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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인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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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양 스크랩 시진핑
심메마니 추천 0 조회 418 13.09.12 21: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마하트마 간디

 

 

 

 

                               1869 ~ 1948  인도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독립운동가  법률가, 정치인이다.

                               영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인도의 영국 식민지 기간(1859~1948) 중 대부분을 영국으로부터의

                               인도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영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반영 인디아 독립운동과 무료 변호,

                               무저항 비폭력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정전 60주년인 지금 우리는 6·25가 얼마나 큰 비극이었는지 얼마나 힘겹게 얻은 평화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레밍(lemming) 또는 나그네쥐라고 불리는 설치류는 3∼4년마다 떼로 바다에 빠져 죽는다. 저곳으로 가면 죽는다는 것을 금세 또 잊고 어리석음을 반복한다. 자칫하면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버릴 수 있다. 앞에 제 동료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고도 똑같이 물속으로 뛰어드는 그런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분명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연평해전, 천안함 사건 등 북한의 도발은 계속되고 있다. 항상 그래왔듯이 북한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 위협이나 도발 등 벼랑 끝 전술을 시도하고 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국민 모두 보훈의식을 가지고 호국영령들이 피로 지킨 소중한 우리나라를 전 국민이 마음을 모아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양영실(의정부보훈지청 보훈과)

 

 

 

 

 

김홍신이 1981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인간시장》은 대한민국 최초로 백만부를 돌파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15, 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96년 민주당 비례대표 4번으로 공천을 받아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이후 1997년 신한국당민주당의 합당으로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다.

1997년 대선 당시에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는데 12월 14일, tv토론 유세를 통해 "김대중씨가 대통령되면 나라가 망하고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는 식의 수위를 넘는 비방을 일삼아 논란을 빚었다.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직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향해 "너무 거짓말을 많이 한다. 옛말에 염라대왕이 거짓말을 많이 한 사람의 입을 봉한다고 했는데, 공업용 미싱이 필요할 것 같다."라는 발언을 해 당시 여당측에서 격렬한 항의를 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갈등이 없었기 때문에 16대 국회에서도 한나라당 소속으로 비례대표 의원을 지냈으나, 이후 당론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바람에 보건복지위에서 강제로 쫓겨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4주기를 맞아 대전의 한 식당에서 노 대통령이 생전에 즐겨 마시던 막걸리를 무한정으로 제공하고 있다.
대전 중구 대흥동에 위치한 막걸리 전문점 '지주식당'은 해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일이면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막걸리 한잔을 나누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23일 하루동안 식당을 찾는 모든 손님에게 막걸리를 무료로 제공할 예정이다.

한편, 식당의 운영자인 정한영 씨는 부동산 팟캐스트 진행으로 더욱 알려져 있다.

 

 

 

 

 

 

흑인인권운동아버지이자 자유와 평화의 상징 넬슨 만델라(94)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AFP통신은 만델라의 가족들이 법원에 제출한 서류를 인용, 만델라 전 대통령이 ‘영구적 식물인간 상태(permanent vegetative state)’에 빠졌으며 담당 의료진이 가족들에게 산소호흡기를 제거할 것을 권고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남아공 정부는 이러한 보도에 대해 전면 부인하고 나섰다. 남아공 대통령실은 이날 성명을 내고 “만델라가 위독하지만 안정적인 상태에 있다는 것을 거듭 확인한다”고 밝혔다. 이 성명에는 만델라가 식물인간 상태가 아니라는 의료진의 의견까지 담겨 있었다. 

 

 

 

 

                                                                                                       반기문

 

제33대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장관을 지냈으며 제8대 국제연합(UN) 사무총장이다.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1985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행정학 석사를 받았다.

1970년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외무부(지금의 외교통상부)에 들어가며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1976년 주인도대사관 1등서기관을 지냈고 1987년 주미국대사관 참사관 겸 총영사를 지냈다.

2003년 대통령비서실 외교보좌관을 지내고 2004년 제33대 외교통상부 장관에 올랐다. 2007년 제8대 유엔 사무총장이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외교관을 꿈꾸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외국학생의 미국방문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것이

그의 외교관 인생을 결정짓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후진국에 가서 돈을 아껴 집안에 보탬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인도 뉴델리 총영사관 근무를 지원했다. 이후 뛰어난 업무능력을 인정받으며 외교관으로 승승장구했다.

 

 

 

 

 

 

2005년 버냉키는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로부터 앨런 그린스펀 후임인 미연방준비이사회의장으로 지명되어,

 2006년 2월 1일 취임했다. 학계에 든든한 기반을 둔 버냉키는 대부분 월스트리트 출신이었던 전임 의장들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표명했다. 그린스펀이 확립한 재정경영방식을 유지해가면서,

주로 인플레이션에 관련된 중요한 변화를 미연방준비제도 위원회에 가져왔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1931. 3. 2 러시아 소련 공산당 서기장(1985~91), 대통령(1990~91).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러시아 연방 남서부 스타브로폴 지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국영농장의 콤바인 기술자로 일했다.

 콤소몰에서의 활동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1952년 모스크바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고 그해 공산당원이 되었다.

1955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콤소몰과 정규 당조직의 여러 직책을 거치면서 지역 당위원회의 제1서기에 올랐다.

 

1991년 12월 8일 벨라루스의 브레스트에서 회동한 옐친과 우크라이나의 크라프추크 대통령, 벨라루스의 슈슈케비치 최고회의의장은

민스크를 행정수도로 하는 '독립국가연합'의 결성을 선언, 연방해체를 막아보려는 고르바초프의 노력에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12월 21일 알마아타에서는 1992년 1월 1일부로 독립국가연합을 발족시킨다는 전제하에 그루지아를 제외한 11개 공화국이 협정안에 서명했다.

1922년 스탈린에 의하여 강제 구성되어 69년 동안 지속되어왔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김구

 

    

 

                                독립운동가 정치가(1876~1949). 대한 제국기에는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석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지휘하였다.

                                해방 이후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 하였다.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되었다. 저서에《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요 다음 소원도 우리나라 독립이다

                                  세 번째 소원도 우리나라 대한의 자주독립이다' 

                                                                                                                                                                                

 

 

 

 

 

 

                                                                                                         김대중

 

 

 
 

 

1924년 - 2009년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200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하의도에서 태어나  군사 정권의 위협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김영삼과 함께  민주진영의 지도자로 군사 정권에 항거했다.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을 참고 이겨내는 "인동초"(忍冬草)라 불렸다.

 연설에 능하였으며 대한민국 국회에서 가장 오래 연설한 기록으로 기네스 증서를 받았다.

재임기간 IMF 경제위기에서 벗어났고 2000년에는 북한과의 남북 정상 회담을 처음으로 개최했다.

 

 

 

 

                                                                                              김정은

 

 

金正恩,1983년 1월 8일 ~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및 조선로동당 제1비서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다.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과 전처 고영희 사이의 차남이다. 평양직할시 출신으로,

별칭은 '샛별 대장', '은하'이고, 김정일 사후, "당과 국가, 군대의 최고 령도자"로 칭해지고 있다.

2012년 4월 11일에 로동당대표자회의에서 당 1비서로 추대되었으며, 4월 12일에는 국방위원회 1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2012년 7월 18일 공화국 원수로 진급했다.

 

 

 

 

 

                                                                                               삼대

 

 

  

 

길동무라고 하기엔 당치 않고 찬미라 하기엔 더더욱 합당치 않은  

이들 삼대를 진정으로 찬미할 날이 과연 오긴 오려는가?

 

 

 

 

                                                                                                         

 

                                                                                                                           

                                                                                          마가렛 대처

 

 

대처

 

유럽 최초의 여성총리, 영국에서 20세기 들어 총리직을 3번 연임한 인물이며,  

 1982년에는 아르헨티나가 10주 동안 점령했던 포클랜드 제도를 전쟁을 통해 재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중에 그녀가 보인 과단성과 지도력은 1983년 6월의 총선을 일방적인 승리로 이끄는 요인이 되었다.

대처는 내각의 엄격한 규율, 강력한 통화주의정책, 노동조합에 대한 법적 규제의 확대 등을 통하여

'철(鐵)의 여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집권 후반기에 이르러

'대처 혁명'은 재정·산업의 경제분야로부터 사회정책부문으로 확산되어갔다.

 

 

 

 

 

1911. 2. 6 미국 일리노이. 미국의 제40대 대통령(1981~89).
보수적인 공화당 정책으로 유명했다. 신발 세일즈맨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32년 일리노이 주 유레카대학을 졸업한 뒤

 아이오와에서 라디오 스포츠 아나운서가 되었다. 1937년 그의 오랜 영화배우 생활은 시작되었고

결국 약 50편의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그중 〈모든 미국인 크누트 로크니 Knute Rockne―All American〉(1940)·

〈왕들의 열 Kings Row〉(1942)·〈성급한 마음 The Hasty Heart〉(1950)이 특히 유명하다. 

영화배우협회 회장직을 맡아 미국 영화산업에서 공산주의자로 여겨지는 세력을 척결하는 데 협력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1809년 2월 12일 켄터키 주의 조용하고 아담한 나무로 된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토마스 링컨은 나이가 50세가 넘을 때까지도 소작인으로 산 목수였으며, 그는 링컨 역시 목수가 되기를 바랬다.

링컨은 어렸을때 키가 크고 말라서 맞는 옷이 거의 없었다. 링컨의 어머니 낸시는 링컨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평화는 가치있는 싸움보다 더 중요하다는걸 가르쳤다. 허나, 낸시는 1818년 독이 든 을 먹은 에서 짠 우유를 먹고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일치하는 점이 많으며, 다음은 공통점의 일부이다.

  • 두 대통령은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는 점,
  • 두 대통령을 암살한 가해자들은 재판을 받기 전에 의문사를 당했다는 점,
  • 그의 부인은 백악관에서 자식을 잃었다는 점,
  • 두 대통령이 하원의원에 당선된 때와 취임한 때가 1846년, 1946년이라는 점,
  • 두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때와 취임한 때가 1861년, 1961년이라는 점,
  • 두 대통령은 테쿰세의 저주를 당했다는 점,
  • 그의 후계자의 성이 존슨이라는 점,
  • 그의 부인은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는 점,
  • 두 대통령은 모두 달러의 주화에 초상이 그려진 점.
  • 링컨 대통령은 포드극장에서 암살당했고, 케네디 대통령은 포드차에 타고 가다가 암살당했다는 것

 

 

 

 

     

                           

                                                                                                마오쩌둥

 

 

Mao Zedong 1893. 12. 26 중국 ~ 1976. 9. 9 베이징에서 타계하였다. 

중국의 공산주의 이론가, 정치가. 1931년 이래 중국공산당의 지도자였으며

1949~5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을 지냈다.

국가주석을 사퇴한 이후에는 사망할 때까지 당주석을 역임했다.

 

 

 

 

 

 

                                                               

                                             넬슨 만델라

 

 

넬슨 롤리라라 만델라1918년 7월 18일 - )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평등 선거 실시 후 뽑힌 최초의 대통령이다.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에 그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지도자로서 반아파르트헤이트운동 즉, 남아공 옛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을 지도했다.

반역죄로 체포되어 종신형선고 받았으나, 26년 만인 1990년 2월 11일에 출소했다.

 

1994년 4월 27일 실시된 선거에서 ANC는 62%를 득표하여 ANC의 지도자인 넬슨 만델라는

1994년 5월 27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진실과 화해위원회(TRC)를 결성하여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는 과거사 청산을 실시했다.

TRC는 성공회 주교데스몬드 투투 주교가 참여하였으며, 수많은 과거사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여 조사하였다.

인종차별 시절 흑인들의 인종차별 반대투쟁을 화형, 총살등의 잔악한 방법으로 탄압한 국가폭력 가해자가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친다면 사면하였으며,

나중에는 경제적인 보상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또한 피해자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피해자 무덤에 비석을 세워줌으로써,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잊혀지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저서로 뉴욕 타임스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책에 선정된《자유를 향한 긴 여정》이 있다.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1880 ~ 1964 ) 미국군인으로 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에 연합군의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1950 국제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인천

                                 상륙작전을 지휘하였고 이듬해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해임되었다.

                                

                                 '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1954. 7. 17 독일 함부르크 ~. 독일 최초의 여성 수상.

메르켈은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동독으로 이주했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고향인 동독의 브란덴부르크에서 개신교 목사로 일했다.

메르켈은 1978년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동베를린에 정착했고, 과학아카데미에서 양자물리학을 연구했다.

1989년부터 동독 민주화운동에 개입하기 시작하여 독일 통일 직전인 1990년에 보수정당인 기독교민주연합 당원이 되었다.

그해 말 하원(분데스타크) 의원으로 선출됨으로써 정치적 수완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헬

무트 콜 총리 아래 그녀는 가족·노인·여성·청소년부장관(1991~94), 환경·자원보존·방사능안전부장관(1994~98) 등을 역임했다.

 

메르켈은 2005년의 선거에서 총리 후보로 지명되었으며, 경제개혁과 대미관계 개선 등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당시 독일의 대미관계는 슈뢰더 총리가 2차 걸프전쟁(2003)에 반대하면서 악화된 상태였다. 

 수주에 걸친 회의 끝에 메르켈에 연합정부의 총리직을 맡는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메르켈은 2005년 11월 22일 총리에 취임함으로써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최초의 동독 출신 총리가 되었다.

 

 

 

 

                                                                                 박영효

 

 

1861(철종 12) 경기 수원~ 1939. 9. 21. 한말의 정치가·개화사상

 

박영효

 

근대적 개혁을 추구한 갑신정변 및 갑오개혁의 주체로 참여했으며 태극기를 최초로 고안했다.

그의 사상은 북학파 실학의 바탕 위에 선 것이었지만,

일본의 문명개화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일본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고

한일합병 이후에는 일제의 통치에 협력했다.

 

 

 

 

 

                                                      

 

                                             

                                                                                                                                                                                                                                                   

박근혜(朴槿惠, 1952년 2월 2일 ~ )는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이다.

1952년 2월 2일 박정희육영수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1963년 부친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 이후 청와대에서 성장하였고,

1970년 서강대학교에 입학하여 전자공학을 전공하였다. 1974년 모친 피살 이후부터 1979년 10월 26일 부친 피살 이전까지

퍼스트 레이디의 직무를 수행하였고, 부친 피살 이후 청와대에서 나와 육영재단 이사장과 정수장학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2013년 2월 25일, 대한민국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1987년 대한민국 헌법 개정 이후

 최초의 과반 득표 대통령, 최초의 이공계 출신 대통령, 독신 대통령, 부녀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박정희대통령은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다. 1945년 건군과 함께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국군의 주요 지휘관을 역임하고 1961년 5.16군사혁명을 주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고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 1963년 제5대부터 1979년 제9대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을 역임하는 동안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터전을 닦아 세계 속의 한국으로 부각시켰으며 

1979년 10월 서울에서 향년 61세로 서거하여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56년 3월 26일 대한민국 경남 창녕군 출생

서울특별시 시장
신체 - A형,  수상 - 2011년 대한민국국제구조대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 상
 

 

 

                                

                                                                                                        백선엽

 

 

 

                                 1941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초기 국군창설에 기여했으며, 휴전회담시 한국측

                                 대표로 나가 휴전문서에 조인하기도 했다. 1952년 제2군단장을 거쳐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 되었다. 1959년 합동참모의장을 지낸 후 1960년 대장으로 예편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첫 정상회담.
두 사람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수 없고, 핵무기 개발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원칙에 합의했습니다.
백악관은 회담 결과를 설명하면서 이례적으로 '완벽한 합의', '절대적 합의'라는 강력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중국이 불과 2년 전 북한 문제에 '우려한다'는 표현을 넣는 것조차 꺼려했던 것에 비하면 파격적인 변화라는 분석입니다.
중국이 북한을 막지 못하면 다른 국가들의 핵개발 경쟁도 막지 못한다는 우려에서입니다.
또 '핵개발'과 '경제발전'이 양립할 수 없다는 점에도 두 정상이 합의했습니다.
이번 결과는 북·중 관계는 물론 한반도 정세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큽니다.

 

 

 

 

 

프랭크린

 

1706. 1. 17 미국 보스턴~1790. 4. 17 필라델피아. 미국의 과학자·외교관·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은 18세기의 미국인 가운데 조지 워싱턴 다음으로 저명한 인물일 것이다. 1757년까지 그는 약간의 재산을 모았고, 리처드 손더스라는 필명으로 펴낸 금언집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 Poor Richards Almanac〉(1732~57)은 처세술의 교본으로 자리를 굳혔으며, 전기에 관한 실험보고서와 이론은 유럽 과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1757년에 정치생활의 첫걸음을 내디딘 뒤 30여 년 동안 큰 족적을 남겼다. 정치가로서 그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자치에 대해 영국의 관리들과 토론을 벌일 때 식민지의 대변인으로 활약했고,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으며, 미국 독립전쟁프랑스의 경제적·군사적원조를 얻어냈다. 또한 영국과 협상하는 자리에서 미국 대표로 참석하여 13개 식민지를 하나의 주권 국가로 승인하는 조약을 맺었으며, 2세기 동안 미국의 기본법이 된 미국 헌법의 뼈대를 만들었다.
프랭클린이 공인으로서 국가에 봉사한 것도 인상적이지만, 일상 생활의 편리와 안전에 이바지한 공로도 그에 못지않게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가 발명한 난로는 아직도 생산되고 있는데, 열량이 벽난로보다 훨씬 많다. 피뢰침과 복초점 안경도 그의 착상이었다. 
프랭클린처럼 생각이 넓고 이타적인 사람이라면 널리 존경을 받았을 거라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동시대에도 미움을 받은 경우가 있었고, 후세에도 종종 물질만능주의자니 위선자니 하는 비난을 받았다. 영국의 소설가 D. H. 로렌스는 그를 미국인의 국민성 가운데 가장 나쁜 특징들을 한데 모아놓은 인물로 보았다.

 


 

 

 

                                                            

                                                                                                               빌리 브란트

  

동서화해 정책(동방정책)을 추구하여 냉전시대 동서의 긴장을 완화 하였으며 독일 통일의 밑거름을 마련한 옛 서독의 총리 빌리 브란트는 현재까지도 독일인들과 세계인들에게 존경 받는 정치인이다. 그는 매우 어려운 성장환경과 역사적 혼란을 극복하면서 정치인으로 우뚝 섰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신념을 훼절시키지 않고 올곧게 지켜가 결국 평화와 화해의 시대를 앞당겼다.

 

 

 

 

 

 

 

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서로 잘 통하지 않거늘 그러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위하여 불쌍히 여겨서 새로 스물여덟글자를 만드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1397(태조 6)~ 1450(세종 32). 조선의 제4대 왕(1418~50 재위).

재위기간 동안 유교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 공법(貢法)을 시행하는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해 조선왕조의 기반을 굳건히 했다.

한글의 창제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문화의 융성에 이바지하고 과학기술을 크게 발전시키는 한편,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국토를 넓혔다.

 

 

 

 

 

 

 

1953. 6 중국 베이징~.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주석(2008~)을 지냈다.

시진핑은 한때 중국의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시중쉰[習仲勳]의 아들로 당과 정부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특히 시진핑이 1989년 톈안먼 사건[天安門事件] 당시 정부의 대응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한 이후 눈밖에 났다.

1969년 문화대혁명 때 많은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교육 받은 도시 청년이었던 어린 시진핑은 산시 성[陝西省]의 시골로 보내졌다.

 그 곳의 농업 공동체에서 시진핑은 6년 동안 육체 노동을 했다. 이 시기에 특별히 지역 소작농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으며,

그로 인해 중국공산당(Chinese Communist Party/CCP)에서 계급이 올라갈 때 명문가 출신의 시진핑이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74년에 시진핑은 정식 당원이 되어 당 지부의 서기를 지냈다. 

 1979년 대학을 졸업한 뒤 국무원 부총리이자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을 겸직한 겅뱌오[耿飇]의 비서로 3년 동안 일했다.

이후 시진핑은 후진타오[胡錦濤] 대통령의 후임자가 되었다.

시진핑의 지위는 2008년 3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부주석으로 선출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부주석이 된 시진핑은 환경 보존 노력과 국제 관계 신장에 힘을 쏟았다. 2010년 10월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부주석으로 임명되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최종 승계에 대한 가능성을 더욱 강화했다.

 

 

 

 

 

1959년 2월 20일 출생, 경기 파주시 | 돼지띠, 물고기자리

정의당, 마을학교 이사장, 정치바로 아카데미 원장, 경기 고양시 덕양구갑, 서울대학교 역사교육학과 졸업

 

 

 

 

 

 

한국 여성 국회의원들이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일본유신회 공동대표 등의 일본군 위안부 관련 망언에

한일 여성 의원들이 공동으로 대응하자고 제안했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 소속된 새누리당 김희정·류지영·김현숙 의원과 민주당 유승희 의원은

28일 기쿠타 마키코(菊田眞紀子) 일본 민주당 여성위원장을 만나 이 같은 입장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아베는 두 권의 책을 썼다. 하나는 첫 총리 취임을 앞두고 2006년 7월 내놓은 ‘아름다운 나라로(美しい國へ)’.

지난 1월에는 ‘새로운 나라로(新しい國へ)’라는 책도 출간했다. 제목이 비슷한 만큼 내용도 거의 복사판이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일본을 위해 싸우는 정치가이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결연한 전사 이미지다.

아베가 투쟁을 통해 쟁취하려는 ‘아름다운 나라’의 기본 모델은 패전 이전의 일본이다.

무력을 앞세워 전 세계로 진군하던 그때의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복고주의적 냄새가 강하다.

저변에는 ‘일본이 피해자’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의 책에 나오는 내용 한 토막.

“일본은 패전 후 60년간 국제공헌에 노력해 오며 호전적인 자세를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국가 간에 문제만 생기면 과거 전쟁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에 꾹 참으며 오로지 폭풍우가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그 결과 걸핏하면 우리(일본)에게 잘못이 있는 듯한 인상을 세계에 심어 왔다.”

함께 전쟁을 일으켰던 독일에 비해서도 일본이 홀대받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옛) 서독은 같은 패전국인데도 주권 회복과 동시에 국방군을 창설했고 통일까지 36차례나 헌법을 개정해 징병제를 채용하고

유사 사태에 대비한 법도 정비했다.”

일본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라는 인식 속에는 당연히 전쟁에 대한 책임이나 침략에 대한 반성 등이 자리 잡을 공간은 없는 셈이다.

 

 

 

 

 

 

1962년 미얀마(버마)에서는 쿠데타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군정이 들어선 이후 1988년 미얀마의 군사독재자였던 네윈 장군이 물러났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주의 [2], 더 나아가 부처의 사상[3][4]에 영향을 받은[5] 아웅 산 수 지 여사는 민주화 운동 와중에 정치에 입문한 셈이었다. NLD의 설립을 도운 후 1989년 7월 20일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그녀는 해외로 떠난다면 자유를 주겠다는 군부의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1990년 총선에서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이 압승을 거뒀으나 군정은 정권 이양을 거부한 채 독재 체제를 이어 나갔다.[6] 1988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정권에 맞서 민족민주동맹(NLD)을 이끌었으며 1990년 5월 실시된 총선에서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이 495석 중 392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고 수 지 여사는 총리가 되어야 했지만, 군사 정부는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7]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한국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한국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萬國公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안중근 의사가 1909년 만주 하얼빈역에서 조국 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의거한 이유다.

                                                                                       

                                1907년 이전에는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 계몽운동을 벌였고, 그뒤 러시아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1909년 초대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조선침략의

                                원흉으로 지목하여 하얼빈[合爾濱]에서 사살했다.

 

                               '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버락 오바마,

 

1961년 8월 4일 ~ ,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 출생)는 미국제44대 대통령이다.

케냐 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미국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흑백 혼혈인으로,  

2007년 2월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는데 200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예비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치열한 유세전을 벌인 끝에 그는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다.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공화당 후보인 존 매케인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9년 1월 20일에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2009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위안부 소녀

일본대사관앞에 한복을 입은 13세의 소녀가 다소곳이 의자에 앉아 있다. 가녀린 이 소녀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울지도 웃지도 않고 대사관을 응시하고 있다. 이 소녀의 공식명칭은 '평화의 소녀상'이며 우리에게 '위안부 소녀상'으로 익숙하다. 소녀상은 2011년 12월14일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 1000회를 기념해 국민의 성금으로 제작됐다. 높이 130㎝의 소녀상 옆에 있는 빈 의자는 소녀를 위로하는 시민의 몫으로 남겨뒀다.

 

 

 

 

 

                                                                                                              유관순

 

   유관순

 

 

                                 만세시위를 주도(1902~1920). 18세 때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생으로 삼일운동에 참가하였다. 그 뒤 고향인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시위를 지휘하다가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윤봉길

 

 

1908 충남 예산~ 1932.

독립운동가.상하이[上海] 훙커우 공원[虹口公園]에서 개최된 일본의 전승축하기념식에 참석한 일본군 수뇌부를 폭살(爆殺)했다. 

아버지는 황(璜)이고, 어머니는 김원상(金元祥)이다. 집안은 몰락양반가로 전형적인 농가였다.

1913년부터 큰아버지 경(坰)에게 천자문을 배우다가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3월 3일부터 4월 초순에 걸쳐 이 지방에서 일어난 3·1운동의 민족적 분노를 목격했다.

이 충격으로 일제의 '제국신민'(帝國臣民)으로서의 자질과 품성을 교육하는 식민지 노예교육을 거부하고 학교를 자퇴했다. 

 김구는 일제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에 전승축하기념식을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탐지하고

폭탄투척거사를 준비했다. 이 거사에 선발된 윤봉길은 4월 26일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된다는 내용의 입단선서를 했다. 4월 29일 김홍일이 준비한 물통과 도시락에 장착한 폭탄을 식장에 던져

상하이 파견군 시리카와[白川義則] 대장,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을 즉사시켰다.

 

 

 

 

 

 

 

 

철저한 친미·반공주의자로 공산주의를 분쇄하는 데 앞장서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를 다졌으며, 공공연히 북진발언을 하기도 했다.

 6·25전쟁중 1952년 부산의 국회에서 재선이 어렵게 되자 헌법을 대통령직선제로 개정하여 제2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53년 미국의 전쟁처리 방식에 반발, 국제연합(UN)군의 동의 없이 반공포로를 석방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1954년 초대 대통령에 대한 연임제한을 철폐하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사사오입개헌을 강행했고,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8년 자신을 반대하는 사회정치적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해 야당과의 첨예한 정치파동을 낳기도 했다.

1960년 3월 15일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려는 대대적 부정선거로 그는 비록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국민적 저항으로 4·19혁명이 일어나자 대통령직을 사임. 하와이 망명생활 중 사망.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인제(李仁濟, 1948년 12월 11일 ~ )는 판사 출신 정치인이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 공천을 받아 경기도 안양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1990년 3당 합당한 민주자유당에 합류해 1993년 김영삼 정부의 첫 노동부 장관(최연소), 1995년 민선 1기 경기도지사를 지냈다.

 

 

 

 

                                                           

                                                                                                               장개석

 

중국 군인 정치가(1887. 10. 31 ~1975).

중국 국민당 총사령관으로, 북벌 성공하고 난징 정부() 실권 장악했으며

중화민국 총통 되었으나 1949 중국 공산당 패하여 본토로부터 타이완 으로 정부 옮겼다.

중국어Jiang Jieshi[]’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이름이다.

 

 

 

 

 

                                                                                                                   전봉준

 

1855(철종 6)~ 1895(고종 32). 3. 30.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의 총대장으로 활약한 혁명가.전봉준은 농민대중의 밑으로부터의 힘을 결집하여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동시에 한국에 침투해 들어오는 일본의 자본주의적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국가의 근대화를 이룩하려 했다. 비록 그의 변혁 의지는 일본의 군사력 앞에서 좌절당하고 말았지만 그가 영도한 갑오농민전쟁은

조선의 봉건제도가 종말에 이르렀음을 실증했고, 민중을 반침략·반봉건의 방향으로 각성시킴으로써,

이후의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진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명숙(明叔), 호는 해몽(海夢).

 

 

 

 

 

 미술계 관계자는 “미술계에 값비싼 작품을 사들이는 ‘두 제왕’이 있다”며 재벌 계열의 한 문화재단과 재국씨를 꼽았다.

전재국씨는 80년대부터 미술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초기엔 고미술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후 근현대 작가로 관심을 돌렸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미술품에 대한 관심이 있던 차에 금융실명제가 시행되면서

비자금을 세탁하는 데 미술 사업을 이용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1990년대는 국내 미술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던 때다. 갤러리들이 늘어나고

전문 큐레이터와 미술 평론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특히 대기업 총수 일가가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비자금을 세탁하기 위해 미술품에 대한 투자를 늘리면서 이런 흐름은 가속화했다.

 

 

 

                                                               

                                                                                          조만식 선생 타계

 

 

1883. 2. 1 평남 강서~ 1950. 10. 18 평양(?). 독립운동가·

 

8세 때 한학을 배웠고, 16세 때부터 상업을 시작, 포목상과 지물상을 경영해 상당한 재산을 모으고 사업가로 이름을 날렸다.

23세 되던 해인 1904년 친구이자 동업자인 한정교의 전도로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이듬해인 1905년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해 1908년에 졸업했다.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을 배워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기로 결심했다. 

 

1945년 8·15해방이 되자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인민정치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약했고,

같은 해 11월 민족주의자들을 결집해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어 반공노선을 뚜렷이 하는 동시에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소련군정에 대한 비타협적인 태도와 신탁통치 반대의 입장 고수로 인해

1946년 1월 5일 이후 평양 고려 호텔에 감금됨과 아울러 조선민주당 역시 소련 군정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접수되었으나,

끝까지 제자들의 월남 권유를 거절하다가 6·25전쟁때 조선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순형(趙舜衡, 1935년 3월 10일 ~ )은 미스터 쓴소리, 은퇴한 정치인이다.

18대 총선에서 자유선진당 비례대표로 당선되어, 7선 국회의원이다(18대 의원 중 최다선).

아버지는 우익지도자인 조병옥 박사이며,

작고한 둘째형 조윤형도 6선 국회의원을 지낸 거물 야당 정치인이었다.

 

 

 

 

                                                                   칭기즈 칸(成吉思汗,)

 

1162년경 ~ 1227년 8월 18일)은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대륙을 점유한 몽골 제국의 창시자 황제이다.

어릴 때의 이름은 테무친(鐵木眞)이었다.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능력주의fh 강한 군대를 이끌어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군사지도자가 되어 중국사에 (元) 태조(太祖)로 기록된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칭기즈 칸 국제공항으로 남아 있다.

 

 

 

 

 

 

                                                                                                

                                             

         1940∼45년과 1951∼55년 총리를 역임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중에 위대한 국가지도자로

         활약했다. 영국에서도 손꼽히는 귀족가문의 상속자, 공부를 못했던 말썽꾸러기 학창시절,

         보어전쟁 당시의 목숨을 건 탈출,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당 바꾸기,노벨 문학상을

         받을 정도의 뛰어난 문장력, 손꼽히는 명 연설가로 2차대전 종식시키는데 공헌했다.

 

 

 

 

 

 

 

                                                                                                      체 게바라

 

 

그는 쿠바혁명 승리후 쿠바 공산당쿠바 혁명정부의 중요직책에 있으면서 쿠바혁명에서 얻은 것들을 지키며

혁명을 더욱 전진시키기 위하여 정력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사형제를 부활시켜

친미또는 반혁명세력 약 14,000명을 죽였다.[2] 쿠바혁명 승리 후 얼마간 아바나의 요새수비대 사령관으로 있다가

산업발전을 조종하는 책임자로 있었으며 동시에 토지개혁의 준비에 참가하였다.

 

그는 쿠바에서 많은 일들을 했음에도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났다.

1965년 4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졌다

.[3] 이 때 쿠바를 벗어나 볼리비아로 투쟁무대를 옮겨 바리엔토스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으나,

1967년 10월 9일 미국이 가세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 총살 후 그의 시체는 정부에 의해 언론에 공개되었으나,

 체 게바라를 하찮은 인간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와 달리,

그의 모습이 예수와 비교되면서 다시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케네디  

 

케네디

 

1917. 5. 29 미국 매사추세츠 브루클라인~ 1963. 11. 22 텍사스 댈러스.

미국의 35대 대통령(1961~63). 재임중 쿠바 사태, 베를린 봉쇄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위기를 맞았으며

핵실험금지조약의 체결과 '진보동맹' 결성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댈러스에서 자동차로 가두행진을 벌이던 중 암살당했다.

 

 

  

 

 

 

                                                                                                                                                              콜럼버스

 

1451. 8. 26(~10. 31?) 이탈리아 제노바~ 1506. 5. 21 스페인 바야돌리드. 이탈리아의 탐험가.

  4번에 걸친 그의 항해(1492~93, 1493~96, 1498~1500, 1502~04)는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탐험·개발·정착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492년 8월 3일, 산타마리아 호, 핀타 호, 니냐 호 3척에 120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마침내 파로스 항구로부터

그토록 꿈꾸어오던 항해에 나서  바하마 제도의 한 섬(지금의 와틀링 섬)에 도착했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인도의 한 부분에 도착한 것으로 확신하고 신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이 섬을 산살바도르('성스러운 구제자') 섬이라고 명명했다. 

 

또한 섬에서는 콜럼버스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프란시스코 데 로르단 일파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1500년 8월 콜럼버스는 그의 통치능력을 심사하기 위해 섬을 방문한 사찰관 보바딜리야에 의해 족쇄가 채워진 채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렇게 해서 콜럼버스의 시대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502년 니콜라스 데 오반도가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된 뒤 마지막인 4번째 항해(1502. 5. 9 출발)를 출발하여

파나마 지협 일대를 배회했지만 태평양을 발견하지 못하고 아무런 수확도 없이 귀국했다.이 항해로 인해 급속히 건강이 나빠졌고

1506년 5월 21일 자신이 발견한 섬들이 아시아의 일부라는 신념을 그대로 간직한 채 바야돌리드에서 죽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후퇴하고 있는 미국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정책'에 대해 일침을 날렸다. 특히 그는 마이클 델 델 CEO와의 논의 중 "한국과 싱가포르는 이미 미래에서 살고 있는 나라들이다"라고 언급하며, "기초과학 및 기술개발의 근본인 연구개발 및 교육 등에 대한 투자 감소로 (미국이) 이러한 미래 기술 국가들과의 간극을 벌어지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46. 8. 19 미국 아칸소 호프~. 미국의 제42대 대통령(1993~2001)으로서 미국이 가장 오랫동안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는 시대에 재임했고 아이티와 중동, 그리고 발칸 지역에서 일어난 국제적 위기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백악관에서 일하던 젊은 여자 인턴 직원과의 혼외정사 때문에

미국 역사상 앤드루 존슨에 이어 2번째로 의회의 탄핵을 받은 대통령이 되었다.

 

 

 

 

                                                                                                          푸이

 

푸이

 

 

Puyi (웨) P'u-i. 1906. 2. 7 중국 베이징[北京]~ 1967. 10. 17 베이징.

중국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1907~12 재위) 또한 일본이 세운 괴뢰정권 만주국의 황제(1934~45 재위).

 1908년 11월 14일에 큰아버지인 광서제(光緖帝)가 죽자, 3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라 아버지 순친왕 재풍(載?)의 섭정을 받으며

3년간 황제로 있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이듬해인 1912년 2월 12일 제위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푸이가 퇴위함으로써 267년에 걸친 만주족의 중국 지배와 2,000년간에 걸친 황제 지배체제가 끝나게 되었다.

 

그는 베이징에 있는 궁전에서 계속 살도록 허용되었다. 그는 자신의 호칭으로 헨리라는 이름을 택했고,

이후 서구에서는 헨리 푸이로 알려졌다. 1924년 푸이는 몰래 베이징을 떠나 톈진[天津]에 있는 일본인 조계(租界)로 거주지를 옮겼다.

1932년 3월 9일 만주국의 집정관(執政官)이 되었고, 1934년 만주국 황제로 추대되어 연호를 강덕(康德)이라고 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8월 소련에 포로로 억류되었다가 1950년 전범 재판을 받기 위해 중국으로 송환되었으며,

1959년 특사로 풀려나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식물원의 기계수리상점에서 일했다. 

 

 

 

 

 

취임 후 그는 부패를 없애고 강력하게 통제된 시장경제를 만들어나가려 했다. 1990년대 장기적인 경기침체 이후 경제를 성장시킨 것으로 푸틴은 2004년 3월 선거에서 쉽게 재선에 성공했다. 2007년 12월 의회선거에서도 푸틴의 러시아 통합당(United Russia)은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비록 선거의 공정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었지만 그 결과는 푸틴의 권력을 확인시킨 것이었다.

2008년 푸틴은 헌법에 따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메드베데프는 2008년 3월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푸틴은 러시아 통합당의 의장직을 맡았다......

 

 

 

                                                                                                         

                                                                                                  홍범도

 

(洪範圖, 1868년 음력 8월 27일 ~ 1943년 10월 25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자성에서 출생하였으며 1907년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에 자극을 받아 갑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삼수·갑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 만주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 후 만주로 망명하였고 간도 국민회의 대한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국내로 들어와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1920년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3일간의 봉오동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고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이후 청산리 전투에서 김좌진북로군정서군과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후에 독립군의 통합운동을 벌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가 되고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했고,

그곳에서 1943년에 죽었다. 1962년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 항복 선언 

..... 짐은 여기에 국체의 무사함을 얻어 충량한 그대를 신민의 마음을 믿고서 항상 그대들 신민과 함께 있다.

만약 정에 격하여 사정을 어렵게 하거나 혹은 배제하여 서로 시국을 어지럽게 하고 대도를 그르치게 하여

신의를 세계에 잃게 함은 짐이 가장 여기에 경계하는 바이다.
모름지기 거국일치하고 자손에서 서로 전하여 굳게 신국의 불멸을 믿고 각자 책임이 중하고 갈 길이 먼 것을 생각하여

총력을 장래의 건설에 쏟을 것이며 도의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튼튼케 하여 국체의 정화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에 뒤지지 않도록 노력할지어다. 그대들 신민은 짐의 뜻을 받들어라     

 

 

 

 

 

힐러리 다이앤 로댐 클린턴(1947년 10월 26일 ~ )은 미국의 정치인이며, 전직 국무부 장관이다.

1993년 ~ 2001년 제42대 대통령을 지낸 빌 클린턴의 부인으로, 남편의 대통령 재직 중 활발한 활동을 하며

세계적으로 관심을 모았으며, 남편의 대통령 임기 말인 2000년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어

2001년부터 국무장관으로 임명된 2009년까지 재직하였다.

 

민주당의 유력한 2008년 대통령 선거 후보였으나, 그해 6월 3일 버락 오바마에게 경선에서 간발의 차로 석패하였다.

오바마의 당선 직후 국무부장관으로 지명되었으며, 2009년 1월 상원의 인준 절차를 통과, 공식 취임하였다.

 

 

                                          

 

 

6·25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만 60년이 됐다. 북의 무모한 남침으로 인해 3년 1개월 하고도 이틀, 1127일간 무려 200만명 안팎이 산화한 끝에 1953년 7월 27일 체결한 정전협정으로 남북은 비무장지대(DMZ) 992㎢를 사이에 두고 전쟁도, 평화도 아닌 무력 대치의 60년 세월을 보냈다.

포연(砲煙)은 가셨으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정전협정 체결이후 공식집계가 이뤄진 1994년 말까지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 건수는 42만 5271건에 이르고, 지금까지 따지면 50만건이 넘는 것으로 우리 군 당국은 추산하고 있다. 하루에 30여건씩 북이 정전협정을 위반했고, 1주일에 한번꼴로 무력 도발이나 간첩침투 도발을 자행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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