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상 황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울시장은 ‘지자체장(지방자치단체장)의 꽃’으로 불린다.
한해 25조원의 예산을 주무르고 5만여
공무원의 임명·해면권을 쥐고 있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최고 의사결정권자다. 경제, 도시계획, 복지, 교육,
문화, 심지어 외교까지 서울시장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분야는 드물다.
국방력만 제외하고는 모든 권한을 갖고 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만큼
파워가 실로 막강하다.
조선시대 한성의 수장이던 판윤(判尹)은 어땠을까.
한성 판윤은 6조판서와 동등한 정2품의 경관직(중앙관직)으로 종2품 외관직(지방관직)인
각 도의 관찰사(觀察使·지금의 도지사와 광역시장)보다 직위가 높았다. 한성부가 전국
부(府)의 하나였지만 부의 수장인 부윤(府尹)과 구별하여 판윤이라 호칭해 특정 지역을
관할하는 직책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오성과 한음 설화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 개인소장
실제 판윤은 의정부 좌·우참찬, 6조판서와 함께 아홉 대신을 뜻하는 9경(卿)에 포함되는
중요한 자리였다. 궁궐과 중앙관서를 호위하고 도성 치안을 담당해 매일 편전에서 국왕과
정사를 논하는 상참(常參)에 참여했다. 지금의 행정부시장 격인 종2품 좌윤과 우윤이 보좌했고
대체로 판서나 참찬 등 정2품을 지낸 인물이 임명됐다.
‘정승이 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벼슬’로 인식되면서 이를 차지하기 위해 붕당 간 경쟁도
치열했다. 한성부 청사는 조선의 행정부가 위치했던 육조 거리에 위치했는데 순서는 의정부와
이조 다음에 배치됐다.
실학자 박세당. 실학박물관 소장
서울의 명칭은 처음엔 ‘한양부’였으며 태조 4년(1395) ‘한성부’로 변경돼 515년간 쓰이다가
1910년 경술국치 후 ‘경성부’로 바뀌었다. 한성부를 다스리는 벼슬아치의 명칭은 ‘판한성 부사’로
시작해 ‘한성 부윤’, ‘한성 판윤’, ‘관찰사’ 다시 ‘한성 판윤’으로 변했다. 예종 원년인 1469년
한성 판윤으로 바뀌어 일제에 병합될 때까지 430년간 사용되면서 한성 판윤은 서울 수장의
대명사로 인식돼 왔다.
초대 한성 판윤은 이성계의 오랜 벗인 성석린(1338~1423)이었고, 조선 515년간 1390대에 걸쳐
총 1100여 명이 한성판윤이 배출됐다. 명재상 황희(1363~1452)와 맹사성(1360~1438), 명문장가
서거정(1420~1488), 행주대첩의 명장 권율(1537~1599), 한음 이덕형(1561~1613), 병자호란 때
주화론(主和論)을 이끈 최명길(1586~1647), 실학자 박세당(1629~1703), 정조의 탕평책을 진두
지휘한 채제공(1720~1799), 개화사상의 선구자 박규수(1807~1877) 등이 한성 판윤을 지냈다.
뿐만 아니라 ‘희대의 간신’이라는 오명이 따라다니는 유자광(1439~1512), 성리학의 대가 회재
이언적(1491~1553), 암행어사 박문수(1691~1756),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1855~1935), 을사
조약이 체결되자 자결한 민영환(1861~1905) 등도 한성 판윤 출신이다.
한성 판윤을 열 명 이상 배출한 가문은 전주 이 씨, 여흥 민 씨, 달성 서 씨, 파평 윤 씨 등 모두
스물다섯 가문이다. 전주 이 씨에서는 마흔세 명, 여흥 민 씨에서는 서른다섯 명이 나왔다. 한성
판윤을 가장 많이 역임한 인물은 이가우(1783~1852)로 헌종에서 철종대까지 13년 동안 무려
열 차례나 지내 ‘판윤대감’이라 불렸다.
정조시대 명재상 채제공.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최단기간 한성 판윤은 김좌근(1797~1869)으로, 임명된 날(철종 즉위년·1849) 오후에 최다
판윤을 지낸 이가우가 새로 임명되면서 반나절 만에 옷을 벗었다. 고종대에 이기세, 한성근,
임웅준도 하루 만에 교체됐다. 판윤대감 이가우 역시 총 재임 기간은 1년3개월에 불과하다.
영조 때 병조판서를 지낸 풍산 홍 씨 상한과 그의 아들 낙성, 손자 의모가 3대에 걸쳐,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달성 서 씨 종태와 두 아들 명균과 명빈은 삼부자가 한성 판윤을 각각 지냈다.
정조 14년(1790) 12월 한성 판윤 구익은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 밖 국왕 거둥길의 눈을 치우지
않아 파직되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3개월 뒤에 한성 판윤에 다시 임명됐다. 일제강점기에
경성부로 격하된 서울의 수장은 경성 부윤으로 스물두 명의 경성 부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광복 후 서울시로 변경된 뒤로는 관선 시장 스물아홉 명과 민선 시장 여섯 명(강덕기
직무대행 포함)이 서울의 수장을 맡았다.
도시계획·건설은 오늘날 서울시장처럼 한성 판윤의 중요한 업무였다. 초대 한성 판윤 성석린은
경복궁을 신축하고 도성을 축조하면서 도시 기반을 다졌으며 홍계희(1703~1771)는 영조
36년(1760)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로 서울 주배수로의 기능을 회복시켰다. 이채연(1861~1900)은
광무 2년(1898) 간선도로를 확장하고 도로 위의 쓰레기와 진흙탕을 정비해 근대적 도시 건설의
기초를 다졌다.
암행어사의 대명사 박문수. 일본 덴리대 소장
조선시대 한성 판윤은 서울시장과 달리 형사사건도 담당했다. 살인, 강도 등의 중죄인은
중앙의 형조가 구속해 죄를 다스리게 하되 절도, 간통, 친족 간 불화, 구타, 욕설 등
상대적으로 가벼운 범죄는 지방수령이 처리할 수 있었지만 한성부는 형조와 사실상 동등한
힘을 가졌다.
일례로 단종 즉위년(1452) 8월 서울 근교 미사리에서 어린이 유기 사건이 발생하자 임금은
한성부가 범인을 국문하라고 지시했다. 태종 4년(1404) 사노 실구지 형제와 박질이 상전인
내은이라는 여성을 강간한 사건도 한성부에서 맡아 자백을 받아 낸 뒤 능지처사(陵遲處死)했다고
실록은 썼다.
한성부는 사법기관으로서 제반 소송과 재판에 관한 사무도 관장했는데 중앙에 소재한
세 곳의 사법행정 기관인 삼법사에 형조, 사헌부와 함께 한성부도 포함됐다. 논밭과 가옥을
둘러싼 법적 다툼이나 묘지에 관한 산송, 시체 검시 등의 업무는 한성부가 전국을 관장했다.
한성 판윤은 오늘날 서울 시장을 능가하는 권력을 갖고 있었다.
<출처: 매일경제 배한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