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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2009년7월11일(토) 서울생활 40여년 만에 인왕산,북악산(백악산) 서울성곽 탐방에 나섰다. 신분증을 제시 하고 번호표(출입증)를 교부받아 출발한 산행은 곳곳에 수도 경비대의 감시하에 정부 중요 기관과 군사시설로 사진촬영이 부분적 으로 제한되고 목이 말라 막걸리를 마시려다 제지 당하기도 했다.시야가 흐려 지척에 있는 남산이 희미하고 사진은 엉망이 되었다.
서울성곽 사적 제10호 (안내책자에서 옮김) 1392년개성 수장궁에서 조선 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한양 천도 계획을 명하고, 태조 4년(1395) 경복궁, 종묘,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곧바로 정도전이 수립한 도성 축조 계획에 따라 서울성곽을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성곽은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 길이 18.2km의 성곽으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 으로 계획 되었다.이 방대하고 시급한 사업을 농한기에 완성하기 위하여 이듬해인 1396년 1, 2월의 49일 동안 전국에서 11만 8천명 을 동원하여 성곽의 대부분을 완공하였고, 가을 농한기인 8, 9월의 49일 동안에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는 동시에 4대문 4소문을 준공하였다.그 후 27년이 지나 세종은 서울성곽을 전면 석성(石城)으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 사업을 벌였다. 세종 4년(1422) 1월 겨울 농한기에 전국에서 약 32만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완공 이것이 지금 서울성곽의 골격이다. 이후 서울 성곽을 재정비했던 숙종 30년(1704)까지 260년간 서울성곽은 부분적인 보수만 있었을 뿐 큰 붕괴는 없었다. 본래 서울성곽은 도성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았지만 정작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울성곽은 제구실을 하지 못해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성곽 자체는 전란으로 인한 큰 피해는 없었다. 1704년, 숙종은 일부 신하들이 청나라의 조약 을 들어 반대하는 것을 물리치고 서울성곽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나아가 북한산성까지 쌓으며 도성의 방어체제를 정비 하였다. 이것이 근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의도적으로 헐어내기 이전의 서울성곽이다. 이후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 전차를 부설하면서 동대문과 서대문 부근의 성곽 일부가 헐려 나갔고, 이듬해는 용산과 종로 사이 전차 부설을 위해 남대문 부근을 철거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서대문과 혜화문(동소문)이 헐리며 사실상 서울의 평지 성곽은 모두 철거되어 오늘날에 총 길이 18.2km 중 산지 성곽 10.5km만 남게 되었다.
빨간선이 오늘의 탐방로구간 입니다.
단군성전 우리겨례의 시조 되시는 단군 할아버님을 모시는 성역입니다.
정부표준 단군영정(가로115cm,세로170cm 그림)을 봉안하여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기리고 있는 곳입니다.
인왕산 인왕산(해발338m)은 서울 종로구의 서쪽에 자리한 산으로 화강암이 노출되어 있는데다가 산세가 웅장하다. 특히 산 동쪽 기슮의 풍치가 아름다워 산수화의 소재가 되곤 하였다. 풍수적으로 보면 조산인 북한산에서 주산인 북악산으로 연결되어 좌청룡인 낙산, 우백호인 인왕산의 형상을 이룬다. 그래서 인지 이 산에는 옛부터 호랑이가 많이 살고있어 태종5년에는 경복궁 내정까지 들이 닦쳤 고,연산군 11년에는 종묘에 침입 하는등 민가의 피해도 많았다고 한다. 인왕산은 조선조 태종때 에는 서봉, 서산으로 불렸으나 광해군 때에 인왕사 라는 사찰이 있어 인왕산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제가 식민 통치를 하면서 인왕산의 가운데 왕(王)자를 인왕산 (仁旺山)으로 고쳤으나 조선조 후기의 화가인 정선이나 강희언의 인왕산 산수화에는 仁王山이라 부르고 있다. 인왕산에는 사적 제10호 인 서울성곽, 제121호인 서울 사직단, 중요민속자료 제28호인 국사당, 서울시 지정 유형 문화재 제23호인 대원군 별장, 제25호인 황학 정, 제26호인 석파정, 서울시 지정 민속자료 제4호인 선바위 등의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어, 우리의 옛정취가 물씬 풍기는 정겨운 산이다. 이밖에도 인왕산은 수석 전시장을 방불케 할정도로 바위의 형상이 실제의 사물과 닮은 기암 괴석들로 가득하여 철에따라 어느때 올라 보아도 그때마다 색다른 느낌을 주는 명산이다.
인왕산 성곽을 따라 올라갑니다.
들머리... 바위를 깎아만든 좁은 돌계단,
방금 올라왔던 서대문방향 사직공원쪽 성곽을 뒤돌아 봅니다.
시야가 흐려 발아래 서울시내가 멀리만 보입니다.
옛날 서대문 형무소 뒤쪽산 안산이라 합니다.
녹번동 홍은동 방향 내부순환로가 보입니다.
인왕산 정상
청와대 경복궁 옥인아파트 옥인동 효자동 방향입니다.
인왕산 새로복원한 성곽입니다.
잠시 기차바위쪽으로 약500m쯤 갔다다 다시 되돌아와 창희문 방향으로 내려갑니다.
지나온 인왕산 정상을 뒤돌아 봅나다.
세검정 방향
세검정,신영동,평창동방향, 북한산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기차바위에서 뒤돌아 와룡공원 쪽으로 내려가야할 성곽입니다.
와룡공원 창의문 쪽으로 내려갑니다.
인왕산을 내려가다 바라본 북악산입니다.
와룡공원 때마침 윤동주시인 시비 제막식 공사중입니다.엄청나게 큰 크레인이 20톤쯤 되어보이는 큰돌을 들어 올립니다.
와룡공원에서 바라본 창의문, 창의문 지붕위쪽 빨간집이 신분증제시 인적사항 기록후 입산할수 있습니다.
1968년 1.21사태때 순직한 고 최규식 경무관 동상,
북악산길은 북악 스카이웨이로 가는방향
창의문 앞에서
창의문
창의문에서 바라본 북악산
창의문에서 북악산 쪽으로 올라가는 성곽
올라가다 뒤돌아본 인왕산 기차바위
시멘트 계단을 나무계단으로 바꾸는중 현재 공사중
전망대 쉼터에서...
청운동과부암동
북악산(백악산)정상
북쪽으로 평창동과 북한산 향로봉 비봉 사모바위 문수봉 보현봉이 한눈에 조망됩니다.
지나왔던 인왕산 성곽이 보입니다.
홍은동과 북한산 쪽두리봉이 보입니다.
서울의 상징인 남산과 세종로가 보입니다.
다시 팔각정 쪽으로 내려섭니다. 성곽 끝쪽에 하얀건물 우측에 팔각정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여러가지 모양의 성곽
성곽 외각 철조망 사이사이에도 전망대가 자주 설치되어 있습니다.
팔가정 쪽으로 내려가다 다시 숙정문 방향(우측)으로 내려갑니다.
숙정문에 도착했습니다.
숙정문 숙정문은 서울성곽의 북대문으로 남대문인 숭례문(崇禮文:예를 승상한다.는 뜻)과 대비하여 엄숙하게 다스린다' 는 뜻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태조5년(1396) 처음 서울성곽을 쌓을 때는 지금 위치보다 약간 서쪽에 있었으나 연산군 10년(1504)에 성곽을 보수 하면서 옮겨 졌다고 한다.숙정문은 본래 사람들의 출입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서울성곽 동서남북에 4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평소에는 굳게 닫아두고 숙정문을 통과하는 큰길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가뭄이 심할때는 숙정문 을 열고 남대문을 닫아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태종16년(1416)에 (기우절목:기우제 시행규칙)을 만들면서 북쪽은 음(陰), 남쪽은 양(陽) 이라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숙정문은 오랫동안 문루가 없이 월단(月團:무지개 모양의 석문)만 남아 있었는데 1976년 북악산 일대 서울성곽을 보수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가운데 큰 기와집이 삼청각, 삼청터널 입구에서 탐방로를 따라 올라가면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이 보이고 팔각정 우측 희미한 산봉우리 북한산 보현봉이 보입니다.
왼쪽 산봉우리가 북악산 정상, 팔각정 방향으로 가다 우측으로 성곽을 따라 내려오면 조금전 지나왔던 숙정문이 보입니다.
성북동이 한눈에 보입니다.맨우측 중간위 부분에 크레인 장비가 보이고 바로 왼쪽 검은 기와집이 유명한 길상사 절(卍)입니다. 위 우측에 북악 골프연습장이 보이고 그뒤 희미한 아파트가 정릉동(우리동네)입니다.다음 맨위좌측 희미한 산이 북한산 형제봉 입니다.
동쪽 돈암동 방향입니다.
조금전에 보았던 숙정문,
삼청각이 더욱 가깝게 보입니다.
"말바위" 공간이 없어 한쪽 부분만 찍혔습니다.
서울의 심장부,
나무계단을 따라 삼청공원으로 내려섭니다.
북악의 식생 경복궁의 진산(鎭山)인 북악은 높이 342m에 이르며 화강암이 주를 이룬 돌산으로, 산 능선을 따라 조성된 성곽 주위로 수목이 가꾸어저 있다. 특별히 소나무는 조선 개국 초부터 특별 보호 대책을 세워 관리되었다.조선조 내내 잘 보존되어 온 소나무 숲은 일제 강점기 이후 숲이 방치되면서 능선 주위에만 주로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북악산은 근 40년간 인 간의 간섭을 받지않은 덕분에 식물들이 잘 보존된 천연의 공간이 되었다.
서울광장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2호선 갈아타고 합정동에 가서 맛난것 많이 먹고 귀가, 유익하고 행복한 산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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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고 갑니다..계단이 넘 많지만 구석구석 볼곳이 많은곳이더군요!!
감사합니다... 수고많이 하셨네요
사진으로 보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산행 열심히 다니시는 모습을 뵈는 보기에 좋습니다.
문화재 청이 이정표를 좀 바꿔야 겠다는 生覺이 듭니다. 제가 알기로는 왜정시대에 나라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이 사직단 인데, 왜놈 들이 "사직 공원" 이라고 이름을 고친 곳으로 아는데, 조상의 얼이 깃든 사직단으로 정정 함이 타당 할 것 같아 잘 알지는 못해도 의견을 전해 봅니다.
주원님 반갑슴니다 사진구경잘하면서 일부분은 다녀왔네여 북악산쪽에서 창의문 쪽인것 같은데 건강조심하시고 언제나 활기찬 산행사진 많이 올려주세요 잘 쉬었다 감니다
전 경복궁에서 걸어서 와룡공원 말바위까지만 갔었지요~~~/사진 골고루 잘 박으시고 잘 봤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