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기록은 태어나면서 부터 시작이다.
태어나면 옛날에는 족보에 올려서 기록을 하지만 여자는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고
남자는 이름과 자를 기록하였다 그리고장성하여 벼슬길에 오르면 족보에 기록 해 두는 것이 사람의 기록이다.
남자는 장성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면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에 기록되고
지방에 가면 각사등록, 읍지. 선생안 등에 흔적이 남아서, 우리가 현재 연구하고 과거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군위향교에는 여러명의 현감, 관찰사, 군수의 기록을 적은 불망비가 남아 있는데
그 중에 이호준, 이증영, 김세호 이성원 등의 비가 남아 있으며, 그 중에 이호준은 우리가 잘 아는
이완용의 양부이고, 이증영은 청백리에 녹선된 인물이고, 김세호, 이성원 관찰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그리고 군위 현감 지낸 인물 중 김요협은 인촌 김성의 조부로 알려졌다
군위향교의 비석에 새겨진 인물 중 이증영과 이호준은 어려 번 가서 촬영하고 기록을 정리하였지만
김요협의 비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화순향교의 비석을 정리하고 나서 보니 그곳에도 김요협의 비가 보였는데, 다른 곳에도
있지 않을까 하여 정리 하던 중에 군위향교에 김요협의 비가 있는 것을 알았다.
기록에는 현감으로 되어 있는데 현대의 자료에는 군위군수를 역임하였다는 하지만
맞지 않는 기록이며, 조선왕조실록에는 군위현감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종 27년 경인(1890) 12월 28일(계해) 맑음
27-12-28[28] 엄세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엄세영(嚴世永)을 대사헌으로, 김천수(金天洙)를 대사간으로ㆍ 김완수(金完秀)를 공조 참판으로, 김요협(金堯莢)을 군위 현감(軍威縣監)으로, 송두옥(宋斗玉)을 정의 현감(旌義縣監)으로 삼았다}
군위향교에 있는 김요협의 선정비에는 많는 명문이 남아 있으며, 그 풀이는 다음과 같다.
飛爲莅南 날아서 남으로 오시더니
振刷逋數 예전의 모습으로 빠르게 돌아오게 하시네
思威浹骨 은혜와 위엄 뼈에 사무치니
羅山片石 적라산의 돌로 비를 세웠네
彈誠拱北 임금을 모시는데 있어 정성이 넘치며
蘇完弊局 혁폐국을 설치하여 옛 모습을 회복하네
奸搰屛跡 간사함을 들추니 흔적을 감추네
畧表侯德 다스린 흔적은 덕으로 나타났도다
엉터리 플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하였다.
1891년 辛卯 8월 일
김요협은 화순현감도 역임 하였다.
그 흔적은 화순 향교에 선정비가 남아 있다.
고종 26년 기축(1889) 6월 6일(경진) 맑음
송영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송영대(宋榮大)를 수찬으로, 민영상(閔泳商)을 판윤으로,. 화순 현감(和順縣監) 김요협(金堯莢)과 진안 현감(鎭安縣監) 이중익(李重翼)을 서로 바꾸었는데, 서로 바꾸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사람의 기록은 찾아 보면 여러 곳에서 나오지만 조선시대에 유행한 선정비에서 인명을 찾으면
현대의 인물과 연결되기도 하고 역사적인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의 이야기는 꼬리를 물고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기에 남아 있는 자료로 는 아주 중요한것이다.
이 시대는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으면 기록이 거의 없지만 정리하고 정리하면 언젠가는
중요하고 역사적인 자료가 된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 일기에 없는 인물의 자료가 나오면 더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옥산 이희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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