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22일 부활 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0-23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7. 찬미받으소서 주간 5월 22일(금)
정치와 경제는 대화로써 길을 찾아야 합니다.
박상훈 신부
예수회인권연대연구센터소장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
“정치와 경제는 빈곤과 [자연] 환경 훼손에 대해서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와 경제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공동선을 지향하는 상호 작용의 방법을 찾기를 바랍니다. … ‘일치는 갈등보다 우월하다.’라는 것이 사실입니다”(「찬미받으소서」, 198항).
“믿는 이들이 자신의 신앙과 일치된 삶을 살면서 신앙에 모순되는 행동을 하지 말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이들이 하느님의 은총에 마음을 다시 활짝 열고 사랑과 정의와 평화에 대한 자신의 깊은 신념에서 힘을 얻도록 권유해야 합니다. 우리의 원칙들을 잘못 이해하여 종종 자연을 착취하거나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횡포, 또는 전쟁과 불의와 폭력을 정당화하여 왔다면, 우리 믿는 이들은 이러한 행동이 우리가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 지혜의 보고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찬미받으소서」, 200항).
「찬미받으소서」는 우리의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여러 위험들의 실상을 깊은 근심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 전체가 아파하는 현실이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1960년대 초, 미국과 소련이 주도한 냉전의 갈등으로 인류 전체가 핵전쟁의 공포에 휩싸여 있을 때, 요한 23세는 「지상의 평화」를 통해서 ‘선의를 지닌 모든 사람들’에게 간절하게 평화를 호소했습니다. 지금 프란치스코 교종은 기후 위기, 세계적인 빈곤, 격심한 불평등으로 무너져 내리는 ‘우리 공동의 집’을 되살려야 하는 인류의 과제를 함께 살펴보고 해결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너나 할 것 없이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삶의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탐욕스럽게 쟁탈하며 누려온 개발과 성장으로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삶이 행복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속할 수도 없다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찬미받으소서」에서는 공동의 선에 대한 감각을 잊어버리고 터무니없는 자만으로 쌓아 올린 개인주의, 그리고 자연 세계를 가혹하게 이용하려는 욕망이 인간의 습속(習俗)과 문화를 지배한다고 봅니다. 이 무모한 ‘인간 중심주의’가 인간 존엄과 지구 환경을 동시에 뒤흔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찬미받으소서」의 모토는, 생태와 사회가 직면한 위기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복합 위기라는 점을 아주 분명하게 짚어내고 있습니다. 게다가 더 심각한 문제는 마치 ‘좋은 삶’의 유일한 척도라도 되듯이 ‘기술 관료적 세계관’이 우리의 정신과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책임도, 가치도, 양식도 없습니다. 한계 없는 질주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지배와 약탈의 욕망 앞에서는 위험을 무시한 채 질주하고 있습니다. 이 폐해가 가장 잘 드러나는 영역이 경제입니다. 이른바 주류 경제의 언어는 교회의 경제 언어와는 근본부터 대립합니다. 가장 큰 차이는 인간에 대한 이해입니다. 주류 경제에는 타인을 염려하는 관심, 공감, 관대함이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오직 ‘지배욕구’만이 있습니다. ‘자유로운 시장’을 통해 개인의 만족과 주관적인 선호를 극대화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찬미받으소서」는 처음부터 인간을 ‘관계’로 파악하고 서로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만남’ 속에 있는 존재로 봅니다. 단지 만족이나 선호가 아니라, 온전하고 통합적인 성장과 발전이라는 분명한 방향과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의 관계 안에서 선을 향해 나아가는 삶의 행로인 ‘연대’를 그토록 소중하게 여깁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속한 것을 그들에게 돌려줌으로써”(「복음의 기쁨」, 189항) 우리는 연대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세대 간 연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근본적인 문제”(「찬미받으소서」, 159항)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리의 것만이 아니라 세대를 넘어서는 공동의 유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대의 깊은 의미는 창조 세계 전체로 확장됩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창조 세계의 모든 부분이 고유의 가치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구의 외침과 가난한 사람들의 외침에 올바로 응답하는 것이 연대의 경제가 수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찬미받으소서」는 공동선과 연대에 대립하는 경제를 넘어서 통합적이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제시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전인격적으로 존엄하고 충만한 삶의 기회를 주는 발전입니다. 우리가 직면한 위기가 복합적이고 서로 포개져 있어서 통합적인 접근 방법이(「찬미받으소서」, 139항) 필요하듯이, 통합적이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루려면, 여러 차원에서 ‘서로 의존’하고 ‘함께하는’ 통합의 역량이 있어야 합니다. 통합과 상호 의존이란 “이 세상을 공동 계획을 가진 하나의 세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찬미받으소서」, 164항).
「찬미받으소서」가 반포된 2015년에 G7은 탈탄소 글로벌 경제에 합의했고, 국제연합총회에서는 모든 회원국이 17가지의 ‘2030 지속 가능한 개발목표(SDG)’와 ‘기후 변화에 관한 파리 협약’을 채택했습니다. 세계 차원에서의 협력이 시작될 때, 「찬미받으소서」는 가장 영향력 있는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이 곧바로 실행으로 옮겨진 것은 아닙니다. 개별 국가와 지역마다 정책과 실천으로 옮겨야 하는 더 큰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회칙은 정치의 역할에 주목합니다.
정치의 역할에서 그 중심은 경제와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는 윤리적인 도전을 할 뿐만 아니라 당면한 문제들이 무엇인지도 알려 줍니다.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의미 있게 만들고자 노력하기 마련인데, 정치 공동체가 그것에 들어맞는 환경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어떤 공동체가 대화도 불가능하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고 억압적이고 병들어 있다면, 그 공동체의 삶은 단적으로 무의미합니다. 정치가 경제를 이끌거나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공모하는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정치는 국회나 기업을 대표하는 로비 단체만의 일이 아닙니다. 정치는 권리, 의무, 책임의 규범을 공공의 영역으로 효과 있게 확장하는 힘이지만, 개인, 눈에 띄지 않는 사람, 시민의 삶에 꼭 필요한 작은 것들, 그리고 지역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작고 사소해도 충분한 관심과 염려를 보이고 공감하는 것이「찬미받으소서」의 정치입니다. 정치는 멀리 내다보고 작은 이들도 포함하는 포괄적인 관점으로 공동선을 실현해야 합니다(「찬미받으소서」, 197-198항). 이를 위해 시민사회의 주체인 우리가 막중한 역할을 떠맡고 있습니다. 시민들은 정부의 정책과 의회의 입법에 대한 정치적 압력뿐만 아니라 각성한 소비자, 투자자, 유권자로서의 선택과 행동을 해야 할 책임과 권리가 있습니다(「찬미받으소서」, 206항). 정치가 자신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타락했다면, 당연히 그런 정치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도록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가 삶의 전반적인 모습을 점검해 ‘새로운 생활양식’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나쁜 정치의 공모자가 될 것입니다. 좋은 삶을 위한 신앙인의 덕목은 경제와 정치를 변화시키는 참여와 밀접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찬미받으소서」, 110항)고 말합니다. 생각과 규범은 관념과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제와 상황 속에서 씨름할 때 잘 파악됩니다. 위기에 직면할 때 우리는 실제의 경험과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선에 따라 실제로 행동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선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행동하고 실천함으로써 공동선이 무엇인지, 올바름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후 변화, 빈곤, 불평등의 시대적 위기를 권력자들의 손에만 맡겨 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직접 실천으로, 행동으로 나서야 하는 도전이며 문제인 것입니다. 전환의 시기는, 치유의 희망으로 고무된 고백과 회개와 정리의 시간입니다. 이 시기를 거치면, 회복의 시간도 그리 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8,9-18
바오로가 코린토에 있을 때,
9 어느 날 밤 주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그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11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12 그러나 갈리오가 아카이아 지방 총독으로 있을 때,
유다인들이 합심하여 들고일어나 바오로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서,
13 “이자는 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바오로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갈리오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유다인 여러분, 무슨 범죄나 악행이라면 여러분의 고발을 당연히 들어 주겠소.
15 그러나 말이라든지 명칭이라든지 여러분의 율법과 관련된 시비라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그런 일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소.”
16 그러고 나서 그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내었다.
17 그러자 모두 회당장 소스테네스를 붙잡아 재판정 앞에서 매질하였다.
그러나 갈리오는 그 일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18 바오로는 한동안 그곳에 더 머물렀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갔다.
바오로는 서원한 일이 있었으므로, 떠나기 전에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았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