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함을 즐기다/고재종
세상에 어린 강아지하고요
세상에 어린 새끼까치가
마당의 밥그덩을 사이에 두고
가르릉 가르릉 엄포를 놓고
까아작 까아작 뽀짝거리네요
세상에 이쁜 강아지하고요
세상에 이쁜 새끼까치가
장난질 치듯 밥다툼을 하는데
난 한편으로 강아지편을 들다가
또 한편으론 새끼까치편을 드네요
그러다가 이제 즈이야 글든말든
난 괜히 벌개지도록 흥감하여선
대문 옆의 홍색 자연 연분홍
봉숭아꽃에 짐짓 눈길을 주네요
발 밑에 줄 지어가는 개미도 보네요
사람이 한가해서 어정거리니
하늘의 흰구름을 따르고 싶고
나뭇잎처럼 반짝이고도 싶은데
바쁘나바쁜 세상에
하느님이 뭐라 하실는지요
<시 읽기> 한가함을 즐기다/고재종
고재종 시인의 이름 뒤에는 농촌시인, 농민시인 등의 이름이 따라붙어 다녔습니다. 그는 직접 농사를 짓는 시인으로, 지난 1970년대와 1980년대를 농민으로 살아오면서 새로운 도시문명이 이전의 농촌문명을 어떻게 밀어내는지, 그것을 생생한 체험 속에서 여실하게 그려 보였습니다. 그의 이런 농촌시는 도시의 시인들이 상상과 관념으로 써낸 농촌시와 달랐으며, 시에서 상상력보다 강력한 체험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줬으며, 농촌이 도시에 밀려나는 문명사의 모순과 그 속의 아픈 삶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들로 하여금 절감하게 하였습니다.
돌이켜보면, 문명사도, 역사도 참으로 냉정합니다. 하나의 문명이 거세게 발흥하면 그 물결은 한동안 세상을 지배하며 도도히 흐르고, 그곳에서 밀려난 이전 세계의 사람들은 당황하며 변화된 물결 앞에서 무력해지곤 합니다.
아직도 농촌, 아니 농민의 문제는 온전히 해결되지 않은 미완의 장으로 남아 있지만, 고재종 시인은 농촌과 농민 속에 자연과 우주 그리고 생명의 세계를 끌어들이며 새로운 삶의 세계와 시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치사, 경제사, 사회사적 시각으로 포착하던 농촌문제에서, 더 나아가 그것을 포함하면서도 자연사, 우주사, 생명사, 미학사의 시각을 여기에 덧붙이며 새로운 길을 넓혀 가고 있는 것입니다.
고재종의 시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속에 들어 있는 위의 시 <한가함을 즐기다>는 고재종 시인의 변화된 시세계를 알려주는 데 부족함이 없는 작품입니다. 여기서 보듯이 그는 시 속에 분노와 아픔을 뜨겁게 담아내던 이전의 농촌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농촌과 자연, 그리고 그 속의 생명들이 놀라운 생명력과 신비감을 너그러운 마음과 시선으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가로움은 게으름과 다릅니다. 그것은 권태로움과도 물론 다릅니다. 한가로움은 결여가 아니라 충만함이며, 과잉이 아니라 적절함이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성한 것입니다. 한가로움 속에서 우리는 잔잔한 평화, 너그러운 여유, 무상의 기쁨, 고요한 안정, 막힘없는 열림, 뜨겁지 않은 자족, 함이 없는 함無爲之爲의 소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한가로운 세계는 누구나 한번 들어가보고 싶고, 열어보고 싶고, 만나보고 싶은 세계입니다.
위 시 속에서 시인은 한가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의 눈길엔 어떤 세속적 기미도 끼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이런 눈길로 세상을 바라본 지가 참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길은 흥분해서 과열되거나 의기소침해서 풀죽어 있을 때가 대부분이니까요.
시인은 한가로운 눈길에 시골 집 마다의 어린 강아지와 어린 새끼 까치가 밥그릇을 사이에 놓고 서로 옥신각신하는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강아지에게 준 밥을 먹으려고 까치가 날아왔나 봅니다. 시인은 이들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보고, 강아지는 “가르릉 가르릉 엄포를 놓고” 까치는 “까아작 까아작 뽀짝거리네요”라고 인상적인 묘사를 하였습니다. 조금 설명을 덧붙이자면, 의성어로 엄포를 놓는 강아지와 의태어로 대작하는 까치의 모습도 인상적이고, 그렇게 묘사한 시인의 언어도 흥미롭습니다.
사실 큰 것들의 싸움은 무섭습니다. 사람의 경우도, 짐승의 경우도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위 시를 보면 서로 옥신각신하는 강아지와 까치는 ‘어린 강아지’이며 ‘어린 까치’입니다. ‘어린 것’들의 싸움은 위의 두 번째 연에 나오듯이 ‘장난질’처럼 그 싸움이 작고, 유치하고, 엉성하지요. 그래서 이 ‘어린 것’들의 싸움은 싸움이라도 귀엽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시인은 이런 강아지와 까치의 옥신각신하는 풍경을 바라보며 강아지 편도 돌아가, 까치 편도 들다가 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어느 편도 아니면서 모두의 편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싸움이 엉성한 장난과 같기 때문이며 동시에 시인이 지닌 한가로운 시선 때문이지요. 그 시선 속에서 그들이 강아지든 까치든 구별 없이 사랑스럽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위 시 속의 시인처럼 이쪽 편도 들었다. 저쪽 편도 들었다 할 수 있는 한가로움이 부럽습니다. 어느 편도 아닌 채 세상을 공평하게, 평평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한가로운 마음으로 새끼 강아지와 새끼 까치의 장난을 지켜보던 시인은 이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립니다. 집착하는 시선이 아니었으니 그들에게서 눈을 떼는 일도 자유로웠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차갑고 싸늘한 시선도 아니었으니 그들로부터 시선을 떼었어도 그의 마음속엔 여전히 따스한 기운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어린 것들이 밥그릇 장난, 아무것도 아닌 듯 그들을 바라보는 눈길, 아무것도 아니어서 편안히 뗀 눈길, 그런 한가로움 속에서 시인은 자작으로 홀로 취해 얼근해진 사람처럼 “괜히 벌개지도록 흥감하여선” 마당의 이쪽저쪽으로 눈길을 주며 행복해합니다.
그의 눈길엔 이제 대문 옆에 피어난 홍색, 자색, 연분홍색의 봉숭아꽃이 들어왔습니다. 손만 대도 씨앗이 노란 듯 튀어나오는 봉숭아, 여름밤에 아이들이 손톱을 빨갛게 물들여주는 봉숭아, 빈터마다 담장 아래마다 누가 심지도 않았는데 해마다 피어나는 봉숭아, 빈집의 마당을 혼자 화사하게 지켜주는 봉숭아로 그의 한가로운 시선이 옮겨간 것입니다.
그의 이런 시선은 다시 발밑으로 줄 지어 기어가는 개미들에게로 옮겨갑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그 장소와 이유를 알 수는 없으나 시골 집 빈 마당엔 하루 종일 개미들이 길을 내며 다닙니다. 이 지구상에 인간보다 먼저 나온 것이 개미든 그렇지 않든, 주인인 없는 동안 시골집은 개미들의 놀이터입니다. 그 놀이터 옆에서 색색의 봉숭아가 자라고, 새끼 강아지와 새끼 까치가 심심한 듯 옥신각신하고, 모처럼 한가로워진 주인은 마다의 풍경에 취하여 한가로움의 참뜻을 새기고 있는 것입니다.
한가로울 때 우리의 눈길을 순해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넉넉해집니다. 더 이상 세상의 인간이 아닌 듯, 그때 우리는 인간사의 여유 없는 레일을 벗어나 하늘과 땅으로 자신의 존재를 넓힙니다. 그때 우리는 자연의 여백의 일원이 되고, 자연의 사람이 되고, 우주의 공간에 들어섭니다. 이것은 자아의 확장이자 세계의 포용입니다. 이때 우리는 헐렁한 옷을 입은 사람처럼 세상을 품안에 들여놓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재종 시인은 위 시의 마지막 연에서 “한가해서 어정거리니/하늘의 흰구름을 따르고 싶고/나뭇잎처럼 반짝이고도 싶”다고 말했습니다. 하늘의 흰구름을 따르고 싶은 그 무심의 자연스러움과 탈속함, 나뭇잎처럼 반짝이고 싶은 영혼의 윤기는 쉽게 얻거나 창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신성의 기운을 몸속에 지닌 영물靈物인지라 자연을 닮은 자연스러운 삶을 살고 싶어하고, 신을 닮은 영혼의 반짝임을 풀어 안고 싶어합니다. 자연스러운 삶과 반짝이며 윤이 나는 영혼, 그것을 삶과 존재의 안팎을 매일 닦고 돌본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드문 은총과 같은 세계입니다.
고재종 시인은, 그러나 자신의 이런 소망이 너무 비현실적인 것은 아닌지, 나무 드높아서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합니다. 그래서 “바쁘나바쁜 세상에/하느님이 뭐라 하실는지요”라고 슬쩍 하느님의 눈치를 살피는 포즈를 취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세속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런 꿈을 나무랄지 모르겠으나 하느님은 자신의 편에 서줄 것이라는 은근한 기대가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자연스러운 삶과 영혼의 윤기를 아는 분의 상징이니까요.
도시에서의 한가로움은 근대어로 새롭게 등장한 ‘산책’이라는 말로 표현되곤 합니다. 그런데 시골에서의 한가로움을 표현하는데는 이 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 시의 마지막 연에 나오는 ’어정거림’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립니다. 그러고 보니 주위에서 어정거리는 사람을 본 지도, 우리가 직접 어정거려본 지도 참 오래된 것 같습니다. 어정거리기엔 우리들의 마음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도 너무나 황급합니다. 어정거림이란 삶 속에 스며 있는 여백(빈터)과 같은 것인데 그런 여백의 죽음을 선포해야 할 만큼 우리는 빽빽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빡빡함이 밀도 있는 삶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들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어정거리면서, 그것이 아니라면 산책이라도 하면서 우리의 삶과 몸의 자연스러운 결을 찾고, 영혼의 빛나는 윤기도 소생시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자연스러운 결과 윤기 나는 영혼, 이 두 가지만 지니고 산다면, 그래도 우리의 삶은 ‘행복’ 쪽에, 아니 ‘성공’ 쪽에 기울어져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