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 봤을 모든 사람들,
예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누렸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과 고통들,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경제 독트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들,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 교사들,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 지도자들,
인간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여기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지구는 우주라는 광활한 곳에 있는 너무나 작은 무대다.
승리와 영광이란 이름 아래,
이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차지하려고 했던
역사 속의 수많은 정복자들이 보여준 피의 역사를 생각해 보라.
이 작은 점의 한 모서리에 살던 사람들이,
거의 구분할 수 없는 다른 모서리에 살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잔혹함을 생각해 보라.
서로를 얼마나 자주 오해했는지,
서로를 죽이려고 얼마나 애를 써왔는지,
그 증오는 얼마나 깊었는지 모두 생각해 보라.
이 작은 점을 본다면
우리가 우주의 선택된 곳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암흑 속 외로운 얼룩일 뿐이다.
이 광활한 어둠 속의 다른 어딘 가에
우리를 구해줄 무언가가 과연 있을까.
사진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까(?)
우리의 작은 세계를 찍은 이 사진보다,
우리의 오만함을 쉽게 보여주는 것이 존재할까(?)
이 창백한 푸른 점보다, 우리가 아는 유일한 고향을 소중하게 다루고,
서로를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는 책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 칼 세이건(1934-1996)의 '창백한 푸른점' 中 -
- 제 책꽂이에 펼쳐보이지 못하고 수십년 째 꽂혀만 있는
'코스모스'의 작가죠.
조디 포스터와 매튜 맥커너히가 주연했던
영화 '콘택트'의 원작자이기도 하고.
워낙에 유명한 천문학자라 많은 이들의 롤모델이 된 분이지만
오점으로 여성 편력과 자부심, 과시욕이 좀 있었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명언 제조기 수준으로 명문도 참 많이 남겼지요,
저 글도 그 중에 하나구요.
- 좋지요(?!) 한퀴에 읽히고.
이 문장을 유시민 선생이 최고의 문장으로 꼽았다더군요.
그 분 감성상 '딱이다' 싶은 글이에요.
그런데요, 저는 저 문장 읽으면 허무감이 밀려요,
칼 세이건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감정이죠.
광활한 우주에 창백한 푸른 점,
그 푸른 점 위에 눈에 띄지도 않을 미세한 티끌 하나.
그리고 그 작은 티끌의 버둥거림을 상상하며 역겹다도 싶어지죠.
이 분은 세상을 아름답고 따뜻하게 느꼈던 분이고
그런 세상이 더 따뜻하고 아름답게 변화하길 기대했던 분이에요,
그런데 제 눈에 세상은 그렇지가 못한가봐요.
삶이 너무 고댔나(?!)
내가 삐딱한 염세주의자 일 수도 있고,
또는 많은 것을 이룬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일 지도 모르겠네요.
'나는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심판하겠다고 하는
신을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칼 세이건은 불가지론자였어요.
아인슈타인처럼 도저히 신을 이해할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재밌는 건 '윤회'를 간절히 소망했어요.
인간의 삶이 이렇게 끝나버린 다는 것이 굉장히 억울했을까요.
머, 반드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보장은 없지만요.
'나는 죽는 순간 다시 살아나 나의 일부를 기억하고 생각하고 느끼면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라 믿고 싶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이 강렬한 만큼나는 그것이 헛된 바램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사후 세계가 있다면 내가 언제 죽음을 맞이하든..나의 호기심과 갈망은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우며,크고 깊은 사랑과 선으로 가득한 곳이기 때문에,
증거도 없이 예쁘게 포장된 사후 세계의 이야기로 자신을 속일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약자 편에서 죽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생이 제공하는 짧지만 강렬한 기회에
매일 감사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 칼 세이건의 유작 '에필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