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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77
11월17일[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연중 제3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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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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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BWcg5My4Ov8
(수원교구 조태현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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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날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그날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해루질을 해보니 은근 중독성이 있습니다. 쏟아져 내리는 별들을 등에 이고, 광활한 밤바다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어 다니다 보면, 여기저기서 게나 물고기, 골뱅이나 소라가 갑자기 나타나는데, 손에 넣기라도 하면 로또라도 당첨된 듯 기분이 좋아집니다.
성공적인 해루질의 관건은 뭐니 뭐니 해도 강력한 밝기의 랜턴에 달려있습니다. 평소 쓰던 랜턴이 빈약해서 새로 하나 장만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랜턴을 켜면 대낮처럼 밝아졌습니다. 희미한 바닷물 속도 시원시원하게 보이니 수확량이 많이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강력한 밝기의 랜턴이었는데, 동녘에 해가 떠오르니, 즉시 별 것 아닌 초라한 존재로 전락해버리더군요. 강렬한 태양 빛 앞에 가로등이나 랜턴 등 모든 빛이 존재감이나 가치를 상실해버렸습니다.
언젠가 사람의 아들이 영광중에 나타나셔서 세상과 인간을 심판하실 때, 가장 중요하고 영속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날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오시는 주님! 그분 자체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그분의 등장 앞에 다른 모든 존재나 대상들은 즉시 그 가치를 상실하고 맙니다. 마치 강렬한 태양 앞에 촛불 한 자루처럼 말입니다.
그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날 유일한 의미요 가치인 주님을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얼마나 잘 경청하고 실천했는가? 우리가 그분을 얼마나 빼닮았는가? 우리가 그분의 삶과 죽음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 바로 그것이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메시아께서 과월절 날 밤에 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밤은 심판이 시작되는 날, 그 밤에 주님께서 첫 단계로 하실 일이 악인들로부터 의인들을 분리시키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의인들은 하느님께 봉헌될 것이며, 악인들은 영원한 지옥에 버려질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천국과 지옥, 갈림길의 기준에 대해서 루카 복음 사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복음 17장 34~35절)
무시무시한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묵상해봅니다. 예수님 말씀은 일종의 강력한 경고입니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는 사람들, 영적인 삶, 하느님 중심의 삶은 뒷전인 채, 오로지 은행 잔고 늘이는 데만 전념하는 사람들을 향한
애끓는 경고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심을 늘 염두에 두고, 현세의 삶도 최선을 다하지만, 또 다른 삶, 영적인 삶, 하느님 안에서의 삶에도 소홀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분 나라에서의 영원한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날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그날 우리 인간들이 지닌 모든 것들이 얼마나 빨리 사라질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쌓아올린 명예와 재산, 한평생 추구했던 자리와 학벌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마지막 날 우리 앞에 남게 될 것은 그간 우리가 쌓아왔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작은 선행, 따뜻한 마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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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죽고 있다면 내 안에 생명이 있다>
며칠 전에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선종하신 최영훈 루카 형제님과 스테파니아 반장님과의 카톡 대화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루카 형제님이 신앙으로 거의 1년간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었는지 읽으며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저는 세례 받은 지 이제 일 년에서 이틀 모자란 초보 신자입니다. 그렇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주님의 온전한 사랑을 느끼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지난 3월 29일 요양병원에서 저녁 예배를 드리던 중, 그동안 하지 못했던, 그러나 꼭 해야만 했던, 주 하느님을 나의 모든 것 위에 놓고,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아버지 하느님을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세상에서 사랑했던 모든 것을 버린 날로, 아마 제가 태어난 이후 제일 많이 울었던 시간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저의 주 하느님! 저를 꾸짖고 책망하소서. 저의 그 얄팍하고 가벼운 신앙으로 아버지 이름을 욕되게 하였음을 눈물로 회개합니다.
육체에 찾아온 그깟 고통 앞에서, 너무나 쉽게 아버지를 원망하고,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 싶었으며, 아버지를 저주하고 싶었습니다. 차라리 아버지를 몰랐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으며, 지금까지 제게 베풀어 주신 수많은 은혜, 그리고 제가 겪었던 그 많은 성령체험을 원망했습니다.
제게 그러한 은총을 내리신 뜻을 따져 묻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새끼손톱의 1/6보다도 작은 진통제 앞에서 저는 한없이 약하고 미미한 존재임을 뼛속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저의 주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옳은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옳은 일임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제게 주신 이 고통에는, 저는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옳은 뜻이 있을 것을 믿습니다. 아버지, 눈물로서 반성하고 회개하오니,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저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소서.
오직 아버지께서만이 저의 생사여탈을 하실 수 있는 주권자이시며 권능자이심을 믿고 고백하오니, 아버지의 부족하고 미천한 아들 루카를 불쌍히 여기시어,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언제나 살아계시고 제 안에 계시며 또한 저를 지켜주시는 주 하느님 아버지. 모든 감사와 영광을 홀로 받으소서.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제게 허락해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소돔 위에 유황불이 쏟아져 내릴 때처럼 그렇게 세상이 멸망하리라고 하십니다. 세상이 아니라 우리 각자도 그렇게 반드시 주님께 가게 되어있습니다.
소돔 땅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고 있었지만 소돔인들은 그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롯과 아내와 두 딸이 소돔 땅을 탈출하자 소돔이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멸망을 피하고자 반드시 품고 있어야 하는 롯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한 분이 돌아가시기 1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품게 되자 그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죽음까지도 감사할 수 있게 받아들였습니다. 더 겸손해지고 더 감사하게 된다면 그 사람 안에 반드시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그분을 몰아내는 것이 진짜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루카 형제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또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2남 2녀의 막내로 온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게는 어떤 마음의 상처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올해 1월, 주님께서는 제 마음속 깊은 곳에 꼭꼭 숨겨져 있던 상처를 한순간에 제 눈앞에 펼쳐 보이게 하셨습니다.
정말 괴수와도 같은 울음과 눈물이 한동안 흘렀는데,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서는 주님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는 기도가 왜 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제게는 그들에 대한 알 수 없는 미움이 사라지고, 그들에 대한 고마움과, 그들에 대한 미안함만이 남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정말 살아계시며, 항상 제 곁에 계신다는 것을, 그리고 제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해준 소중한 기억이자 은혜였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제게 허락하신 이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아멘!”
우리 안에 롯과 같은 분을 반드시 모시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다면 나는 죽고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죽음인 내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내 안에 모십시다. 그러면 미움이 죽고 용서가 살며, 절망이 죽고 희망이 살며, 화가 죽고 겸손과 감사가 살아납니다.
내가 죽고 하느님의 기쁨이 샘솟는 것을 보면 절대 나를 그렇게 만드는 롯을 내어 쫓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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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초등학교 때의 기억입니다. 학년이 높아지면서 ‘소유’에 대한 집착도 커졌습니다. 짝꿍과 함께 쓰는 책상을 반으로 나누어 ‘줄’을 그었습니다. 줄을 넘어오지 말라는 경고의 표시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한심한 일인데 그때는 철이 없었습니다. 친구의 공책이 제 자리로 넘어왔습니다. 저는 옮기라고 하면서 경고를 하였고, 친구는 무시하였습니다. 저는 친구의 공책을 찢었습니다. 이번에는 저의 교과서가 친구의 자리로 넘어갔습니다. 친구는 옮기라고 하면서 경고를 하였고, 저는 무시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친구가 저의 교과서를 찢었습니다. 사실 공책과 교과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소유에 대한 저와 친구의 욕심 때문에 벌어진 참사였습니다. 결국 저와 친구의 이런 행동은 선생님의 레이더에 포착되었고 친구와 저는 아주 엄한 체벌을 받았습니다. 친구와 저는 책상을 나누었던 줄을 깨끗하게 지우면서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저의 공책이 넘어가도, 친구의 교과서가 넘어와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소유를 표시하던 줄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70년 전에 남과 북은 ‘정전협정’을 하였고 남과 북의 허리에는 ‘휴전선’이 생겼습니다.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면서 넘어갈 수도 없고, 넘어올 수도 없는 휴전선은 70년 남과 북의 분단선이 되고 있습니다. 북한은 땅굴로 도발하였고, 남한은 북한에 ‘총풍’을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휴전선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문제는 남과 북의 정치인들의 생각입니다. 휴전선을 자신들의 욕망과 정권을 채우려는 도구로 삼는다면 휴전선은 긴장과 갈등의 상징으로 남을 것입니다. 휴전선을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도구로 삼는다면 휴전선은 평화와 생태의 관광지가 될 것입니다. 북한에 개성공단과 같은 경제협력 공단이 10개가 더 생긴다면, 남한의 철도가 북한의 철도와 연결되어서 남한의 수출품이 북한을 통해서 유럽으로 수출된다면 우리는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문화강국, 경제강국이 될 것입니다. 북한의 숙련된 노동과 남한의 세련된 기술이 만나면 마치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부디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한과 북한의 국민들이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는 정치인들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자녀라고 자부하는,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하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목숨을 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들이 넘어올 수 없는 장벽을 만들었습니다. 팔레스타인들의 생명줄인 물과 전기를 통제하였습니다. 팔레스타인들을 정당한 재판 없이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 놓은 ‘선’으로 평화가 이루어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들은 지하에 땅굴을 파 놓았습니다. 장벽 안에 갇힌 팔레스타인들은 분노하였습니다. 물과 전기를 공급받아야 하는 팔레스타인들은 가난과 굶주림에 지쳐갔습니다. 정당한 절차와 재판 없이 체포당하고, 죽어야 하는 이웃을 보았습니다. 분노와 굶주림 그리고 저항은 결국 ‘선’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기약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참된 평화와 화해는 높게 쌓은 장벽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참된 평화와 자유는 제한된 물과 전기의 공급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참된 자유와 평화는 힘에 의한 억압과 탄압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을 알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저는 초등학생 때 ‘소유’의 상징인 ‘선’을 지우면서 친구와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외줄타기와 같은 긴장 속에서도 휴전선을 평화와 생태의 공원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도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답게 높은 장벽은 허물어 버리고, 자유롭게 왕래하며 참된 평화와 화해를 이루면 좋겠습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함께 새로운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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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7,26-37: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알지 못할 때 오시리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옛날 노아와 롯의 때처럼 세상 끝 날도 갑자기 닥칠 것이라 하신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방주를 짓는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방주를 짓는 일 자체가 설교였다. 그들은 산꼭대기에 방주를 짓는 노아를 비웃었다. 오늘날도 그들을 본받는 자들은 믿지 않는다. 구원의 방주인 교회가 세워지고 있지만, 그들은 역시 비웃고 있다. 홍수와 같은 심판이 그들을 위협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하였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27절) 홍수는 믿는 이들에게는 세례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려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31절) 우리는 어떤 시련을 겪더라도 영적인 삶에서 육적인 삶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간 사람은 지난날을 뒤돌아보거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돌아서지 마라.”(31절) 하느님의 말씀이 뿌려져 영적인 열매를 갈망하고 덕성스러운 수고의 열매를 거두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변치 말고 부지런히 열매를 거두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32절) 롯의 아내는 뒤를 보는 바람에 소금기둥이 되었다. 남편이 도와주었지만 뒤돌아보는 바람에 결국 산에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삶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야 그 생명을 얻을 수 있다. 하느님의 심판 때 두 사람이 전 생애를 함께 지내왔다 하더라도 하나는 선택을 받고 하나는 버림을 받을 수 있다. 선한 사람과 친하게 지냈다 해도 그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면 버림을 받는다는 경고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결과가 다르다는 것이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37절) 믿음이 있는 곳에는 성체성사가 있고 거룩함이 머문다. 언제나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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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람의 아들의 날>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 17,26-30)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는” 일은 인간들의 평범한 일상생활이고, 그 일들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외면하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죄’입니다. <영혼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 갖지 않고, 일상생활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의 날’은 표현으로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고, 뜻으로는 ‘심판의 날’입니다. ‘심판’은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일입니다. 모든 민족 사람들, 모든 종교 사람들이 다 대상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다른 종교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믿는 신의 심판을 우리가 왜 받아야 하는가?”라고 항의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시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심판의 대상은 모든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2-6)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신앙인들은 멸망을 당하지 않는다고 장담하는 말이 아니라,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평소에 늘 깨어 있으라고 권고하는 말입니다. 신앙인이라고 해도 신앙인답게 살지 않고 세속 사람들처럼 살고 있다면, 세속 사람들이 당하는 것처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 때에는 어떤 특권도, 특혜도 인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루카 12,47-48)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31-37)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인들이 실행해야 할 행동 지침인데, ‘그날’이 되었을 때 실행하면 되는 지침이 아니라, ‘지금’, 그리고 ‘평소에’ 실행해야 하는 지침입니다. 세간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라는 말씀과 들에 있는 이는 뒤로 돌아서지 말라는 말씀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뒤로 돌아서다.’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앞으로’ 나아가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창세 19,26) <그 이야기에서 ‘소금 기둥’은 ‘허무함’을 상징합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는 “육신의 목숨에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인데, 넓은 뜻으로는,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 못 들어오게 막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하느님 나라에 안 들어가서 못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이 세상의 허무한 것들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버려라.”라는 가르침입니다. ‘한 침상에 있는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함께 맷돌질을 하는 두 여자’는 모녀, 또는 자매, 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입니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라는 말씀은,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고, 식구라도 회개와 신앙생활을 대신 해 줄 수는 없고, 각 개인이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종말이 ‘언제’ 오느냐고 물었는데(루카 17,20), 제자들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두 질문 모두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라는 말씀은, 종말과 심판은 특정 장소에서 특정인들만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고, 모든 곳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날이 되면 모든 사람이 저절로 그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재림과 심판의 날이 언제 어떻게 오든지 간에, ‘바로 지금, 여기에서’ 회개하면서 신앙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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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한 때와 장소와 방식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재림을 맞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 때에 벌어질 일을 물과 불에 의해 멸망하게 된 구약의 두 사건, 곧 노아(창세기 6장-7장)와 롯(창세기 19장) 때와 같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재림’의 준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노아와 롯의 시대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노아 때에 대해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갔음을 말하고 있을 뿐, 특별한 죄나 부패를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은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사랑에 소극적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이 장차 일어날 일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오직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들처럼 비록 죄를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인간적인 세속의 삶에 빠져 주님을 알려 하지도, 하느님을 경외하지도, 하느님의 의로움을 구하지도 않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놓은 사랑을 실현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 25장의 ‘심판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이 사랑하지 않았음이 문제였음을 말해줍니다.(마태오 25장 31절-47절)
한편 롯의 때에는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불과 유황으로 멸망 당하였습니다. 롯도 노아와 마찬가지로 장차 닥쳐올 재앙을 미리 알고서 소돔을 떠나는 조처를 취하고 구원받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집 안에 있는 세간 곧 소유물에 대한 애착으로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장 33절)
결국 이 두 이야기는 ‘사람의 아들의 날’을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먹고 마심과 자신의 소유와 목숨의 보존에 매이지 말고, 그 때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의 삶이 어디를 향하고, 누구를 향하여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곧 죽음을 향하여 있는지, 생명을 향하여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장 37절)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썩어 부패한 시체의 삶이 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살아 팔딱거리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보존을 향한 죽음의 삶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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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얼마 전 ‘섬뜩한 오늘?’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글에서는 하느님께서 ‘오늘’이라는 일상의 삶 안에 찾아오실 때마다, 인간은 엇갈리게 행동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현재’, ‘오늘’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일지 모릅니다.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현재는 지나간 ‘과거’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이라는 시간은 해가 뜨고 지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발생하는 변화의 측정 단위로서의 물리적 시간이라기보다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개념으로, 순간의 선택을 통하여 삶의 방향이 바뀌는 기회의 때이며 결단의 때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해는 중천에 떠 있고 달력은 아직 넘어가지 않은 오늘입니다. 어제와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사람을 만나고 똑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일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도, 롯 시대에 소돔이 멸망하던 때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인 오늘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와 롯만이 ‘오늘’이라는 일상이 아닌 ‘오늘’이라는 마지막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물리적 시간인 ‘오늘’이 아닌 변화와 결단의 때인 ‘오늘’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섬뜩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또한 내가 변화하고 회개한 때의 시작점인 것처럼 일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순간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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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까마귀를 보면 기분이 나쁘다?>
이른 아침 까치를 보면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를 보면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까마귀 색깔이 검은 탓도 있지만 그놈이 심하게 울어버리면 영락없이 동네의 앓던 어르신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까마귀가 흉한 일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분이 떠날 것을 사람보다 미리 안 것일 뿐인데 까마귀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까마귀가 길조로 환영받습니다.
어린 까마귀는 어미의 극진한 도움을 받고, 커서는 제 어미를 철저히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을 때는 매일 같이 까마귀를 보았습니다. 까치는 아예 보지 못했습니다.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했으면 아마도 매일 기분이 언짢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3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국 정서로 말하면 ‘주검이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모여든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썩은 고기는 독수리를 끌어들이듯이 죄인들은 자기 삶에 심판을 불러들인다는 말씀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합니다. “사람들은 언짢은 죽음을 두려워하나 언짢은 삶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심판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금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회개의 문제입니다.
지금 여기서 천상을 이미 살고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심판은 하느님께서 하시기 전에 이미 내가 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삶이 심판의 자료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심판이 있게 마련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심판이 오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지금 여기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 비춰봐야 합니다. 심판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이미 내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는 이들은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야고 2,12)는 것을 알기에 결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그런 절망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하느님의 자비는 어떤 죄라도 용서하실 것이며, 이미 용서하셨습니다.”(성 예로니모)
심판을 두려워하지 말고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까마귀를 보고 기분 나빠할 것이 아니라 까마귀가 왜 몰려왔는가를 생각해야 할 시점입니다. 외적인 환경과 예기치 않은 일에 마음을 상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무질서를 보고 언짢아해야 할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심판의 날은 곧 구원의 날입니다. 하느님을 마주하는 날입니다.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이에게는 그야말로 심판이고 죽음입니다. 노아는 많은 사람의 비웃음에도 믿음으로 방주를 만들어 생명을 얻었고, 롯과 그의 가족은 구원받았지만, 롯의 아내는 순종하지 않았고 세상에 미련을 두어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희망을 당신의 자비에 맡기게 하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악대로 우리를 벌하지 마소서!”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크신 자비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멘.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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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교구청에 갈 일이 있을 때, 또 장례로 병원에 갈 때, 그밖에 송도를 떠나 도심지로 갈 때 자주 지나가는 동네가 있습니다. 바로 옛날에 그러니까 거의 50년 전에 살았던 동네입니다. 함께 차를 타고 있는 분에게 이 동네를 가리키면서, “이 동네가 예전에 자그마한 동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넓은 공터가 있기도 했지요.”라고 말하면 깜짝 놀랍니다. 왜냐하면 도저히 동산이나 공터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이거든요.
이 동네에서 제가 기억하는 예전의 모습은 전혀 없습니다. 동산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아파트들이 들어섰습니다. 갈대밭이 있었던 공터는 지금 많은 빌딩과 상가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당시에 어머니와 어머니 친구들이 함께 이야기 나누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때 어머니 친구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는 절대로 개발되지 않을 거야.”
이사 가자마자 곧바로 터미널이 생기는 등 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어머니와 친구분의 예상은 불과 몇 년 만에 완전히 틀렸습니다. 그 뒤 그곳이 계속 발전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예상도 틀렸습니다. 터미널은 다른 곳으로 이전했고, 이제는 개발이 멈춰진 완전 옛날 동네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예상은 늘 틀렸습니다. 그런데 자기 예상은 꼭 맞을 것처럼 생각하고 또 그렇게 기대합니다.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만이 틀림 없이 올바른 길로 가십니다.
하지만 여전히 틀린 주장을 맞는 것처럼 우기고 있던 우리가 아닐까요? 따라서 주님의 뜻만을 찾아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도 겸손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우리 역시 겸손의 모습으로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아 때, 사람들은 대홍수가 날 것을 알았을까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과연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예측할 수 있었을까요? 모두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종말을 준비하는 모습이 꼭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인간적인 기준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기준을 따르면서, 주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종말도 언젠가는 반드시 오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는 것입니다. 이 당연한 이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노아 시대의 사람들,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과 같은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뜻이 아닌, 주님 뜻에 집중할 때 잘 준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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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죽음으로써 살다>
루카 17,26-37 (사람의 아들의 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죽음으로써 살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살리기 위하여
죽어가는
이에게
영원한
삶을 위하여
넘어야 할
마지막 죽음은
느닷없이
오지 않으니
살리는 만큼
죽어가기
때문이요
죽어가는 만큼
살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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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애착이 아닌 사랑을>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어제는 하느님 나라를 다른 때, 다른 곳에서 찾지 말고, 지금, 여기서 찾아야 하고 만나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신다는 교리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교리를 가지고 오늘 저는 반대의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를 떠나야 하고, 지금 여기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 말입니다.
금요일도 하느님을 만나고 토요일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여기서도 하느님을 만나고 저기서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금요일이어야만 한다거나 여기여야 한다고 고집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니 지금과 여기를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그리고 롯의 아내처럼 재앙과 파멸이 불가피합니다.
지금과 여기는 떠나야지만 새로운 지금과 여기가 시작되고, 지금과 여기가 끝나야지만 영원과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니 지금과 여기는 살아야 하는 것이지 집착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집착하는 것은 더러운 영들이 게라사 지역을 더럽게 집착하여 돼지 떼 속에서라도 살려는 것과 같고, 그리하여 그 영혼들은 저세상 곧 하느님께 가지 못하고, 이 세상을, 아니 게라사 지방을 떠나지 못하고 영원히 떠도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애착도 집착과 마찬가지임을 또한 깨달아야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가지 못함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여기에 두고 떠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하느님께 기쁘게 감으로써 내 사랑하는 이들도 기쁘게 하느님께 따라오도록 하는 것이 애착이 아닌 사랑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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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과 지혜>
-무지에 대한 답은 주님이시다-
"네 근심 걱정을 주께 맏겨드려라. 그분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이 흔들리게 버려둘리 없으리라."(시편 55,23)
오늘은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입니다. 어제의 젤투르다 성녀와 13세기 동시대 분입니다. 24년 동안 성녀의 짧은 생애를 일별해 보니 헝가리 국왕의 공주로 태어났지만 이보다 복잡하고 기구하고, 불쌍하고 불행하고 불우한 성인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생 지옥같은 절망의 시궁창에 뿌리 내린 연꽃같은 청순한 사랑과 지혜의 성녀였습니다. 말그대로 지옥같은 환경 속에서 천국을 산, 영적승리의 삶을 산 성녀였습니다.
고작 24세로 선종했지만 참으로 가난과 겸손, 깊은 사랑의 감동적인 삶을 사셨고, 빵제조업자와 빵집, 그리고 자선사업기관과 작은 형제회 재속 제3회의 수호성인으로 독일인들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성녀입니다.
성녀의 영성지도 신부였던 콘라드의 증언입니다. “이 여인만큼 관상에 깊이 젖어 들어간 이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수사들과 수녀들이 여러번 목격했듯이 그녀가 기도의 은밀함에서 나올 때 그 얼굴은 광채로 빛났고 그 눈에서 태양 광선과 같은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하느님의 빛이 마음속 어둠을 몰아냅니다. 지혜의 빛, 말씀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어제는 지혜를 사랑하자는, 지혜 예찬에 대한 강론이었습니다. ‘정주의 지혜’라 명명했듯이 정주의 사랑, 정주의 지혜입니다. 조선시대의 집중 최고는 지리산에 자리 잡은 남명 조식의 산천재山天齋라 하며 이에 관한 내용을 일부 인용합니다.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뤘던 대학자였습니다.
-이상하게 지리산은 사람을 감동시킨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리산에 가면 그냥 코가 찡해진다. 그 덩치가, 그 느림이 감격스러우며, 그 골격이 감격스럽다. 무엇보다도 싫은 내색, 좋은 내색 전혀 없이 사람을 턱 하고 안아주는 품이 감격스럽다. 그래서 지리산 근처에만 가도 마음이 푸근해지며, 사람으로 태어나 이왕이면 지리산의 품 정도는 되어야 하지 하고 스스로 다짐해 본다. 그 지리산 천왕봉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바로 남명의 집, “산속에 하늘이 담긴 집”이란 산천재가 있다. 조선시대의 집중 최고가 산천재다. 남명 조식은 하늘을 담은 산이었고, 산에 담기는 하늘이었다.’(집의 미래;임형주, 노은주 23쪽)-
저는 말을 바꾸어 한국 수도원 중 최고는 불암산 정상이 가장 잘 보이는 요셉 수도원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산천재란 뜻대로 “산속에 하늘이 담긴 수도원”이요 여기서 평생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수도자들은 ‘산속에 하늘을 담은 사람들’입니다.
하늘이신 하느님을 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을 담은, 닮은 사람들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제 자작 애송시 ‘하늘과 호수’입니다. 하늘을 담은 산도 있지만 하늘을 담은 호수도 있습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1997.2
요즘 몇 년동안 제가 즐겨 읽는 책들은 위인들의 평전이나 자서전입니다. 이분들의 사랑과 지혜를 배우기 위함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가장 존경하는 분이 누구냐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망설임 없이 아버지라 말할 것’이란 분의 부모에 대한 감동적인 일화도 나누고 싶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직장 때문에 주말 부부로 떨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내와 아이들만 있는 집에 도둑이 들어 아끼던 패물들을 모두 도둑맞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당황하며 남편에게 찾아가 소중한 패물 모두를 도둑이 가져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긋이 아내를 바라보던 남편은 아내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합니다. 얼마 후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보석 가게였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맘에 드는 반지와 목걸이를 모두 사줄 테니, 도둑맞은 물건에 대하여 속상해하지 마시오. 어떠한 보석도 당신보다 소중한 것은 없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입니다. 40년 전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지금도 제 가슴에 새겨 있는 부모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경계에서;김성진 187쪽)
그대로 사랑이 지혜임을 깨우쳐 주는 감동적 일화입니다. 오늘 역시 미사 독서와 복음은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임을 알려 줍니다. 좀더 분명히 하면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이며,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는 자연숭배의 어리석음에 대해 말합니다. 자연의 신격화, 자연의 우상숭배야 말로 무지의 소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작자는 무지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며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립니다.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 겉모양에 정신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용서받을 수는 없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에 대한 책임은 궁극으로 그 자신에 있다는 엄중한 말씀입니다. 이래서 지혜 사랑, 지혜 공부, 지혜 훈련입니다. 바로 이런 자연 숭배자에 대한 답이 오늘 화답송 시편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한 지혜와 사랑의 시편작가입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복음은 일상의 삶에서 무지의 육적 욕망의 탐욕에 빠진 이들의 멸망에 대해 말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깨어 있는 자들과는 반대로 이들은 현세의 것들에 깊이 중독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잊고 세상 것들에 빠져 중독되어 살다보면 괴물도 되고 급기야 폐인도 되는 경우 얼마나 많은지요!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 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반복되는 역사같아 마음이 섬뜩해집니다. 물과 불의 심판 다음엔 무엇일까요. 인간의 무지와 무절제의 탐욕으로 인한 대량소비와 무한한 쓰레기들로 공동의 집인 지구의 병이 날로 깊어지니 말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세상 것들에 집착하여 뒤돌아 보다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깨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똑같은 자리에서의 삶인데 내적 상태는 이렇게 달랐다는 것입니다. 내적으로 깨어 있는 영혼은 구원이지만 생각없이, 영혼없이 살아온 이들에겐 자업자득, 버림받는 심판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제자들과 예수님이 주고받는 말씀도 오늘 우리에게 주는 화두입니다.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그 누구도 하느님의 심판을 빠져나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뜻합니다.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疎而不失), 천지 자연의 법칙은 광대하여 엉성한 듯 보이지만, 악인에게 벌을 주는 일은 빠뜨리지 않는다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직답을 피합니다.
한마디로 시체처럼 살지 말고, 오늘 지금 여기 삶의 꽃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깨어 본질적 깊이의 맑고 향기로운, 지혜롭고 투명한 삶을 살라는 말씀이겠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뿐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이자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뿐이며 이 거룩한 미사 또한 답이 됩니다.
평생 영성교육에 매일미사보다 더 좋은 공부도 없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랑과 지혜 가득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시편 5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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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17,30)
<깨어 준비하고 있자!>
오늘 복음(루카17,26-37)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인 사람의 아들의 날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 결정적인 때에 일어나게 될 모습을 우리에게 전하면서 지금 정신차리고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노아 때와 롯 때처럼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정신차리고 깨어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그 때에 그들에게 일어났던 똑같은 멸망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모습을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재속 프란치스코회 주보 성인이시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이신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이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은 부잣집 공주로 태어났는데, 남편이 전쟁에서 죽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신 분'이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행함으로써, 깨어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같은 마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깨어 준비하고 있도록 합시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의 본질이요 결정체인 십자가를 바라보고, 이 '십자가 묵상'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서 기뻐 즐거워 합시다!
"하느님, 복된 엘리사벳에게,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공경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섬기게 하소서."(본기도)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지혜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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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C1CUqaX_U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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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 37)
반드시
오고야 말
우리 모두의
죽음입니다.
끝내 가야 할
우리 모두의
여정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고
창조가 있으면
반드시
종말이 있습니다.
죄인에게는
빛의 심판이
기다립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썩어 없어질
시체에
마음 빼앗기지
않습니다.
방향을
잃어버린 시체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시체는 시체를
갉아먹듯
죄는 죄를
갉아먹으며
모여듭니다.
시체는 가족의
근황을 결코
묻지 않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생명의 빵은
생명의 빵으로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우리가 쌓아놓은
모든 것은
이처럼
허물어지고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욕심을 물어뜯고
미움을 탐색하는
끝없는
시체놀이를
멈춥니다.
시체가 사는 곳은
영원한 죽음이지만
생명이 사는 곳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시체는 목적지를
모릅니다.
생명을
생명으로
바라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죽음이 덮쳐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이 믿음을
정화하듯
십자가는
십자가로
우리를
정화합니다.
우리 자신이 죽어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야 할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그 길 위에
우리가
있습니다.
뼈와 살이
생명의 빵과
함께 춤추는
생명의 길입니다.
시체와 독수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뵙는
생명의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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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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