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비워진다. 천연빛깔의 잎들이 점점 퇴색되어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에서 떨어져 온 산을 덮는다. 어느샌가 파란 산은 순식간에 붉어진 다음 하나같이 누런색으로 변했다. 그 떨어진 잎은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고랑부터 채우고 숲길을 덮으며 결국 응달 아래 조용히 멈춘다. 그만큼 산은 훤해졌다. 시야는 듬성듬성한 가지 사이를 뚫고 산 능선을 지나 멀리 산봉우리로 뻗어갔다. 구름 없는 하늘은 더불어 맑고 태양 반대편에서 달의 윤곽이 또렷하다. 이러한 사실들은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울창한 나무와 숲이 갈 길을 혼동시켜 이리저리 헤매다가 어느 길을 따라 나오면 바로 벼랑으로 막혀 길을 다시 찾아야 할 때가 있다. 그러면 숲을 건너 또 한번 휘돌아 올라가야 산 정상으로 갈 수 있듯이 앞날이 보이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시기가 젊음이라고 할까. 뒤돌아보면 숲은 휑하고 비어서 지금까지 지나온 길이 이제는 훤히 보이고 앞으로 가야 하는 능선길이 이만큼 다가왔다 싶으면 비로소 그때가 노년기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리라. 노인의 성성한 머릿속을 보여주듯이 초겨울의 숲은 온통 옷을 벗었다.
선운사 동운암의 흑구가 짖는다. 두 외래인이 길도 아닌 곳으로 오르고 있으니 개는 야단이 났다. 법당에서 나온 스님이 타이르자 녀석은 꼬리 한번 흔들고 이쪽을 보고 다시 짖는다. 김제 어느 고을의 면장을 했다는 노인이 극구 길 아닌 길을 우긴다. 눈밭을 헤치듯이 가시덤불과 밀집된 조릿대 숲을 뚫고 능선을 향하여 부지런히 스틱을 옮겼다. 철쭉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희미한 무덤 옆을 지나 작은 웅덩이를 건너니 빽빽한 덤불 숲은 더욱 앞을 가렸다. 그 사이로 지나다닌 동물들의 낮은 흔적을 따라 계속 오르며 땀을 흘렸다. 낙엽이 푹신한 구릉을 지나고 돌담으로 둘러싸인 어느 선비 무덤에 이르자 산길이 제모습을 갖추고 나타났다. 뒤따라 올라온 칠십 넘은 노인의 숨이 가쁘다. 그이는 이십 년 전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그가 등산화 끈을 묶고 있는 나와 합류한 때가 시간 반 전이었다. 그렇게 잠시 숨을 고른 후 우리 둘은 호젓한 숲길을 따라 구황봉을 내려갔다.
목동의 한 아파트 사건 뉴스를 읽었다. 자식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벌이를 하던 30대 부부가 극한 선택을 하였다는 것이다. 요즈음 천정부지로 오르는 아파트 가격과 전셋값은 소위 ‘영끌’을 하는 그들에게 한순간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 언제부터 서울의 좋은 아파트에서 살며 아이를 교육하는 것이 행복의 도달이라고 믿는 우리의 한국이다. 행복감은 그 크기와 종착점이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 양을 줄인다면 어찌 되는 건가. 하버드를 나온 어느 스님이 남산을 바라보는 근사한 집을 구매하고 방송에도 나와 민중들에게 행복을 전도하였다고 하는데 과연 그는 멈추고 보았을까. 모두가 도시 안에서 생성된 가격표에 맞는 꿈과 행복을 찾는 동안, 한 번쯤 산과 들에 나와 깊은 호흡과 사색을 하는 순간 세상은 물질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왜 알아채지 못하는 것일까.
선운산 수리봉에 오르면 변산 앞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멀리 해안선을 따라 파도의 물거품이 피어오르며 점점이 떠 있는 배와 섬들이 물결에 출렁인다. 오래전에 여객선 침몰 사고를 품고 있는 위도가 구름 아래에 외롭게 떠 있다. 오른쪽 산 아래에 있는 석상암은 이미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산그늘을 안고 있고 산새들의 먹이로 남긴 감들이 바람 따라 주렁주렁 흔들리고 있다.
브라질에 사는 82세 할아버지가 의대 입학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료 진료의 꿈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희여재에서 헤어진 그 노인도 궁금하다. 그분 백두대간을 종주했다고 하니 안심이 들지만.
첫댓글 '선운사' 많이 듣던 지명인데 근처도 안 가봤어요.
이제 수리산도 엄두가 안 나니 산 타는 사람들이 부럽기만 하네요.
마음이 허할 때는 산을 주로 혼자 가지요. 수리산이나 선운산이나 같습니다. 발행인님!
산에 올라 잡다한 마음을 비워내고픈 날,감사히 읽고 갑니다.
산을 좋아하시는군요. 언제 산에서 뵙기를 고대합니다.
@미둔 조순섭 네,신갈을 자전거로 시원하게 달려보고 싶네요.운동삼아 자전거타기를 즐겨 합니다.
산이 비워내는 계절에 산에 오르셨군요ㆍ겨울 아침 잘 읽었습니다ㆍ가난과 아름다움은 하나입니다
보령에 있는 산에 가면 신작가님 뵙기를 기대하는데 윤허하실지요.
@미둔 조순섭 오서산 있어요ㆍ정상에 억새밭 있죠
@신이비 가는길에 연락하지요.
찾아보니 고창 선운산이 100대 명산에 들어있군요. 조 작가님은 마라토너에서 산악인으로 거듭 나고 있습니다.ㅎ
세상은 물질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산에 올라서면 물질과 탐욕이 참 가소롭게 보이지요. 조 작가님, 해탈하셨습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달리기와 산을 쪼금 아는데 글을 못쓰고 있군요. 회장님! 그날 오신걸 제대로 인사도 못하였습니다. 가까운 날 뵙기를 기대합니다.
꽃무릇 피던 선운사를 가본 적은 있지만, 산은 오르지 못했지요.
나뭇잎들 털어내고 빈 가지로 서 있는 겨울산, 어디라도 좋을 거 같아요.
네. 이번에 저는 산을 올랐습니다. 산이나 산사나 이즈음 조용하군요.
사진이 참 예술입니다. 그림으론 표현하기 힘든 사실적 아름다움으로 가득합니다.
산행을 통해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모습이 아름답군요.
요즘 좋아진 핸폰의 위력이겠지요. 머물다 가신 님처럼, 맑은 눈으로 그린 화폭에 그 깊이를 견줄 수 없지요. 단지, 이 답답한 형국을 피해 산행은 저에게 위로를 줌은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