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상
늦은 시각 이르쿠츠크 공항에 내리니 협소한 공항엔 입국 수속도 까다롭다. 공항직원들이 너무 딱딱하고 만만디다. 현지 가이드가 나와 있었으나 그는 허둥지둥 한다. 인원이 많아 두 팀으로 나눠 한참 기다린 버스에 올라 호텔에 짐을 풀고 첫 밤을 보냈다.
이번 여행은 6개월 전 조선일보사에서 모집한 이벤트성 행사였다. 아내의 끈질긴 요청이기도 했다. 8월의 한창 휴가시즌에 날짜를 맞췄었고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폭염이 계속되던 올 여름이어서 폭염 탈출 겸해 더위를 피해 잠시 떠난 것도 그냥 견디는 분들 보기엔 괘씸하게 보이겠지만 한 방법 같았다. 평소 몽고라는 곳은 한 번 가 보고 싶었었다. 그 넓은 초원들 얼렁뚱땅 옮겨짓는 집 게르, 유목민의 삶이 어떤지 직접 보고 싶었다. 바이칼호는 매스컴에 많이 소개도 됐지만 별 관심이 없었는데 묶어서 가는 것이라 보너스로 생각했다. 실은 그곳이 시베리아의 진주라는 곳이라는데.
아침밥은 호텔 뷔페식이어서 아내와 난 익숙한 것처럼 빵을 토스터에 굽고 요구르트와 버터 잼 또 과일까지 배를 채우고 있으려니 중국 관광객인 듯 많이도 들어와 식당 안을 꽉 채운다. 조금 늦었더라면 자리도 없을 뻔 했다고 부지런한 걸 자랑도 하며 일정에 들었다. 호텔 바깥으로 나오니 기온이 그리 덥지 않다. 평균 섭씨 25도에서 30도 안팎이 요즘 이곳 기온이란다. 얼마나 좋은가. 끔찍하게 더운 서울을 생각하니 하루 이 온도만 해도 천국에 온 것 같다.
먼저 가까운 곳에 있는 바이칼호수를 내려다보는 울긋불긋 띠를 두른 서낭당 같은 바위가 있는 전망대로 데려 간다. 헌데 올라가는 리프트가 많이 낡았다. 시설한지 30년은 되는 것 같고 영 엉성해 안전이 염려돼 보이기도 했지만 기우였고 튼튼하니 잘 올라간다. 그곳에 일하는 사람들은 또 행색이 누추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공항시설도 오래 된 듯 초라하고 협소했다. 숙소 근처 집들이나 지나는 현지인들 모습까지 초췌해 보인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해 보이고 피곤들 해 보이는 건 조금 숨 돌리고 살게 된 우리 모습과 비교가 돼서 인지 자꾸 눈에 들어온다.
그리 높지 않은 지역이라 일행들은 올라가 끝을 모르게 드넓게 펼쳐진 바이칼호 일부를 조망하고 채르스키 산맥의 식생도 만끽해 본다. 운동겸 걸어서 내려가도 된다는 가이드의 말에 따라 트랙킹 코스처럼 들길에 핀 야생화 감상도 하며 경사면을 따라 가볍고 우아하게 내려왔다. 아직 관광지로 개발에 신경을 못 쓰는 것인지 도로며 주차장이 비포장이고 편의시설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한 겨울엔 스키장으로 이용된다고도 했다.
내려와선 리스트반카라는 곳에서 점심도 먹고 탈치 목조민속 박물관도 보고 앙가라강 가운데에 있는 셔먼 바위도 구경했다. 이 바위는 수면위로 노출 된 부분은 작으나 거대한 바위가 물속에 숨어 있어서 강물이 큰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바위 주변 수 킬로미터는 아무리 추워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브리아트족 셔먼들이 이곳에서 바이칼 신에게 제사를 지냈기에 샤먼바위라고 부르며 먼 옛날 이곳에 살던 브리아트족은 저녁에 범죄자를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가 다음날 아침까지 살아 있으면 무죄방면하고 범죄자가 사라졌으면 바이칼 신이 그를 수장시켰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 다음은 현지인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노천 재래신장을 관람했다. 조로 현지인은 몽고계통 사람으로 보였으며 실지 옛날에는 이곳이 몽고 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장에서 관광객에게 파는 것도 몽고 민속품 같은 것이었고 이곳 바이칼 호에서 많이 잡힌다는 정어리처럼 생긴 생선을 ‘오물’이라 부르며 훈제를 많이 해서 좌판에 놓고 팔고 있었다. 바다 같은 강변 옆으로 보트나 어선은 많은데 수영객은 볼 수 없었다.
시장을 나와 스케줄에 있는 바이칼 유람선을 타고 보드카와 훈제 오물을 시식하는 시간도 있었다. 유람선이란 것이 포장만 친 어선으로 이동식 나무의자에 우릴 앉혀 놓고 가이드가 오물 두 팩과 보드카 한 병을 꺼내놓고 손으로 생선을 찢어 종이 접시에 내 놓는다. 술 한 잔씩 맛을 보며 “와 독하네!”소리가 절로 나온다. 손으로 오물 한 쪽씩 안주로 먹으니 그것도 괜찮았다. 처음해 보는 경험이라 강바람 맞으며 ‘바이칼에서의 한 잔’소리를 하며 기념촬영도 하면서 추억의 시간을 만들어 본 것 같다.
“겨울엔 이 강이 다 언 다네요.” 얼음이 1미터 두께로 언다니 그러면 즉시 그 위를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되고 신호등이 설치된다니 바이칼의 진면목은 겨울에 와야 볼 수 있는 것 같다. 예전의 가본 여행지 일본의 북해도도 그렇고 캐나다의 루이스 호수도 그랬었다. 여름철에 가서 봤던 것이라 겨울풍경이 상상이 안돼 다시 가 봐야 할 것 같은 그 모습들이 보고 싶어 이곳에서도 미련을 남긴다.
여기서 현지 가이드를 소개해 보면, 남자답게 좀 터프하게 생겼다. 좀 깔끔하게 생기진 않아서 생긴 거완 달리 이 지역 사정과 유적안내를 깔끔하게 잘 한다. 나름 스터디를 많이 한 듯 러시아 역사까지 현지 지식이 풍부하다. 설명도 막힘이 없고 우릴 안내하는 솜씨가 아주 능숙해 보인다. 나이는 43세, 어쩌다 이루쿠츠크까지 와 눌러 지내게 되었다며 모스크바에도 있었고 이제 12년 됐으며 러시아 처녀를 만나 결혼해 현재 딸만 둘을 두고 있단다. 그래서 언어 소통에 별 불편이 없고 이곳은 아직 한국 사람이 영사관 관계자 외 20명이 안 된다고 한다. 북한사람이 한 2백명 정도로 더 많이 와 있고 앞으로 한국인이 좀 많이 진출해 이곳에 풍부한 빈 땅과 자원 사람들을 이용도 하고 투자를 많이 했으면 좋겠단다. 자기 같은 가이드도 모자라니 집에서 빈둥되는 젊은 사람들 자기한테 보내주면 사람 만들어 보내겠다고 한다.
이번 여행은 버스 두 대로 43명의 인원이 움직였다. 다른 버스에도 현지 유학생 한 명이 가이드를 하고 있는데 열심히 배우는 중이란다. 버스가 모두 국산 현대 자동차에서 나온 중고 버스다. 여기까지 와 굴러다니는 게 신기하다. 몽고에서도 같은 현대차인데 이 차는 새 차로 고급형 같았는데 기사가 한국에 2년 일하러 왔었다며 차를 애지중지 아끼고 치장을 많이 해 놓은걸 볼 수 있었다.
이 가이드 얘기가 또 기억에 남는 게 있었다. 이 러시아 사람들 남자 여자 할 거 없이 보통 바람둥이가 아니란다. 도처에 이혼녀 많고 미망인천지이고 그래서 결혼을 다섯 번도 하고 사는 남자도 있단다. 자기 장인이 그렇다며 그를 ‘개‘ 라고 칭한다. 모두가 혁명과 전쟁 통에 남자가 시베리아 가고 다 없어져 그런 모양이란다. 조금씩 나아지곤 있단다.
우리 일행 중에 특이한 사람이 있었다. 가이드가 무슨 설명을 할 때 톡 튀어나와 질문하고 참견을 많이 하는데 좀 보기에 거슬렸다. 가는 곳 마다 자기만 영어를 하는 양 일부러 나서서 일행을 도와주려는 심사로 행동 했고 식사 때 마다 가져온 소주를 그들 부부만 먹다 한 사람한테 들켜 같이 먹자고 뺏기는 모습도 보면서 심심하질 않았다. 그 사람 부인인 듯한 여자는 아주 키가 작고 그 남자는 비쩍 마른 큰 키의 60대인데 그래도 둘은 얼마나 다정한지 그 여자는 또 공주타입이었다 그게 또 일행 여자들 입방아에 올랐다. 옆 사람하고 얘기도 없이 조용히 앉아서만 간다. 여자가 버스에 오르거나 식당에서 남자는 꼭 시종처럼 배려를 한다. 남자는 얼마나 자상하게 그 여자를 섬기는지 몸에 밴 것 같다. 주변을 의식하지도 않는다. 일행들은 샘이 나서 그런지 그들 부부가 혹시 불륜이 아닌지 이바구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정상부부라면 저 지랄을 할 게 뭐 있냐!”고 대놓고 헐뜯는 70대 노인 예비역 장성도 있었다. 지랄이라는 말에 주변 일행이 다 웃음을 짓는다.
아무튼 그들 부부는 억울하겠지만 일행의 가십꺼리였고 볼거리였고 우릴 즐겁게 하기도 했다. 40여명 일행이다 보니 별 직업을 가졌던 사람이 다 모인 듯하다. 대개 6,70대인 거의 부부들인데 전직 공무원 교사 군인 세무사. 대사관직원까지, 그리고 나 같은 사업을 하다 정년을 맞은 은퇴자 부동산 임대인 등등 그래도 이번 여행은 경비가 좀 비싼 투어라 그런지 대부분 일행들 마음도 넉넉해 보였고 자신만 챙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 친구만 달랐고 그래서도 별명을 내가 ‘촉새’라고 지었다.
다음날은 바이칼 호수안의 알혼섬을 가보는 날이다. 우르쿠츠크에서 4시간이 걸린다니 좀 멀다. 두 대의 버스로 주변 들판을 양 옆으로 가르며 달린다. 들판은 거의 나무는 없고 잡풀만 무성하고 경작도 안하는 땅이 그대로 널려있다. 드물게 나무휀스로 경계표시한 곳도 보인다. 섬으로 들어가는 훼리 선착장에 도착하니 여기도 휑하니 야전 사령부같다. 쉴만한 그늘도 안 만들어 놓고 화장실도 임시 막사같고 푸세식이다. 이곳에서도 이곳 선박회사 검침원인 듯한 사람들의 불친절 횡포도 있다. 우리 가이드가 훼리선이 도착해 연결다리 판이 내려지자 “자 들어갑시다.” 해서 우르르 올라타려 했더니 한 사람이 딱 막아서더니 못 타게 한다. 무질서해 보이긴 했어도 달리 탑승구도 없어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마음에 안 들었는지 우린 못 타게 하고 러시안 관광객들만 태운다. 배 두 척을 더 지나치게 하고 3번째 배에 우릴 타게한다. 벌판에서 벌서고 있던 셈이다. 항의도 못하고 다 들 그냥 온순해 졌다.
암튼 건너가 내리니 ‘우아직’이라는 미니밴이 방문객을 태우려고 여러 대가 대기하고 있다. 차를 가져오지 않은 방문객은 모두 이차를 택시처럼 이용하는 것 같다. 나뉘어 이걸 타고 30분정도 더 가야 섬 안의 호텔로 갈 수 있었다. 호텔 까지는 비포장도로다. 왕복차도로 만들어 놓긴 했으나 재정문제로 아직 비포장이라며 먼지를 날리며 움푹 파진 곳을 피해 차량 6대가 나란히 내 달린다. 미리 경고도 있긴 했지만 허리 안 좋은 사람은 정말 고생 좀 할 것 같다. 우리 버스엔 그래도 80가까운 노인은 안 타서 다행이긴 했는데 어느새 촉새는 맨 앞쪽 조수석에 앉고 마누라는 바로 뒤에 앉히곤 히히락락이다. 나는 어쩌다 아주 불리한 맨 뒷좌석이어서 정말 차가 튀는 바람에 허리에 힘을 바짝 주고 주의를 해야 했다. 얼마나 차가 튀는지 탕탕 소리에 하부가 금방 내려앉고 부서질 것만 같다. 스프링 장치 쇽크압쇼바(충격 완화장치)가 아예 없는 차 같고 원래 군용차였는데 개조해서 이곳 현지인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밥벌이로 이용되는 것 같았다.
많은 불편 속에 호텔에 도착하니 호숫가에 통나무 울타리를 인디언 아파치 요새처럼 이색적으로 빙 둘러 만들어 놓았다. 식당과 객실도 역시 나무 판자집 2층으로 방갈로처럼 만들어 숙소로 사용케 하고 있었다. 여장을 풀고 그래도 호수가 옆의 운치가 너무 좋아 다들 참고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늦은 점심을 먹고 잠시 쉴 틈도 없이 주변 가볼 때를 데리고 나간다.
세계 최대의 담수호라는 바이칼 호수, 바이칼의 모습은 한마디로 장엄하다. 푸른 수면은 잔잔하고 이따금 아침공기 맛보려 물고기들이 고개를 내미는 물 주름만 보인다. 찬란한 정오의 햇빛에 부딫친 포말은 하얗게 부서지는데 신이 빚어 놓은 지구 내륙의 또 하나의 작품 같다. 드넓은 크기가 압도적이고 물은 검푸르고 차다. 지금이 여름인데 물속에 들어가면 온 몸이 얼 듯 수영도 못하고 금방 나와야 할 것 같다. 맑기도 수정 같다. 어디 오염원이 한 군데도 없을 것 같고 북쪽 시베리아의 빙하가 녹아내려온 물 같기만 하다. 확인은 못해 봤다. 유입 수량은 엄청난데 빠져나가는 곳은 한군데 앙가라 강 뿐 이란다.
서쪽해안 한 가운데 형성되어 있는 후지르 마을은 알혼섬의 심장부로 선착장에서 2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인구 1,5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 이곳은 기념품가계와 집들이 곳곳에 있었고 칭키스칸이 묻혀있다는 전설이 깃든 부르한 바위를 볼 수 있었다. 몽고의 땅이었다는 이곳에 러시안들이 정착하면서 전통적인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아직도 소수민족인 브리아트 인들을 볼 수 있다. 이 알혼섬은 바이칼 호수에서 남북으로 초승달처럼 길게 누운 형태였다. 알혼섬의 후지르 마을과 연결되어있는 부두에 있는 부르한 바위는 아직도 많은 샤먼들이 제사를 지내고 기원을 드리는 곳이라고 했다. 그 다음은 두 번째 큰 마을 이라는 하란츠마을과 주변의 악어바위 사자바위와 최북단의 호보이 곶을 볼 수 있었다. 유적지를 가며오며 역시 탕탕 튀는 그 미니밴을 타야 했고 촉새는 여전히 앞자리를 고수해서 일행에게도 한마디를 또 들었다. 그래도 꿈쩍않고 자리를 고수한다. 대단하다. 지적하는 우리도 문제 같고 자신만 생각하는 그 사람이 외계인 같다고 한 마디씩 거든다.
북쪽으로 가면서 울창한 소나무 전나무 자작나무숲을 지나갔는데 희한하게 제법 큰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곳은 우측지역뿐이고 호수가 옆으로는 나무가 하나도 없이 끝없이 초원지대를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느냐고 가이드가 맞추면 상품을 준다고 했는데 맞추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땅속의 염분 탓인지 기온 차이인지 정답은 뭐라고 했는데 잊어 버렸다. 많이 아쉽다. 이런 곳에도 울창한 나무들이 이렇게 많으니 재목이 풍부해서 인지 나무집이 많다. 러시아의 예전 주택은 거의 목조주택 이라고 한다.
이곳 알혼섬 숙소에서의 식사가 좀 부실하다고 들 그런다. 부실정도가 아니라 식당사람들까지 무뚝뚝하고 불친절해 왜 이 사람들이 이러냐고 했더니 가이드는 원래가 그렇게 생겨먹었고 이곳 원주민인데 물자조달이 원만하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라며, 여러 번 얘길 했는데 시정이 되질 않는단다. 그래서 일정표에 컵라면이나 햇반이라도 챙겨오라고 했는데 못 봤냐고 한다. 만일을 위해 도시락 싸들고 다니라는 얘기인지 일정표를 눈여겨 안 본 사람책임인지 모르겠다.
통나무 건물에서 잘 자고 아침을 맞아 둘이는 산책을 하기로 하고 호수가로 나갔다. 우리보다 부지런한 세무사 부부, 대사관 부부가 먼저 나와 걷고 있다. 산책로는 조성이 안 되어 있고 호수가 모래사장을 따라 위쪽이나 아래로 수변따라 걸어 보는 조깅이다. 세무사 부부가 묻는다. 아침에 우리 쪽은 뜨건 물이 잘 나왔느냐고 , 우리도 샤워물이 한참후 찬물이 나오더라고 하니 자기 내는 아예 샤워를 못 했단다. 샤워를 아내보다 늦게 한 나도 낭패를 봤기 때문이다. 거의 다 마무리쯤에서 찬물만 나오는 것이라 그냥 나와 버렸고 그러려니 했다. 보일러 시스템이 아침에 한꺼번에 다 온수를 사용하니 감당이 안 됐던 모양이다.
아침을 먹고 이젠 알혼섬을 떠나야 해서 또 툭툭이같은(캄보디아에서 본 오터바이를 개조한 차) 차로 선착장을 향해 내 달린다. 촉새는 또 앞에서 머뭇거리며 이젠 좀 미안한지 중간에 앉으려고 하는 걸 그냥 앞에 타라고 하곤 우린 뒤에 앉아 맘 편하게 내 달리며 그 섬을 떠나왔다. 다음에 언제 다시 가 볼 수 있으려나 미련을 두고서, 겨울에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다시 이르쿠츠크로 나와 묵었던 호텔 다시 일박을 하곤 몽고로 간다고 했다. 4시간 버스를 타고 나와 이르쿠츠크 시내 관광을 했다. 첫날 살짝 봤던 허름한 시골 마을로 보였던 이곳이 그게 아니었다. 많은 역사적 박물관과 혁명 유적이 있었고 고풍스런 건물과 성당 및 러시아 정교회 그리고 혁명광장의 동상들은 이곳이 역사적 이야기가 많은 도시임을 보여줬다.
먼저 칼라풀하게 색을 입힌 벽돌로 지어진 보고야블렌스키 성당을 보고 카작인 동상과 알렉산드로 동상을 볼 수 있었다. 앙가라강 옆의 쌈지공원과 유노스찌에서 커피한잔에 맥주 샤슬릭(러시안 꼬치구이)등을 파는 곳이라 맛을 보기도 했다. 24시간 올림픽 성화처럼 가스불이 꺼지지 않는 성화대가 광장 가운데 있다. 혁명기념광장에서 많은 현지 나들이객에 휩쓸려 역사적 유적들을 관람했고, 끝으로는 우리의 이태원이나 가로수길 같은 130번가라는 젊은이들 거리도 있다고 해서 찾았다. 카페 레스토랑 쇼핑센터외 거리에 젊은이들이 많이들 복작인다. 거리로 나와 버스킹(길거리 공연)을 즐기기도 한다. 젊음과 활기는 이곳에만 있는 것인가 실감도 하며 이날을 마감했다.
이날 저녁식사는 현지식으로 우유뜨나야 와 샤슬릭을 먹으며 유명한 벨루가 보드카를 한 잔씩 할 수 있었다.
다음날, 드디어 대륙 횡단열차를 24시간 타고 몽고로 간다. 먼 기차여행이란 생각에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구내식 부페를 든든히 먹고 버스를 타고 이르쿠츠크 역으로 갔다. 가이드로부터 김밥과 스낵과 과일 음료가 든 큰 비닐봉지를 받아든다. 기차에서 먹을 점심 저녁 두끼 식사다. 어느 한국인이 마련했는지 맛을 떠나 내 나라 음식을 보니 먼저 마음이 짱하다. 역 앞에서 현지 가이드와 헤어진다. 그동안 정이 들었는지 남은 몽고여행 잘 하시라는 가이드 말에 일행은 손을 잡고 그를 향해 잘 지내라고 더 격려를 한다. 허깅이라도 한 번 해 줄 뻔 했다. 역내로 들어가니 기차가 벌써 와 있다. 모스크바에서 이곳을 거쳐 울란바토르로 간단다. 몽고여인인 듯 유니폼을 입은 차장이 승강장 앞에서 여권검사를 하며 좌석표 대로 승차를 시킨다. 우리는 운 좋게 세무사 부부와 같이 쓰는 4인실 침대칸이다.
한 쪽으로 통로가 길게 나 있고 번호가 붙은 각 룸마다 이층 간이침대가 놓여있다. 학창시절 수학여행 가는 기분을 다시 맛 보는 듯 우린 짐을 침대 밑과 윗층 수납장에 쑤셔 넣고 일층 침대에 걸터앉아 두 집 사람끼리 마주 보기도 하며 기차 여행을 시작한다. 바이칼호가 계속 되는지 아님 어느 강줄기를 따라 내려가는지 낡은 기차는 우리의 완행열차 같다. 쉬지않고 덜컹거리며 천천히 내 달린다.
같은 객실을 쓰게 된 부부, 서울 신림동에 산다며 세무사사무실을 경영하고 있단다. 총각 처녀 때 국세청 근무하면서 만나 사내결혼을 했으며 공부를 잘해 이대와 연대를 졸업시킨 남매를 두었고 딸은 시집보내 캐나다에 교수남편을 두고 지낸단다. 남자는 항상 캐논브랜드 카메라를 메고 말도 없이 웃는 낯으로 열심히 사진만 찍어 대길례 사진작가인줄 알았다. 젊어 보여 나보다 한참 어린 사람으로 봤는데 나랑 동갑이란다. 여자는 아내보다 두 살이 많고. 통성명을 하고 앉아서 쉴 새 없이 수다가 이어졌고 가족 얘기 남자얘기 세금얘기까지 끝이 없다. 아내는 나를 글 쓰는 작가라고 소개를 한다. 아마 반만 맞는 말 일 것 같다. 그 집 남자는 여전히 사진기 들고 차창에 지나치는 풍경을 담기에 바쁘다. 또 몽고 여자 차장에게 살갑게 굴며 먹는 걸 얻어 오기도 한다. 나는 러시아 농촌 모습과 강줄기가 창가에 지나쳐 없어지는 게 너무 아쉬어 또 맑은 하늘에 내려 쪼이는 온화한 햇볕이 좋아 한참을 넉 놓고 바라보곤 했다. 미세먼지에 매일 뿌연 내 나라의 사정을 생각하다보니 지금 시간이 마냥 아늑하고 행복하다.
이층 침대로 올라가 가져온 책을 펴 들고 열중해 읽어보려 했지만 집중이 안 된다. 이해가 빨리 안 되는 조금 난해한 장석주의 ‘은유의 힘’을 다 읽어보려 했는데 자꾸 내려놓게 된다. 이때 쯤 소설반 모임 옴팡식구들 생각이 난다. 계속되는 찜통 서울 날씨에 어떻게들 잘 지내는지 나만 더위 피해 좀 시원한 곳 다녀오겠다는 말은 떠나 올 때 차마 할 수 없었다. 사진이라도 몇장 보낼까 했는데 새로 구입한 폰 작동을 잘 몰라 사진들을 까톡방에 보낼 수 없어 누구 타짜 도움을 받아야 할 것만 같다.
옆 칸을 슬쩍보니 대사관 부부와 유럽인인 듯한 사람과 몽고사람이 같이 있다. 그 옆 칸엔 통영에서온 부부와 27살 딸이 있고 외국인이 한사람 들어있고 모두 못 마땅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다. 우리처럼 같은 일행 동승자라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인가 보다. 우리 칸을 보면서 기웃거리는 표정들이 우릴 무척 부러워한다. 특히 여자들이 그렇다. 우리처럼 자리 배정을 해 줬어야 한단다. 촉새는 어디 있나 보니까 화장실 칸 옆에 몽고사람 둘과 같이 있다. 심히 못 마땅한 표정이다. 잘 쓰는 영어가 안 통해서 일까 그들 행색이 좀 초라해서 같이 있으려니 격이 떨어져 보일까 그러는지 씁쓰름한 표정을 지으며 그래도 3일 동안 안면을 터서 그런지 반가워한다. “화장실도 가깝고 좋은 자리네.” 했더니 약 올리시는 거냐고 한다. 그 집 여자는 아예 들어 누워 있다.
기차는 긴 몸체를 유지하며 남쪽을 향해 거침없이 달린다. 드넓은 초원이 보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산림우거진 산간을 지나고 강물이 또 보이고 백색의 신사 같은 자작나무 숲이 끝 모르게 이어지기도 한다. 이 지역도 징키스칸 시절에는 이처럼 평화스럽진 않았을 것 같다. 위로는 바이칼호까지인지 용맹만을 과시하고 긴 칼 휘두르며 말을 달렸던 정복의 땅이었는지 모르겠다. 이처럼 평화로운 시절 철마를 24시간 타고 같은 일행과 눕기도 하며 가는 우리의 여행길은 축복 같기만 하다.
점심으로 가져온 김밥을 꺼내 먹고 있는데 식사 때마다 자주 술 한 잔 마셔대는 걸 봤던 통영 사람이 우리 룸에 들어와 씩 웃으며 놀러 왔단다. 이 집은 딸도 마누라도 식사 때마다 맥주를 시켜 먹어 화통한 집안 인가보다 점수주고 싶던 집이다. 억샌 경상도 말로 세무사에게 어제 면세점에서 보드카 사는 걸 봤다며 한 병 까자고 웃으면서 요청을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은 확실한 거절 표시도 안 하고 내 놓질 않는다. 누구 갖다 줄 선물로 구입 했다는 것이다. 돈 받고 몽고에서 다시 사면되질 않켄느냐고 해도 여전히 웃으며 대꾸를 안 한다. 한참 조르다가 별수 없이 그냥 돌아서는 그 사람을 보니 웃음도 나오고 안 내어 준 세무사도 대단한 사람 같아 보여 나까지 멋쩍어 보인다.
이 열차에 식당 칸이 달려있다는 걸 식당 사람들인 듯한 복장의 사람들이 각 방을 들려 이용해 달라고 해서야 알았다. 어색한 한국말로 “맥주 보드카 커피 샤슬릭있어요. 많이 이용해 주세요”하며 지나간다. 세무사한테 “한 번 가 봅시다.!” 했더니 “맨 앞 칸인가 본데” 하고 마지못해 따라 나선다. 마침 서있던 통영사람도 끼워 달란다. 셋이 식당 칸에 들어가니 사람이 많다. 그 중에 촉새가 벌써 와서 여자랑 맥주를 마시고 있다. 아무튼 빠른 사람이다. 우리도 그 옆에 비집고 앉아 본다.
“햐, 두 분은 동작도 빠르시네.”
“가이드가 열차에 식당 칸이 있을 것 같다고 해서 찾아 왔어요.” 자리를 조금 내 주면서 촉새가 얘길 한다. 우리가 별로 반가운 표정은 아니다.
“여행을 자주 다니시나 봐요?” 통영사람이 인사치례로 묻는 것 같다.
“네, 뭐 많이 다녔죠. 남미까지.”
“하이고, 그 먼데를 다 다니시고. 이과수 폭포도 보구 오셨겠네.”
“예, 그걸 보러 아르헨티나까지 갔었죠. 페루 마추피추까지 20일에 걸쳐 갔다 왔나 그랬죠.,”
“대단하시네 . 그럼 안 가 본데가 어디요? 크루즈 여행도 해 보시고?”
“예, 지중해 크루즈를 아내랑 이태리 제노바에서 승선해 그리스, 터어키 이집트 모로코, 마르세이유. 모나코 리스 베니스 나포리를 한 달 걸쳐 돌아 다녔어요.”신명나게 답변을 한다.
“좋았겠네. 참 복도 많으셔. 그런 여행 할 수 있는 여유와 여건이 되시니. 부러워요!”
“돈만 있어서 다닐 수 있는 건 아니구요. 건강도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우리 집 사람이 좀 아파요.” “엉, 많이 아프세요?” “좀 아파요.” 더 이상은 얘길 안하려고 한다.
“집은 어디세요?” “금호동 살아요.”
“금호동 하, 거기도 요새 아니 최근에 많이 달라졌더라고 . 예전엔 거기도 달 동네였는데” 하고 세무사가 거드니 촉새는 자기네를 무시하냐는 듯 즉시 답변한다.
“강남 살다 투자겸 거기로 왔었죠. 지금은 아파트만 잔뜩 들어서 있지요. 처음엔 좀 쌌었거든요.”
“50평정도는 얼마나 가요?”
“요즘 한 9억... 저희 64평 사는데 전에 6억 줬었고 지금 12억 가요.”
“허어. 부자 되셨네. 그 돈 가지고 여행 다니시나보다.”
“강남에 아파트 두 채가 더 있는데 거긴 요즘 미쳤어요.” 난리도 아니고 일주일에 일억 씩 오른단다. 그곳의 아파트 값 난리가 난 건 서울사람은 다 안다. 알고도 말 못 하는 건 강북사람 또 집 없는 사람들이다. 농담 한 마디 건냈더니 술술 막 나온다. 자기네는 비행기도 비지네스석으로 만 타고 다닌단다. 이번에도 60만원 더 주고 그렇게 왔다면서 이젠 좁은 자리 못 앉아 다니겠다고 한다. 듣는 우린 많이 불편했다. 이코노미석 만이라도 비행기 타는 건 감지덕지로만 생각했지 비지네스석은 거들떠보질 못한 나서부터 그랬다. 그에 비하면 3등 인생 같고 인생 서툴게 사는 거 같아서다. 이런 사람도 만나야 인생 공부도 하는 것인가. 씁쓸하다며 세무사는 한 숨도 쉰다. 우린 다 같이 멋 적어져서 보드카 잔을 비우고 다시 한 잔씩 더 따른다. 그런데 옆에 촉새 여자가 갑자기 피곤하다며 들어가자고 남자를 부추긴다. 그들이 먼저 일어나고 셋이선 똑 같이 n분의 일로 거둬서 계산하고 우리자리로 돌아 왔다.
이런 헤프닝으로 기차는 달리고 있는데 통로 쪽에서 크게 웃음도 나고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억양이 유럽인들 같았다. 헌데 내다보니 대사관 부부하고 어느 유럽인이 마주보고 서서 불어로 얘기를 하고 있다. 신기한 듯 쳐다보기만 해도 그렇고 해서 룸안에 얘기를 하니 영어는 아니고 스페인어다 아니다 불어다 따져도 보며 막힘없이 유창하게 대화를 길게도 하고 있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경이롭고 존경스러워 보였다. 나중에 “아니 한국사람 아닌 거 같유?” 했더니 웃는다. 오래 객지(외국이라고 안하고)생활하다보니 불어를 익히게 되었다고 프랑스에서 6년 스위스에서 3년 대사관 근무를 했단다. 지금은 은퇴해서 동부 이촌동에 산다고 했다. 이들 부부의 외국어스피치를 본 촉새는 그 뒤부터 나서서 영어를 안 쓴다.
기차는 횡단철도 본선상에 있는 이곳도 바이칼과 가까워 많이 찾는다는 울란우데 기차역을 지나 국경역 나우시키에 도착할 무렵 이곳에서 약 1시간 50분가량 까다로운 출국심사와 검색을 한단다. 사람만한 세퍼트 수색견을 앞세우고 군인 복장 같은 옷을 걸친 러시아쪽 세관원 두 세명이 객차내 들어와 객실 천장까지 열어 마약소지 여부를 검색 한단다. 서너시간 엄숙하게 대기하고 군대 점호 받듯이 검열과 출국심사를 엄하게 받아서 이것도 기억에 남는다. 서너 시간 화장실도 사용 못하게 한다. 또한 국경을 넘어 몽고쪽에선 입국 심사가 있었는데 여자세관원이라 그런가 열차내 올라와 각 객실을 방문하듯 미소도 지어 보이며 수월하게 통과를 시켜 준다. 이래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가 자기네 나라를 찾아준 손님 일텐데. 그렇게 무례해서야.
지구가 한 바퀴 자전을 하는 동안 우린 몽고로 내려왔다. 기차에 올랐던 다음날 같은 시각에 기차에서 내려 울란바토르 시내로 들어와 한국인이 경영하는 듯한 식당에서 조식으로 갈비탕을 먹었다. ‘르 서울’이란 음식점 주인이 한국 사람이라면 좀 성의있게 만들어 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머얼건 국물이 울어나질 않았다. 너무 많이 요구하는 건가.. 시내는 공기가 안 좋은 듯 날씨 탓인지 뿌옅다. 멀리 굵은 연기를 내 뿜는 화력 발전소가 보인다. 현지 가이드 얘기가 이곳은 석탄이 많아 화력발전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석탄을 광산에서 캐는 게 아니라 들판에 널려있어 긁어서 가져다 사용할 만큼 흔하게 있다고 했다.
먼저 찾아 간 곳은 천진불독이란 곳의 칭기스칸 마동상을 찾았다. 시내에서 1시간 30분 되는 거리다. 가는 주변이 나무는 없고 또 거의 초원지대다. 시내만 바글거리고 벗어나면 거의 빈땅이고 벌판이다. 생각 외로 아파트가 많고 새로 짓는 건물들이 많아 근래 들어 많이 발전하는 것 같고 외국자본이 이곳에도 투자가 많이 있는 것 같은 인상이다. 그 중에 한국 자본도 이곳에 투자가 많은지 가는 도중 한글 간판이 제법 보인다. 담장 쳐 놓은 사각 면적에도 한국말로 뭔가 씌어져 조림 사업을 시작하는 곳이라고 들었다.
칭키스칸을 스텐레스 재질로 엄청 크게 만들어 세워놓고 안으로 들어가면 위에서 주변을 전망할 수도 있게 해 놓았다. 2008년에 조성한 세계에서 제일 큰 동산이란다. 높이가 40m 무게가 250t이나 된다. 몽골제국 이전의 훈제국 유물도 볼 수 있는 박물관도 있다. 전 유라시아에 걸쳐 정복자로 위세를 떨친 칭기스칸 이지만 남겨진 유물이나 흔적은 좀 초라하다. 자손들이 잘 해야 되는데 아직 이 나라도 정치인들의 부정이 많다고 신입 현지가이드는 솔직히 얘기한다.
내부는 괜찮은데 바깥 계단과 타일공사가 부실공사인지 다 망가져 조각이 난걸 그냥 방치하고 있었다. 이렇게 난림공사를 해 놓고 돈을 챙겼을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고 나왔다. 이곳에서 작은 양피지에 말 탄 몽고인과 게르를 그려 놓고 파는 처자가 있어 한 점 기념으로 샀다.
다음은 태를지 국립공원이다.1993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며 몽골 최고의 휴양지이기도 하다.1년 내내 개방되어 있으며 높지 않은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과 기암괴석 숲 초원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자연 풍화로 만들어진 바위들이 군데군데 있어 마치 일부러 세워놓은 조형물처럼 정겹다. 유목민의 전통가옥 게르와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떼와 말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가 찾은 때가 여름이라 에델바이스와 야생화가 만발하고 있었다.
우리는 국립공원 안에 있는 레드락 리조트(The Red Rock Resort)에 여장을 풀었다. 우리는 거의 현대식 건물에 투숙이 되었고 운이 없었던지 유목민 체험을 할 수 있는 게르를 쓸 수 없게 됐다. 화장실 샤워실을 공동으로 쓰게 된다는 게르지만 이번에 못 자보면 언제 또 와 자 볼 것인가. 조금 아쉽고 애석하다. 허긴 이 게르는 현지 유목민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관광 온 투숙객을 위해 급조해 만든 것으로 저 멀리 초원에 나가 자유인으로 사는 그들 진짜 게르에 한 번 들어가 보는 것이 진정 체험이 될 것이다. 이번 게르 체험 당첨은 엉뚱하게 술 잘 먹는 딸도 있는 통영가족과 장군 팀이 결정됐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다. 다들 긴 기차여행에 좀 시달리기도 했고 여기가 초원 위에 세워진 리조트라는 걸 인식해서인지 푹 쉬고 싶어 한다. 리조트내 식당에서 허르헉이란 몽고 음식 바베큐 비슷한 음식이 나온다. 빡빡한 일정에서 좀 풀어져서인지 내가 술 한 잔 하고 싶었다. 우리 테이블의 일행을 보니 다들 조용히 음식만 먹는다. 가이드가 얘기하는 이곳에도 칭기스칸 보드카가 유명하단다. 40도인데 꽤 비싸지만 특별히 오늘 좀 염가로 줄 수 있다고 한다. 내가 그거 가져 오라고 시켰다. 한 테이블 8명이 시선이 집중된다. 마침 술 잘 먹는 통영사람이 딸과 함께 제일 먼저 쳐다본다. 엄지를 들어 최고란다. 그 집 마나님은 눈을 흘긴다. 한 잔을 다 못 마시고 남기는 여자들이 있고 통영 아저씨 혼자 기회는 이 때다 싶은지 두 잔을 마신다. 나도 두 잔 정도만 하기로 한다. 세무서 사람은 따라 줬는데 입에 조금 대곤 잔을 안 비운다. 더 달라는 사람이 없다. 좌석을 옮겨 장군팀에 가서 한 잔씩 따라 드렸다. 져스트 80살 이라는데 청년 같다. 고마워한다. 포항 교사부부도 따라 줬다. 언제나 조용히 따라만 다니는 사람이다. 바이칼에서 허리를 염려하며 나랑 뒷좌석에 같이 탔던 50대 교사부부다. 그도 면세점에서 은근히 보드카를 샀던 남자다. 그리고 우리 테이블로 돌아오니 촉새가 쫒아 온다. 왜 자기네는 안 주냐는 거다. 가서 여자 잔에 까지 따라 줬다. 5만 원짜리 보드카 한 병 가지고 인심 한번 많이 썼다. 술은 반이 좀 안 남았다.
다음날 아침도 화창하다. 이번 여행 내내 비가 온 적이 없다. 우산도 준비하라고 했었는데 필요가 없게 됐고. 리조트에서 아침을 먹고 일행은 뒷산 트래킹을 한다고 했다. 일정표에 있는 일이다. 완만한 경사에 리조트 뒷 편의 붉은 바위가 방풍역할을 하는지 병풍역할인지 덩치가 묵직하고 그로테스크하다. 지구가 아닌 어느 행성에서 불러다 앉힌 것 같다. 리조트 자리가 명당 같고 배산임수 배치 같다. 나무는 없고 온통 풀밭이다. 이름도 모를 야생화가 만발이다. 민들레와 에델바이스 풀 정도만 알만 하다. 자유롭게 언덕을 오르는데 힘들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80고령도 정상까지 올라서더니 환하게 웃는다. 이 정도야 우습다고 너스레를 떠신다. 해발 600고지 쯤은 된다. 세무사의 사진기는 야생화 찍기에 바쁘다. 그 집 마누라는 팽개치고 안 보인다. 우리 집 사람도 역시 어디 오는지 보이질 않는다. 포항 교사부부도 신혼처럼 처져서 셀카봉으로 둘이 붙어 찍고 또 찍는다. 촉새는 어디쯤 있나 봤더니 여자 손목을 꼭 잡고 끄트머리 쯤에서 올라온다. 이 사람은 여행이 목적이 아닌 듯 그 여자 보디가드가 중한 거 같다.
정상에서 서울에 있는 글방 문우들께 사진을 전송할 수 있었다. 통영 술 잘 먹는 가족 딸에게 부탁을 했더니 2분도 안되 표시한 사진 10매를 쉽게 전송한다. 문우들 표정이 내가 부럽지 않은 듯하다. 그들은 마침 모임 날 점심때인지 육회 비빔밥 사진을 찍어 보내며 오히려 나보고 부러워하라며 약 올리는 듯하다. 내려와 버스로 이동 점심을 게르식당에서 일정표대로 소 통갈비 찜으로 먹었다. 가축이 흔해서인지 푸짐하다. 체면 불구 얼굴만 한 갈비 한 대씩 힘차게 물고서 뜯었는데 여자들도 잘 먹는다.
승마장으로 이동했다. 현지 가이드와 목장 교관의 승마요령과 주의사항을 잘 듣고 안전모도 하나씩 챙겨 들고 두려움 반 각오 반으로 승마에 임한다. 그 많은 인원이 말안장에 다 오르니 총 말만 60여두, 큰 무리를 이루며 대 이동 같다. 어린 마부가 말 두 마리를 인도하며 앞에 서고 일행들은 고삐를 꽉 잡고 대열을 따라 이동한다. 초보라도 순한 말 같아 잘 적응들을 해서 별 일 없이 1시간 반을 개울을 건너고 늪지대를 지나왔다. 제주도 조랑말 보단 좀 크긴 한데 어떤 말들은 힘들어 하는 것 같다. 기수들이 모두가 7,80킬로는 될 것 같은 무게들 아닌가. 승마를 끝내고 보니 마부가 대부분 어리고 소녀도 있다. 7살 정도나 됐을까 하는 아주 어린아이도 있다. 그들에게 감사표시로 얼마를 건네야 할지 좀 난감해서 망설여지기도 했다. 10불을 꺼내주니 쑥스러워 하면서도 얼른 받아 넣는다. 이렇게 거친 일도 하며 힘들게 커 가겠지만 몽고의 미래를 책임질 큰 일꾼들이 되 주길 바라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모두 잘 타고 돌아 온줄 알았는데 촉새 부부에게는 일이 생긴걸 알게 됐다. 부부가 올라타고 10분정도를 가다 그 집 여자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게 됐단다. 둘이는 승마를 중단하고 급하게 차로 목장 내 의료실로 갔다고 했다. 큰 부상이 아니길 바라지만 그런 일이 생기다니, 한참 만에 버스로 돌아온 부부는 한쪽 발을 붕대로 감은 채 표정이 없다. 다리가 겹질린 것 같다고 큰 병원에 가 봐야 한단다. 그 다음에 알려진 일이 더 충격적이다. 가이드가 얘기한다. 여자가 원래 큰 병을 앓고 있는 환자라며 아마 고치기 힘든 병이라고만 얘길 하더란다. 일행들은 그게 더 궁금해서 요새 못 고치는 병이 있나. 암도 생존률이 높아 졌다는데 걱정들만 한다.
나중에 촉새한테 듣는 그 여자의 사정은 더 심각하다. 무리라며 타지 말라고 했는데 여자는 말 한번 꼭 타고 싶다고 졸라서 어쩔 수 없이 태워 줬는데 더 힘들게 됐다며 울상이다. 여자는 6년 전부터 백혈병이라고 알려진 혈액암을 앓아 왔다며 그동안 치료를 하며 지내 왔는데 좋아졌다가 나빠지기도 하면서 다시 좋아졌는데 나은 줄 앓았다며 그런데 최근에 또 재발이 돼서 악화가 되더니 이젠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로 의사는 2,3개월 일거 라고 애길 하더란다. 그래서 그동안 온갖 방법을 다 써 고쳐보려 했지만 이젠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여행이나 하자며 이번에 데리고 나온 것이라고 했다. 여자 나이 59세 남자는 63세로 오래 동안 을지로에서 식당을 해 지금은 제법 큰 규모의 사업이 되어 살만 하니까 이런 일이 생겼다며 눈물이 글썽이는 걸 본다. 이 소리를 듣는 일행들은 아연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면서 쉽게 단정해 사람을 폄하해 한 걸 많이 부끄러워 해야 할 것 같았다.
이제 하루 밤만 자면 이 여행이 끝난다. 촉새네 사정을 들은 일행들에겐 사람이 죽는다는데 여행이 더 즐거울 수가 없다. 환자 앞에서 상투적으로 하는 위로는 할 수가 없었다. 대신 온 힘을 다해 껍데기를 벗는 우리 시대의 고통과 평범하게 살다 가는 건 또 무언가 를 생각해 본다.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공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오후엔 칭기스칸 광장과 간단사원을 보고 한식당에서 한식으로 저녁을 먹고 일정표에 남은 그날 일정을 대충 돌아 보면서 마지막 숙소 홀리데이인 호텔에 몸을 풀었다. 이튿날은 자이승 승전탑에 올라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보고 바로 아래쯤에 있는 이곳 구한말 시절 독립운동도 하며 몽고 왕의 주치의였다는 한국인 이태준 선생 기념관을 봤다 점심을 먹고 몽고 국영백화점을 방문 별거 없음을 확인하고 마지막 식사를 한식당에서 숯불구이 삼겹살을 먹고 공항으로 이동 면세점에서 보드카 두 병을 더 사고 비행기 탑승, 인천 공항에 새벽 2시 반에 내렸다.
끝없이 드넓은 푸른 초원에 야생마가 한가히 풀을 뜯는다. 언젠가 또 생각날 것 같은 몽골의 초원. 한 여름에도 섭씨 20도~30도인 선선한 날씨가 지속되고 여행하고 활동하기 최적인 이곳은 이젠 긴 잠에서 깨어나 머지않아 큰 힘을 쓸 것 같다. 앞으로 많이들 찾을 것 같다. 쉼이 있는 초원 위의 구름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한 여름에 찾은 이 땅은 마치 우리의 초가을 날씨 같았다. 밤에는 하늘 가득 수놓은 별들이 샹델리아처럼 반짝이고 초원에 나온 사람들은 그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언제고 탄성을 지를 것 같다.
(원고지96매)
|
첫댓글 잘 쓰지도 못 하는 글, 우리 동창만 보는게 아닌것 같군. 조회수가 180이 넘는다는 건 아무래도 그런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직 탈고 전이라 누가 도용해다 사용하면 안 되는 것인데. 그런 염려도 해야 된다고 어떤 문우가 지적해 주는걸 들은적 있지. 괜한 걱정인가......
아마 요즘에 바이칼호 관광이 많아 관심이 큰 이유인것 같네. 유럽으로 비행할때 늘 지나던 곳이 바이칼호와 이르크츠크 컨트롤(관제소)였지. 바이칼호 북쪽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 엄청나게 먼 인도로 극적인 육로탈출을 성공한 재미있는 실화 영화가 있었지.
멋진 여행도 부럽고 글솜씨도 부럽고 고상한 여러가지의 취미생활 또한 부럽소
원숙이는 오직 자전거타고 전국일주로 세월 빨리 가는게 야속할 뿐인데 암튼
멋진 취미생활과 멋진추억을 남기며 멋진노후를 즐기다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