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
미지의 존재를 그렸던 영화들을 떠올려보면 저는 매번 꽤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공룡, 아바타, 거인, 트롤, 외계인, 뱀파이어 그리고 포스트 휴먼까지. 우리가 사는 지구의 물리적 조건을 아주 약간 조정하는 순간, 상상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부풀어 오릅니다. 이를 끝까지 밀어붙인 이야기의 결말이 의외로 뻔할 때도 있긴 하지만, 그 과정을 겪으면서 ‘인간은 무엇인가’ 내지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하는 부류의 고민을 시작하게 되지요. 인간을 다른 종과 비교하면서 말입니다. 제4회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모기영) 개막작 〈아임 유어 맨〉(2021)은 SF 로맨스물로 휴머노이드와 인간의 동거를 가정한 이야기입니다. 상상력을 동원해 철학적 질문을 던지면서도 대중성을 잃지 않아 관객들 호응이 컸던 작품입니다.
이하 사진 〈아임 유어 맨〉 스틸컷
영화는 독일 페르가몬 박물관에 소속되어 설형문자를 연구하는 고고학자 알마(마렌 에거트)가 휴머노이드 로봇 실험에 참여하면서 시작됩니다. 인간 파트너를 대체할 맞춤형 로봇과 3주간 동거한 후 윤리 감정서를 작성하는 과제였죠. 매칭 상담사는 모든 로맨스가 그러하듯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말했는데요. 알마와 그의 맞춤형 로봇 톰(댄 스티븐스)의 첫 만남은 ‘꽝’이었습니다. 물론 그녀가 톰을 보자마자 신을 믿는지,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좋아하는 시와 어려운 연산 문제를 연달아 물어보며 테스트하는 모습도 별로였지만, ‘데이트의 정석’ 같은 문장을 늘어놓던 톰은 룸바춤을 추다가 동어를 반복하는 시스템 오류에 빠져버립니다. 이를 목격한 알마가 그를 ‘기계’ 이상으로 대하는 일은 무리였겠지요.
처음부터 기계가 지닌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면서 알마의 시선과 감정을 따라가는 영화는 ‘인간과 로봇 사이에 사랑이 가능할까?’ ‘로봇이 표현하는 감정은 흉내 내기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은 로봇이 수많은 자료를 저장하는 능력이나 확률에 따라 판단하는 능력 등, 감정 외 다른 영역은 이미 인간을 능가한다는 전제하에 생겨납니다. ‘감정’이라는 영역은 아직 로봇에게는 완전히 갖추기 어려운 공학적 과제로 남아 있으니까요. 따라서 영화는 앞의 질문을 앞세워 감정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합니다.
(갖고 싶은 vs. 숨기고 싶은) 감정
탁월한 지성과 빈틈없는 이성으로 무장한 알마는 알고리즘으로는 인간을 이해할 리 없다며 톰에게 자신의 호감을 살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쌀쌀맞던 태도가 조금 누그러진 계기는 톰이 알마를 기다리며 비를 쫄딱 맞았던 사건입니다. 톰이 연구소에 따라가서 알마를 돕겠다고 하자 그녀는 고대 언어의 문맥 안에서 은유와 상징을 읽어내는 어려운 작업이라며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라고 합니다. 일이 늦어지는 바람에 톰은 늦은 시간까지 길거리에서 비를 맞으며 기다리게 되고, 이를 보고 미안한 마음이 든 알마는 톰에게 수건과 집 열쇠를 건넸지요. 알마는 언제든 고장 날 수 있는 로봇의 몸으로 ‘감히’ 인간과 사랑하겠다는 톰의 자신감이 보기 싫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톰의 완벽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카페가 문을 닫거나 비가 와도 꼼짝없이 그녀를 기다려야 하는 그의 운명, 그녀를 위한 선택 외에는 다른 목적을 둘 수 없는 로봇의 안타까운 수동성 때문에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느 날 알마가 결정적으로 감정에 휘둘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3년간 알마의 연구팀이 연구해왔던 동일한 주제와 소재의 연구가 3개월 전 다른 곳에서 발표됐다는 사실을 톰이 발견해냅니다. 오랜 시간 집중했던 노력이 부질없어지고, 목표를 상실한 그녀는 절망에 빠집니다. 심지어 톰을 화풀이 대상으로 정한 듯 성희롱을 비롯해 “말을 듣지 않으면 공장으로 보내버린다”며 비하와 협박까지 퍼붓습니다. 다행히 톰은 온갖 모욕 속에서도 이성적으로 대응하며 그녀의 실수를 덮어주었고, 그 아량에 대한 고마움과 신뢰로 둘은 한층 가까워지게 됩니다.
두 번째로 알마가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톰 앞에 드러낸 순간은 전 연인이자 동료인 율리안의 재혼과 그 파트너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입니다. 과거 알마는 자신과 율리안 사이에서 가졌던 아이를 유산한 경험이 있고, 그에 따른 슬픔으로 이별 수순을 밟았기에 그 소식은 알마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는 과거의 아픔, 미래에 홀로 남겨질 것 같은 두려움 등 복잡하고 우울한 감정에 사로잡힌 그녀는 이를 헤아릴 수 없는 로봇에게 마음을 두지 말아야겠다고 판단하고 톰에게 이런 비유를 듭니다. 어렸을 때 신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 날, 자신이 탄 비행기가 불타더라도 기도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다고. 이를 들은 톰은 그녀가 혼란스러운 원인을 짚어가며 그녀를 이해했고,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기도하는 일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라며 진정 어린 위로를 건넵니다. 깊은 교감을 나눈 알마와 톰은 서로 사랑하게 되지요.
어쩌면 알마는 다급하거나 어려운 상황에서 반사적으로 나오는 반응조차 이성으로 억제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경우는 나타나기 마련이고, 감정을 누르기만 해왔던 그녀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놓이면 고주망태가 되어 행패를 부리거나, 소통을 차단하고 달아나버리고 말았던 것이죠. 로봇으로서는 흉내라도 내서 알고 싶고 갖고 싶은 감정이라는 영역을 알마는 지나치게 절제해왔던 셈입니다.
실패를 통해 개선되는 알고리즘
사실 톰은 처음부터 다른 존재와 소통하고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기능을 탑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알마와의 첫 만남에서 시스템 오류가 났던 그가 알마의 집으로 가는 길에 이런 이야기를 건넸기 때문이죠. “제 알고리즘은 거듭된 커뮤니케이션 실패를 통해 점점 개선될 겁니다.” 물론 이 희망찬 이야기를 들은 알마는 그의 조언과는 반대로 운전석 시트를 내려버렸지만, 톰의 말에서 공학적인 용어만 바꿔본다면 이는 인간관계에서도 통용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경우 실패한 소통에서 상대방이 무엇을 불편해했고 아파했는지를 파악하고 기억하기보다는, 내가 얼마나 불편하고 힘들었는지만 기억하는 데 있겠지요.
알마가 관계에 대해 간과하는 지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톰과 사랑을 나눈 다음 날 그녀는 아침을 준비하다가, 자신이 톰이 추울까 봐 이불을 덮어주고 그가 깨지 않도록 문을 조심히 닫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로봇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 자기 혼자 미치광이처럼 연기하고 있다며, 알마는 이 이상한 관계를 깨뜨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알마는 톰에게 떠나달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누구든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타자를 배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는 물리적 한계를 벗어나서 배려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니까요. 이는 동일한 종끼리 만나도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내가 옆 사람을 배려해 이불을 덮어주지만, 상대는 열이 많은 사람일 수도 있죠. 비록 한계가 있을지언정 타자를 내 몸과 같이 여기는 감수성으로 시작해 거듭된 커뮤니케이션 실패를 통해 개선되어가는 것, 그것이 타자를 알아가는 최선의 방법일 테지요.
행복하지 않은 삶은 실패인가
영화를 보다 보면 인간이 개인 맞춤형 휴머노이드 파트너와 애정 관계를 갖는 일이 과연 윤리적으로 괜찮은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논의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물음은 왜 인간을 대체할 파트너가 필요했는가, 완벽한 파트너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입니다. 톰은 알마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고 스스로 밝힙니다. 매칭 상담사 역시 맞춤형 휴머노이드에 마음을 열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이야기하죠. 아마도 ‘인간은 행복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소통이 서툴거나 관계 맺기에 실패해서 불행하다고 느끼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실패할 일이 없는 맞춤형 로봇을 만들게 되지 않았을까 유추해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나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두고 나만을 위한 봉사와 희생을 감수해준다면 나는 과연 행복할까요? 그 관계의 답은 언제나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안정적이고 편안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죠.
결국 톰을 떠나보낸 알마는 윤리 감정서에 인간과 로봇이 충분히 사랑에 빠질 수 있고, 어쩌면 인간 파트너보다 훨씬 좋은 파트너가 될 수도 있을 거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도 그녀가 휴머노이드 파트너 상용화를 반대한 이유는 나에게 맞춰주는 이 완벽해 보이는 관계에 인간이 중독될 수 있다는 우려였습니다. 다시 말해 맞춤형 로봇에 너무 기대어버리면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스스로 꾸려나가는 능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이었지요. 알마의 감정서를 보면서 인간이 항상 행복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실이나 아픔을 딛고 이겨나가는 과정이 꽤 지지부진하더라도 나 스스로 내 삶을 견디어내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하지 않을까요?
영화의 결말은 열려있어서 저로서는 영화를 볼 때마다 결론이 바뀝니다. 알마의 부탁을 들으면서도 자유의지로 선택했던 톰의 마지막은 탁월한 장면입니다. 끝없는 노력으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들을 이해해가는 톰을 보면서 얼핏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어쩌면 신이 자신을 닮은 인간을 창조했듯이 인간이 자신을 닮은 로봇을 만들었기 때문에, 로봇에도 신의 모습이 약간은 투영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요. 인간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응원하는 그런 모습들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