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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삶과 신앙] “재난 속에서 이웃이 되어준 교부”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
지난 두 달간 “강철 같은 사람” 오리게네스를 만났다면, 이번 호에서는 그의 제자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Alexandria, 약 190~264/265년)를 소개합니다. 후대 교회는 그를 “위대한 디오니시우스”라 불렀습니다. 그를 기억하게 하는 것은 학문적 업적만이 아닙니다. 박해와 재난의 한복판에서 공동체를 돌보았던 목자의 삶도 그 이름 안에 담겨 있습니다.
지난 8월, 마산교구 거제지구는 기록적인 폭우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15일부터 사흘간 약 900㎜의 비가 쏟아졌고, 집중호우가 만조 시간과 겹치면서 집과 성당이 물에 잠기고 삶의 터전이 무너졌습니다. 이러한 재난 앞에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됩니다. “고통받는 이에게 나는 어떤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까?” 약 1800년 전 디오니시우스가 남긴 편지는 오늘 우리의 물음에 오래된 이야기 하나를 들려줍니다.
이교도 가정에서 태어나 그리스도교로 회심한 디오니시우스는 오리게네스에게 배웠고,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의 교장을 거쳐 247~248년경 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평온한 사목의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에는 체포와 피신을 겪었고, 뒤이어 발레리아누스 황제 때에는 유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박해만이 아니었습니다. 전쟁과 기근에 이어 역병까지 알렉산드리아를 덮쳤습니다. 디오니시우스는 부활절을 앞두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참상을 전하면서, 병자들 곁을 지켰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이 편지의 일부는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에 인용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집니다.
“우리 형제들 대부분은 넘치는 사랑과 형제애로 자신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서로를 굳게 붙들고 두려움 없이 병자들을 찾아가 끊임없이 돌보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섬겼습니다. (…) 많은 이들이 이웃을 돌보고 낫게 하다가, 이웃의 죽음을 자기 자신에게로 옮겨 그들을 대신하여 세상을 떠났습니다.” -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7권 22장 7절, 디오니시우스의 부활절 서신에서 발췌
디오니시우스는 이렇게 이웃을 돌보다 목숨을 잃은 이들의 죽음을 순교에 견줄 만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사제와 부제뿐 아니라 평신도들도 있었습니다. 신앙이 있다고 해서 고통과 죽음을 피해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받는 이를 홀로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복음은 병자의 곁을 지키는 손길이 되었고, 죽은 이를 정성껏 거두는 사랑이 되었습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고통과 죽음을 외면하는 일이 아니라, 그 한복판에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일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 교구의 지난여름도 그 오래된 편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8월 19일, 이성효 리노 주교님께서는 교구 기획관리국장 신부, 사회복지국장 신부와 함께 거제 수해 현장을 찾으셨습니다. 지하층 전체가 침수된 장평성당, 산사태 피해를 입은 순교자 윤봉문 요셉 성지, 침수 피해를 입은 지세포성당을 차례로 방문하여 피해 상황을 살피고 복구 지원 방안을 논의하셨습니다. 거제지구 사제단도 지구장 신부를 중심으로 복구와 지원 방안을 논의하며 실질적인 도움을 보태고자 했습니다. 신자들은 성당에 들어찬 물과 토사를 치우며 힘을 모았습니다. 자기 집이 침수된 상황에서도 새벽부터 성당으로 달려와 함께 물을 퍼낸 이들도 있었습니다. 교구는 피해 신고와 성금 접수창구를 마련하여 도움의 손길을 모았습니다.
역병에 걸린 이의 곁을 지키던 손길과 수해 현장에서 진흙을 걷어내던 손길은 시대도 상황도 다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마음은 다르지 않습니다. “당신을 혼자 두지 않겠습니다.” 디오니시우스가 편지에 담아 전한 사랑도, 우리 교구가 거제지구의 형제자매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마음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재난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지만, 고통받는 이에게 어떤 이웃이 되어줄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디오니시우스의 오래된 편지는 그렇게 과거의 기록에 머물지 않고, 오늘 우리 교구가 함께 써 내려가는 살아있는 역사의 일부로 되살아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44) 타인의 행복을 빼앗는 언어 폭력에 의한 불의(不義)
익명성 뒤에 숨은 칼날… 언어적 정의 지켜 소통의 장 만들어야
현대 사회는 소통의 혁명 시대를 맞이했다. 누구나 실시간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SNS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아고라’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오늘날 이 디지털 광장은 소통과 연대의 장이 아닌 가짜 뉴스, 혐오 표현, 근거 없는 인격 모독이 난무하는 전쟁터로 변질되었다. 특히 정치권의 풍경은 참담하다. 정책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대안 제시는 사라진 지 오래이며, 오로지 상대 진영의 인격을 말살하고 사회적 생명을 끊기 위한 고발과 비방만이 난무한다. 이러한 세태는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근간인 정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기술의 비약적인 발달이 왜 인간의 도덕적 탁월함으로 이어지지 못했는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의 언어는 왜 이토록 불의에 가득 찼는가?”, “이웃의 사회적 신망을 파괴하는 행위는 단순한 말실수인가, 아니면 본질적인 악습인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에서 볼 때, 기술은 외적 행위의 속도와 파급력만을 증폭시켰을 뿐, 인간 내면의 ‘의지의 올바름(rectitudo)’이라는 도덕적 습성을 도외시하게 했다. 즉, 올바른 지향을 잃어버린 기술적 도구가 불의한 의지와 결합하여 타인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흉기가 된 것이다. 이러한 현대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 행위와 언어의 도덕성을 엄밀히 규명한 토마스의 통찰을 살펴보자.
언어를 통한 불의의 본질
토마스에 따르면, 정의가 다루는 대상은 단순히 물질적인 사물에 국한되지 않고 ‘언어’를 포함한다.(II-II,58,8)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결코 단순한 정보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그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권리를 확정하는 정의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를 통해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정의의 결핍인 ‘불의(iniustitia)’에 해당한다.
토마스는 단순한 실수가 아닌, 명백한 의도(intentio)를 가지고 타인의 선을 해치려는 언어적 행위의 무게감을 엄중히 평가한다. 그는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불의한 행위가 영혼의 생명인 ‘참사랑(caritas)’을 직접적으로 거스르는 ‘사죄(peccatum mortale)’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II-II,59,4) 특히 현대 SNS의 익명성은 이러한 참사랑의 인격적 관계를 단절시키며, 죄의 가책 없이 타인의 사회적 생명을 파괴하려는 의지적 공격을 더욱 용이하게 만든다.
면전에서의 ‘모욕’과 등 뒤에서의 ‘중상’
언어를 통해 타인의 사회적 신망을 무너뜨리는 구체적인 형태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모욕과 중상이다. 모욕(contumelia)은 타인의 면전에서 명예를 거스르는 말을 통해 망신을 주는 행위다. 토마스는 이를 타인의 명예를 직접적으로 강탈하는 폭력적 행위로 규정하며, 그 성격이 ‘강도’와 유사하다고 보았다.(II-II,72,1) 이는 상대방의 인격적 존엄을 현장에서 파괴하는 명백한 공격이다.
모욕이 정면 공격이라면, 중상(detractio)은 은밀한 말로 이웃의 명성(fama)을 제거하는 비겁한 행위다. 토마스는 명성을 세속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자산으로 평가하기에, 이를 앗아가는 중상은 ‘절도’와 같으며 반드시 ‘배상(restitutio)’의 의무를 지님을 강조한다.(II-II,73,1-2) 특히 익명 게시판이나 비공개 단체 채팅방에서 이루어지는 루머 유포는 중상의 전형적인 현대적 형태다. 디지털 환경에서 중상은 더욱 치명적이다. 한 번 훼손된 명성은 무한히 복제되어 유포되기에, 토마스가 강조한 배상의 의무를 실천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관계를 단절시키는 ‘불평’, 인격을 훼손하는 ‘조롱’, 언어 폭력의 극단인 ‘저주’
명예와 명성에 대한 공격이 사회적 자산을 훔치는 것이라면, 다음의 행위들은 공동체의 근간인 우정과 인격 자체를 겨냥한다. 불평 또는 중상모략(susurratio)은 단순한 불만 토로가 아니라, 이간질을 통해 우정을 갈라놓는 것을 목표로 하는 악의적 행위다. 토마스는 불평이 중상보다 더 큰 죄가 된다고 비판한다.(II-II,74,1-2) 인간에게 우정은 외적 명성보다 더 본질적인 선이며, 공동체의 화합을 깨뜨리는 행위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해악이기 때문이다.
조롱(derisio)은 인격 자체를 깎아내려 상대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행위다. 최근 온라인에서 유행하는 특정 대상을 향한 ‘밈(meme)’이나 희화화는 토마스가 경고한 조롱의 전형적인 사례다. 이는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상대방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전락시키는 잔인한 불의다. 특히 상대의 명성이 클수록, 혹은 상대가 취약한 상황일수록 조롱의 죄는 더욱 무거워진다.(II-II,75,1-2)
언어적 불의의 극단은 이웃에 대해 악을 바라며 퍼붓는 저주(maledictio)다. 토마스는 저주를 단순한 감정적 폭발이 아니라, 타인에게 실질적인 악(벌)이 임하기를 바라는 의지적 선택으로 정의한다.(II-II,76,1) 이는 정의의 관점에서 타인의 안녕을 바라야 할 도덕적 의무를 근본적으로 저버리는 행위다. 또한 토마스는 하느님의 피조물을 저주하는 행위가 지니는 불경함을 지적한다.(II-II,76,2) 하느님의 모상인 타인에 대한 저주는 단순한 개인적 원망을 넘어 존재의 질서 자체에 대한 반역이자 창조주에 대한 모독이다.
현대 SNS 공간의 혐오와 정치적 모독은 기술의 부작용을 넘어, 타인의 권리인 명예와 명성을 강탈하는 명백한 ‘불의’의 산물이다. 토마스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우리의 언어가 불의에 가득 찬 이유는 우리가 언어를 ‘각자에게 그의 몫을 돌려주는 도구’가 아닌, 타인의 몫을 빼앗아 자신의 ‘영향력’과 ‘조회수’를 챙기려는 탐욕의 수단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정의의 핵심이 각자에게 그의 몫을 돌려주는 것이라면, 디지털 공간에서의 정의는 타인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존중과 신망을 되돌려주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비록 온라인 공간이 익명성 뒤에 숨어 있다고 할지라도, 타인의 사회적 신망을 보호하려는 ‘올바른 의지’를 갖추는 것이 공동선 실현의 필수 요건이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도 타인의 몫을 존중하는 언어적 정의를 실천할 때, 비로소 우리의 디지털 아고라는 진정한 소통의 장이 되어 서로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다.
교황 권고 「하느님을 찬미 하여라(Laudate Deum)」의 생태영성 (1)
지구가 따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따뜻해져야 합니다!
금년 여름에도 변함없이 기후변화에 따른 여러 가지 재난 소식이 뉴스에 자주 소개되었습니다. 뉴스만 들으면 금방이라도 세상이 어찌 될 것 같은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였습니다. 또 앞으로 예견된 재난 예측도 우리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그러나 인류는 그렇게 손을 놓고 가만히 재난을 기다리고만 있지도 않았습니다.
국제 에너지 기구(IEA)의 발표에 따르면, 2025년 세계적으로 새로 설치된 재생에너지 발전설비는 약 800GW(원전 800기 규모)에 달한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엔 6곳의 원자력 발전소가 있고 여기에서 24기의 원자로를 가동 중입니다. 우리나라 원전의 총 40여 배에 달하는 재생에너지 설비가 전 세계에서 설치되고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 재생에너지 설비로 전체 인류의 에너지 필요량 중에서 25%를 충당했습니다. 이를 통해 2025년에 연간 30억 톤의 CO₂(이산화탄소)를 절감하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이 밖에도 모든 사람이 함께 노력하고 있는 다양한 탄소감축 노력을 수치로 환산하기 어렵지만, 우리 각자는 삶의 자리에서 조금씩이라도 탄소배출을 감소하려는 공동의 목표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연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우리를 살려주고 있는 창조세계를 어떻게 다시 살릴 것인가?”라는 방향으로 질문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찬미 받으소서」가 창조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하라는 초대였다면, 2023년 교황 권고 「하느님을 찬미하여라」(Laudate Deum)는 그 사랑을 행동으로 증명하라는 요청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문학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지구의 온도가 오르는 것이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타인의 고통과 피조물의 신음에 무감각해진 인간의 마음입니다. 교황은 지구를 식히기 전에 먼저 인간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라고 말한다.”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혹 기회가 없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고통도 함께 견디어내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도 창조세계를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37) 복자 이경언 바오로
순교한 형·누나 따라 조선 교회의 모범이 된 묵상가
조선 왕조 치하 박해기 날마다 묵상과 삶의 모범으로 세상 사람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가르치는 이가 있었다. 그는 가족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간직하고 형제자매 그리고 친·인척이 걸어간 순교의 길을 기꺼이 따랐다. 이번 호에는 묵상가이자 교회 재건을 위한 성직자 영입 운동을 지원한 복자 이경언(바오로, 1792~1827)을 소개한다.
박해로 몰락한 집안에서 신앙생활에 전념
이경언은 복자 이경도(가롤로)와 이순이(루갈다)의 동생이다. 신유박해로 형과 누나가 순교할 때 그의 나이 9살(또는 10살)이었다. 이경언은 조선 태종 이방원의 서장자 경녕군의 15대손이다. 아버지 이윤하(마태오)는 조선 가톨릭 신앙 공동체 설립 당시 주도적으로 활동했던 인물이고, 어머니 권씨는 권철신(암브로시오)와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여동생이다.
1801년 신유박해로 집안이 몰락한 이경언은 어머니 권씨와 형수(이경도의 부인) 오씨와 함께 가난하게 살았다. 왕족의 후손이었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가문에서 아무도 그들을 돌봐주지 않았다. 그는 22살에 중인 집안의 한 여인과 혼인했으나 아내의 성질이 고약해 평생 크나큰 괴로움을 감당해야 했다. 어머니와 형수는 가난을 견디지 못해 1815년 충청도 연풍으로 이주했고, 이경언 홀로 남아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오직 그리스도인 삶의 본분에만 전념한 그는 외교인들을 신앙으로 권면하여 가르치고, 냉담자들을 고무하고, 이교인들을 회개시키는 데 정성을 기울이면서 교우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자주 병약했던 그는 그의 고통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고, 가르치고 권면하면서 종종 밤을 새는 것을 염려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그의 결점들을 그에게 알려줄 것을 청했고, 그에게 이러한 도움을 주는 이들에게 감사를 표했다.”(다블뤼 주교,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63~67쪽 참조)
그는 교회 서적을 필사하고 성화를 제작 판매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지만,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아낌없이 가진 것을 나눠줬다. 무엇보다 그는 신유박해로 산산이 무너진 신앙 공동체를 재건하는 데 힘썼다. 가난 속에서도 성직자 영입을 위해 북경을 오가는 정하상(바오로)의 여행 경비를 마련하는 데 앞장섰다.
묵상에 힘쓰며 교우들에게 순교 권면
이경언은 묵상가였다. 그는 늘 성경을 읽고, 깊은 묵상에 빠졌다. 기도하기 시작하면 사람의 왕래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집중했다. 그를 만난 모든 이가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어느 누구라도 그의 말을 무심하게 듣지 않았다.
그의 묵상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었다. 주님의 십자가 수난을 묵상할 때마다 그는 순교의 열망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교우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조선 전역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선 우리가 순교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만나는 교우들에게 늘 주님을 위해 죽을 준비를 하라고 권고했다.
1827년 전라도에서 정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체포된 한 교우가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교회 서적과 상본을 이경언으로부터 받았다고 진술했다. 이로 인해 그해 4월 21일 이경언은 한양 집에서 체포돼 전주로 압송됐다. 그는 쇠사슬에 묶이고 칼이 씌워진 채 투옥됐다. 다음날 그는 전주 관장 앞에 끌려가 문초를 받았다. 25년 전 누나 이순이가 수차례 문초를 받고 숱한 매질을 당했던 바로 그 장소였다. 그는 보름 이상 반복되는 형벌을 초주검이 될 때까지 받으면서도 형과 누나를 생각하며 그들의 순교 발자취를 따르겠다고 마음을 거듭해서 다잡았다.
신앙의 길 당부하는 편지 남겨
이경언은 전주 감영 옥에서 어머니와 가족, 아내, 명도회 회원에게 보내는 3편의 편지를 썼다. 그는 순교를 앞두고 어머니와 형수 그리고 아내와 자녀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몇 발자국 따라가게 해주고, 또 제 형님과 누님의 전구로 그분들의 뒤를 따라가게 해주시니 너무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이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십시오”라며 청했다. 더불어 그는 “매사에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고, 지난날의 모든 잘못을 뉘우치며, 남아있는 날들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하느님 앞에, 성교회 앞에 영광스럽게 살아달라”고 당부했다.
이경언은 명도회원들에게도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 이 세상의 불행을 두려워 말고 모든 힘을 써서 하느님의 집을 보존하는 것은 물론이오 확장하도록 애쓰십시오. 교우들을 굳건하게 지키면서 천주교가 꽃피우도록 일하십시오”라고 권고했다.
이경언은 형벌로 인한 몸의 상처가 너무 깊어 며칠 동안 의식이 없었다. 1827년 6월 27일(음력 윤 5월 4일) 겨우 의식이 돌아온 그는 함께 옥에 갇힌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기고 순교했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이 제 몸보다 틀림없이 더 강하지 못했을 터인데 올리브 동산에 피땀을 흘리셨고, 채찍질을 당하셨으며, 당신 십자가를 지고 산꼭대기까지 천 걸음도 더 되는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분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어떤 교인도 그를 도우러 오지 않았는데, 저 같은 큰 죄인에게 사람들이 도우러 오고 또한 제게 의식이 되돌아오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초대교회 사람들] 삶은 잠시 지나는 나그네 길
충청도 홍주 출신 복자 박취득 라우렌시오의 기록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나옵니다. 관장이 공범자를 대라고 하자 그는 이미 참수당한 지황의 이름을 대며 자기도 죽겠다고 대답합니다. 관장이 죽는 것이 어째서 그렇게 좋으냐고 묻자, 그는 “천주께서 제게 한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건만, 제 죄가 무수하여 죽어 마땅하다.”고 대답합니다. 관장이 무슨 죄를 범했느냐고 물으니, “십계를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고 대답했지요.
다음 신문 때 관장은 집게로 살을 집어 뜯게 했고, 세 번째 신문에서 국법을 어기면서 무슨 이익을 얻으려느냐고 추궁하자 그가 대답합니다. “임금님은 육체의 임자가 될 수 있어도 영혼의 주인은 천주뿐이십니다. 그분이 죽은 뒤의 상과 벌은 아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죽는 것이 제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생은 사라져버리는 이슬과 같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요, 죽음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새로 관장이 바뀌고 나서도 박취득이 배교의 뜻이 없이 더욱 견결한 태도로 신앙을 증거하자, 관장은 그를 악랄한 고문으로 유명했던 해미 군영으로 보내버립니다. 그곳에서 그는 더욱 악독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배교하고 국왕께 순종하겠다고 다짐하였으니, 너도 배교하라는 다그침에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했든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제 자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집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여러 달 동안 잔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그를 알몸으로 진흙탕 속에 던져 밤새 추위에 떨며 비를 맞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씁니다. “어머니, 봄과 가을은 흐르는 물처럼 지나가고, 세월은 부시로 치는 돌에서 튀는 불똥과 같이 잠깐 만에 스러집니다. 특히 조심하셔서 천주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십시오. 제가 옥에 갇힌 지 두 달쯤 되어, 어떻게 해야 천주의 은총을 입을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을 때 어느 날 잠결에 십자가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얼핏 보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16번 이상 신문을 받았고, 그가 맞은 곤장은 1,400대가 넘었습니다. 8일간 물 한 방울 못 마시게 한 일도 있었고, 그가 죽은 줄 안 옥사장이 옷을 벗겨 밖에 내던졌지만,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다시 매질을 당해 의식 없이 옥에 던져진 그는 몇 시간 뒤 혼자 일어나 감방으로 들어가 누웠지요. 그의 상처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깨끗해진 상태였습니다. 무슨 귀신에라도 홀린 듯 무서워진 옥사장이 마침내 새끼로 목을 졸라서 그를 죽였습니다. 이것은 1799년 4월 3일(음력 2월 29일) 오전 11시의 일이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30세였습니다. 그는 18개월 동안 날마다 참혹한 고문을 당했어도 천주를 향한 그의 뜨거운 마음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여러 진술 중에 인생이 아침 이슬 같다고 한 말, 계절은 흐르는 물처럼 지나가고 부싯돌의 불똥처럼 스러진다는 표현이 이상스레 긴 여운을 남깁니다. 그는 그 너머에서 지고의 빛으로 빛나던 천국의 영광을 분명히 보고 느꼈던 것이겠지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38) 황사영 알렉시오
입신양명 대신 신앙 택한 유생, 대역죄인으로 순교
“선교 자유 위해 서양의 배를 보내주십시오”
1784년 늦가을 한양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거행된 세례식으로 탄생한 조선 가톨릭 신앙 공동체는 1801년 9월 황사영 백서가 발각될 때까지 17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북경 주교에게 ‘대박청래’(大舶請來)를 요청했다. 대박청래는 서양인 성직자가 큰 배를 타고 조선에 와서 임금에게 서양의 문물을 제공하고 선교의 자유를 공식으로 허락받는 것을 뜻한다.
1790년 이승훈(베드로)·홍낙민(루카)·지황(사바)·이가환 등이 윤유일(바오로)을 북경으로 보내 구베아 주교에게 처음으로 대박청래를 요청했다. 구베아 주교는 이 제안을 거절하는 대신 성직자 파견을 약속했다. 이 일을 추진했던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오로지 성직자를 맞아들일 염원으로 서양의 큰 배를 청했다. 따라서 그들은 ‘성직자’와 ‘서양 큰 배’를 같은 개념으로 인지했다.
두 번째 대박청래 요청은 1796년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발의로 추진됐다. 1795년 6월 관원들에게 체포될 뻔한 주 신부는 서양의 큰 배를 불러들여 자신의 조선 선교 활동을 보호받기를 원했다.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보낸 대박청래 청원서에는 이승훈·홍낙민·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최창현(요한)·유관검·황사영(알렉시오)이 조선 교우 대표로 서명돼 있었다. 이들은 서양의 큰 배가 와서 조선 임금에게 필요한 서양 문물을 제공하면 새로운 사회 질서가 수립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성직자=서양 큰 배’라는 1차 요청 때보다 그 개념이 확대된 것이다.
구베아 주교는 청원서를 들고온 황심(토마스)에게 “서한을 교황께 전달하겠지만, 교황청이 조선 정부가 가톨릭을 금하고 있는 사실을 무릅쓰면서까지 큰 배를 파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덧붙여 구베아 주교는 “이 일에 많은 돈이 든다”고 지적했다.
1801년 신유박해로 1·2차 대박청래를 북경 교회에 요청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조선 교회 지도자 대부분이 순교했다. 박해를 피해 제천 배론 산골에 숨어지내던 황사영이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帛書)를 작성해 세 번째 대박청래를 제안했다. 황사영은 1·2차 대박청래를 제안했던 조선 교회 지도자들과 달리 “신앙 자유를 위해 서양의 무력을 동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박청래 개념이 성직자 영입, 서양의 선진 문물을 통한 조선의 새로운 사회 질서 구현이 아닌 ‘군사력 동원’으로 바뀐 것이다.
무력을 수반한 황사영의 대박청래 방안에 대해 교회 일각에서는 인간 존엄성과 공동선을 거스른 당시 조선 조정에 대한 불가피한 저항으로 보고, 도덕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윤리적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가치 중립적 사안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대다수이다.
명도회에서 활발히 활동하다 배론에 은거
이번 호의 주인공은 26년 생애를 불꽃처럼 살다 순교한 조선 유생이며 그리스도인이었던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이다.
황사영은 인조에게 직언해 여러 차례 파직된 남인 시파 만랑 황호(1604~1656)의 7대 종손이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증조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1790년 15살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해 정약현의 큰 딸 정명련(난주, 마리아)과 혼인했다. 혼인 후 처삼촌인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정약용(요한 사도), 처고모부 이승훈에게 교리를 배워 그리스도인이 됐다.
황사영은 정조가 20살이 되면 중용하겠다며 장래를 보장해줬지만, 입신양명을 포기하고 교우들과 교류하면서 밤낮으로 교회 서적을 탐독했다. 특히 그는 명도회 회원으로 한양 아현에 있는 자신의 집을 명도회 하부 조직인 육회(六會)의 모임 장소로 제공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조선 교회 안에서 황사영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신유박해가 일어난 직후인 1801년 3월 23일 조정에서는 그의 체포령을 내렸다.
체포령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황사영은 김한빈(베드로)과 함께 제천 배론에 사는 김귀동의 집으로 가서 토굴에 숨어 살았다. 배론에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여러 교우의 순교 소식을 들은 그는 가로 62㎝·세로 38㎝의 흰 명주 천에 붓으로 북경 주교에게 보낼 122행 1만 3384자의 백서를 썼다. 백서에는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55명의 인물이 소개되고 있고 이들 중 39명의 순교 행적이 적혀 있다. 또 신앙의 자유를 위한 대박청래 청원도 담겨 있었다. 1801년 10월 29일(음력 9월 22일) 완성된 백서는 밀사로 활동하던 옥천희(요한)가 북경 주교에게 전달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백서가 완성되기도 전인 10월 22일 옥천희에게 백서를 전달하기로 한 황심이 체포됐다. 황사영 백서 초안을 봤던 황심은 문초 끝에 배론 은거지를 실토했다. 황사영은 그해 11월 5일 김한빈과 함께 배론에서 체포됐고, 백서도 압수됐다.
조선 순교자 시복식 때 바티칸에 전해진 ‘백서’
백서 내용을 본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황사영은 11월 14일부터 약 한 달간 모진 고문을 당했다. 대역부도(大逆不道) 죄로 사형 판결을 받은 황사영은 1801년 12월 10일(음력 11월 5일) 한양 서소문 밖 형장에서 능지처사 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황사영 백서는 의금부에 압수됐다가 1894년 갑오경장 때 소각 폐기되기 직전 담당 관리가 빼돌려 친구 이건영에게 몰래 줬고, 천주교인이었던 이건영은 바로 뮈텔 주교에게 건넸다. 뮈텔 주교는 1925년 바티칸에서 거행된 조선 교회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비오 11세 교황에게 백서를 선물했다. 황사영 백서 원본은 현재 바티칸 민속박물관 서고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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