉선화를 닮아가는 듯 했다. 장마기 비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는 작은 꽃잎은 아름답기보다는 애처로워 보일 만큼 슬픔을 자아냈다.
"초저녁 별빛은 초롱해도 이 밤이 다하면 질터인데 그리운 내 님은 어딜가고 저 별이 지기를 기다리나. 손톱 끝에 봉숭아 빨게도 몇 밤만 지나면 질터인데 손가락마다 무명실 매어주던 곱디고운 내 님은 어딜갔나. 별 사이로 맑은 달 구름 걷혀 나타나듯
고운 내 님 웃는 얼굴 어둠 뚫고 나타나서 초롱한 저 별빛이 지기 전에 구름 속 달님도 나오시고 손톱 끝에 봉숭아 지기 전에 그리운 내 님도 돌아오소"
정태춘ㆍ박은옥의 '봉숭아' 노래이다. 참꽃이 피고 복숭아꽃과 살구꽃 그리고 봉선화 꽃이 분강촌을 꽃밭으로 만들 때면 울타리 아래 옹기종기 흐드러진 봉선화 꽃잎을 접시 접시마다 가득히 따다가 누이동생과 어린 나를 텃마루에 앉혀 놓고 손가락마다마다 꽃물 놓아 무명실로 매어주던 곱디고운 내 누님.
손톱 위에 들여놓은 봉선화 꽃물이 첫눈이 올 때까지 아니 지워지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동화 같은 얘기도 있다. 진작에 그런 사연을 알았다면 유년시절 어이 해서라도 그 꽃물들을 고이 고이 배여 두었을 것을... 하얀 얼굴에 말이 없고 눈이 깊은 그 소녀를 그리며 들창가에 쏟아지는 휘영청한 달빛을 맞으며 백로지에 쓰고 지웠던 연서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봉선화의 연정은 소년이 도회지로 그 마을을 떠나면서 구름이 되었다. 지금도 봉선화가 피는 봄, 여름, 가을이 오면 아직도 그 소녀는 희미한 기억 속에 그리운 사람으로 여기저기 남아 있다.
일월은 강물처럼 흘러갔고 나도 이제는 청춘을 지났다. 그리운 옛사람들도 세월 따라 하나 둘 별이 되었다. 곱디고운 누님의 머리에도 흰눈발이 수북이 날리고 꽃 같은 누이동생도 불혹을 넘은 지가 오래 되었다.
봉선화의 꽃말은 "Touch me not" 이다. 현철의 '봉선화의 연정'을 보면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봉선화라 부르리 더 이상 참지 못할 그리움을 가슴 깊이 물들이고 수줍은 너의 고백에 내 가슴이 뜨거워 터지는~"
그렇다. 봉선화의 잘 익은 씨방은 손만 대면 바로 "톡" 터져 멀리 사방으로 날아간다. 환경이 좋은 야생으로 씨앗을 날리려는 일종의 본능처럼 보인다. 닿기만 하면 "톡" 하고 터지는 씨방이 마치 사전 경고를 미리 보내는 지순하고 지고한 여인의 굳샌 지조 같아 이 또한 우리 민족의 연약하지 않는 끈덕진 기개를 닮았다.
도산서원 아래 분강촌 기와집 울타리 밑에 봄, 여름, 가을 없이 무던히 피고 지던 그 봉선화 꽃이 사무치도록 그리운 계절이다. 손가락마다마다 손톱 위에 드리운 빨간색 꽃물들이 애수에 배여 흐릿하게 고향산천을 그려내는 애련미 가득한 계절 6월이다. 수몰이 되지 않은 분강촌이 있었다면 지금쯤 고운 누님 텃마루에 살포시 앉혀 놓고 봉선화로 꽃물 들이며 봉선화 노래를 불러주고 싶은 애잔한 6월이다. 아니 훌쩍 커버린 딸아이의 손톱 끝에 봉선화 꽃물을 한번도 들여주지 못한 아쉬움이 못내 진한 여운으로 남는 6월이 가고 있다♧.
♤홍난파 선생은 일제 강점기 때 나라 잃은 슬픔과 애환을 '봉선화'로 음률지어 민족의 시름을 달래 주었다.
"울 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울타리 밑에서 반겨줄 이가 아무도 없는 비운의 시대에 순정의 빨간 꽃을 아름답게 피워낸들 어찌 그 모습이 처연하지 아니할까. 이천만 우리 동포가 나라 잃은 설움과 시름을 봉선화로 달래며 위로하며 울며 불렀으리라.
[사진 출처: 안동 풍산 누님댁(사진 속 인물은 분자 누님) 울 밑에 핀 봉선화의 청순한 모습이 유년시절의 깊은 그리움을 자아낸다. 수몰이 안된 분강촌이 있었다면 지금쯤 고운 누님 텃마루에 살포시 앉혀 놓고 봉선화로 꽃물 들이며 봉선화 노래를 불러 주고 싶은 애잔한 6월이다. 곱디고운 누님의 머리에도 흰눈발이 수북이 날리고 꽃 같은 누이동생도 불혹을 넘은 지가 오래 되었다. 2021.7]
♤유년시절 고향 분강촌 삽지껄 길가와 장독대 옆과 그리고 울타리 밑에는 봄, 여름, 가을 없이 봉선화가 무던히 피고 졌다[사진 출처: 유튜브. 박은옥 봉숭아(가사)]에서 캡쳐.
♤우로부터 김천애, 홍난파, 김형준 [사진출처: 조선동요백곡집(1929.10) 및 브레이크뉴스]
봉선화는 일제 강점기에 한민족이 처연하게 불렀던 대한민국 최초의 저항 동요이자, 국민 가곡이었다. 봉숭아를 한자 표기로 쓰면 봉선화가 된다. 성악가 김형준이 정동 홍난파의 옆 집에서 살 때 작시한 이 동요의 처음 이름도 봉선화로 알려지고 있다.
홍난파(홍영우 1898~1941)는 1920년 4월 28일에 바이올린곡으로 가사가 없는 '애수'를 작곡했다. 홍난파의 선배인 김형준은 1925년 이 악보에 자작 동시인 봉선화를 담았다. 홍난파와 한 동네에 살았던 정신학교 음악 교사였던 성악가 김형준(1885~몰ㆍ미상)은 한민족의 처량한 신세를 자기집 울타리와 삽지껄에 구슬프고도 가련하게 핀 봉선화에 은유해서 단숨에 동시를 써 내려갔다. 곡만 있고 노래가사가 없는 '애수'의 음색에 봉선화라는 절절한 동요 싯구가 얹혀져서 불멸의 국민 저항 가요가 탄생했다. 봉선화를 대중 앞에 처음 부른 사람은 일본 유학생 소프라노 김천애(1919~1995)였다. 그것도 일제 강점기 서슬퍼런 일본땅 한복판에서였다.
동경에 있는 무사시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김천애는 1942년4월 동경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전일본 신인음악회에서 하얀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봉선화를 불러 행사장에 모인 재일 교포들과 유학생들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홍난파 사후 1년이 지난 때였다. 나라 잃은 복받친 설움과 타국에서 밀려오는 진한 애수가 봉선화의 구슬픈 선율과 어우러져 간장을 도려내는 애잔한 민족 가요로 등장하는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불세출의 국민 동요이자, 국민 가곡인 봉선화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성악가 김천애는 이 봉선화 노래로 6개월의 옥고를 치르며 식민지시대 한인 음악가로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하지만 역사의 심판은 단호하고도 엄정하고 냉정할 뿐이다.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 인명사전에는 1세대 음악가들이 상당수 친일 음악가로 등재되어 있어서 음악계가 거센 발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음악계는 이들 음악가들이 일제 치하에서 항일 음악과 애국 행위로 수난을 당한 사실도 강하게 토로했다. 광복을 한 지도 80여 년이 되어가지만 한민족이 겪은 굴곡의 역사에 대한 아린 여진은 지금까지도 사회 곳곳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오뉴월이 되면 유년시절 분강촌 기와집 삽지껄 양지바른 담벼락 아래에서 혼자서 조용히 피고 지던 소담스런 봉숭아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아내 앤이 연주한 "봉숭아" 속에 봄꽃들이 무성하게 피던 분강촌 동네의 전경들과 추억들이 적이 떠오른다.
♤도봉산을 병풍 삼아~ 아름다운 계절 속에서...
♤봉숭아[작사 박은옥, 작곡 정태춘]
초저녁 별빛은 초롱해도 이 밤이 다하면 질터인데 그리운 내 님은 어딜가고 저 별이 지기를 기다리나. 손톱 끝에 봉숭아 빨게도 몇 밤만 지나면 질터인데 손가락마다 무명실 매어주던 곱디고운 내 님은 어딜갔나. 별 사이로 맑은 달 구름 걷혀 나타나듯 고운 내 님 웃는 얼굴 어둠 뚫고 나타나서 초롱한 저 별빛이 지기 전에 구름 속 달님도 나오시고 손톱 끝에 봉숭아 지기 전에 그리운 내 님도 돌아오소.
첫댓글
도산골에 모여 봉선화꽃으로 손톱에 이쁘게 물들려보는 시간이 언젠가 오려나
봉선화 원글(21년4월18일)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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