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서 金弘敍 (1886 ~ 1959)】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1886년 2월 3일 평안남도 함종군(咸從郡) 남리면(南里面) 훈련리(訓鍊里, 강서군 함종면 함종리로 개편)에서 김봉흡(金鳳洽)과 봉덕(鳳德, 성씨 미상)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
1904년 18세에 함종 함일학교(咸一學校)에 입학하여 20세인 1906년 졸업 후 함종의 기독소학교에서 교감으로 교무를 맡았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 연락원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매일신보 회계를 맡았다. 경술국치 이후 1912년에서 1915년까지 함종 사광학교(四光學校) 교감으로 지냈다. 1915년부터 평양에서 기독교 전도 활동을 하던 중 일제 경찰에 붙잡혀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16년 초 중국 난징(南京)의 진링대학(金陵大學) 신학원으로 유학하여 1919년에 졸업하였다. 상하이(上海)로 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평안도 대표로 선출되었다. 1919년 7월 하순 제5회 임시의정원에서 군무위원(軍務委員)에 뽑혔다. 한편 1919년 7월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회(史料編纂委員會) 간사로 선임되어, 국제연맹에 제출하기 위한 역사서인 『한일관계사료집』 4권을 편찬·간행하는 데 참여하였다. 같은 해 8월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에 상의원(常議員)으로 선출되었으며,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발간 업무를 맡았다. 임시정부 교통부 조직망을 통해 국제연맹에 목사를 파송할 것과 독립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유하는 서신을 평양 기독교계에 보내기도 하였다.
1919년 12월 임시정부 국무원 참사(參事)에 임명되었으나, 1920년 2월 사임하였다. 같은 해 7월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 의사원(議事員)에 선임되었다. 1920년 4월에는 임시공채관리국의 공채모집위원에 임명되어 난징, 상하이, 텐진(天津) 지역의 공채모집을 담당하며 중국인들에게 임시정부 공채를 소개·판매하는 임무도 맡았다.
1920년 9월에는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원동임시위원부 사업에 힘썼다. 상하이 프랑스조계 하비로(霞飛路) 날비덕로(辣斐德路) 216호에서 대성공사(大成公司)라는 상회를 경영하기도 하였다.
1920년 10월 간도참변이 일어나자 그 해 12월에 「만선(滿鮮)에서의 일본군의 참해(慘害)」라는 한문 전단을 배포하여 일제의 잔학상을 폭로하였다. 독립운동계에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소집 요구가 높아지는 가운데, 1922년 7월 안창호(安昌浩)·여운형(呂運亨)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해 국민대표회의 소집에 대한 각 세력의 주장을 조정하는 데 진력하였다.
1922년 10월 김구(金九)·여운형 등과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결성하고 기초위원이 되어 군인양성과 독립전쟁 비용 조달에 힘썼다.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문서과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1월 임시정부 교통부장에 선임되었으며, 1월 3일부터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는 공성단(共成團) 대표로 참석하였다.
1930년에는 임시의정원 상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안창호·이동녕(李東寧)·김구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1931년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임하였다. 1931년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가 창설한 상하이 공평사(公平社)에도 가입해 소비합작운동을 펼쳤다. 1933년 12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보선되었고,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정무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8월에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국무원 재무부원에 임명되었다.
1935년 7월 난징에서 의열단(義烈團)·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이 통합하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창당되자, 상하이지부장을 맡았다. 1937년 1월에는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10월 상하이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일부 단원들이 일제의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원동위원부의 해체를 선언하자 차리석(車利錫) 등과 함께 해체 선언을 부정하고, 원동임시위원부의 부활을 선언하였다.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에서 미주 흥사단 본부에 보고한 문서에 의하면 1944년에는 신장(新彊)에서, 1945년 2월에는 중국 간쑤성(甘肅省) 란저우(蘭州)에서 중국물자위원회 광부산국에 근무하면서 흥사단 단원과 민족혁명당원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1946년 4월 국내로 돌아왔다. 1947년 흥사단 국내위원부 상무위원, 1948년부터 1953년까지 흥사단 의사부원을 역임하였다. 한국일보 사장에 취임했으나 1952년 폐간되었다. 1959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73세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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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로부터 받은 편지(1936. 8. 10)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