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2일 주님 승천 대축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루카 24,46ㄴ-53)
Then he led them out as far as Bethany, raised his hands, and blessed them. As he blessed them he parted from them and was taken up to heaven.
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사십 일 동안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다. 그리고 승천하실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 강림을 약속하시며,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알고 그분께 희망을 두라고 권고한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하늘에 올리시어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고, 이로써 교회는 그리스도로 충만하여 하느님의 부르심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증인이 될 것을 명령하시며 성령이 오실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이르신 뒤,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릴 적에는 ‘예수님의 승천’을 동화 같은 이야기라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슈퍼맨처럼 하늘로 올라가신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던 것입니다. ‘승천’이라는 말을 말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 공부를 하면서 오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늘’이 뜻하는 것을 과학적 의미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의미, 곧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소련 시절에 우주선이 발사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우주선의 조종사에게 그렇게 높은 하늘에 다녀온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답니다. “하늘에 올라가 보았더니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더군요.” 이 우주선 조종사 역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한 그 하늘을 과학적 의미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초월적 세계를 가리킵니다. 곧 시간이나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곳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창조물의 세계가 아니라 창조자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의 승천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그분께서 하늘로 오르셨다는 것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전적으로 하느님의 세계에 오르셨음을 뜻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참으로 하느님이심을, 그래서 본디의 당신 자리로 돌아가셨음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 ‘승천’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승천’은 곧 ‘현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높으신 자리로 현양되신 것입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신대원신부-
주님승천대축일이자 홍보주일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40일 동안 당신이 사랑하던 사람들과 함께 지내시다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기념하는 대축일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시자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루카 24,52). 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하늘만 유심히 바라봤다(사도 1,10)고 한다. 그러자 흰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라고 그들을 일깨운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주님 제자이자 하느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이 되는가? 하늘만 멍청히 쳐다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 그분의 부활하심과 승천하심과 다시 오심을 온몸으로 증언하고 홍보해야만 한다. 승천하신 분께서도 당신께서 오시고 사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사실들을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라고 당부하셨지 않는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8-20).
21세기는 역사상 유례없이 과학이 발달하고 첨단 대중매체가 활보하는 시대다. 그러한 시대에 걸맞게 교회는 각 교구와 본당, 수도회마다 디지털 첨단 매체들을 동원해 승천하신 주님께서 당부하신 말씀을 선포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발달한 과학기기를 총동원해 주님 말씀을 선포함에도, 과연 그 효능은 아날로그 시대보다 더 효과적일까? 단순 비교만으로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겠지만 회의적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홍보하는 일에 첨단 과학기재들이 어느 정도 도움은 될 수 있으나, 거기에 전적으로 의지하려는 태도는 금물이다. 복음 선포는 첨단 과학기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삶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주님 뜻에 부합하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첨단 과학 시대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어떻게 홍보할 것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박해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찬란하고 아름다운 선교 역사를 신앙 선조에게서 상속받았다. 예를 들면 1785년 이 땅의 최초 신앙대회(을사추조적발) 때는 불과 10명 남짓이던 일꾼들에 의해 무려 1000여 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모진 박해의 칼날 속에 심산유곡에 숨어들어서도 주님의 기쁜 소식을 홍보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또 1970~80년대 서슬 퍼런 군부 독재 아래에서 오히려 교회를 찾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모든 것이 과거와는 달리 넘쳐나게 갖춘 것이 21세기 한국교회 모습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에는 점점 '위기의식론'을 주창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왜일까? 해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물질만능주의에서 속히 벗어나는 것이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증인'의 역할을 세상 안에서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한국교회 안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길거리 미사'는 이제 예외적 현상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력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봉헌하는 미사에 제대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하느님의 절박한 호소에 응답하는 것인데, 왜 길거리 미사가 교회 안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주님께서는 길 위에 오셨고, 길 위에 사셨으며, 길 위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또 승천하셨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길을 버리고 거대하고 화려하게 꾸며졌으며 모든 것에서 안정되고 보호받는 성전 안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사실이 그러하다면 이 시대의 십자가는 누가 질 것이며, 길거리에 내쫓겨 아파하고 신음하는 가난하고 작은이들의 눈물은 누가 닦아 줄 것인가? 교회이며 길이신 분이 그러하셨으니, 이제 그분 지체인 우리가 그분이 하신 대로 따라함은 참으로 당연하다.
아마도 이 때문에 성경은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기록하지 않았을까?
주님의 승천 대축일이자 홍보주일인 오늘, 우리가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라는 주님 말씀을 새롭게 되새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도리다.
향주덕(向主德)인 믿음, 희망, 사랑
-전영준 신부-
믿음이라고도 하는 신덕(信德)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올바로 알아보고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도 사도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께서 계시해 주신 당신과 진리를 알아듣고 믿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은 부활 신앙입니다. 우리는 매 미사 중에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므로 신덕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정말로 죽으셨다가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즉,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구세주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희망이라고도 하는 망덕(望德)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주는 최고 목적으로 여기고 갈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성자 그리스도와 성부 하느님만이 진정한 우리의 희망이라는 것을 깨닫고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망덕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희망을 둘 분은 주님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분을 갈망해야 할 것입니 다. 즉, 우리가 도달할 곳은 주님이 계신 그곳 뿐입니다. 사랑이라고도 하는 애덕(愛德)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과 친교의 일치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보라, 내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단지 마음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증인으로서 우리가 성령의 도움으로 나날이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애덕은 증진될 것입니다. 그리고 애덕을 통하여 결국 우리는 하느님과 합일의 은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여정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나가는데 도움을 주는 덕행들은 예수님의 부활부터 시작하여 주님의 승천으로 마무리되는 부활시기,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시기까지와 맞물려 우리에게 올바른 영성생활을 가르쳐 줄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교인의 영적 여정은 신덕을 통하여 예수 부활 대축일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또한 이 영적여정은 망덕을 통하여 주님 승천 대축일인 오늘 우리의 영적 여정의 종착점이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나라라는것을 확인하고, 하느님 대전에 참여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갈망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 여정은 애덕을 통하여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때까지 이웃과 하느님을 극진히 사랑하는 긴 행이 될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박병규 신부-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와 이루신 일치의 자리에 저희도 머물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복음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라는 말로 시작한다. ‘기록된 것’이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될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소식이다. 성경에 기록된 한편의 글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에 하나의 사실이 되고,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글은 살아 있는 소식이 되었고, 모든 민족이 그 글이 주는 생명 안에 불린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글이 살아 움직이게 된 것은 새로움에로의 변화를 위한 것이었다. 그 새로움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체의 등장이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죄에서 해방하러 오신 분이셨다.(마태 1,21 참조) 이 해방은 흔히들 말하는 자신을 위한 자유로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해방은 전적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는 해방이었다.(루카 24,47) 하느님 현존의 장소인 예루살렘, 그곳에 일치해 있어야 하는 해방이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는 해방이어야 한다.(53절)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나타난 해방은 무엇보다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보여주신 것은 하느님과의 일치였고,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그분의 승천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지내는 제자들, 하늘로 오르시는 예수님, 그 향하는 장소는 극단적으로 다를지라도 그 안에 펼쳐지는 하느님과의 일치는 서로 많이 닮아 있다. 예루살렘이 곧 하늘이고, 하늘이 제자들의 예루살렘이 된다. 예루살렘과 하늘의 일치 속에 우리는 빼놓지 말고 새겨야 할 또 다른 장소를 언급해야만 한다. 바로 ‘모든 민족들’의 자리이다. 이 세상 곳곳에 살아가는 모든 민족들의 자리가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과의 일치를 만들어내야 할 자리인 것이다. 세상 곳곳이 예루살렘이고 하늘이며, 하느님을 마주대하는 곳이어야 한다.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강복이 여기, 저기 그리고 저 먼 곳에 가득 퍼져나가야 한다.
묵상(Meditatio) 어디서 기도해야 더 나은 기도가 될까. 어디서 기도해야 하느님을 더 가까이 모실 수 있을까. 우리의 질문 속에 있는 이 ‘어디서’라는 말은 알고 보면 세상과 하느님을 갈라놓으려는 아둔함을 가리키는 말일 수 있다. 성당 담벼락 너머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성경 너머의 글에서 우리는 무엇을 증언할 수 있을까? 성당과 성경만 벗어나면 세상의 수많은 소리와 다를 바 없는 공허한 소리만 내뱉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에 대한 증언은 세상 곳곳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세상의 소리와 더불어 선포되어야 한다. 세상과 등지고 세상을 떠나온 자리에서 하느님을 증언하는 것은 예수님을 글 속에, 건물 속에 화석처럼 고정해 버려 육화한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어디서 기도할까 고민하기보다, 내가 만나는 지금 이 사람, 내가 머무는 지금 이곳이 참된 기도의 자리고, 참으로 머물러야 할 예루살렘이 되도록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기도(Oratio) 제가 당신의 규정과 법을 지키니 당신의 모든 길이 제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시편 119,168)
승천하시는 주님의 증인 역할을"
-홍승모 신부-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승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실 승천 사건은 하느님 안에 감춰진 신비입니다. 이 신비를 알기 위해 주님께서 하늘로 어떻게 올라가셨는지, 또는 하늘 어디에 계신지를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무익한 일일 것입니다. 승천이란 주님께서 보이지 않지만 우리와 함께 현존하신다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옛 성현들은 하늘을 두고 시작과 끝이 없고, 위아래와 사방이 없어서 비고 또 비어있으나, 품지 아니한 것이 없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기에, 하늘을 볼 수 없는 곳이 세상에 어디에도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늘이 이런 의미를 갖고 있다면, 주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의미는 우리가 있는 곳 어디에나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며 현존하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복잡한 일상에 쫓기며 제대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유를 잃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일에만 급급해 하늘을 통해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당하면 고통만 볼 뿐 고통을 통해 주님께서 내게 주시는 은총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남에게 상처를 받으면 상처를 준 사람만 미워할 뿐 상처를 통해 전해오는 주님 은총을 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슬픔에 잠기고, 그렇게 실망하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통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주님을 바라보면서도, 그 고통과 십자가 여정이 내게 던지는 은총과 행복은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통에서, 십자가에서 멀리 달아나려고만 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승천이 우리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루카 24,50-53). 주님께서 승천하셨다는 의미는 우리 곁에서 영영 사라지신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변모처럼, 감춰졌던 거룩한 하느님 신성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슬퍼하기보다는 기뻐했습니다. 주님은 사도들을 축복하셨고 이제 그들은 매일 기쁨에 넘쳐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현존은 당신의 거룩한 변모처럼, 우리를 변화시켜 주는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주님 승천은 우리의 선택을 요구합니다. 이 놀라운 신비를 믿고 따르느냐, 따르지 않는냐 하는 문제입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9-11). 이 선택은 늘 우리 인생에 질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믿음과 실천입니다.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일상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 사랑과 증오, 용서와 단죄, 위로와 상처, 이런 감정이 얽혀있는 세상에서 어떤 삶이 증인의 삶인지 선택하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십자가를 내려놓고 하늘만 쳐다보며 과거 향수에 젖어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십자가는 벗어 던져버리고 싶은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에페 1,17-18).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그 엄청나고 강한 은총의 힘을 통해 삶이 변화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거창한 말보다 작은 행동이 더 호소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표징의 삶입니다. 불화와 무관심으로 상처받고 슬퍼하는 가정에서, 병으로 고통 받는 병실에서, 가난한 형제들의 생활고에서,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통을 겪는 곳에서, 우리는 승천하시는 주님의 증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양해룡신부-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당신께서 십자가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직접 현시하셨고, 제자들이 보는가운데 승천하셨습니다. 승천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 부활의 증인이라는 것을 강조하시면서 그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와 회개를 선포하라는 명이었습니다. 이 사명은 제자들만의 힘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약속하신분, 곧 성령과 함께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베타니아 근처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곳은 당신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였던 올리브 동산이 있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승천에는 반드시 고난이 따라다닌다는 것을 상기시키십니다. 제자들의 사명, 곧 복음화는 매우 고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신 것을 기억한다면 이를 확실히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실천하기에 앞서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파스카 예식, 성체성사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삶을 다시 가슴에 새길 수 있었습니다.
루카 복음은 서두에서 즈카르야가 주님의 성소에서 분향할 때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를 들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루카는 이제 예수님의 승천으로 자신의 복음을 마무리하면서 제자들이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한다고 전합니다. 이제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복음을 전달하는 것, 죄의 용서와 회개를 외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의 사명이 되고 파스카에 대한 신앙 고백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이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신앙을 올바로 이해하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이 곧 타인에게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을 삶으로 증거하면서 확실히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하겠습니다.
이 고백을 바탕으로 이 세상에 예수님에 관한 진리가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선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개인적 접촉으로 혹은 공적인 홍보를 통해서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이웃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현대에는 홍보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교회는 신문과 방송, 인터넷과 휴대폰 등을 이용해 복음을 알리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그들 각자의 마음에 복음이 자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들이 회개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초석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자들이 성전에서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의 복음 선교 사명을 실천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청해야 하겠습니다.__
주님과 만날 영과으이 날 기다리며
-손용환신부-
예수님의 승천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는 성경을 그림으로 가장 잘 풀이한 화가입니다. 그가 그린 <예수님의 승천>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일깨워 준 작품입니다. 그는 루카복음 24장 48-51절과 사도행전 1장 6-11절의 말씀을 소재로 이 성화를 그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습니다(사도 1,8-9).
예수님은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천장을 향하여 승천하십니다. 흰옷을 입으신 예수님께서는 눈부신 광채에 휩싸여 두 딸을 활짝 펴시고 본향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그분의 손바닥에는 아직도 못 자국이 선명합니다. 그리고 두 팔을 펴신 모습이 십자가상의 모습과 흡사하고 미사를 드리는 사제의 모습을 연상 시킵니다. 승천은 그분의 죽으심으로 완성되었고, 성체성사로 재현되니까요.
예수님 곁에는 천사들이 가득합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을 마중 나온 듯 환호하며 경배합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빈자리를 성령이 채우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리시면 제자들이 힘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실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9) 그래서일까요? 성령과 예수님 사이에 원형으로 별이 빛나고 있습니다. 이로써 성령강림과 예수승천은 우리에게 별처럼 빛나는 사건임을 암시합니다.
반면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바닥의 하단에는 제자들이 승천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산꼭대기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승천하는 예수님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승천하는 예수님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제자, 너무 놀란 나머지 두 팔을 벌린 제자, 경외심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무릎을 꿇은 제자, 승천하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제자, 승천하는 예수님을 가슴에 새기는 제자, 승천 사건을 동료들과 나누는 제자 등 제자들은 위대한 그리스도의 귀향 장면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한가운데 구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산꼭대기와 하늘을 나무가 연결해 주고 있습니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향하여 가지를 뻗고 있습니다. 이것이 승천하는 예수님과 닮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어 우리와 함께 사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오르시어 본향으로 가셨습니다. 천국에 대한 그리움을 우리에게 남기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나무처럼 인간과 하느님을 이어주는 구원의 사닥다리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루카 24,48). 우리는 예수님이야말로 구원의 유일한 중개자이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을 수 없습니다(사도 1,11).
주님과 다시 만날 영광의 날을 기다리며 땅 끝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예수님의 이름에 있다는 것을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해야합니다(루카 24,47).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임숙희 -
시작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가 성령의 이끄심으로 영광에 싸여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 대한 희망으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독서 루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파견하는 장면으로 복음서를 마무리하지 않고, 승천 장면을 덧붙입니다. 24장 50 – 51절은 베타니아 근처에서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52 – 53절은 제자 공동체의 반응을 다룹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은 예루살렘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베타니아 근처로, 올리브 산 위에 있는 마을입니다. (루카 19, 29; 사도 1, 4 – 12) 성전과 가까워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마르 11, 11), 또는 혼자서 주무신 곳입니다. (마태 21, 17) 베타니아에서 밤새 기도하시고 나서 다시 힘을 얻어,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가르치고 기적을 행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여자가 향유를 들고 와서 예수님의 몸에 부어 예수님의 장례식을 준비했다는 칭찬을 들었고 (마태 26, 12), 사랑하는 라자로가 죽자 ‘눈물을 흘리시며’ 친구를 살려낸 곳입니다. (요한 11, 1 – 44) 이렇게 예수님의 선교 활동의 추억과 제자들과 친구들과 나눈 우정과 사랑이 담긴 베타니아 근처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51절)
예수님이 ‘손을 드는’ 동작은 단순히 작별인사가 아니라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는’ 자세를 나타냅니다. (1티모 2, 8) ‘올라가다’ 라는 말은 신약성경 다른 곳에서 제물을 봉헌하는 행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히브 7, 27) 당신 몸을 제물로 바치고 이제 하늘로 올라가 “하느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사제” (히브 10, 21)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제자들을 위해 간구하실 것입니다. (로마 8, 34) 지상에서 인간이 드리는 감사와 탄원과 흠숭기도의 향기로운 연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 올라갈 것입니다. ‘아빠, 아버지’ 인 하느님이 당신 딸과 아들들에게 마련해 놓으신 온갖 선물 곧 은총과 평화와 영원한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을 믿는 모든 민족에게 내릴 것입니다. (에페 1, 2 – 12)
모여 있는 제자들은 강복하시는 예수님께 ‘경배’ 하는 것으로 응답합니다. (52절) ‘경배하다’ 라는 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proskune,w는 신약성경에서 하느님과 믿는 이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 바탕을 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 를 가리키는 문맥에서 사용됩니다. (사도 20, 36; 21, 5; 7, 59 – 60; 9, 40; 에페 3, 14) 신약성경에서 이 동사가 쓰이는 용도를 살펴볼 때, 우리는 제자들이 하늘로 오르는 예수님께 ‘경배’ 한 것은 제자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어떤 형식을 갖춘 전례 행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늘로 오르는 분께, 그들이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체험한 데서 비롯된 감사와 찬미하는 마음을 ‘무릎을 꿇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 (요한 4, 24)라는 표현은 지금 예수님께 경배 드리는 제자들의 마음을 우리에게 잘 전달합니다. 제자들은 기쁨에 차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52절) ‘기쁨’ 은 제자들의 영혼 상태를 보여주는 데, 예수님이 살아 계시어 하느님의 세계로 올라가셨고 그분과 친교를 나누는 분이라는 데서 비롯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은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냅니다. (53절) 52절에서 승천하시는 예수님께 드리는 경배가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향한 경배라는 것을 이 구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 은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의 핵심입니다. 자기 삶의 모든 것이, 창조주의 손에 맡겨졌음을 믿는 유다인이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유다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민족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선물을 받게 됩니다. 아버지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이 거저 받은, 인생 최고의 선물임을 체험한 제자들은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데서 출발하지 않고는 기도를 시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루카복음은 하느님께서 구세주를 보내신 것에 대해 가난한 사람들이 드리는 찬미로 복음서를 시작하고 제자들이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성전은 환전상과 장사치들이 장사하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라신 대로 ‘기도하는 내 아버지의 집’ 이 됩니다.
성찰 ‘오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시고, 그분과 함께 우리의 마음도 올라갑니다.’ (아우구스티노)
기도 하느님께서 온 누리의 임금이시니 찬미가를 불러라. (시편 47, 8)
저는 요즘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일상의 모습을 찍곤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찍은 사진을 저 혼자만 보기가 아까워서 제 카페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찍다보니 재미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하더라는 것이지요. 사진기만 갖다 대면 곧바로 얼굴을 가리는 것은 물론, “찍지 마세요.”라고 말하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저는 얼굴에 자신이 없어서 사진 찍는 것이 싫어요.”
그렇다면 그분의 얼굴이 못생겼을까요? 아닙니다. 멋있고 아름다운 얼굴인데도 불구하고 사진기에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이십니다. 하긴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는 연예인들이 더 외모에 대해 신경을 쓰면서 자신감을 갖지 못한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다른 동료 연예인들과 끊임없이 자신을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외적인 모습으로 인해서 자신감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무척 슬픈 것 같습니다. 이 외적인 모습은 영원하지 않으며, 나를 이루는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외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사람을 더욱 더 많이 기억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외적인 세계를 조작함으로써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계발함으로써 진정한 영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아름다움을 간직할 때 우리들은 자신감을 갖고 이 세상을 더욱 더 기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후 40일 뒤에 승천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의 제자들 모습은 오늘 제1독서를 통해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올라가신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지요. 아마 이제 예수님 없이 어떻게 살아갈까를 걱정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죽음 이후 보여주었던 제자들의 미성숙한 모습들이 불과 40일 만에 완벽한 모습으로 탈바꿈하리라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승천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외적 모습에 의존하는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즉 스스로 내적 아름다움을 가꾸어 나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천사가 말하지요.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그 안에는 저에 대한 온갖 비판이 가득했지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비판을 받을만한 행동도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이러한 비판을 받을 만큼 막 살지도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 편지의 내용이 제 머릿속을 잘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잡한 생각 중에 우연히 방 정리를 하다가 그 동안 제가 받은 편지와 카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편지와 카드 안에는 저에 대한 좋은 이야기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 대한 비판이 담긴 딱 한 통의 편지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지만, 저에 대한 칭찬이 담긴 수많은 편지는 전혀 바라보고 있지 않았던 것이지요. 마치 하늘만 쳐다보던 제자들처럼 저 역시 부정적 평가 하나만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감을 갖고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눈에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내적 아름다움을 위해 우리 곁에서 늘 지켜주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한 기억과 자신감이 승천하신 주님의 모습을 쫓아 영광의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네 우물이 가득 차 있어도 목마름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이미 억누를 수 없는 목마름이 아니겠는가?(칼릴 지브란)
주님의 승천은 우리 영광의 예표
-이준석신부-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주님의 승천은 그분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에페소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에페 1,19) 빕니다. 즉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그분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드러내준 사건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의탁하고 따르는 분이 죽음에 굴복하는 나약한 존재라면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불안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우리의 든든한 믿음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미래에 그들이 받을 영광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에페소서는 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에페 1,18) 주님의 승천은 그분을 믿은 사람들이 누리게 될 영광의 예표입니다. 그러니 힘을 냅시다.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과 복잡함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실 영광에 비하면 매우 작은 장애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께서 누리신 영광을 우리에게도 주실 것이라 믿고 주님 가르침대로 용감하게 살아갑시다.
승천은 위임
-김찬선신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 오르심은 위임입니다.
무엇을 위임하시는 것이고 누구에게 위임하시는 것입니까?
땅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우리들에게 위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지배하라는 말씀인가요? 세상의 임금들처럼 세상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인가요?
그것은 주님께서 위임하신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도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하신 것은 회개와 복음을 선포하심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는 것이었고, 그래서 세상을 떠나시며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것도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임은 마치 아버지가 자기도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에게 이루라고 하는 것과 같이 느껴지고 과도한 짐을 자식에게 넘기는 같이만 느껴집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세우시려 했던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이 세상에서 실패했습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제자들마저도 실패했다고 생각했으며, 사도시대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미완성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는 영원히 미완성입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려고 하지만 그 말 자체가 땅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서” 시작되지만 미구에 완성되고, 우리에게 위임되었지만 성령께서 이루시는 나라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무책임하게 우리에게 떠넘기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그러니 높은 데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그러므로 실패의 장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실패의 장소, 거기서 우리는 높은 데서 오는 힘을 입어야 합니다. 실패한 곳이 우리가 힘을 입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곳이 성령께서 임하신 곳이듯 우리가 실패한 곳이 하느님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곳이고 예수님께서 하늘로 떠나신 때가 성령께서 오신 때이듯 우리가 실패한 때가 하느님 성령께서 역사를 시작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실패를 실패로 단정 짓지 말고, 오히려 성령과 함께 하는 새로운 시작의 순간으로 여기며 늘 다시 시작하고 새롭게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전삼용신부-
귀 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입니다. 시와 친하지 않은 저도 참 좋은 시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뭐, 미련 없이 이생의 소풍 끝내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도 오늘 미련 없이 이생의 삶을 마치시고 하늘로 ‘공식적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공식적으로’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께로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상병 시인이 노래하는 ‘귀천(歸天)’에서처럼 예수님도 소풍 끝내는 마음으로 하늘에 올라가셨을까요? 사실 예수님의 마음은 소풍 끝내고 돌아가는 그런 기분보다는 더 큰 것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위로자께서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요한 16,7)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부터 항상 하시던 말씀입니다. 당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만 성령님께서 오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이곳에 남아계시고 싶어도 그러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성령의 불로 태우는 것이 목적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면 우리에게는 ‘왜 예수님께서 떠나가셔야만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나신 열흘 뒤에야 성령님은 ‘공식적으로’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마치 육상경기에서 바턴터치 하는 것처럼 두 분은 세상에 동시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성서 전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었습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죄의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아담은 ‘사람’이란 의미와 ‘땅’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죄를 지은 결과로 하느님은 ‘아담’을 저주하십니다. 사람만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땅도 저주하십니다. 사람이 죽어서 썩어야 할 뿐 아니라 땅도 저주받아 사막처럼 말라버려 사람이 고생하여 일하지 않으면 먹을 것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은 4개의 강이 흐르는 비옥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과일과 생물이 풍성하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마치 갈릴레아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짓고는 마치 사해(死海), 즉 죽은 바다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릴레아 호수와 사해를 잇는 강이 요르단 강입니다.
인간은 지상낙원인 갈릴레아 호수에 살다가 죄를 짓고 아무 생물도 살 수 없는 죽은 바다인 사해로 떠내려 온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로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사막과 같은 우리 마음을 다시 동산으로 바꾸실 수 있는 ‘생명수’와도 같은 분이십니다. 인간은 사해에서 빠져나와 요르단강을 거슬러 갈릴레아 호수에 도착하면 목적을 완수하게 됩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은 사해근처 요르단강 마지막 부분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곳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한 출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죄의 용서를 받고 다시 성령이 쏟아져 바뀌게 될 새로운 에덴을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늘에서 영이 우리 위에 쏟아져 내려 사막은 과수원이 되고 과수원은 숲으로 여겨지리라.(이사 32,15)
죄로 인해 사막이 되어버린 우리 저주받은 땅에 예수님께서 생명수인 성령님을 뿌리셨습니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요한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온 것을 보고 놀라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피를 보고 놀랄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으로 찔려서 피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이 나온 것을 보고 놀란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바로 인간의 죗값입니다. 먼저 죗값을 치러야 성령님이 오실 수 있고 그렇게 우리 마음엔 다시 생명이 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죗값을 치르고 생명수를 받은 땅은 이제 땅이 아니라 에덴동산이 되고 하늘이 됩니다.
그러면 된 것이지 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올라가야만 하셨을까요? 여전히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습니다.
성경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요한 3, 34-35)
또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요한 13,3-4) 라고 나옵니다.
요한이 말하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의 손에 주시는 ‘모든 것’이란 하느님의 ‘모든 것’입니다. 이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성령님, 즉 모든 것을 주신다면 아버지는 이름 외에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죽음입니다. 아버지의 사라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아버지는 이름만 있고 보이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에게 당신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은 ‘완전한 사랑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명까지도 줌으로써 자신은 죽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죽음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받게 된 죽음의 벌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부활이 따르지만 유다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성경에서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순간이 바로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는 겸손과 순종을 보시고 아버지는 당신의 모든 것인 성령님을 아드님께 보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상에서 아버지께서 당신께 베푸신 이 사랑을 당신의 교회에도 베푸시기 위해 겉옷을 벗으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십니다. 제자들은 스승이 왜 자신들의 발을 닦아주시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는 단순히 겸손의 행동이 아닙니다. 바로 제자들에게 자신의 생명인 성령님을 부어주시는 행위이고 내일 있을 자신의 죽음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깨끗이 씻겨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발을 닦지 못하신다고 말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성령을 받아야 씻겨지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피와 물’, 곧 성사를 받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하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거부하면 아버지와 아무런 관계도 갖게 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주는 것인데, 하느님께서 사랑하셔서 주시는 것은 당신의 모든 것인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준다면 그 주시는 분은 이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게 되기 때문에 ‘죽게 됩니다.’ 마치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성령님을 보내시기 위하여 돌아가시듯이, 또 그리스도께서 당신 성령님을 교회에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늑방이 열리시는 것처럼 성령님이 내려오신다는 것은 곧 성자의 죽음이요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죽이시어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시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곧 사라짐입니다. 성령님과 그리스도께서 동시에 이 세상에서 활동하실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령님 안에서 우리 안에 사실 수는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곧 영광이듯이, 아버지의 죽음이 곧 영광이듯이, 삼위일체 하느님은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스스로에게 당신의 신성을 성령님을 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신비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 남은 것은 교회이고 교회는 성령님의 성전이 됩니다. 교회는 마리아의 순교적인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교회에 당신 성령님을 주시기 위해 당신 생명을 바치고 계신 것입니다.
“벗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새벽을 열며
잘 차려입은 신사가 큰 호텔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거지가 불만을 터뜨립니다. “운명은 너무 불공평해! 저 사람은 끼니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는데 나는 도대체 뭐야?” 바로 그 순간, 하느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렇게 운명을 불공평하게 생각하니,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즉, 네가 원하는 만큼 황금을 채워 줄 테니 메고 있는 자루를 내려놓아라.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절대 황금을 땅에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만약 황금이 땅에 떨어진다면 그 순간 돌로 변하여 너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참, 네 자루가 이미 상당히 낡았다는 점도 명심하여라. 그러니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담을 수 있을 만큼만 적당히 담아라.” 거지가 낡은 자루를 벌리자 황금이 마치 빗방울 떨어지듯 후드득 자루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자루는 순식간에 불룩해졌지요.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만족하느냐?” 이 사람은 아직도 멀었다는 듯이 자루를 계속 벌렸습니다. 그리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제가 이 자루를 몇 년 동안 가지고 다녔는데요. 저는 이 자루에 물건을 얼마나 담을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만하면 평생 배불리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닙니다. 더 담을 수 있어요. 조금만 더 담을 수…….” 바로 그 순간, 거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루를 찢어지면서 황금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황금은 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거지의 욕심이 어쩌면 우리들이 안고 있는 욕심과 똑같은 것은 아닐까요? ‘조금만 더’를 외치면서 남들보다 더 많은 재물을 갖기를, 남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얻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그 욕심으로 인해서 오히려 자신이 얻을 수 있는 행운을 놓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부활 후 40일 뒤에 일어난 사건, 모두가 크게 기뻐할 사건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서운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지 걱정만 되었나 봅니다. 그래서 제1독서에 나오듯이 그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지요. 바로 그 순간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이렇게 하늘만 쳐다볼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지금 당장 세상으로 뛰쳐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부활과 승천이라는 영광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수난과 죽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즉, 자신의 낮춤이 있었기에 그러한 영광도 있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아무 것도 없는 허상만을 바라보는 어리석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요?
빈 하늘만 쳐다보는 것과 같은 세상의 욕심은 모두 내려놓읍시다.
빠다킹신부
가슴에 하늘을 담아
-배광하 신부-
승천의 의미
예수님의 승천은 그분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시 오신다는 약속에 대한 기다림이며, 희망입니다.
그분께서는 2천년 전이라는 시간과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공간에 머물러 계실 분이 아니십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시작도 마침도 없이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존재해 주셔야 하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그분의 승천은 이별에 대한 아픔이나 하늘만 쳐다보는 넋 나감이 아니라 기대에 찬 희망의 기다림인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세상을 보다 살기 좋은 하느님 나라로 만들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부단한 노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분께서 떠나신 뒤, 다시 오실 때에는 그토록 사랑하셨던 세상을 더욱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어 보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때인 것입니다.
그 같은 노력 가운데 맞이하는 주님 재림의 기쁨을 승천 교리는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의 재림을 이미 승천 때부터 꿈꾸며 오르신 주님께서 우리 내면 깊숙이 들어오실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승천하시는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 18)
하늘로 오르신 주님께서는 영영 떠나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악과의 싸움에서 결코 겁내거나 두렵지 않은 이유도 어버이처럼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희망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송기득이라는 신학자는 이 같은 희망의 말을 하였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아픔의 실체인 악의 세력과 그 밖의 요인에 대해서 끝까지 싸우라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아픔에서 벗어나고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싸움은 두려워할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의 세력과의 싸움은,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고, 이미 이겨놓고 하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더 큰 용기와 믿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
하늘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땅으로 내려오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베네딕토 성인께서는 당신의 수도회 규칙서 ‘겸손’의 장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자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내려오셨기에 오르실 수 있으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내려와야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 함께 하여야 우리 또한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위대한 교부 ‘오리게네스’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대가 하늘이고 그대가 하늘로 간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교부들이나 사막의 성자들, 수많은 수도자들은 모두 이 같은 사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즉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우리가 하늘이라는 소중한 믿음을 안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을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하늘의 하느님을 모시고 있으면 우리가 하늘이다.”
분명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보다가 들려오는 위로와 믿음의 소리를 듣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 11)
제자들은 이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복음 선포의 일꾼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의 승천 뒤 제자들은 실의에 빠져 있거나 예전의 비겁과 공포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됩니다.
이제는 과거의 나약한 모습의 제자들이 아니라 승천하신 주님을 자신들 마음에 모시고 강인한 투사가 되어 기도하며 교회 공동체를 다시금 재정비하고 오시게 될 성령강림을 준비합니다.
예수님 승천이 제자들에게 실망과 고독을 안겨준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욱 강한 확신과 희망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또한 주님을 모시고 다시 오실 희망의 믿음을 간직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렉시오 디바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
아이들에게 하느님을 그려보라고 하면 대부분 수염이 긴 할아버지를 그리듯 예수님의 승천을 생각하라고 하면 대부분의 신자들은 천사들이 옹위한 가운데 흰 옷을 입고 구름을 밟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할 것입니다. 이는 사도행전에서(1,611) 묘사한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시체의 소생이 아니라고 했을 때 느끼는 것처럼 승천도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고 하면 혼동을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사화는 공관복음서 저자마다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28,20)고 약속하시면서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이는 마태오 복음사가가 우리에게 주지시켜 주고 싶은 `임마누엘`입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요셉은 꿈을 통해 다시 듣습니다(1,23). 공생활을 통해 우리와 함께하신 예수님은 죽음을 당하신 뒤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끈을 놓지 않으신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에서는 더 짧게 묘사되는데 예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16,19-20). 루카복음에는 손을 들고 강복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시는데, 이는 열왕기 하권 2장에 나오는 엘리야의 승천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갑자기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이를 갈라놓고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영이 제자 엘리사에게 내립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제자들이 경배하는 가운데 예수께서 어떻게 하늘로 들어 올려지시는지에 대하여, 그리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분을 그들에게 보내주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24,44-53). 루카복음의 후편인 사도행전은 같은 저자임에도 승천을 다른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승천하신 날이 사도행전에서는 부활 후 40일 되던 날인 데 반해 루카복음에서는 부활날입니다. 승천하신 장소도 다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올리브 산(1,12)이고 루카복음에서는 베타니아 근처(24,50)라고 합니다. 마태오복음에는 갈릴래아에 있는 산(28,16)에서 일어납니다. 또한 요한복음에 의하면 승천은 예수님이 원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가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17장 참조). 이렇게 같은 일을 복음서가 다르게 묘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승천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위해 다음 내용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에 대한 전기와 같은 양식으로 기록되었지만 초기교회의 신앙 실천을 반영하는 문서입니다. 그 문서는 20세기에 사는 우리를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을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복음서의 기록들이 역사적 사실 보도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시대의 역사·문화적 여건 하에서 복음서 저자가 처한 상황과 그들의 신앙을 전달하려고 하는 대상을 고려하면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승천을 통해 표현하고 싶어하는 복음서 저자들의 공통된 본질 요소는 예수가 인간 개체의 역사적 개별성을 넘어서 하느님의 보편성 안으로 들어가셨다는 믿음입니다. 이제 하늘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인간 예수의 실천을 하느님의 일로 알아듣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보여준 삶은 시간과 공간과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 하느님의 일을 말한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승천은 또한 예수가 지도자로 이 세상에 군림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지닙니다. 메시지를 발생시킨 사람이 군림하면 그 메시지의 내용은 왜곡되고 사람들은 복지부동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유를 잃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신앙인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떠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부활 후에도 섬기는 분으로 남아 계시다는 뜻입니다."(서공석, 「예수-하느님-교회」 중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의혹과 죄책감과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진 것임을 설명하시면서 안심시키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24,47-48) 하시며 그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심으로써 여전히 그들이 당신의 제자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못난 그들을 당신의 증인으로 인정하십니다. 그들 몸소 체험한 용서와 사랑을 그들도 모든 이들에게 드러내고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축복해 주십니다. 제자들의 마지막 주님 체험입니다. "우리는 사냥꾼의 그물에서 새처럼 벗어났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벗어났네."(시편 124,7) 마음의 해방을 맞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고 루카복음은 끝을 맺습니다. 기쁨으로 예배하고 찬미하는 삶은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해피 엔딩입니다. 그들을 사로잡고 있던 배반·의혹·불신·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복음과 함께 기쁨 중에 생활하는 제자들의 이야기, 복음이 세상 곳곳으로 전파되는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계속됩니다.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이사 52,13)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심
-조욱현신부-
제1독서: 예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이 지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지형학적 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심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 영광에 우리도 성령의 능력으로 이미 가까이 가있음(에페 3,12; 2,18)을 믿는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신다면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하늘이 더 가까워지게 한 역사(役事)이다.
제2독서: 당신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기 위해서는 신앙의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내려주셔서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하여주시기를(에페 1,17) 간청하였다. 이 깊은 인식은 십자가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때 가능하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승천은 모든 능력을 초월해 계시는 우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왕위에 오르심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지는“(23절) 교회의 주님이 되시게 한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구원의 능력과 축복으로 끊임없이 채워주시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새로워져야 한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성 레오 대 교황은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우리의 고양(高揚)이기도 합니다. 머리의 영광이 앞서 이루어진 곳에 지체의 희망도 있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뻐합시다!”(S. Leone Magno, Sermo in Ascentionem). 예수님의 승천은 주님께서 영광에 들어가심을 의미하며, 또한 우리의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항상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삶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고양되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분이 십자가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다면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분의 영광에 함께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복음:축복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모든 시대의 신앙인들을 ‘땅 끝에 이르기까지’(8절)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이끌어 주시어 교회라는 새 ‘이스라엘 왕국’(6절 참조)을 세워주실 성령의 때의 시작인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더 가까이 현존하실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깨달은 제자들이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6절)라고 묻는다. 이 말은 성령의 선물과 더불어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건설되리라는 확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계산에 몰두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결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7-8절). 예수님의 승천이 바로 모든 제자들을 “땅 끝에 이르기까지”(8절)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여 하느님 아버지 앞에 구원이 충만하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서서히 공중으로 사라져 가는 것같이 느끼고 슬픔과 향수에 젖어 그리스도의 모습을 쫓아 하늘을 응시한다. 이것은 마치 빈 무덤에서 두 천사가 나타나(루가 24,4) 현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마지막 심판관으로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시리라는 것이다(마태 24,30; 1테살 4,16; 묵시 1,7; 14,14-16). 이렇게 다시 오실 때까지 제자들과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요한 17,20)은 세상에 그분을 증거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같이 우리의 삶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의 삶 속에 매일 매일 건설해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이 새로운 세상의 예표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승천은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정의가 깃들일’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의 빛이 이미 비치고 있는 구원의 장소로 받아들이라는 권고이다.
복음에서 다시 한번 예수님의 승천이 당신의 ‘영광’과 ‘권세’를 취하시게 한다. 그러면서 또한 제자들을 당신의 구원사건에 포함시킴으로서 더 깊이 일치하게 하신다. 둘째로 ‘축복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의 ‘전례적’ 행위에 관한 것이다. 그 모습은 지성소에 들어가는 히브리 대사제의 태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듯 하다(루가 24,50-51; 히브 4,14; 6,19-20; 9,1-14). 이제 사도들은 성전에서 전례를 거행하며 계속해서 주님께 찬미를 드린다. 전례거행 특히 성체성사의 거행은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의 간격을 없이해 준다. 이 성사를 거행할 때에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게 되며 하늘에 올라가신 예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셨을 때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신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압바(Abba)!
-김지영신부-
1960년대 소련의 우주 탐험가인 가가린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늘에서 하느님을 찾아보았지만 신은 우주 어디에도 없었다.” 그 후 미국의 우주인이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달을 탐험하고 돌아와 기자 회견 도중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달에 머무르는 동안 신의 존재를 아주 가까이에서 체험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곳에 가서 같은 것을 보고 왔는데 한 사람은 하느님을 본 듯 이야기했고 다른 한 사람은 하느님이 없다는 확신을 더 강하게 갖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이었다면 다시 확인이라도 해서 누구 말이 옳은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의 진리는 증명할 수 없는 정신세계의 것이고 각 사람의 믿음 안에서만이 객관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신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신은 우리 가운데 머무를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정말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는가? 하느님이라는 우리말도 ‘하늘’에 ‘님’이 합쳐서 ‘하늘님’, ‘하느님’을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표현은 하느님의 무한하심, 만물의 시작이요 끝이며, 우리 인간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차원, 지상에 머무는 우리의 차원과는 전혀 다른 차원임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차원에 계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실현시켜 주신 것입니다.
압바(Abba)란 ‘나의 아버지’란 뜻으로, 아버지께 대한 신뢰와 애정에 찬 아랍어 호칭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내는 주님 승천 대축일의 의미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심으로써 우리도 하늘의 차원으로 승격될 수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압바(Abba)께 오르심으로써 우리도 하느님의 영역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큰 구원의 선물을 받은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제1독서에서 그 대답을 명쾌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일상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증언하고 복음(福音)을 전하는,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실천하지 않는 믿음,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나날들을 미움의 시간표를 빼곡히 채우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하며,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두 발을 땅에 딛고 하늘의 압바(Abba)를 그리워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겸허한 신앙을 청해 봅니다.
삶과 죽음의 완성, 승천
-이기양신부-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 말 중의 하나가 '웰빙'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웰빙'은 말 그대로 건강한 (Well- 만족한), 인생(Being)을 살자는 의미입니다. 물질적 가치나 명예보다는 건강한 신체와 정신적 행복을 척도로 삼자는 것이 '웰빙'의 시작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웰빙 문화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시작은 미국과 비슷한 60~70년대인 것 같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새마을 운동'으로 전국이 들끓고 있었지요.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혀서… 푸른 동산 가꾸어 잘 살아보세."
이것이 웰빙 문화의 시작인 것이지요. 너무나도 지긋지긋했던 가난의 대물림으로부터 해방이 되는 것을 목표로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독재 정권을 감수하고, 또 저임금을 감수하면서 온 국민이 힘을 모아 뛰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가난에서 벗어나면서 삶의 질도 조금씩 높아져간 것이 우리 나라에서의 웰빙의 시작이라 생각됩니다. 이제는 없어서 못 먹는 사람과 더불어 너무 먹어서 탈이 나는 사람이 계속 늘어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노력해서 절대적 빈곤의 대물림을 끝내고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즐기며 잘 살게 된 지금 국민들이 더욱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는가 하고 물어본다면 그 답은 부정적입니다. 오히려 60~70년대보다도 더 불안하고 각박하며, 역사 이래 자살률이 최고 수치를 갱신하는 불행한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가난을 넘어서면 행복해 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부유해진 지금이 더 불행하게 느껴지는 것이 과장이 아닌 현실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행복한 인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플라톤이라는 철학자는 인간의 행복 조건 다섯 가지를 이렇게 제시한 바 있습니다.
첫째, 먹고 입고 살기에 조금은 부족한 듯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외모
셋째, 자신이 생각하는 것의 절반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명예
넷째, 남과 겨뤄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연설을 했을 때 듣는 사람의 절반 정도만 박수를 치는 말솜씨
행복해지기 위한 이 다섯 가지 조건들의 공통점은 조금은 부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차고 넘치는 곳에는 행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플라톤은 다섯 가지 행복의 조건을 제시하고도 인간의 불행의 극한인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일생을 통해 이뤄 놓은 모든 것을 빼앗기는 극단적 상실감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성과를 수포로 되돌려 놓는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는 참다운 '웰빙'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웰빙'의 완성은 '행복한 죽음'(Well- Dying)입니다. 행복한 죽음을 맞지 않으면 행복한 삶 또한 완성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넘어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기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고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믿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원한 나라를 희망하는 것, 이것이 확실하고도 완벽한 웰빙인 것입니다. 웰빙의 완성은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신앙을 사는 것이며 부활의 완성은 승천입니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의 완성인 승천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사는 신자들이 바로 '웰빙족'인 것이지요.
참된 행복은 유기농 식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전하는 삶에서 오는 것이며 열심한 신자인 여러분들이 멋진 웰빙족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승천
-이재민신부-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신 승천 대축일은 우리에게 하늘의 의미를 새롭게 던져준다. 예수께서는 부활 후 하늘로 오르심으로써 우리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게 하셨고 하늘을 통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당신을,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을 바라볼 수 있게 하셨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하늘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자만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분이 하느님 곁에 계심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복잡다단한 일상에 쫓기며 제대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유를 잃고 살아갈 때가 많다. 눈앞에 보이는 일에만 급급하여 하늘을 통하여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고통을 당하면 고통만 볼 뿐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내게 주시는 메시지를 보지 못하고, 남에게 상처를 받으면 상처를 준 남만 생각할 뿐 상처를 통하여 내게 전해오는 메시지를 읽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슬픔에 잠기고 그렇게 우리는 실망하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고통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을 바라보면서도 내게 올 구원만을 생각할 뿐 그 고통과 십자가 그리고 그 죽음이 내게 던지는 영생의 메시지는 읽지 못한다. 하느님의 뜻을 읽지 못한다. 그리하여 고통으로부터, 십자가로부터 멀리 달아나려고 기를 쓰며 살아간다.
그런 우리에게,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우리의 시선을 하늘로 향하게 하신다. 하늘을 통하여 당신의 십자가, 당신의 죽음을 바라보게 하신다. 스테파노는 그렇게 하늘을 우러러 봄으로써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 “아, 하늘이 열려있고 하느님의 오른편에 사람의 아들이 서 계신 것이 보인다.”(사도7,56) 주님께서는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심으로써 고통에서 고통만을 보던 우리의 눈을, 죽음에서 죽음만 바라보던 우리의 눈을 열어 영생을 바라보게 하신다. 제자들은 여태까지 한 번도 올려다보지 못했던 하늘을 바라보게 됨으로써 주님의 일생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주님이 오르신 그 하늘은 땅을 등지고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수평이 아니다. 주님께서 오르신 하늘은 당신께서 지상에서 겪으신 모든 고통을 등진 곳이 아니라 고통의 영원한 의미를 느끼게 해주는 곳이며, 지금도 당신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곳이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나타난 그분의 삶은 우리가 멀리서 감상할 수 있는 하늘의 이론이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당신이 오르신 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시어 시선을 다시 땅으로 향하게 하신다. “왜 너희는 여기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사도 1,11)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눈으로 당신께서 살던 곳, 당신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곳을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말은 이리하여 땅 아래의 세계에까지 내려가셨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에페 4,9-10 참조). 사실 땅 속 지옥에까지 내려가신 분이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다.
예수의 승천은 하늘과 땅을 통하여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게 하신다. 그것은 곧 부활이 주는 인생의 의미이다. 부활은 죽음이 죽음이 아님을 선언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활은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 눈으로 땅을 내려다보는 사람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승천은 새로운 강림
-강길웅신부-
제1독서 : 사도 1,1~11 (예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 제2독서 : 에페 1,17~23 (그리스도를 하늘나라에 불러 올리셔서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복 음 : 루카 24,46~53 (예수께서 그들을 축복하시면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사실은 크리스천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확신과 희망을 안겨 주게 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리스도와 같은 승천의 영광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은 이 다음 우리에게 돌아올 영광의 예표요 보증인 것입니다.
성서에 보면, "사람의 아들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다니 7,13). 유대인들은 모두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내용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하늘에 떠 있는 어떤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의 승천을 말한 작가는 루가뿐입니다. 루가는 사도행전과 루가복음 두 권의 책을 썼는데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승천으로 끝을 맺고 있으며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사실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루가는 예수님의 승천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 영광의 예수님은 먼 나라에 계셔서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이 이별된 것이 아니라 새롭고도 더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은 이별의 슬픈 장면이 아니며 새롭게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만나는 기쁨과 은혜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승천'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승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모습을 감추신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체험할 수 없는 먼 거리로 가신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시 오셔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승천은 떠나심과 동시에 새롭게 찾아 주신 사건입니다.
얼마 전에 자녀 때문에 고생하시는 어떤 자매님이 찾아와서는 이야기 끝에 주님은 자기를 버리셨다고 했습니다. 너무도 고생이 많았고 너무도 서운함이 컸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오해입니다. 주님은 우리 생애의 어느 한 시기도 떠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해도 그분은 우리를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지옥의 문턱을 넘어서기까지는 하느님은 항상 우리에게 희망을 갖고 계시며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힘들거나 어려운 때, 그리고 슬프거나 외로울 때 주님의 현존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높은 산을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 승천 대축일에 산이나 들에서 야외 미사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념이지 산이나 들만이 주님을 만나는 장소는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선 마음만 먹으면 됩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으면 그분은 또 보여 주시고 우리가 그분을 부르면 또 그 분이 우리에게 대답을 주십니다. 어떤 장소와 시간도 구애받지 않으시고 원하는 시간마다 원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어떤 형제가 예수님을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했지만 늙어 죽을 때까지 그 꿈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도 않았고 또 사랑하시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 병자성사를 받을 때 신부님께 그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이 그러셨습니다.
"평생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 사셨으면서도 하느님을 못 보았다고 하십니까? 자, 여기 예수님을 만나십시오."하며 성체를 영해 주시는데 형제는 그때 비로소 주님의 현존을 체험했다면서 지나온 생에 대한 감사와 회개를 눈물로써 고백했다고 했습니다.
옛날 필립보가 예수님께 "아버지 좀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하셨습니다. 우리도 사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보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을 꿈 속에서라도,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승천입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의 그 모습으로 우리 앞에 존재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하느님만의 특별한 존재 방법으로 우리 앞에 계실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뵙지 못하는 것은 다만, 우리의 마음과 신앙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승천의 믿음을 활짝 엽시다.
'주님의 산 증인'
-심흥보신부-
사람들이 가끔 "자식은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그러나 저는 신부 돼서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고 동생이 모시게 되어 늘 가슴속에 부담이 되었는데 정작 돌아가시고 나니까, 이제는 내 마음속에 언제나 내가 생각할 때마다 기억할 때마다 기억할 수 있으니, 가슴에 묻는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을 이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승천 축일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한 곳에 머물러 계시면 예수님께서 머물러 계시는 그곳에 함께하는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뵈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 본래의 모습대로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부를 때마다, 우리가 청할 때마다 우리와 함께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승천하시면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요한 16, 7)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그나마 '이젠 살았구나.' '이젠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겠구나.'하고 좋아했다. 그런데 또 다시 가신다고 하시니 그리고 이젠 영영 다시 안 돌아오실 것처럼 이야기하시니 정말 슬프고 전보다 절망스럽다. 한 번 가셨으면 아예 돌아오시지 말지 살짝 오셔서는 이제 완전히 가버리신다니 너무나 허망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 두지 않겠다. 기어이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요한 14, 18)하시며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요한 14, 16-17) 그리고 우리가 성령께서 오시면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이렇게 말씀하신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 17) 왜냐하면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4, 26)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을 받아들이고 성령께서 보여주시고 이끌어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에게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요한 14, 21)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언제나 주님께 충실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나약하고 부족하기까지 한 우리에게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로마 8, 26-27)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이런 희망을 안겨준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가 8, 28)
그리고 또 오늘 에페소인들에게는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으며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셔서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에페 1, 22-23)라고 말씀하신다.
승천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보이지 않고 쉽게 이해할 수 없어 받아들이기 힘든 신앙의 신비들을 다가오시는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도록 청하며, '갈릴래아 사람들처럼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것'(사도 1, 11)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산 증인'(루가 24, 18)으로서 부활하신 주님의 영을 따라 세상에 주님에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며 주님께 나아가야 하겠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과 삶을 본받아 실천할 때 그분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서공석신부-
부활 대축일이 지나고 40일이 지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합니다. 부활과 승천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죽음을 넘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곧 승천하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르코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시고 “하늘로 맞아들여져 하느님 오른 편에 앉으셨다.”(16,19)고만 말합니다. 마태오복음서는 마르코복음서를 옮겨 적으면서도 이 부분을 삭제하고 승천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루가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고 베타니아 근처로 그들을 데리고 나가 축복하시고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로 사도행전을 들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장면을 더 분명하게 묘사합니다. 부활 후 40일 동안 자주 나타나셔서 사도들을 격려하신 후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은 같은 사람이 집필하였습니다. 저자는 루가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삶에 대해 기록하고,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의 활동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저자의 기록인데도 두 문서가 전하는 승천 이야기는 서로 다릅니다. 루가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당일에 승천하셨고, 그 장소는 베타니아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고 제자들은 성전으로 가서 날마다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신지 40일 만에 승천하셨습니다. 장소는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는 구름에 싸여 올라가시고 제자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사람 둘이 나타나서 예수님이 같은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승천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 복음서들 안에 없는 것은 부활과 승천이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이 부활과 승천을 굳이 분리하여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사실로 말하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부활을 설명하려는 의도가 작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우주가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있는 죽음의 나라, 이렇게 세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부활은 죽음의 나라에서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돌아온 것이고, 승천은 땅에서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부활과 승천 사이에 40일의 기간을 둔 것은 제자들이 부활을 믿고 복음 선포에 나서기까지 상당한 시일을 필요로 하였다는 말입니다.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을 같은 저자가 집필하였는데, 두 문서에 승천을 서로 다르게 기록한 것은 승천에 대한 사실보도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다는 말은 그분이 제자들을 떠나 하느님에게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위에 군림하지도 않으시고, 당신의 초능력으로 제자들의 활동을 돕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떠나가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겨 놓은 것은 당신에 대한 기억이고, 성령이 곧 오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신 기적이 경이로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대해 제자들이 기록하여 남긴 성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배워 실천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우는 그리스도인인 것은 예수님의 초능력을 배워서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경이로운 일을 하며 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과 삶을 본받아 실천할 때 그분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요한복음서는 말합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그대들은 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고 그대들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14,19).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초능력을 과시하며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초능력을 과시하면 사람들은 그 초능력에 매료되어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굴종시키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의 생명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실천하여 자유로운 당신의 자녀로 살 것을 원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마르 8,11)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은 표징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초능력을 과시하여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하신 나머지 악의에 찬 유대인들의 자유 행사에 압도당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자유를 무시하고 그를 압도하여 자기 뜻을 관철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가 자기의 사랑을 자유롭게 받아 주고, 그 사랑에 호응할 것을 호소하고 기다립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처신이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이 섭리하시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여 떠나가셨다는 오늘의 메시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공동체에는 어느 누구도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위나 권한을 주장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떠나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당신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약속을 남기고 당신은 가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성령이 일하셔서 나타나는 제자들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군림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제자의 정체성은 섬김입니다. 성령이 살아계시는 신앙인의 모습에는 섬김이 보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말은 하늘이 있는 곳 어디에나 예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늘이 보이는 곳 어디에나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은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스스로를 낮추어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자기의 실수와 실패의 죽음을 넘어 하늘을 우러러는 마음으로 새 출발하는 사람들의 삶 안에 승천하신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기억 안에만, 혹은 전례가 거행되는 성당 안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넓은 세상 어디에나 그분이 가르치신 섬김을 실천하고 그 섬김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지고 수고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살아계십니다. 억울함과 고통을 딛고 일어서서 이웃을 섬기는 데에 삶의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의 삶 안에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나자렛, 갈릴레아 혹은 예루살렘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늘 아래 어디에나 성령이 일하시는 곳에, 희생적인 섬김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에, 예수님은 그들의 주님으로 살아 계십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승천하신 주님"
-이수철신부-
우리는 방금 화답송 후렴을 참 흥겹게 노래했습니다.
저절로 흰 구름 되어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입니다.
“환호소리 높은 중에 하느님 오르시도다.
하느님 오르시도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
참 기분 좋은 날입니다.
참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 쪽에 앉히시고,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성모성월도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느낌입니다.
마침내 주님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시니
우리의 하늘 길이, 하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미래에 있을
우리 믿는 모든 이들의 영광의 날을
앞당겨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났을 때 쓰는 ‘하늘이 불러갔다.’ 라는
소천(召天)이란 말과,
‘하늘로 돌아갔다.’라는
귀천(歸天)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하늘에 올라갔다.’라는 승천(昇天)이란 말과 더불어
하느님께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가는
인간의 운명을 암시하는 말들입니다.
본능적으로 ‘하늘’ 향한
초월적 욕구를 지닌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향한 우리의 갈망을, 초월적 욕구를 채워주며
우리 마음에 희망과 기쁨을 가득 안겨주는
승천하신 주님이십니다.
하늘을 바라보실 때 마다
승천하시는 주님과
승천할 우리의 미래를 상상하면
큰 위로와 평화를 얻으실 것입니다.
저는 베네딕도회 영성을 즐겨 목운동에 비유합니다.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베네딕도회의 모토에서 착안했습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목운동을 자주해야 합니다.
베네딕도회의 영성은 목운동의 영성입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하늘보고 땅보고,
하느님보고 사람보고,
관상하고 활동하고,....
자주 위아래로 목운동을 해야
온전한 균형 잡힌 영성입니다.
세상일에 너무 몰두하여 땅만 보고 살아도 안 되고,
영적 일에 몰두하여 하늘만 보고 살아도 안 됩니다.
네발 달린 동물들은
땅에 붙어살면서 먹는 일이 전부이지만,
사람들은 두발로 서서 하늘도 보고 땅도 보며
일하며 살라고 직립으로 만들어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늘 보고 기도하고 땅에서 일해야 비로소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손이요, 일하는 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승천하는 주님을
넋 놓고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한
천사들의 충고가 재미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하늘을 그만 바라보고
네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일상의 삶에 충실 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하늘에 오르시면서
약속하신대로 당신의 마지막 재림에 앞서
보호자 성령을, 교회를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이 성령 덕분에
하느님 곁에 계신 초월의 주님께서
우리 곁에 내재하시는 주님이 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주시어
아버지를 알게 하셨고,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어
우리가 지닌 희망에 대해
그리고 그분 상속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깨달음의 은총들
승천하신 주님께서 보내주신 성령 덕분입니다.
승천하신 주님은 우리의 기쁨과 희망의 샘입니다.
승천장면을 목격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크게 기뻐하며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합니다.
바로 오늘 우리의
주님 승천 미사 분위기와도 흡사합니다.
우리 모두 큰 기쁨으로
승천하신 주 예수님을 경배하며
하느님 찬미의 미사를 봉헌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부활 승천이 없으면 성령도, 교회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발아래 만물을 굴복시키시고,
만물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우주만물을 가슴에 품는 교회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교회를 통해,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온 누리에 퍼져갑니다.
교회가 거행하는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지탱되는 온 세상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 모두를 한 말씀으로 요약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교회는 물론 온 우주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라는 놀랍고도 장엄한 고백입니다.
오늘도 부활 승천하신 주님은
성령 충만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를
하늘의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채워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아멘.
하늘과 땅의 새로운 의미
-박상대신부-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로, 즉 그분께서 원래 계셨고, 오셨던 곳으로 다시 올라가셨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이다. 유럽 교회에서는 주님 승천 대축일을 통상 부활 제40일째인 부활 제6주간 목요일에 지내고, 우리나라와 같은 전교지역에서는 부활 제7주일에 지낸다. 예수님의 승천사실은 전하는 신약성서의 기록들을 먼저 살펴보자.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기록은 신약성서에서 단지 세 군데 발견된다.(사도 1,3-11; 루가 24,50-52; 마르 16,19) 마태오와 요한복음에 승천사실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놀랄 필요는 없다. 마태오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따로 갈릴래아의 산으로 초대하신 후, 제자들에게 첫째로 "세상 모든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을 것", 둘째로 "성삼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 것", 셋째로 "예수께서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칠 것"을 지상사명으로 내려주신 다음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함께 있을 것을 약속하셨다.(마태28,16-20) 이렇게 마무리되는 마태오복음은 예수님의 승천사실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이미 장구한 고별사(13-17장)의 틀 안에서 죽음-부활-승천-성령강림을 예고한다. 특히 추가로 편집된 21장은 부활하신 예수의 베드로에 대한 특별한 안배를 통하여 예수께서 가신 길을 베드로도 따를 것을 명하고 있다.(요한 21,19) 마르코복음이 전하는 승천사실도 사실은 후일 추가로 편집된 기록에 속한다.(마르 16,9-22) 이 대목에서 추가편집자는 마태오와 루가복음을 참조하여 부활예수의 발현, 제자들에게 지상사명전달, 예수의 승천 사실을 덧붙임으로써 복음서를 마무리짓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승천사실을 제대로 기록하고 있는 신약성서의 기록은 루가복음과 사도행전뿐이다. 그런데 루가복음을 잘 살펴보면, 예수께서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부활하신 후 바로 그 날 저녁 늦은 시각에 승천하신 것으로 보인다. 즉,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부활, 발현, 승천 사실을 단 하루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도하고 있다는 것이다.(루가 24,1-53) 오직 사도행전만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여러 가지 증거로써 여전히 살아 계심을 보여주셨고, 후기 교육과 함께 성령의 강림을 약속하신 후 11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사도 1,3-11)
결론적으로 복음서들의 직접·간접적인 기록을 통하여 예수께서 승천하셨다는 사실은 확실하나, 부활하신 후 40일째 되는 날 승천하신 사실은 사도행전의 증언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개념을 다시금 정리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 돌아가신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이나, 부활하신 후 40일간 지상에 머무셨다는 것, 성령강림 사건이 유다교의 과월절 후 50일째 되는 오순절에 일어난 사건(사도 2,1-4)이라는 것 등에서 성서저자들이 정확한 시간을 기록하려했다기보다는 3일, 40일, 50일의 신학적 의미를 더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서에서 3일은 무엇을 결정하고 확인하는 의미를, 40일은 회개와 변화를 위한 준비의 뜻을, 50일은 하늘로부터 귀중한 것을 내려 받는 오순절의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하늘과 더불어 살아왔다. 하늘에 빌고, 하늘을 우러러 반성하고, 푸르고 넓은 하늘을 보면서 답답한 가슴을 달래고 살았다. 오늘 우리는 대도시에서 하늘을 우러러볼 여유도 없이, 우리 삶의 일상쳇바퀴에 갇혀서 살아간다. 푸르고 신선한 하늘, 밤이면 별이 쏟아지는 하늘이 우리 삶에서 사라진 그만큼, 하느님에 대한 감수성도 잃어가고 있다. 우리 삶에 숙연함을 주는 체험도 잃어가고 있다. 넘쳐나는 인간 생산품에 시선을 빼앗기고, 정보매체들이 전하는 정보의 홍수에 빠져, 우리는 모두 분주하게 또 고달프게 살아간다. 하늘을 우러러 생각할 겨를도 없고,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여유도 없다. 이러한 때 주님 승천 대축일은 그런 삶이 인간 운명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하늘이 우리 삶에 의미하는 바가 있듯이, 우리가 세상에서 매일 보고 듣는 것보다 더 귀중한 것이 우리 삶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푸르고 넓은 하늘, 우리 마음을 숙연하게 하는 하늘,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하늘의 의미를 되찾게 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절망과 실의에 빠진 병든 이들을 고쳐서 생기 있는 삶의 현장으로 보내셨다. 죄인이라 버려진 이들을 찾아가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하느님의 넓으신 자비 앞에 그들을 숙연하게 만드셨다.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 살아야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행복을 오히려 불행한 것으로 보셨다. 예수님을 재판하고 사형 언도를 내린 유대인 최고 회의와, 그 언도를 확인하고 집행한 빌라도는 잠깐의 승리자였고,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은 잠시 동안은 패자였으나 이제 영원한 승리자가 되셨다. 이 모든 것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자비와 은총의 결과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묵은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고린 5,17). 그리스도 안에 새로움을 체험한 바울로 사도의 외침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가 사는 하늘과 땅에 새로움을 준다. 승천은 하늘 아래 어디에나,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실천되는 곳에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며, 그곳에 참다운 삶을 향한 새로움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당이나 사람들이 거룩하다고 여기는 어떤 곳에 갇혀 계시는 것이 아니다. 푸르고 넓은 하늘이 어디에나 있듯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사람들이 있는 곳 어디에나 그분은 새로운 체험의 대상으로 늘 살아 계시는 것이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