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스모니아 왕조
The taking of Jerusalem by Herod the Great, 36 BCE(sic)/Public Domain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하고 남 유다가 바벨론에 망한 후, 바벨론에 끌려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페르시아 고레스왕 때 귀국해서 성전을 다시 짓고, 느헤미야 시대에 예루살렘 성벽을 복원하면서 구약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요.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뜬금없이 이두메 사람 헤롯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고, 로마의 가이사 아구스도가 호적하라 명하는 장면도 나오고, 세례 요한의 활동 시기를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15년이 되던 해라고 나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왕 이후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등장하기까지를 신구약 중간사라고 부릅니다.
이집트와 페르시아가 힘겨루기 할 때, 그 둘 사이에 껴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당하던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끌려가 페르시아에서 살다가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 귀국하지 않은 사람들과 귀국하여 이스라엘을 회복시킨 사람들, 이집트로 피난 가서 정착한 사람들, 두 강대국 틈바구니에서도 꿋꿋하게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사람들까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게 됩니다. 이들 공동체는 서로의 문화도 달라지고, 언어도 달라졌으며, 신앙도 달라졌지요.
지중해 아래에서 동쪽의 페르시아와 서쪽의 이집트가 반목하고 있을 때 지중해 위쪽 발칸반도에 있던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더가 등장합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이집트는 물론 인도까지 점령했던 역사적인 인물이지요. 헬레니즘 문화권이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는 지중해 이남에 헬레니즘 문화를 전파하고 언어를 통일시킨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헬레니즘은 문화를 중시했던 터라 알렉산더 치하에서 헬레니즘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됩니다. 그 꽃 중 하나가 이집트에 자신의 이름을 본떠 지은 알렉산드리아가 있습니다. 이곳은 그 당시 거대한 도서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구약 성경의 헬라어 버전인 칠십인역이 바로 이곳 알렉산드리아에서 주전 300년경에 만들어졌지요.
우리가 신약에서 만나는 경건한 이방인들, 혹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오는 헬라인들을 이해할 때 알렉산드리아의 칠십인역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로 알려진 아볼로가 바로 알렉산드리아 출신이었습니다. 히브리서를 통해 보듯, 아볼로가 구약의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칠십인역이거든요. 이집트에 사는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다 잃어버렸고, 알렉산더 덕분에 헬라어를 쓰던 사람들이라, 신앙의 전승을 이유로 헬라어 성경을 쓰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헬라어 성경은 이스라엘의 전유물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 도서였으니 헬라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더 이후에 주목해야 할 사람이 이집트 서쪽에 있던 당시 강대국인 카르타고의 한니발이라는 장군입니다. 카르타고는 해군력이 좋아서 로마에 적지 않은 위협이 되었는데요, 로마가 이 카르타고를 물리친 전쟁이 1차 포에니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을 이끌었던 카르타고의 장군이 한니발의 아빠였습니다. 한니발의 아빠는 아들에게 유언으로 로마를 물리치라고 했고, 이 유언에 따라 한니발이 로마로 간 것이 2차 포에니 전쟁이자, 한니발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한니발 전쟁에 대해서는 ‘역사 이야기’ 6편에서 수전절을 설명할 때 언급했던 전쟁입니다. 한니발이 비록 로마의 스키피오에게 패하고 말았지만, 이 전쟁으로 인해 로마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공화정의 몰락이었지요.
한니발 이후에는 로마 초대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시저로 알고 있는 사람인데요. 이 사람이 바로 가이사 아구스도로 알려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양아버지입니다. 그리고 공화정 몰락 후 카이사르가 황제가 되기 전에 세 사람이 통치하던 시절을 1차 삼두정치라고 부르는데요, 이때 세 명의 지도자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그리고 ‘듣보잡’ 크라수스라는 사람입니다. 폼페이우스는 주전 63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유대인 12,000명을 학살했던 장본인입니다. 폼페이우스 덕분에 마카비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하스모니안 왕조가 멸망하고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트로스가 유대의 실권을 잡게 되지요. 이때부터 이두메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주전 167년 성전이 더럽혀진 것이 계기가 되어 봉기한 마카비 혁명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일궈냈고, 3차 포에니 전쟁으로 정신없던 로마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마카비 가문이 하스모니아 왕조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스모니아 왕조의 초대 왕은 시몬이라는 사람으로 마카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이었습니다. 시몬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가 2대 왕이 되는데, 2대 왕 힐카누스가 알렉산더 흉내를 잠시 냈었습니다. 유대교로 세계 제국을 만들겠다고 침략전쟁을 치렀던 왕이지요. 이런 제국주의 망상에 빠져 있던 힐카누스가 이두메를 정복했고, 이두메인들을 유대교로 강제 개종을 시켰던 것입니다. 이때 개종한 이두메 귀족이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트로스였지요. 힐카누스가 그래도 로마 흉내를 좀 낸답시고 개종한 이두메 귀족들을 등용했었는데요, 이때 안티파트로스가 등용이 되어 정권 근처에서 알짱거리게 되었습니다.
요한 힐카누스 이후 몇 번의 권력 싸움이 있었고, 손자 대에 가서는 두 형제가 정권을 놓고 개판으로 싸움박질하게 됩니다. 그 두 명이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로스 2세인데요. 둘의 싸움은 헤롯의 아빠 안티파트로스가 이간질해서 이뤄졌습니다. 아리스토불로스 2세와 친했던 안티파트로스가 자기 처갓집의 나바테아 왕을 끌어들여 힐카누스 2세를 제거하려 했고, 이에 겁먹은 힐카누스 2세가 폼페이우스의 부하에게 뇌물을 바치고 폼페이우스 군대를 예루살렘으로 끌어들였던 것이지요.
나바테아 왕은 로마군대가 온다는 소식만으로 줄행랑을 쳐 버렸고, 정치 9단 안티파트로스는 폼페이우스에게 딱 붙어서 딸랑거렸습니다. 폼페이우스가 주전 63년에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키고 안티파트로스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의 실권을 맡겼습니다. 폼페이우스가 지중해 남쪽에서 이름을 떨칠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위쪽 알프스 산맥 북쪽에서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카이사르랑 폼페이우스는 서로 힘겨루기를 했고, 결국 카이사르가 이기면서 주전 49년에 로마 초대 황제가 되었지요. 카이사르가 정권을 잡기 위해 내전을 일으켜 루비콘강을 건널 때 했던 말이 “주사위는 던져졌다”였습니다. ‘루비콘강을 건너다’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다’라는 말의 의미로 쓰이게 만들었던 사건이기도 하지요. 역시나 이때도 정치 9단 능구렁이 안티파트로스는 카이사르에게 딱 붙어서 딸랑거렸구요. 카이사르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행정장관으로 이 능구렁이를 임명해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