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암 말기입니다. 수술을 하면 1년을 살 수 있고 수술을 하지 않으면 그것도 못삽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의사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연히 수술해서 어떻게든지 남편을 살리겠다고 말하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나갔다. 이를 꽉 깨물고 떨리는 다리를 두 손으로 꼭 잡았지만 뛰는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죽을힘을 다해 다시 일어서는데 그제서야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양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느 날부터인가 유난히 몸이 부쩍 마르고 먹는 음식마다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남편이 이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남편의 삶이 1년 밖에 남지 않았다니…. 의사는 믿을 수 없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단 한 마디 말로 그녀를 천 길 낭떠러지로 떠밀었다.
의사와 상담을 마치고 나오는 그녀를 보자 밖에서 기다리던 남편이 반기듯 활짝 웃었다. 남편의 삐쩍 마른 몸, 검어져 버린 얼굴 빛. 가슴이 미어졌다. 왜 진작에 병원에 오지 않았을까. 금방이라도 콸콸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참아야 한다. 아니 울 수 없었다. 울어버리면 이 모든 게 현실이 되어 버릴 테니까.
꽃다운 나이 20대 초반에 남편을 만나 토끼 같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고 알콩달콩 살아가던 김순자 씨에게 검은 구름은 그렇게 다가왔다.
오로지 집과 회사 밖에 모르는 자상한 남편과 엄마를 끔찍하게도 위해주는 착한 두 아들과 딸. 콩나물 값 한 푼이라도 아끼며 사는 평범한 삶이었지만 그녀는 크게 욕심내지 않았다. 남편의 퇴근 시간에 맞춰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준비하고 다섯 식구가 함께 둘러앉아 저녁 먹는 것이 가장 행복했던 그녀는 착한 아내, 좋은 엄마였다. 그런 그녀에게 하늘이 두 쪽나는 시련이 닥친 것이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녀가 남편에게 거짓말을 시작했다.
“당신, 위에 탈이 났나 봐요. 수술만하면 금방 나을 수 있다네요. 진작에 병원에 왔으면 됐을 것을. 예전부터 병원 한 번 가보자고 했죠. 정말 당신 때문에 못 살겠어.”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오히려 화를 내버렸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했다. 별일 아니라는 자신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허허’ 웃는 남편의 모습은 그녀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버스 창밖으로 사람들의 모습이 빠르게 지나갔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낯설고 두렵게 느껴졌다.
예정대로 수술을 마쳤지만 의사의 말대로 남편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고 스스로도 불길한 느낌을 감지한 남편이 의사를 찾아갔다.
그제서야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남편. 그 때문이었을까. 예정보다 더 빨리 남편은 떠나버렸다. 그녀가 47살이 되던 1987년이었다.
이미 예고된 일이었지만 꿈만 같은 현실이었다. 하지만 슬픔도 잠시. 남편의 따뜻한 그늘 아래서 20여년을 살아온 그녀에게 현실은 냉정하기만 했다.
고2의 큰아들과 중학생 된 아들과 딸. 남편을 따라 가고 싶은 마음도 여러 번 들고는 했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인의 도움으로 근근이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을 마련했지만 여자 혼자 아이 셋을 키워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도 세상 앞에서 조금씩 단단해졌다.
그렇게 아픔이 서서히 아물 무렵. 어느 덧 장성해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으로 바르게 자라준 큰아들이 갑자기 이상한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남편의 산소를 이장한 이후부터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심장이 멈춰버리는 듯 했다. 결국 아들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고 그녀는 또 한 번 몸서리를 쳐야했다. 떠난 남편을 대신해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던 큰아들이었기에 그녀의 충격은 더했다.
그녀는 제일 먼저, 생계였던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아들 간호에만 전념했다. 무슨 일이라도 할 작정으로 병원이라는 병원은 다 찾아다녔다. 하지만 수술로도 고칠 수 없다는, 원인과 병명조차도 알 수 없는 ‘무병’이라는 답변뿐이었다. 또 한 번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끝내는 무당도 찾아가 보고 백방으로 뛰어다녀 봤지만 그녀가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은 늪으로 빠져버리는 듯 했다.
“정말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그때 덕양선원 법상 스님을 만났어요. 그리고 스님의 권유대로 신묘장구대다라니 주력수행을 하기 시작했죠. 스님과 아들과 셋이서 법당에 앉아 낮과 밤 구분도 없이 죽기 살기로 했습니다. 정말 내가 지금 당장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첫 100일 정진을 시작했습니다.”
김순자(원명화·65)씨의 주력수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100일 정진이 끝나면 또 다시, 또 다시.
200일, 300일, 400일, 500일…. 끝도 없이 그녀는 주력수행을 계속 이어나갔다.
일산에 위치해 있는 덕양선원과 살고 있는 집까지의 거리는 2시간. 새벽 5시에 일어나 1시간 동안 두 아이의 식사를 챙기고 집안 일을 마무리한 뒤 아들과 함께 오전 8시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컴컴한 밤이 될 때까지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또 매주 금요일에는 오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23시간동안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독송했다. 그렇게 해서 10만독을 마치고 20만독을 해냈다.
“기도 중에 조상님과 만나기도 하고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시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까치가 머리 위에서 ‘까악까악’ 울기도 하는 신비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을 겪기도 했었죠. 또 어떤 날은 죽어있는 내 모습을 보기도 했었고요. 그럴수록 스님은 더 정진해야 한다며 1000독도 모자라 하루 2000독을 하라고, 더 정진하라고 하셨어요. 그땐 정말 ‘나 죽었구나’ 했었죠.”
그렇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내가 쓰러지면 모든 게 끝나버린다’는 생각에 스스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리고 다시 정진을 시작했다.
“어느 날은 하다하다 정말 죽을 듯이 힘이 들어 ‘스님 저 못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었죠. 하지만 그때마다 ‘그래, 차라리 내가 죽자’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모든 괴로운 마음들을 부처님께 맡기는 방법을 알게 됐습니다.”
그때를 회상하는 그녀의 눈에서 촉촉히 이슬이 맺힌다. 하루하루가 길고 긴 어두운 터널에 갇혀있는 것처럼 힘에 겨웠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럴수록 이를 악물었다.
“기도할 때 저는 항상 혼자가 아니었어요. 힘겨워하는 제 곁에서 저 보다 더 간절하게 목탁을 치며 독송하는 스님이 계셨고 도반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죠.”
그리고 거짓말처럼 서서히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언제그랬냐는 듯 큰아들도 대비주 독송으로 병을 이겨내고 예전의 든든한 아들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그녀는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현재 대비주 87만독을 이루어 내고 매일 1000독을 계속해 오고 있는 김순자 씨.
하루 모든 시간을 쏟아 부어도 모자랐던 신묘장구대다라니 1000독을 이제는 단 4시간 만에 마칠 정도로 그녀에게 수행은 몸의 일부처럼 하나가 되어버렸다.
“내 목숨이라도 바꿀 각오로 수행으로 나와 맞서다보면 어느 순간 힘든 모든 일들이 콩알만큼 작아지고 내가 큰 우주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나비가 훨훨 날아가다 향기로운 꽃에 다가가 살포시 내려 앉는 그런 기분이죠. 수행을 만나고 정진의 마음이 한 층 한 층 탑을 이루면서 세상 모든 일들이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죠.”
‘수행을 하면 할수록 가슴에서 느껴지는 맑은 빛이 하늘의 태양보다 더욱 빛나는 것 같다’는 그녀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른 거 없습니다. 죽기보다 힘든 일 있으면 죽을 각오로 기도해보세요. 그렇게 죽기 살기로 정진하면 소원하는 한 가지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행복해집니다.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저도 해냈는걸요.”
저는 부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배움이 짧기도 하지만, 사는 일이 바빠서 부처님 법을 공부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40중반에 남편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남겨진 삼남매를 보란 듯이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살았을 뿐입니다. 내가 일을 해야 살 수 있었으므로, 절에는 그저 초파일에 등이나 달러 갈 수 밖엔 없었지요. 제가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하기 전 까지는 참 살아온 세월이 힘이 들었습니다.
3년 전 시댁 쪽에 산소를 이장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보통 산소를 이장 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라고 말들 하지만 좋으라고 하는 일인데 뭐 별일이 있겠나 싶었습니다.한데, 무슨 일인지 산소 이장 이후 집안에 이런저런 좋지 않은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자꾸 풀리지 않는 어려움이 나타나기 시작 했습니다. 온 마음을 바치며 자식들을 위해 살아온 세월이건만 행여나 하는 마음에 좋다는 방법을 모두 찾아 다녔습니다.그러다가 어느 스님과의 인연으로 제가 사는 곳은 서울인데 거제도까지 가서 천도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천도재를 마치자 스님은
“여기 거제도까지 오실 수는 없으니 댁에 돌아 가셔서 마음에 드는 도량을 찾아 백일기도를 하십시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곳부터 찾아보았지만 왠지 마음에 끌리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다 만난 곳이 제가 천수대비주 기도를 하게 된 이 도량 이었습니다.요즘 생각하니 그래도 제가 전생에 조금 덕을 지어 놓았나 싶기도 합니다. 거제도에서 돌아와 저는 이 도량에 나와 백일을 아들과 열심히 108배와 광명진언, 천수대비주 21편을 날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 했습니다.그 후에 다시 천수대비주 백일기도를 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스님께 무어라 감사의 절을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제가 부처님을 열심히 공경하는 일 만이 스님께 은혜를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이었습니다. 백일을 스님께서는 목탁을 치시며 저를 위해 108편 천수대비주 기도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5시간이 넘게 걸리는 데 말입니다. 그런 스님의 법력에 힘입어, 저 역시 백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에 목욕으로 몸을 정히 하고 음식도 가리며, 먼 길을 마다 않고 새벽길을 헤치며 법당에 와 청수를 갈고 공양을 올리며 기도 하였습니다.그렇게 긴 시간을 지나며 조금씩 가정에도 안정이 찾아 왔습니다.
물론 돈을 벌어야 하던 것도 다 물리치고, 오직 일념으로 기도 하였습니다.
그때는 제게 급박한 일이 많았습니다. 돈 보다는 기도를 해야 했으니까요.
백일이 지나자 이제는 스님께서 매일 108독씩 다라니기도를 계속하라시면서 이제부터 금요일에는 1000독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이었습니다.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다른 분들과 함께 바로 1000독 독송에 들었습니다.말이 천 독이지 혀도 잘 안돌아가는 제게 처음에 천 독은 참 힘들었습니다.아침 10반에 시작해서 다음날 9시에 마쳤으니 그 시간이 어땠겠습니까?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저는 참 죽을 맛이었습니다. 스님! 저 힘들어서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하고 말씀 들여도, 앞에서 스님은 꼼짝없이 같이 독송을 하시니, 어쩌지도 못하고 온몸을 꼬아 가며 꼬박 날밤을 새어가며 22시간만에 1000독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얼마나 힘드셨을까나?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참 우습기도 하고 죄스럽기도 하고 합니다.그렇게 해서 지금은 25만독이라는 숫자를 채우고 있습니다.스님께서는 숫자를 꼭 챙기라고 하십니다.목표를 세워 기도하라고 하시는 거지요. 물론 숫자에 매이는 것은 아닙니다.그렇지만 숫자를 챙기시라는 말씀의 이유를 이제는 다 알 것 같습니다. 또 10만독, 20만독을 독송하고 나니, 이제는 또 글을 쓰라고 하십니다.글도 제대로 모르는 저에게는 엄청난 일이지요.
“그냥 느낀 대로만 쓰시면 됩니다. 그래야 글 못 쓴다는 마음에서 벗어 날 테니 쓰십시요.”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또 말도 안 되지만 글을 씁니다.
* * * *
신묘장구 대다라니 십만독을 끝마칠 무렵 -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참 어찌 십만독을 내가 해 내었는지 이건 나의 힘이 아닐 것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그후 3000독 ,7000독 10000독을 거듭 독송하며 나는 많은 경험들을 했습니다.조상들의 영가와 만나는 시간도 있었고, 오래도록 소원하게 지내던 친척과도 화해를 아무 거리낌 없이 이루었고, 자식들의 문제들도 수월히 풀려 나갔고, 일하면서 마음에 응어리 졌던 사람과도 웃으며 만나며 아무런 미운 마음이 들지를 않았습니다.
또한 환희심이 일어 언제나 웃는 낯 이 되어 주의 사람들에게 뭐 좋은 일이 많은 가보다 라는 좋은 말을 자주 듣기도 했습니다. 또 혈색도 좋아지니 미인이 되었다는 농담도 듣게 되니, 나는 이 기도 만큼 나를 변화 시킨 것이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어쨋던 나는 이 기도가 평생 나를 지탱해 줄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이지요.이렇게 기도의 횟수가 십만독에 가까워오는 때 독송을 하는데 흰나비가 살랑살랑하고 날아와 앉을 듯 말듯 하면서, 신묘장구 대다라니가 노래 소리로 들렸습니다.그러더니 마음이 갑자기 설레고, 기분이 너무 좋아 춤이라도 덩실 덩실 추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십만독을 하고 나니 제 마음은 그저 흐믓하고 행복한 마음 뿐 입니다.이제 십만독은 다시 처음의 일독으로 돌아가는 것 일뿐이라 생각합니다.
-20만독 독송을 하고나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15만독 쯤 독송하였을 때 많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는 것일까? 자식을 위해 울리려 하는 것일까?아님 내 자신을 위해서 종을 울리려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냥 여기서 그만둘까” 하는 마음을 고민하면서 잠시 잠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희한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나의 이런 어리석은 마음을 아셨는지 꿈속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 책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그래서 “아! 내가 어리석은 생각을 하였구나.” 하면서 내가 여기서 끝나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더 열심히 정진하여 20만독을 독송하게 되었습니다.3차 백일기도 회향하는 날, 스님께서 천수대비주 21편을 독송하시는 중간에 다시 이상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눈을 감고 열심히 기도하는 제 머리위로 까치가 ‘까악까악’ 소리를 지르면서 입에 편지를 물고 부처님 전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그때 저는 아들의 직장문제로 걱정을 하던 때 였습니다.그런데 이것이 무얼 말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환희로운 마음에이 모습을 보고 저는 이게 독송의 즐거움이구나! 하고 더 큰소리로 독송하였습니다.그런데 며칠 후에 아들의 직장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 이었습니다.저절로 저는 얼굴에 미소를 띄우게 되고 더욱 힘차게 기도 하게 되는 것 입니다..
얼마 전 4차 백일기도를 시작하며 바로 가행정진 열흘을 했습니다.가행정진 열흘 동안 저는 너무도 벅차게 환희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그 날은 가행정진 7일째 이고 음력 7일이라 산신기도 법회가 있는 날 이었습니다.그날도 일찌감치 집을 나서 법당에 도착했습니다.저는 지금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이 25만독이 가까워 오고 있으며가행정진시에는 지금 까지는 1000독씩을 해왔었는데 이번에는 한계를 넘어 보라는 스님의 권유에 하루에 1500 ~2000독을 했습니다.
며칠 전 스님께서 하신 법문을 듣고, 정말 이번에는 '내가 죽었다' 하고
기도하기로 마음먹고 정진하고 있었습니다.정성껏 마음을 모으고 스님의 목탁소리에 맞춰 다라니 21편을 소리 높여 독송하는 중이었습니다.중반쯤 되었는데 내가 그만 죽었습니다.죽어 있는 나를 바라보니나는 관속에 누어있고, 아이들은 관속에 있는 나를 보며 빙 둘러 울고 있었습니다.산신각 앞에 내가 누워 있는 관은 누런 금빛이고, 내 머리맡에는 머리에 노란 관을 쓰신 분이 주장자를 들고 계셨습니다.
그러더니 그분은 사라지고 다시 머리에 하얀 관을 쓰신 분이 너울너울한 흰옷을 입고 나타나 다시 머리맡에 서 계십니다.
죽어 있는 나를 바라보며, 내가 죽은 것이 너무 슬퍼 마구 소리를 내어 울며 다라니 독송을 했습니다.다라니 21편이 끝나니 온 정신으로 돌아오며, 순간 온 몸에 힘 이 다 빠져 그만 '스님 저 쓰러지겠습니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억지로 참았습니다.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스님의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진언에 일어섰습니다.
이번 백일기도에 괜히 처음부터 가행정진을 하고 싶었습니다.물론 이루고저 하는 바도 있거니와, 스님께서 열심히 정진하다 보면 '다 좋은 일이 있다 '라는 말씀에 뒤 돌아 볼 것도 없이 그저 기도하기로 마음먹었었습니다.
법회를 마치고 스님께 여쭈니 빙그레 웃으시며 계속 일심으로 정진하라고 하셨습니다.7일쯤 되니 머리가 휭하니 붕붕 떠 있는 느낌도 들고, 어지러운 듯 정신이 몽롱하였습니다. 가행정진하는 동안 눈에는 피부병처럼 무엇이 났는데 보살들이 우스게로 '우담바라' 가 피었다고 놀립니다.
정말 내 몸에 우담바라가 핀다면? 그럴 일은 조금도 없지만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좋은 일일까 하기도 했었습니다.그날 겪은 일은 저도 너무 신기한 경험이라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 광경입니다.
이렇게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열심히 합니다. 열심히 하다보니 모든 것이 좋은 일로 바뀌더군요. 그동안 힘들게 살아오면서 간간히 아이들에게도 화를 잘 내던 나의 습관도 사라졌습니다. 다 내가 지어 내가 받는 것임을 아는 일이니까요.부처님의 법이 얼마나 환희로운지 경험을 해 보셔야만 아실 것 입니다.저는 그저 천수대비주 기도로 죽음을 맞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만 어려운 일이 있으신 분 들이나 마음고생을 하시는 분들, “모두들 기도 열심히 하세요”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기도 열심히 하셔서 소원성취하시고 성불 하십시요.
나는 오랫동안 불자로서 살아왔다. 그러나 가만히 지난 시절을 살펴보면 신묘장구대다라니
수행을 하기 전에는 거의 복을 받기를 바라는 수준에서의 신행이었다.
남편이 잘되길 바라고 자식이 건강하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길 기원하고 가족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것이 어쩌면 전부였다.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텅빈 법당에서 홀로 3000배를 하기도 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1000배 절 수행을 하기도 했다. 그 공덕의 힘으로 많은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었지만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꼈다.
그런 시기에 덕양선원을 알게 되었고 법상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 수행을 시작하였다. 독송목표는 100만 독으로 잡았다. 처음에는 하루에 108독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108독을 하는데 2시간 30분이 걸렸다. 이렇게 4개월간의 수행을 진행하던
중 일주일 동안 매일 1000 독을 하는 가행정진을 하기로 하였다. 천 독을 하는데 20시간이
들었으니 잠을 자는 4시간을 제외하고 일상생활을 하는 모든 시간에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중얼중얼 거리면서 지냈다.
걸으면서도 중얼중얼, 밥을 하면서도 중얼중얼, 심지어 사람을 만나는 중에도 중얼중얼
거렸다. 그렇게 하다 보니 사람 만나는 일도 줄이고 바깥일도 최소화하면서 오로지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을 하는 일에 매달렸다. 드디어 이레째 되는 날 무려 7000독을
마치고 나니 마음 저 깊은 곳에서 희열이 솟구쳤다. 일단 해냈다 하는 환희심에 젖어 들었다.
한 차례의 가행정진을 하면서 얻은 성과는 환희심 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신묘장구대다라니
한 번 독송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으니
일상생활을 제대로 하면서도 독송에 전념해서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기간 중에 시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할 일이 생겼다. 일주일 입원 치료를 하는 기간
중에 늘 곁에 붙어 간호를 하면서도 독송은 놓지 않고 계속 하였고 그전에 느끼지 못했던
어머님을 향한 지극한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왔다.
참으로 환희심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 독송 중에도 문제가 발생하였다.
지난 시절 마음속에 담아 놓았던 업장들이 나타나서 나를 괴롭힌다.
흔히 말하는 탐진치 삼독심에 사로 잡혀 있으면서도 그것에 빠져있는 줄 모르고
헤매던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슴이 울컥하고 답답하고 터져 버릴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스님께 전화를 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나타나는 현상을 그대로 바라보면서
오직 마음은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에 집중해라고 할뿐이다. 그래도 어쩌랴.
스님의 분부는 지엄하니 그대로 하는 수밖에. 다시 독송에 들어 가본다. 어렵게, 어렵게
독송이 진행된다. 꺼져가는 불꽃을 다시 힘들게 피워 올리는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다 털어내 버리고 독송에 전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제야 스님께서
그렇게 짧게 한 마디 하신 그 말씀, 오직 독송에만 집중하라고 한 그 말씀의 힘이 느껴졌다.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자들에게 던지는 짧은 한마디 말씀에 불성을 깨닫는 것처럼 스님께서
하신 그 한 마디 가르침이 참으로 커다란 위신력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라니 108독 15분 만에… 하루 3천독
100일 10만독 후 자신감-위신력 체감
가행정진을 거듭 할수록 내면의 힘이 세어진다. 독송에 걸리는 시간도 많이 줄어들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108 독을 하는데 이제는 15분이면 족하다. 입으로 내는 소리와 그 소리를
듣는 마음이 함께 내 안에서 굴러가면서 염불삼매에 빠져 든다. 하루에 3,000독이 가볍게
이뤄진다. 하루에 3,000 독을 하고 나면 한량없는 성취감에 환하게 피어나는 연꽃의 향이
진하게 느껴진다.
정진을 시작한 지 9개월 만에 10만 독을 돌파하였을 때에는 환희심은 말할 것도 없었고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겠다 하는 자신감이 밀려들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지난 시간을 되돌아 보았다. 참으로 먼 길이었다.
높은 길이었다. 힘든 길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탄탄대로가 아닐까 하는 확신이 들었다.
이런 기쁨이 있어 수행을 하는 것이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10만 독을 하고 나니 독송 속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빨라졌으며. 100일 기도 한 번에
10만 독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속도만 빨라지는 것이 아니고 그 속도가 빨라진
것과 더불어 기도에 빠져든 나의 마음자리도 깊어져갔다.
한없이 깊어지는 나의 내면을 살펴보면서 나에 대한 믿음과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나와 남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나를 위하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이며 남에게
잘해주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것임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또한 오늘의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한 부모님과 조상님에 대한 무한한 공경심이 절로
우러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밝고 맑은 기운이 나를 밝고 맑게 할 뿐 아니라
나의 주변을 역시 밝고 맑게 해 준다.
그러면서 내 자신이 내 삶의 주인공이 되어간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 수행은 나의 삶의 지침이 되었고 내 삶의 전부가 되었다. 문득문득 스쳐가는 위기의
순간들이 모두 원만하게 해결되는 것을 보면서 이 수행의 위신력을 체감한다. 또한 오고가는
길에서 유정들에게도 무정들에게 읊어주는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 공덕이 온 우주를 밝혀준다.
독송이 거듭 될수록 마음이 환해지고 지혜가 생기며 현실의 문제에도 겁을 내거나
피하려는 마음이 들지 않고 잘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긴다. 강한 긍정의 힘이 생겨
튼튼한 울타리가 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다. 힘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행복이 내안에서 찾아야 하듯이 밖으로 향하는 나의 눈을 내안으로 돌려 오는데 여태까지의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내안의 힘과 내안의 행복을 찾았으니 이 힘과 행복을 밖으로 쏟아내어야
한다는 마음이 든다.
지금까지 받은 이 많은 복들을 다른 사람에게도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공주교도소
후원을 하게 되었으며 단 한사람이라도 맑고 밝은 마음자리 찾아 자신의 올바른 삶과
이 사회에 공헌하는 일을 하게 하는데 작은 정성이라도 보태고 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416자의 다라니를 통해 나의 삶을 이렇게 송두리째 바꿀 수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념으로 독송을 하면서 나약하고 이기적이고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
강하고 이타적이며 행복한 삶으로 거듭 태어났다.
매주 금요 철야기도 시간 어김없이 스님의 목탁소리에 맞춰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이 이어진다.
그 열기는 금요 철야기도에 직접 참석해 본 분들은 아실 것이다. 쌀쌀한 가을밤에 에어컨과 여러 대의 선풍기를 작동해야 할 정도의 열기다. 내가 결혼도 뒤로 하고 이렇게 기도에 매달리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스스로 되물어 본다.
2001년 여름쯤으로 기억된다. 지금의 스승님을 처음 뵈었을 때가….
어릴 적, 부모님 따라 가끔 절에 다닌 부처님과의 인연이 있었다.
물론 “부처님 ~ 해주세요.” 하는 기도였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금강경 사경하고, 독송하기도 하고, 엄마 따라 그 추운 겨울날 조계사 법당에서 손과 발이 꽁꽁 얼 것 같은 추위 속에서도 21일 기도도 했었고, 또 인연 있는 다른 도량에서도 60일 새벽 기도에 참여도 했었다. 무엇인가 엉성하기는 했지만, 열심히 부처님과의 인연의 끈은 놓지 않고 지냈다. 그래서였을까? 그 기도 공덕으로 20대 후반에 지금의 스승님을 뵐 수 있게 된 것 같다.
“기도를 하면, 바늘 하나 꽂을 곳도 없이 작은 내 마음 그릇이 무한대로 커져서, 내 주변의 인연들을 돌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내 운명도 바꿀 수 있습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운명을.’
스님의 가르침이 내 안에서 늘 맴돈다.
2004년 가을쯤으로 기억 된다. 덕양선원을 ‘신묘장구대다라니’ 수행도량으로 만드시려는 스승께서는 금요 철야기도를 해보라 하신다.
하루 1000편 하루에 1000편이라니…. 천수경만 읽기 시작하면, 몸이 꼬이고, 신묘장구대다라니 1편만 하면 잠이 쏟아지는 내가?
자신이 없었다. 아니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스님께서 한번 해 보라고 권하신다. 하다보면, 그 다음부터 힘이 붙어서 좀 쉬워지니까 다시 한 번 해 보라 하신다.
그래서 도전 했다. 철야에 신묘장구대다라니 1000독을 말이다.
“신묘장구대다라니 나모라 다나다야 야야...”
그때는 정말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없다. 다만, 꼬박 24시간 걸렸고, 다음날 엄마와 함께 졸면서 집에 간 기억 뿐.
한번 해 보니, 그다음부터 철야 할 때는 자신감이 생겼다. “저번에도 했는데, 이번에는 왜 못해!” 라는 마음이 들어서 정말 열심히 기도하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
금년 백중기도 회향 때, 신묘장구대다라니 10만 독을 마무리 했다.
10만 독. 언제 할 수 있을까 했는데, 한 편 한 편 하다 보니 어느새 10만 독이 넘었다.
백중 기간에 가행정진을 하면서, 나는 가족들 모두 불심이 일어나길 기도 했고, 조상 천도재를 발원했다. 결국 이 두 가지 원은 바로 이루어졌다.
신묘장구대다라니 10만 독을 먼저 성취하신 엄마와 함께 하는 수행 길이라서 더 힘이 난다. 집안의 문제가 하나씩 풀리고, 가족에 대한 나의 발원들이 이뤄지면서, 이 기도에 대한 믿음은 더 확고해졌다.
10만 독 후 탐·진·치 삼독심 점차 소멸
2010년 5월까지 다라니 100만 독 발원
나에게도 기도의 힘이 생기면서, 종교와는 거리가 멀었던 여동생도 지금은 매주 금요 철야에 함께 수행한다. 부모님을 벼랑 끝까지 몰아가며 방황하던 남동생도 마음을 잡았다. 조상님께도 온 식구가 참석하여 여법하게 천도재를 모셔드렸다. 재를 지내며 나는 끝없이 우러나는 환희심으로 부처님께 감사드렸다.
처음 이 기도 수행을 할 때는 언제나 잠과의 싸움, 게을러지는 마음, 하기 싫은 마음들이 무한히 올라오기도 하였지만, 기도가 계속되면 될수록 그 마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발원하는 마음도 예전에는 “부처님께 ~ 해주세요” 하는 기도에서 이제는 “부처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변화 되었다. 무엇보다도 수행 후에 달라진 점은 또 있다.
전에는 어떤 일이 생겼을 때, ‘~탓’으로 돌렸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들다가도 금방 “그래, 이것은 내 잘못이지”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당연하게 생각 했던 것들도 다르게 보인다.
한 끼의 밥을 먹을 때 얼마나 많은 분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던가. 물을 마실 때, 전기를 쓸 때, 지금 이렇게 편안하게 수행일기를 쓰는 이 순간에도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란 것을.
스님의 법문을 들을 때는 그 말씀을 들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만, 신묘장구대라라니 10만 독을 하고 나니 내 주변의 환경이나 사물들이 확연히 다르게 보인다. 10만 독을 이룬 후에 느끼는 전과는 다른 마음들은 아마도, ‘탐·진·치 삼독심과 업장’이 조금씩 소멸 되면서, ‘내 마음을 변화 시키고 있기 때문’일게다.
물론 지금도 ‘닦을(수행) 거리’는 나의 생활 속에 많이 존재한다.
“수행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하지만, 가장 보람된 길·행복의 길이다” 라고 스승께서 말씀 하셨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기고, 또 인연에 의해 사라진다”는 부처님의 가르침!
세상의 깊은 이치를 젊은 나이에 느끼면서, 수행하고 있으니까 나는 정말 행복하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이 행복감을 나만이 느끼는 것이 아닌 모든 이들이 이 같은 마음을 느껴보기를 간절히 발원하게 됐다.
언젠가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의 주인공 홍수환 선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말 중에 이 한마디가 나의 수행에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 “매일같이 남산의 계단을 오르는 체력 훈련을 할 때 계단 꼭대기를 보면, 몇 계단 오르지 못하고 지친다. 그러나 바로 앞 계단을 보면서, 한 계단만 더, 한 발작만 더 라는 마음으로 훈련하다 보면, 어느새 남산 정상에 올라가 있다”
이 말은 수행하는 이들에게도 참 많은 생각을 하게하고 또 수행을 하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되는 말인 것 같다. 나 역시 이 말을 되새기면서 하루하루 수행을 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난 앞으로 2010년 5월까지 신묘장구대다라니 100만 독을 향해, 한 독 한 독 정성스런 마음을 담아 독송할 것이다.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의 삶을 살고 있을 나를 상상하면서….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부처님 정법 만나서 공부 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오늘도 나는 대비주력 수행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또 마감한다. “신묘장구대다라니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첫댓글 나모라다나다라야약나막알야바로기제새바라야사바하....저는 대비주 108독하는데 2시간반이 걸리는데요 ? 비법이 따로 있는지요 ? 원명화보살님의 놀라운 기도정진에 찬탄을 보냅니다. 나무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저 또한 감사합니다 ()()()
()..
피와 살의 감촉은 보지만 아직 골수는 체득하지 못한 듯 합니다. 더 나아가 법인의 향기는 아직도 ....
저도 더 열심히 기도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_()_
제가 기도 정진하고 있다고 자부했던게 부끄럽고요...각성하게 됬어요~!나무상주시방불 나무상주시방법 나무상주시방승
진흟속에서 향기로운 연꽃이 피어났네요 건강하시구 성불하십시요
무아지경까지 가야하겠지요 ___()___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거듭나는 불자가 되도록 환희심을 북돋는 소중한 말씀 가슴깊이 새겨서 나태해지지 않도록 정진 해아겠네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