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현 숙
첫눈이 내렸다.
아침 일찍 창 밖을 내다보니 아파트 정원이 눈으로 덮여있었다. 장거리 외출을 앞두고 은근히 걱정되었다.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풍경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몇 장 찍었다.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나오자마자 그늘진 곳에는 벌써 빙판이 되어 있었다.
“오늘 못가겠는데...... 영덕은 동해 쪽이라 눈이 더 올 수 있어서 이 상태면 가는 게 무리다. 당신 맨날 청춘인 줄 알고? 다음에 갑시다.”
남편은 나선 김에 가보자며 눈길 차 운행을 고집한다. 막상 나와보니 도로에는 제설이 되어 다행이었다. 때때로 겨울눈이 알맞게 내려 대지를 하얗게 덮어주는 동안 여러 농작물이 겨우살이를 끝내고 파릇한 봄맞이를 하는 기쁨을 주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겨울답지않은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더니 갑자기 폭설이 내려 도시가 마비되었다고 아우성친다. 눈 오는 겨울 날을 기다리는 것은 온돌방 따뜻한 이불 밑에서 발 싸움을 하며 먹는 군고구마처럼 달콤한 추억을 꺼내어 보고 싶은 까닭인지도 모른다.
방학을 맞이한 아이들과 오랜만에 가족여행 삼아 강원도 스키장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눈이 온다는 기상예보에도 아랑곳없이 체인을 감은 자동차는 툴툴거리며 도로 위를 달려갔다. 폭설로 인한 피해가 우려된다는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스키장을 향하는 눈길은 낭만에 취해 있었다. 스키장을 오가는 도로는 한적한 편이었다. 하얀 눈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오랜만에 설원에 푹 젖어있었다.
꽁꽁 언 방천에서 지치던 썰매 타기는 추억 속에 뛰어놀고 겨울 방학을 손꼽아 기다리던 아이들의 스키장 나들이는 큰 추억거리가 되었다. 스키장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리프트를 타고 오르내리며 신나게 스키를 즐겼다. 다음날에도 아이들은 지친 기색도 없이 오전 내내 스키장을 누볐다. 새하얀 눈은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었다. 늦기 전에 눈길을 벗어나려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산그늘에 덮인 마을은 어둠이 내려앉고 나지막한 산길로 이어진 인적없는 도로는 눈 속에 흔적을 감추었다. 운전대를 잡은 남편의 손에 힘이 들어있었다. 낄낄대는 차바퀴는 눈길을 허우적거렸다.
좀처럼 나아가지를 못한 채 이따금 다른 차들이 엉금엉금 추월해 가지만 예상을 넘은 눈길에 우리 차는 속수무책이었다.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장거리 여행으로 차 안에서 잠이든 아이들도 불안한 듯 잠에서 깨어 남편의 눈길 운전을 지켜보며 눈망울만 굴린다. 눈발은 점점 굵어지고 길 위에 눈은 소복소복 쌓였다.
눈길 운행에 익숙하지 않은 남편은 말이 없었다. 체인을 감은 차바퀴도 터덜터덜 오르막길에 힘을 쓰지 못했다. 눈이 쌓이면서 차선도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오르내리는 차들은 우리 차를 피해 갔다. 언제 왔는지 우리 차 뒤에 작은 트럭이 비상등을 켜고 옆길로 차를 세웠다. 잠시 뒤 성에 가득 찬 운전석 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차창을 내리고 미안하다 했더니 괜찮다고 하며 차를 옮겨 주겠다고 했다. 트럭사님은 눈길에서 헤매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가 안타까운 마음에 가던 길을 멈추고 내리막길까지 우리 차를 옮겨 주었다.
어디 사시는지 물었더니 가까운 동네 사는 사람이라 했다. 눈오는 어두운 밤길 조심해서 가라고 하더니 트럭을 몰고 앞서 가버렸다.
눈 덮인 마을 길을 벗어나 철커덕거리는 차바퀴의 체인을 풀고 보니 스키장의 하얀 낭만은 어느새 진흙 길이 되어 질퍽거렸다. 따뜻한 집으로 돌아왔다. 한나절 눈길 운행으로 지친 남편은 이내 잠이 들었고 아이들은 일기장을 꺼내며
“엄마. 오늘 그 아저씨 아니었으면 우리 집에도 못 오고 눈 속에 갇힐 뻔했지?”
“그래, 고마운 강원도 아저씨 덕분에 잘 왔지.”
아이들은 마음에 남은 친절과 고마움을 일기장에 적어놓고 한참을 이야기했다. 트럭 기사님의 연락처도 제대로 받아두지 않아서 고마움을 전해 드리지 못하지만, 우리 집에는 계절마다 맛있는 강원도산 감자빵과 찰진옥수수, 대관령 황태 택배가 쌓인다. 강원도 감자바우처럼 듬직한 이웃의 고마움을 뒤로하고 세월이 흘렀다.
지난 추석 연휴에 큰딸 사돈 부부와 다낭으로 가족여행을 가게 되었다. 사전에 정성껏 준비한 여행이라 즐겁고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다낭을 떠나기 전날 아침에 호텔 안에서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도 큰딸이 오지 않아 기다렸더니 오던 길에 갑자기 쓰러진 한국인 응급 환자 가족을 도우느라 늦었다고 했다. “살려주세요” 하는 다급한 소리에 달려가 자초지종을 듣고 재빨리 응급 차량을 호출하고 후송하는 데 통역 도움을 주고 약속 장소로 왔다.
호텔 사무실에는 장기화된 코로나 여파로 여행객이 줄어 평소 배치된 통역원이 없었다. 딸아이의 통역 협조로 병원에 이송한 후 응급 치료를 받은 가족은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처음 해외여행을 왔는데 뜻하지 않은 일로 부모님께 불효할 뻔했다며 같은 한국인이라 더 고맙고 잊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다행히 저녁 식당에서 응급 환자 가족들을 만나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호텔 측에서는 위급 상황을 적절히 대처하도록 도와준 우리 가족에게 숙소로 찾아와 감사 파티를 열어 주며, 퇴실할 때는 총지배인이 직접 나와 호텔 재방문 시에 특별(V.V.I.P) 고객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눈 덮힌 강원도 정선 고갯길에서 만난 감자바우와 낯선 이국 땅에서 만난 이웃사랑은 어렵고 위급할 때 서로 주고받는 우리들의 남다른 인정 아닌가?
‘카톡’ 김해 공항에 도착하자 딸아이 선물함에 ‘한우세트’가 들어 있었다.
다낭 숙소에서 만난 인연이었다.
첫댓글 강원도 트럭기사님도 고맙고
따님도 김선생님을 닮아 따뜻한 마음을 가지셨네요.
바라보는 눈은 낭만이지만, 눈길 운전은 정말 겁이 납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수필 회원님들의 마음처럼 세상살이 각박해도 주변에는 아름답고 고마운 일들이 참 많았어요. 서로 나누고 함께하는 정다운 이웃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