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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새 출발로 아름다운 가족의 달☜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마6:1-4절)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
우리는 해마다 연말(年末)이 되면, 구세군들이 자선냄비를 걸어 놓고, 종을 치면서 모금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즘 우리 주위에는 수재민이나 결식아동 등을 위한 구제와 모금 운동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돈을 주고, 물건을 사고파는 거래이지, 그냥 남에게 돈을 주고 돌아오는 자선(慈善)이나 구제(救濟)가 아닙니다.
한편 요즘은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한 모금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어떤 구제를 위한 특별방송 같은 것을 하면, 사람들이 돈을 들고 일 열로 서서 잠깐 한 번 텔레비전 화면에 자기 얼굴을 비추고, 모금함에 돈을 넣고 갑니다.
또 신문사에 찾아가서 헌금을 전달하면, 그날 신문에 동그랗게 조그만 사진과 함께 누가 얼마를 기부했다는 사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 집니다. 확실히 이런 식으로 모금을 하면, 그냥 아무것도 없이 모금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실적(實績)이 좋은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기왕 좋은 일하면서 자기 이름도 드러내는 것을 보람되게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 백성들의 선행(善行)이 다른 사람들과는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나라 백성들인지를 말씀하시고, 결국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우리들에게 실현하고자 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단순히 종교적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개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즉 얼굴이 좀 마르고, 눈은 쑥 들어갔으며, 목소리는 기도를 많이 해서 약간“히스키”하고, 농담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갖고 있는 생각은 여러 사람들 중에서 종교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진 사람은 하나님나라 백성입니다. 즉 뚱뚱할 수도 있고, 전혀 진지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신앙과 종교에 전혀 관심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 안에 있는 죄 성을 깨닫고, 하나님과 자신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 사람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두 번째로 말씀하신 것은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율법(律法)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들로 하여금 행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오른 뺨을 때리는 자에게 보복(報復)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원수(怨讐)를 사랑하며, 나를 핍박(逼迫)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자리까지 나아가게 하는 것이 복음(福音)의 목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 믿는다는 것은 기독교라는 하나의 종교를 가지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惡)한 자나 선(善)한 자에게 비나 햇빛을 나눠 주시는 것처럼, 마치 내가 이 세상의 하나님인 것처럼 사랑을 베풀면서 사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처럼 위대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하듯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베푸는 위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떻게 신(神)도 아닌 우리 인간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어지면, 첫걸음을 옮기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편 네 편을 나누지 않는 것입니다. 즉 사랑의 한계선을 긋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라고 생각되면, 믿음의 첫 걸음을 옮겨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요, 복음이지, 교회 안에서“내가 몇 년을 믿었다거나 내가 얼마나 똑똑하냐! 면서 자랑하는 것은 믿는 것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복음(福音)은‘나’로서는 할 수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원론(原論)을 가지고 말씀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훨씬 더 구체적인 각론(各論)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위나 삶이 다른 사람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 를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존재에 대한 것(beina)이라면, 이제는 그런 존재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삶(doing)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달라져야만 삶이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사람이 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행동과 변화를 하나님은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Ⅰ.그리스도인들의 의(義)
결국 그리스도인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1절)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의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주의(注意)하라고 하십니까? 어떤 의(義)를 행할 때 사람에게 보일 의도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의(義)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는 것입니다.
이 뒤에 보면, 예수님은 여기서 말한 의(義)를 예(例)를 들어“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칫“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종교적 행위를 의(義)라고 말씀하시는 구나”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죄인(罪人)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즉 죄(罪)가 청산되어야 하고, 바른 관계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의 의(義)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바른 관계에서 행하는 행위”를 의(義)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 생활 전부가 여기서 말하는 의(義)입니다.
단순히 종교적 행위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 전부를 사람들이 보든 보지 않든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특별히 종교적인 행위들을 의(義)로 예(例)를 들었을까?
그것은 이 세상에서 그의 동기(動機)를 가장 구별하기 어려운 것이 종교적 선행(善行)들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는 선(善)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과언 어떤 생각을 갖고, 이런 일 하는지는 정말로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분간하기 어려운 이런 행위들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에서 그 동기(動機)를 분간하기 가장 어려운 것이 하나님과 관계되는 일들입니다.
물론 다른 것들도 다 중요하지만, 특별히 하나님과 관계되는 것은 그 본인과 하나님 외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과의 관계있는 이런 종교 행위들이 위선적(僞善的)이라면, 그의 나머지 생활이 부패(腐敗)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아마 아직 많은 사람들이 삶속에서 나의 필요가 구체적으로 채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혹시 좀 더 안정된 직장이나, 결혼 대상이 나타나는 것이나, 미래의 진로(進路)가 열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우리가 항상 썩지 않고, 싱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하고, 그 통로(通路)가 막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곧“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지 않는” 이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드리며, 찬송하는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면, 우리는 더 이상 생명력이 있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힌 다”는 것은 곧 사람에게 보일 목적으로 기도하고, 사람에게 보일 목적으로 찬송하고, 사람에게 자랑할 목적으로 헌금하고, 사람에게 나타낼 의(義)로 금식하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훌륭하고, 모범적인 사람이 어느 한순간에 사기꾼이나 간음한 자로 뉴-스로 발표되는 것을 보면서“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이것은 무엇인가 분명히 잘못된 거야 그렇게 거룩하고 훌륭한 사람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위선적(僞善的)인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는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위선적(僞善的)이거나, 형식적(形式的)이 되지 않도록 목숨을 걸고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6:1절)...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賞)을 받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상(賞)”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죽은 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받을“상(賞)”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恩惠)를 포괄적으로“상(賞)”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의 도움으로 지탱(支撑)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은혜(恩惠)와 능력(能力)이 우리를 지켜주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보일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더 이상 이런 은혜(恩惠)와 능력(能力)을 공급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사람에게 보일 목적으로 선을 행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얼마나 신앙이 좋은지를 보일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서“저분 좀 봐 저렇게 기도하는 것을 보면 저 사람은 신앙이 대단히 좋은 분이셔. 우리 같은 사람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다고”라는 말을 들을 목적으로 기도하거나, 열심을 내는 것은 위선(僞善)입니다.
왜 이런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를 막을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실수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은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일단 사람은 눈으로 드러난 것으로만 말을 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일주일의 생활을 모두 다 알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일주일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리 죄(罪)를 많이 지었어도 한번 길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신앙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 자신도 그렇게 착각한다는 사실입니다.
일주일 동안 더러운 생각을 수도 없이 하고, 음란하고 추악한 것들을 내내 즐기다가 일주일에 딱 한 번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나면, 자기 스스로도 감동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 생활로 살아왔는지를 모두 잊어버리고, 스스로도 감동의 도취(陶醉)에 빠집니다. 이런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구역질을 느끼십니다.
하나님께서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께 나와서 무엇인가 봉사하려고, 큰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다른 모든 것들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즉 지금까지 내가 사람들을 만나면서 주고받았던 것들이나, 내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갖고 있던 원한(怨恨)관계나 분노(忿怒)나 미움 같은 것들은 모두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자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입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자들입니까? 한 순간이라도 죄(罪)를 짓지 않고는 넘어가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안에는 마치 시커먼 시궁창이 열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즉 우리가 하는 그 헛된 말들의 의미를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우리 생각 속에 한 번이라도 들어왔다면, 얼굴에 침을 뱉고, 다시는 상종(相從)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마치 미세먼지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악(惡)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체면(體面)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自尊心)을 내세우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내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넘어져야 했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깊은 탄식(歎息)하면서 다 토(吐)해 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십니다. 나를 완전히 새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십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열어놓지 않고, 사람에게나 잘 보이려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헌금하는 사람은, 겉으로는 신사적(紳士的)이요, 경건(敬虔)해 보이지만, 그 속은 이미 썩어 문드러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상(賞)”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시고, 새 결단을 주시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Ⅱ.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구제(救濟)
예수님께서는 조금 전에 말씀하신 의(義)의 예(例)로 가장 먼저 구제(救濟)를 말씀하십니다.
6:2절)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왜 예수님께서는 가장 먼저 구제(救濟)를 예(例)로 들어 말씀하셨을까? 즉 왜 예수님이 여기서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이 아니라, 구제(救濟)를 들어서 말씀하시는지? 의문(疑問)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는 구제(救濟)보다는 헌금(獻金)이 더 하나님 앞에서 생색을 난다고 생각하겠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아무리 많이 바쳐도 그들에게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왜 예배로 예(例)를 들어서 말씀하지 않으실까? 유대인들은 예배는 당연히 다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별한 예(例)가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찬양을 예(例)를 들어서 말씀하시지 않는 것일까? 모든 사람들이 다 찬양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시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돈이었습니다. 그들은 역시 돈이라고 해야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지, 다른 것으로는 생색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에게 대단하다고 생각된 것은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救濟)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상적인 종교 행위 외에 사람들이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을 예(例)로 드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남들이 하지 않는 종교적인 행위를 할까? 다시 말해서 남들이 하지 않는 구제(救濟)를 하거나, 남들이 하지 않는 정도의 기도(祈禱)를 하거나, 금식(禁食)을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는 자기 안에 있는 종교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서입니다. 사람의 욕망 중에서 가장 고상한 욕망은 종교적인 욕망입니다. 물론 우리 안에는 식욕(食慾)과 성욕(性慾)과 소속(所屬)감과 같은 기본적인 욕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욕망 중에서 가장 고상(高尙)한 욕망은 자기 자신을“어떤 종교적인 세계에 자신을 바쳐버리는”것입니다. 이기 서 중요한 것은“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그렇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죽은 후, 십 년이나, 아니면 백 년 후라도 누군가가“이런 위대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준다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들을 업적(業績)을 남기기 위해 던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성자(聖者)나 혹은 성인(聖人)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경우는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특별한 인정을 받고 싶을 그때"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라면, 똑같은 조건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누구에게 특별이 더 관심이 갖을까? 아무래도“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특별한 희생을 하거나 특별한 노력을 하는 그 사람”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헌금을 하거나, 특별한 희생을 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더 잘 들어 주실 것이라는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구제(救濟)를 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사람에게 영광을 얻을 목적으로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나팔을 붙었느냐? 불지 않았느냐? 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많은 돈을 기부할 때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광고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어떤 특별한 시간을 마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존경하는 이분이 바로 이만큼의 돈을 기부하였습니다.”라고 발표하면, 사람들이 짝, 짝, 짝, 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요즘 기부행위나 헌금을 하면서 이렇게 하지 않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널리 알리면, 이 사람은 자신은 물론이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될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해야 악(惡)한 사람들이 자기 돈주머니를 풀지, 그렇지 않으면 누가 남을 위하여 생돈을 내놓으려고 하겠습니까? 사실 장학(獎學)사업이나 가난한 자를 구제(救濟)하는 이런 선(善)한 일을 위해서는 가진 자들이 돈을 좀 내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로 하여금 돈을 포기하게 하려면, 더 고상한 욕망을 자극(刺戟)해야만 합니다. 즉 당신이 이 정도의 돈을 포기하면,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당신을 선(善)하다고 하겠느냐? 고 부추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에서도 이런 기부행위에 대해서는 과세(課稅)를 하지 않음으로써 은근히 사회사업 쪽으로 돈을 쓰도록 유도합니다. 이것이 사회에서 하는 것이요, 모두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불신자(不信者)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제(救濟)나 헌금(獻金)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6:2절).......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고 하시면서 6:3절)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Ⅲ.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6:3-4절)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의 물질을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쓰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에 비하면, 매우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내 놓는 것뿐입니다. 즉 이래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론적(理論的)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사실 우리는 나의 돈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내놓기에 인색합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불선(不善)한 의도와 목적으로 돈을 내놓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선적(僞善的)인 구제(救濟)나 헌금(獻金)은 하기 싫다면서 아예 돈을 내놓지 않을 가능성도 많습니다.
사실 우리의 양심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모르고, 진리(眞理)를 모를 때는 정말 열심을 냈다는 것입니다. 즉 헌금도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하려고 노력했고, 봉사도 힘껏 하고, 열심도 많이 냈습니다.
그런데 이미 구원받았으며, 이제 그런 것이 나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는 더 인색(吝嗇)해 집니다. 즉 기도도 별로 하지 않고, 헌금도 인색하고, 남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실 사회봉사에 있어서 천주교와 개신교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천주교가 선행(善行)에 열심을 내는 이유는 구원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성자들의 공로를 빌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나의 선행이 이미 죽은 자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사람이 공로가 부족한 채로 죽으면, 일정한 기간 동안 연옥에서 고생을 해야 하는데, 그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 살아 있는 사람이 헌금을 하거나, 기도문을 외우거나 해서 그 기간을 단축시켜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들의 선행(善行)은 구원을 담보로 한 것입니다. 즉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 불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훌륭하게 사회사업이나, 구제를 합니까?
그러나 개신교는 이미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하나의 이유로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이 되지 못한 노예들은 여전히 열심히 수고를 하는데, 정작 아들이 된 자들은 농땡이를 부리면서 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개신교의 헌금은 축복(祝福)을 바라보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당연히 나의 돈을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쓰는 것이 아니라,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더 복(福)을 주시기 때문에 헌금하는 것입니다.
만일 노예 취급을 하면서 당장이라도 헌금이나 구제를 위한 돈을 내놓지 않으면, 재앙(災殃)을 내린다고 위협하면, 사람들이 많은 돈을 내놓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알아서 도와 달라고 하면, 아무도 내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확실히 우리들은 노예 때, 더 많은 열심을 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녀의 사랑과 헌신을 더욱 원하십니다. 즉 노예처럼 자격을 돈 주고 사기 위하여 억지로 억만금을 내놓는 것보다는 변화된 인격에서 조금씩 마음이 열려서 남을 위하여 사는 것을 더욱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아이들아 너희는 무엇을 하든지 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기쁨으로 그리고 감사함으로 내놓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뻐하시고, 복(福)을 주십니다.
우리 한국의 교회들을 부패(腐敗)시킨 요인은 빨리 커지려는 성장(成長)의 욕구라고 생각합니다. 즉 빨리 커지려다 보니까 목회자가 가진 부자(富者)와 손을 잡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진 자들이 중심이 변화된 자들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주머니를 풀려고 하니까 광고(廣告)하지 않을 수 없고, 나팔을 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의미의 정종(政,宗 癒着)입니다. 즉 목회자가 돈 있는 사람 앞에서 꼼짝 못하는 사태입니다. 그러면 성경대로 설교할 수가 없습니다. 즉 그 안에 있는 장로들이 죄(罪)를 치는 설교를 좋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커졌는지 모르지만, 결국 더 소중한 성령의 능력을 잃고 맙니다. 이렇게 돈 있는 사람과 손을 잡으면, 교회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그들을 사랑한다면, 마음껏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 가운데 눈물과 회개와 기도응답의 역사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는 것입니다.
본문은“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은밀(隱密)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떤 좋은 일을 하게 되면, 그만큼 기분이 좋고, 만족감이 듭니다.
그러나 선(善)한 일을 해놓고,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기억을 하고 있으면, 자기 의(義)가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 후,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내가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수고했는데, 주님이 나를 이렇게 몰라 줄 수가 있느냐? 면서 섭섭한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또 교회나 목회자에 대해서도“내가 이렇게 교회를 위하여 수고를 했는데, 사람을 이렇게 몰라줄 수가 있느냐?”면서 시험(試驗)들 가능성이 많습니다. 즉 무엇인가 선(善)한 일을 하고 난 후, 자기 장부(帳簿)에 적어놓고, 보고, 또 보고, 하면서 스스로 만족해하는 것은 주님이 나에게 어려움을 주실 때,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선(善)한 일을 했을지라도 스스로“나는 무익한 종”이라고 생각하고, 모두 잊어 버려야 합니다. 만일 자꾸 기억하고, 자기 만족감에 빠지면, 이것은 자기가 한 것이 됩니다. 그가 어려 울 때,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 앞에서 정직한 것이 이 생명의 줄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공급되는 길뿐입니다. 지금까지 가졌던 전통적 신앙의 습관을 벗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새로 벌거벗은 자세로 서야 합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간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액수 여하를 떠나 가장 귀한 것들입니다.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돈이나 물건을 나누는 것도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가장 귀한 이 일을 종이나 노예의 심정으로 하도록 만들어서 자기만족에 빠지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것이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찬송가 321잘 *날 대속하신 예수께*
※새벽(冬)5-6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늘에 보물 쌓을 교갱원 創立member ▽교갱원 설립할 온라인 특별 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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