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은
순리에 대한 깨달음을 자연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흐르는 물은 낮은 곳에 모이지만
바닷물이 거칠어도 모래턱을 넘지 못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렘5:22)
바닷물이 모래턱을 넘지 못하는 것은
지구가 둥들기 때문입니다.
물이 위에서 흐르듯 또 다른 하나님의 순리는
거친 파도가 모래 언덕을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욥은 문학의 감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창조적 지혜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살피시며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
그 때에 그가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탐구하셨고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고 하였습니다.(욥28:23-28)
욥은 고난 중에서도 창조적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문학의 감성으로 창조의 복음을 소통의 서정으로 노래하였습니다.
창조의 원리로 하나님의 소통을 삶의 지혜와 지식으로 삼았던 욥기의 저자는
하늘과 땅을 지혜의 그 말씀으로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소셜네트워크 시대 소통의 리더쉽에 요구되고
소통의 장은 공감의 세대를 빛나게 합니다.
그러나 소통의 벽은 모래턱을 넘지 못하는 거친 파도와 같고
흐르는 물은 소통의 한계를 산과 골짜기의 경계로 가졌습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
산의 골짜기로 흐르는 물은 능선을 넘지 못합니다.
산의 높은 곳과 낮은 곳은
물이 흐르는 소통의 길이 무엇인가를 교훈합니다.
가끔 정치인들의 볼멘 소리......
소통의 벽을 성토하며 불통의 소치를 비난합니다.
소통의 순리는 비난의 먹이감이 아닌데도
불통의 비난질로 목청을 높이며 가뭄에 타들어가는 논바닥으로 소통의 소외를 부끄럽게 드러냅니다.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소통의 장벽, 그 상호작용으로
골짜기의 물이 산의 능선을 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소통의 소외......
그것은 소통의 벽으로 흐르는 물길을 스스로 막은 비극이요,참상입니다.
자신의 참상을 남의 탓하는 정치인은
소통의 리더쉽으로 공감의 장을 미래 발전의 희망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스스로 몸을 낮추고 마음을 겸손히 하여 골짜기가 되면
물은 흐르고 소통의 통로가 되어 흐르는 물을 모아낼 것입니다.
고개를 쳐들고 교만하여 비난의 삿대질로 정국을 이끌어 간다면
누구라도 화합과 통합의 정치적 리더쉽을 가진 정치는 요원할 것입니다.
소통의 벽을 가진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를 보고 불통을 비난하는 것은 우매하고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골짜기의 물은 계곡으로 흐르고
계곡의 물은 강물이 되어 바다로 흘러 갑니다.
대인의 길은
몸을 낮추고 마음을 겸손하게 하여 소통의 문을 열어 흐르는 물이 되어야합니다.
담장을 높게 하고 그 위에 유리 조각을 박고 또 철조망을 치고서
이웃과의 소통을 말한다면 속된 말로 개수작일 것입니다.
먼저 담장을 헐고 문턱을 낮추면.......
누구든 이웃이 될 수 있고 친근한 정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은
소통의 공감으로 화평의 덕을 그 말씀으로 이룰 때 가능합니다.
막힌 담을 헐고 화평케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와 소통하는 참된 주의 백성입니다.
소통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또 거친 파도가 모래 언덕을 넘지 못하는 것처럼
분량의 한계로 진리 안에서 자유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범주를 넘어서는 소통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소통할 수 없을 것서입니다.
태초에 계신 그 말씀은
그 완전한 지혜와 지식과 진리로 창조와 우주의 질서를 확립하였습니다.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주의 참된 성도는
빛과 생명의 말씀으로 소통하고 은혜와 진리의 말씀으로 소통합니다.
또한 언약과 약속의 말씀으로 소통하고
진리의 복음과 구원의 말씀으로 은혜의 해를 선포하고 천하만민을 그리스도로 소통하게 합니다.
많은 물 위에 있는 하나님의 소리와 소통하는 자유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영생의 복으로 누리는 구원의 실상입니다.
소통의 본질, 그 미학을 잃어버린 사람은
우주적 하나님 나라의 소통을 증거의 말씀으로 영원히 담아낼 수 없습니다.
빛과 어둠은 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경계와 한계, 분별과 분리의 문제요
하나님의 아들과 벨리알은 조화가 될 수 없습니다.
전염병과 소통할 수 없듯 진리와 비진리는
배타적 한계를 가지며 대립과 갈등의 문제이지 소통과 공감의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과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종교 다원주의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종교적 감성은
전염병과 소통하는 죽음의 길입니다.
언약적 개혁주의 복음 신앙은
기복과 무속의 인본주의 신앙과 절대 소통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진리의 바른 길로 가지 아니하고......
맘몬의 영화를 누리는 바알 신앙을 선택하였습니다.
복음으로 다른 복음과 소통하고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연합을 인본주의 신앙으로 결속하였습니다.
거친 파도가 모래 언덕을 넘고
쓰나미가 되어 삶의 터전을 휩쓸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의 순리가
인본주의 그 신앙의 힘으로 낮은 곳의 물이 위로 올라가는 역리현상을 만들었습니다.
종말론적인 현상의 끝은
소셜네트워크의 좀비적 현상일 것입니다.
창조적 빛과 생명의 원리를 거스리는 좀비적 소통은
하나님 나라 그 왕국을 누리는 은혜의 소통이 아닙니다.
소통의 리더쉽은 불통을 비난하는 삿대질이 아니라
위에서 흐르는 물을 담아내는 바다의 웅지를 품은 순리입니다.
참으로 진리와의 소통은
하나님의 뜻으로 완전한 공의와 거룩의 눈높이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오는 것이 거룩의 소통이요,
죄의 악에서 눈물의 참회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 성결의 소통입니다.
인본주의 신바벨탑 문화로 소통하는 것은
노아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와 고라와 발람의 패역을 따르는 심판과 죽음의 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뜻과 소통하기 위한
영원한 언약의 중보로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로 말미암아 진리의 복음 곧 구원의 그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빛과 생명과 진리와 은혜를 공유하는 소통의 새롭고 산 길입니다.
참으로 바다의 모래턱은 불통의 장벽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조화할 수 없는 경계, 그 진리 안에서 평과 평안으로 누리는 자유의 문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