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이 낳은 소설가 구혜영을 기리다>에 대한 토론문
김 백 신
‘2006년7월25일 구혜영 소설가가 떠나던 날’로 시작되는 이영춘 시인의 주제문을 읽으며 나는 나의 무지에 개탄했습니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보다도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한참을 먹먹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구혜영 소설가의 작품이 내게는 모두 낯설거니와 그 분이 춘천 사람이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선대여성문인을 조명하는 이 기회를 통해 그리고 금회의 주제인 <춘천이 낳은 소설가 구혜영을 기리다>를 통해 내가 구혜영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 님의 작품세계를 볼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고 우리 고장의 자랑스러운 선배 문인을 알아 뵐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부끄러움만큼 행복하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주제문은 원고의 말미에 밝혀진 바와 같이 4개의 참고문헌을 바탕으로 짜여있었습니다. 그 외 구혜영 선생의 사망 당시, 주제 발표자가 쓰신 弔詩와 구혜영 소설가의 주변 인물들을 살펴보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주제발표문은 우리지역 선대문인인 구혜영을 다시 생각하고 애도하는 시간을 갖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주제문에는 몇 가지의 의문점이 있었습니다. 하여 이를 해결할 목적으로 인터넷을 수 없이 검색했습니다. 예상대로, 소설가의 명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많은 자료가 개인의 블로그나 뉴스, 인명사전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나는 또 한 번 부끄러워하면서 우선 구혜영 소설가의 연대별 주요 사건을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구혜영 소설가 (1931~2006)
부 : 일제 강점기 유능한 행정관리(군수), 6.25사변에 납북
모 : 항일학생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 구금되기도 함, 결혼 후 시가인 평창에서 교편을 잡은 선각 여성
1931년 춘천시 약사동 출생 ( 어린 시절 평창에서 보냄 )
1946년(15세) : 강원일보 시 발표 (춘천여고가 중학교 6년제로 개편됨)
1950년 : 서울대 미술대학 입학 (서울대학교 사법대학 부속중학교 졸)
1952년 : 숙명여대 국문과 편입
1955년 : 대학 졸업, 소설 등단 (사상계, 안개는 걷히고) ,한국일보 편집국 기자
1958년 : 숙명여대 전임 강사
1966년 : 학원사 [주부생활] 편집기자
1967년 : 취재기자상
1974년 : 소설 「불타는 신록」이 「여고 졸업반」이라는 이름으로 영화 제작
1987년 펜문학상. 1987-한국소설문학상, 1988-월탄문학상, 1995-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
2006년 7. 25. 빛으로 떠나다.
구혜영 소설가의 개인적인 삶에 이어 그의 소설을 이해하려면 우리나라의 시대적 배경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구혜영 소설의 특징이 주로 가정사를 다루고 있지만 인간정신의 해방 등 이데올로기에 휩쓸린 젊은이들이 이 땅의 역사를 안고 살아가는 분단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10년은 우리나라가 한일강제병합이라는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던 해입니다. 이후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36년의 일제 강점기를 끝내고 1945년 조국해방을 맞습니다. 구혜영 소설가는 일제 강점기가 시작된 후 20년이 지난 1931년 태어납니다. 짐작컨대 일본에 의한 민족 말살정책으로 우리말을 배우기 어려운 시기에(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창씨개명은 1940년에 시작 그해 79% 개병)에 태어난 셈입니다.
고급 행정관료(군수)인 아버지를 두었기에 우리말을 배우기는 더 어려운 환경이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러나 어머니 역시 선각여성으로 학창시설에 항일학생사건에 연류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한글을 배우기 어려운 상황’을 단정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950년은 우리나라 동족잔상의 6.25 사변이 발발하는 해입니다. 이 때 고급행정관이었던 아버지는 납북됩니다. 이를 근거로 주제문에서는 구혜영이 ‘설상가상으로 어린 동생들과 홀어머니를 거느려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라 밝히고 있습니다.
저의 의문은 아버지가 납북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구혜영이 과연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거느린 불행한 가장’인가 하는 것입니다. 1950년에 구혜영 소설가는 서울대 미술대학에 진학을 합니다. 또한 1952년 숙명여대로 편입학을 하여 1955년에 졸업합니다. 이 당시의 우리나라 시대적 상활을 보겠습니다.
Redian의 보도 자료(2013.6.13. 유채하)에 의하면. [1955년에 우리나라 남자아동의 71.9%가 취학하거나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여자아동의 경우는 57.3%에 불과하고, 1959년 12월 중앙교육연구소가 진행한 ‘전국문맹자조사’에서 나타난 문자해독을 하지 못하는 인구비율은 남성이 11.1%인데 비해 여성은 33.4%로 나타났다.]고 전합니다.
그러니까 여성의 42.7%가 초등학교도 진학하지 못하는 시기에 구 작가는 대학을 졸업한 것입니다. 과연 이 상황이 ‘불행한 가장’으로 볼 수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실 중에는 독립운동가의 자손보다 친일을 한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든 사회적 지위로든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여유롭게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왜 굳이 강조하려는지 알 수 없으나 이것이 왜곡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구혜영 소설가는 회고를 통해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수련기간 없이, 스승도 없이 거성이 되었다며 등단 이후 경제적 무능,무력한 자신은 다수식솔의 호구지책에 쫓겨 갈고 닦을 시간이 없었다’고 하는데 나는 이 고백에 실망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구혜영 소설가는 1955년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사상계 창간 2주년 창작 공모에서 소설 <안개는 걷히고>가 당선 되고 같은 해 한국일보 편집부 기자가 됩니다. 3년 후인 1958년에는 숙명여대 전임 강사, 1966년 학원사 [주부생활]의 편집기자, 1967년 : 취재기자상을 받습니다.
구혜영 소설가가 말하는 다수식솔의 호구지책으로 갈고 닦을 시간이 없었다는 말이 과연 정당한 변명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만족하는 만큼의 경제력이라는 것은 오직 당사자 자신에게 있으니 앞세워 따질 일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주제문에서 밝힌 것 중에는 구혜영의 에세이집에 밝힌 내용을 들어 ‘다소 변형된 모습으로 작품에 반영되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구 작가는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유능한 행정관리였다가 해방이후 일제 강점기에 관직을 맡았나는 이유로 은둔자로 가난을 견뎌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혜영 소설가는 아버지를 납북자가 아닌 은둔자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구 작가는 모든 것을 감수하고라도 아버지를 보호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자격지심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또 하나의 의문점이 남습니다. 어머니의 항일학생 운동은 진정성이 있는 것일까? 어긋남 호기심으로 저는 우리 역사에 기록된 항일 학생 운동을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인터넷 검색창에는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먼저 올라와 있었습니다. 구혜영 소설가가 1931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아 구 작가의 어머니가 당시 학생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다른 학생 항일운동은 부산 항일운동으로 1940년에 있었던 일이기에 제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고향, 또는 어머니가 다닌 학교가 전남 등지에 소재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광주에서 붙잡혀 서울 서대문경찰서로 압송되었다면 항일 운동을 극렬하게 혹은 주체적으로 앞장선 학생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기사를 읽어내려 가면서 그런 의문은 곧 사라졌습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일본의 우민화 정책과 억압과 조선인 학생들이 일본인 교육자들의 억압과 무시를 당하며 일어난 사건으로 각 고등보통학교에는 비밀학생조직이 조직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령 광주항일학생운동에는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더라도 각 지역에 산재한 비밀조직의 일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설가 어머니의 이름을 알 수 있다면 서대문 형무소 투옥인 명부를 확인할 수 있을 테지만 성토하자는 것이 아니니 그럴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하나의 진실이 흩어져버리면 꼬리를 물고 오는 것이 불신입니다. 선각여성인 어머니가 홀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평장으로 가서 교편을 잡았다는 것은 과연 사실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굳이 미화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허나 이 또한 미화되지 않았다는 확인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구혜영 소설가는 춘천에서 태어났고, 일정 기간 동안 문제의 평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 적어도 아버지가 납북되기 전인 15세 이전에는 춘천으로(춘천여고 입학)왔으며, 서울에서 졸업을 하게 됩니다. 부모의 직장 이동에 따라 수시로 학교를 옮겨 다녔다는 것으로 보아 구 작가의 어머니는 일정기간 홀어머니를 봉양하며 평창에서 어머니가 교편을 잡은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또한 연좌제를 적용할 의도가 아니므로 이쯤에서 접습니다만 문학의 본질인 순수성을 버려선 안 된다는 신념입니다.
지난해 춘천시에서는 ‘이야기길 조성 사업’으로 의암호 주변에 20개의 문학비를 세우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문학비의 주인을 가리기 위해 춘천문인협회에서는 소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시끄럽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그 때 전상국 김유정문학촌장께서 29명의 문인들을 뽑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소위원회에 있었기에 촌장께서 제시하신 문인 중에서 절반이 받아드려졌고, 나머지는 등단 순에 의한 춘천거주 문인으로 정해 춘천시에 통보하였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구혜영 소설가는 없었습니다. 왜 구혜영 소설가는 빠졌을까?
당시 춘천문협지부장이었던 본인에겐 결정권이 없었습니다. 설정 결정권이 있었더라도 구혜영 소설가를 모르고 있었으니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고장의 안개를 모태로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사랑한 구혜영 소설가는 왜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 아쉬움이 큽니다.
끝으로 선대문인 구혜영 소설가를 알아보지 못한 무지에 다시 한 번 용서를 빌며 이 글을 통해 그의 영전에 머리 숙여 죄송함 전합니다. 더불어 본 문안이 다소 공격적이더라도 이는 토론이 갖는 의제일 뿐, 진실을 이유로 후세 사람들이 정한 구혜영 소설가의 명성에 누를 끼칠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영원한 안식으로 돌아가신 선생님께 심심한 조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구혜영 토론문.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