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희문 밖 순교자들의 행적. 우술임 수산나 [강석진 신부]
3. 우술임(수산나)
1803년에 양주 고을의 양반 가문 후손으로 태어난 우술임(수산나)은 17세 되던 해에 인천에 사는 어느 교우와결혼하였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천주교 교리를 배운 후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성품이 순수하여 양선(良善)한 우술임은 천주교에 입교한 후 열심히 신앙을 지켰으며, 금육이나 금식재(齋)도 지키고 묵상(熱想)도 부지런히 하였다. 1828년에 우술임이 살던 지역에서 작은 박해가 일어나 그녀도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하였다. 그 무렵에 우술임 은 임신 중이어서 관장 앞에서 혹독한 형벌은 받지는 않았으나, 손발을 사용하는데 아주 큰 어 려움을 느낄 정도의 고문을 받았다. 체포된 지 두세 달 뒤에 우술임은 풀려났으며, 옥에 갇혀 있는 동안 배교하라는 요구를 받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동료 교우들을 고발하라는 요구를 받았다.80 이 내용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시복재판의 증인으로 나온 이간난의 동생 이 이사벨라의 증언이 있다.
우술임 수산나에 대해서 과거의 내용은 자세하게 잘 모르지만,언니 이간난의 집에 다닐 때 들은 이야기로는 … 천주교 신앙을 지키다가 박해를 만나서 매도 많이 맞았다.
1841년에 우술임은 천주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서울로 이주 하였고, 거기서도 그녀는 신앙에 대한 열성으로 동료 교우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기도와 묵상에 열심히 전념 하였고, 만나는 누구에게나 만족을 주려고 애를 썼으며, 특히 겸손과 인내의 덕을 실천하여 모든이들로 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녀는 과거 작은 박해 때에 훌륭한 순교의 기회를 놓친 것을 끊임없이 뉘우쳤으며,83 종종 자신의 죄를 진실로 통회 하는 마음을 발하였다.
그녀는 다른 이들의 시중을 들수 있는것을 기뻐 하였고, 자신을 천하게 취급 당하는것 자체 를 마치 대우 받는것처럼 받아들였으며, 남의 집에서 종살이 하는것을 만족 스럽게 받아 들였다. 그 녀는 가난을 기꺼운 마음으로 견디었으며,그녀가 가지고 있는 옷이라고는 고작 거친 천의 옷들과 여기저기 기워 놓은 옷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그 옷들을 입고 다녔다.
우술임은 젊어서 과부가 된 후 사회적 여건상으로 여자 혼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있던 이간난을 만나 함께 살 았다.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동안 서로에게 도움을 주면서 철저 하게 신앙을 지켰고,86 동시에 남을 도와주는 선행을 꾸준히 실행하였다. 시복재판의 증인인 김 가타리나에 의하면, ‘이간난과 우 술임은 서로 의지하며 살았고, 신앙생활을 충실히 잘 실천했다’고 말했다.
1846년 봄에 김대건 신부가 황해도 옹진에서 체포되면서,서울에 있는 김대건 신부의 집 위치가 탄로 나게 되었다. 또한 포교들이 김대건 신부의 집을 중심으로 현석문과 동료 신자들을 체포하 고자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현석문은 동료 신자들을 피신시키면서, 여자 신자들은 장동(혹은 잣골)에 있는 이간난의 집으로 보냈고,자신은 김임이가 사포서동에 새로 매입해 놓은 집으로 갔다.
그후 포교들은 서울에 있는 김대건 신부의 집을 덮쳤을 때, 천주교 신자들은 이미 피신한 사 실을 알게 되었다. 포교들은 여자 교우들이 피신 할 때에 가마를 태워준 가마꾼들을 찾아서 그 들을 붙잡았다. 그리고 가마꾼들을 통해 여자 교우들이 이 간난의 집으로 간 사실을 확인하였다. 포교들이 이간난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90 이 간난의 집에 피신했던 여자 신자들은 현석문 이 사포서동에 새롭게 장만한 집을 보러 갔으며, 이 간난의 집에는 우술임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포교들은 우 술임을 체포한후, 다른교우들이 어디 있는지를 추궁하자, 겁에 질린 우 술임은 현 석문이 새로 장만한 사포서동의 집을 가리켜주었다. 그래서 포교 들은 우 술임을 데리고 그집 으로 쳐들어가 함께 있던 신자들을 체포 하였다. 이당시에 체포된 사람 들은 현석문, 김임이,오(吳)바르바라, 정철염, 이간난, 우술임이었고,때는 1846년 윤(聞)5월 16일(양력 7월 9일)신시神時,오후 3-5 시)였다.
이렇게 체포된 이들은 우포도청 에서 갇혀 지냈다. 시복 재판의 증인인 김 가타리나는 함께 체포 되었다가 배교한 후 풀려난 오 바르바라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인용하여 이 간난의 옥중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이간난 아가타와 우술임 수산나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서로 다투었다고 한다. 아마도 우술임 수산나가 포교를 데리고 현석문과 함께 숨어 지내고 있는 집을 가리켜 준 이유일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석문 가롤로와 다른 교우들의 권유와 노력으로 이 둘의 마음은 풀어지고,다시금 감옥 안에서 사이좋게 지냈다고 한다.
또한 시복 재판의 증인인 이 간난의 동생 이 이사벨라역시,오 바르바라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증언하였다.
이들이 다 잡힌 후에 포청에 갇혀 7월 그믐까지 같이 지냈으며, 옥중에서 일어난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이간난 아가타와 우술임 수산나가 말로 다투었단 말은 듣지 못 하였으며, 옥중에서 겪는 모든 괴로 움을 서로가 달게 받았고, 인내하며 잘 지낸 줄만 아옵니다.
시복재판의 증인인 김 가타리나는 이간난과 우술임이 함께 치도곤과 다른 형벌을 받았다고 증언하였다.96 그 후 포교들은 이 간난과 우 술임,그리고 갇혀있는 다른 교우들을 같은 날에 감옥에서 장살 하였다. 그 후 포졸 혹은 포청의 하인들이 옥에서 죽은 여자 신자들의 시신을 광희문 밖에다 내다 버렸다.
그리고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던 다블뤼는 이 간난이 옥중생활을 하는동안 배교의 유혹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몇몇 이들이 말하기를, 그녀는 한순간 목숨을 보존하려는 유혹을 받았고, 그때부터 고문 중에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았으나, 두 교우가 격려로서 그녀를 일깨우자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을 감수하며 고통을 받 아 냈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시복재판의 증인인 이 글라라도 비슷한 증언을 하였다.
이간난 아가타는 체포된 후 포청에서 고문의 형벌이 고통스러워 배교의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같이 체포된 김임이 테레사가 이간난 아가타에게 말하기를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을 잘 참아 받자’며,알아듣게 일러 주었다. 그래서 이간난 아가타는 그 덕을 입어 형벌들을 잘 인내하며 참아 받았고,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으며,마침내 순교를 잘했다.
시복 재판의 증인인 김 가타리나 증언에 의하면,이 간난 아가타는 우 술임 수산나와 함께 치 도곤과 다른 형벌을 받았다. 그후 포교들은 이 간난과 우 술임, 그리고 갇혀있는 다른 교우들을 같은날, 감옥에서 교살(紋 殺)하였다. 그 후 포졸 혹은 포청의 하인들이 옥에서 죽은 여자신 자들의 시신을 광희문 밖에 내다 버렸다.
그리고 시복 재판 증인인 이 이사벨라는 당시 이 간난의 시신을 찾았던 사람들이 이 간난에게 는 목을 맨 흔적이 없어서, 몽둥이로 매맞아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고 한다 또한 같은날 죽은 우 술임과 정 철염은 목을 맨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진술은 그것을 직접 본 목격자는 진술로서 이들의 시신을 장사 지내준 최(崔)회장에게 직접 들었다는 것이다.
시복 재판 증인인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에 의하면, 치명한 후에 이간난의 경우 그녀의 부친이 딸의 시체를 찾아가서 장사를 따로 지냈다.
그러나 김임이,우술임,정철염의 시신은 광희문 밖에 버 려져 있는 것을 김 프란치스코를 비롯하여 여러 신자들이 밤에 찾 아와 광희문 밖 근처에서 다시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그 당시 일은 너무 오래전의 일이었기 때문에,광희문 밖 순교자들의 시신을 묻 은 구체적인 산소 자리도 모르고,그 밖의 다른 것들도 거의 다 잊 었다고 한다.
시복 재판의 증인인 서 야고보의 증언에 의하면,본인인 서 야고보와 김경보와 김원보, 그리고 강씨 성을 가진 교우와 두세 사람 이 광희문 밖에 버려진 시신을 찾으러 갔다고 한다. 이들은 광희문 밖에 버려져 있는 시신이 여자 신자 세 사람뿐인 줄 알았는데, 네 구의 시신이 있어서 확인해 보니, 하나는 남자 도적의 시신이었다 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남자의 시신은 따로 옆에 빼 놓고,여자 교우 들 시신만 1마장을 옮겨,하나의 무덤구덩이를 파서 그 안에 세 구 의 시신을 따로 구분해서 놓은 후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고 하였 다.
그리고 시복재판의 증인으로 나온 김 가타리나의 증언에 의하 면 우술임의 시체는 교우들이 찾아가서 그 근처에 장사를 지내되, 정철염과 하나의 무덤구덩이에 묻었다는 말을 장사 지내 준 교우들 에게 직접 들었다고 한다. 또한 김 가타리나는 언니 김임이의 산소에 성묘를 다닐 때에 그들의 분묘를 직접 눈으로 보았으며, 김임이 의 분묘에서 열 보(步)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시복 재판의 증인 으로 나온 이 이사벨라의 증언의 의하면,우술임과 정철염의 시신은 천주교 신자들이 찾아서 장사를 지냈지만,그 산소가 어딘지를 모른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