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2012년 여름에 귀국한 뒤, 지금까지 국내에서 영혼몸에 관한 진리를 전하면서 경험한 반응을 나누겠습니다.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앤드류 워맥 목사님의 책 ‘영혼몸’의 내용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이미 우리의 영 안에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가난해 지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부요가 이미 우리 영 안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현실세계(우리의 삶)로 끌어내는 것이 믿음의 역할이며(히 11:1) 그것은 말씀을 묵상할 때 일어납니다. 여기까지 듣고서 "결국 그 게 그거네"라고 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미 가졌다 해도 아직 내 삶에서 경험하지 못하고 있고 여전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이 매우, 매우 안타깝습니다. 마치 똑같은 씨를 뿌렸는데 좋은 땅에서만 열매가 나고 나머지 세 땅, 길가, 가시 밭, 돌짝 밭에서는 아무런 열매가 맺히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은 왜 그런지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들 중에도 "어떤어떤 목사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던데요?", "말씀대로 했는데 안 됐어요!" 등등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과 자기의 경험을 높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 즉 사람의 말과 자기 경험에 비교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사람에게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자동판매기처럼 자동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역사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 또는 '내가 하는 일'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내가 했던 묵상이나 기도, 또는 예배와 헌금이 나의 공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씨는 땅에 심겨야 열매를 맺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땅은 씨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열매를 맺은 땅이 "내가 한 일을 보아라!"라고 한다면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생명은 씨에 있는 것이지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씨 역시 혼자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기에 우리가 묵상하고 기도하고 하는 일들, 즉 땅(우리 마음)에 심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땅은 그 땅에 무슨 씨를 심는가에 따라 그 씨의 열매를 맺는 것이기에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고) '무엇을 열매 맺을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땅에 있는 능력이 아니라 씨에 있는 능력입니다. 내 능력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이라는 말이지요.
열매 맺지 못하는 세 번째 이유는 땅의 상태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를 심어도 땅의 상태에 따라 열매를 맺을 수도, 영원히 맺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받을 때, 기쁘게 받으나 뿌리가 없어서 얼마 못가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눅 8:13). 뿌리가 없는 사람일수록 반응이 굉장히 화려(?)합니다. 또 항상 의구심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렵다, 모르겠다, 혼란스럽다, 이해가 안 된다 등등 한마디로 하면 항상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를 선입견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의구심'이라고 표현한 것은 '왜 그럴까?'라는 질문, 알고자 하는 마음과는 다릅니다. 뭔가 말씀을 튕겨내는 거절, 꽉 막힌 벽 같은 느낌입니다. 이런 분들은 먼저 그 자세와 태도를 고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첫 단계는 그 자세를 바꾸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한테 이처럼 마음의 자세와 태도를 바꾸는 것을 성경은 회개라고 표현합니다.
좋은 땅은 단순합니다. 말씀에 토를 달지 않고 받아들인 후 "인내"로 결실할 때까지 견딥니다(눅 8:15).
제가 케리스 바이블 칼리지에 입학해서 앤드류 워맥 목사님의 첫 수업시간에 들은 말씀을 나누면서 오늘 큐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처음 목사님의 수업을 듣는 날이라 들뜬 마음으로 갔는데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드시면서 청천 벽력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정적인 선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진리를 말씀드리겠다. 여기 모인 여러분들 중, 1/4만이 내가 전달하는 말씀을 받아 열매 맺을 것이다."
'나는 나라를 떠나 거기까지 갔고 다른 주에서 자기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첫 시간에 위로와 격려를 해 주시진 못할망정, 꼭 저런 말씀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저는 정신을 차리고 즉시 생각을 바꿔 ‘꼭 저 1/4 안에 들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내 앞날을 보장해 줄 것만 같았던 박사과정도 때려 치고, 내가 너무 좋아했던 직장도 버리고, 너무나 사랑하는 어린 조카들이 한창 예쁘게 자라는 모습도 못보고 거기까지 갔는데 열매도 맺지 못하는 땅으로 끝날 순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이지 신기하게도 400여명으로 시작했던 1학년 학생들 중에 결국 200명이 채 안 되는 숫자만 2학년으로 올라갔고 100여명만 3년 차 과정까지 이수했습니다. 정말 1/4만 전체 과정을 다 마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분의 말씀을 자신보다 더 높이셨습니다.
(시 138:2)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는 나음을 입었다"라고 하시면 나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는 부요하다"라고 하시면 나는 부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한낱 인간인 내가 토를 달고 있는 것이 얼마나 웃긴 일입니까?
그러면 '지금 병에 걸렸는데도 나았다, 나았다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하라는 것인가?' 아닙니다. "내 몸에 질병이 있고 통증이 있는 것이 사실(팩트)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진리)은 내가 나음을 입었다고 하시고, 그 치유는 이미 내 영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내 몸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이미 내 영 안에 치유를 주셨으니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제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보여주시면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좋은 땅의 자세, 바른 신앙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에겐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보여주실 것입니다.
반면, "치유됐다더니 아니네. 부요를 줬다더니 아니네." 이런 자세는 버려야 합니다. 거기엔 믿음이 전혀 없습니다. 내 몸을 바라보지 말고 내 안의 영, 그 안에 있는 치유를 바라보자는 뜻입니다. 혹여, 이 땅을 사는 동안 무슨 이유에선지 그 치유가 풀어져 나오지 않을지라도 이미 주신 치유를 감사하고 찬양하고, 경배하다가 천국 가는 것이 "치유 됐다더니 왜 안 돼?"하면서 불평하다 가는 것 보다는 더 낫지 않겠습니까?
올 한해 내 상황, 내 환경, 내 공로, 내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고 하시는지 그것만 높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말씀이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