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째 장맛비가 띄엄띄엄 오더니 드디어 하우현 성당으로 성지순례를 가시기로 하던 전날 밤은 폭포수 같은 장맛비는 온 천지를 뒤덮고 과연 어르신들을 모시고 갈수 있으려나? 걱정하던차에 다음으로 미뤄졌으면 하는 작은 기대로 기다렸으나 아침을 맞이 했답니다.
어르신들과의 차량 봉사를 약속한 저로서는 시간 맞춰 성당에 도착해 보니 열분중 한분만 빠지고 아홉분이 쨍하는 햇살아래 쉼터에서 기다리시고 계셨습니다.
비는 커녕 하늘에서는 언제 그랬냐는듯 맑은 날씨를 주신 주님께 어르신들 모두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의왕시에 있는 원터마을 하우현 성당(성지)으로 향했습니다.
11시 미사를 수원교구 가정사목부 손님 신부님께서 집전 야고보 축일을 맞아 상세한 설명과 강론으로 은혜로운 미사를
바치고 다리나 허리가 많이 아프신 어르신들을 카페겸 성물방에서 커피와 자몽주스로 땀을 식히며 정겨운 시간을 우리들만의 공간으로 보내며 늦은 점심은 백운호수에 위치한 산채 한정식(채수호)으로 너무나도 맛있는 식사를 하였습니다.
주임신부님께서 그동안 70대에서 80대에 어르신들이 매주일마다 주보를 접어 전신자들이 보도록 봉사를 하시는 공로를 어여삐 여기시어 본당 봉고차량과 금일봉으로 맛난 음식 사 드시라고 특별히 하사 하셨다 하여 좋은 날씨 주심에
신부님께 감사. 미사 잘 드리고 시원한 곳에서 맛있는 음식 먹게 해주신 신부님께 감사 !!
곳곳마다 본당 주임 신부님을 사랑하는 어르신들의 깊은 정이 느껴지는 하루였고 봉사하는 저역시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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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현성당>
청계산과 광교산맥을 잇는 원터마을에 있는 곳으로 마을 지명은 조선시대 동양원 역원이 있었던 곳에서 유래한다.
사제관은 2001년 1월 16일 경기도기념물 제176호로 19세기 초반부터 천주교인의 피난처로서 교우촌이 형성돼 1884년에 공소공동체를 이뤘다. 1893년에 공소가 돼 1894년 초가로 된 목조강당 10칸을 지었고, 1900년에 본당으로 분리, 사제관을 새로 지었다. 1954년 안양읍에 새로 지은 성당이 본당으로 승격하자 하우현은 안양 본당의 공소가 됐으며 1965년에 건물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우현 일대에 언제부터 교우들이 모여들어 살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 지방에 청계산과 광교산 등 높은 산들이 있고 거기에 형성된 자연의 계곡과 울창한 수목이 박해를 피해 산길을 찾던 천주교인들에게는 더 할 나위 없는 피난처였음에 비추어 어느새인가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교우들이 때로는 땅을 파고 토굴 속에서 살던 곳이었다고 하여 '토굴이'라고도 불리웠다. 하우현에서 국사봉을 넘어 5키로 정도 가면 둔토리성지가 대표적인 곳이다.
1884년에 하우현은 공소공동체의 모습을 갖추고 뮈텔(Mutel)신부 등이 정기적으로 순방하여 전교하였다. 이때까지도 한국 천주교회는 박해하에 있었기 때문에 뮈텔 신부는 상복으로 변장하고 은밀히 하우현을 방문했다. 1886년 한불조약의 성립으로 한국 천주교회에는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했다.
이 조약이 비준된 이듬해인 1888년 7월 왕립(갓등이)이 최초로 본당으로 승격하여 하우현의 모(母)본당으로 하우현까지 관할하였다.
1893년 공소 초대 회장으로 김윤중(베드로)이 선출된 기록이 있으며, 1894년 5월 왕림본당 2대 신부인 알릭스(Alix) 신부는 하우현 신자들이 공소 강당없이 교우 집에서 공소 예절을 행하는 것을 보고 강당 신축을 강력히 권고한 결과, 알릭스 신부가 협조한 금액과 하우현 교우들이 모금한 1,500냥으로 초가 목조 강당 10간이 건축되었으며, 1900년에 하우현은 왕립 본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을 독립했다.
1965년 김영근 신부는 성당 건물이 퇴락해 붕괴 위험이 있음을 보고 미군부대 건축자재 원조로 현재의 성당을 신축했다. 하우현은 본당 설정 이래 본당 폐쇄가 거듭 되풀이 되고 타 본당에 귀속된 공소였던터라 사목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었다.
하우현은 현재 200여 명의 신자수로 교우촌을 형성하고 있는 작은 본소에 불과하나 본당 역사 100주년을 맞은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성당이다. <자료/경기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