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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지도 벌써 44주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떤 과오가 있었던 것은 분명 사실이나, 결과론적으로 경제발전과 안보, 국가 성장, 가난 극복의 공헌이 수백배 이상 되며; (북한에 일제가 남긴 많은 공장들에도 불구하고 ) 북한을 세계 최빈국수준으로 떨어뜨리고, 50년대 중반부터 북한국민 300만명을 학살한 김일성과 또한 300만명 이상 굶겨죽인김정일의 사악한 독재에 비하면 박정희는 몇 만 배 더 잘한 것입니다.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들을 공산좌파들은 인정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박정희의 업적들을 리뷰해 봤습니다.
1. 최초로 주민등록 제도 실시
사실 주민등록증 제도는 별거 아닌 것 같으나, 각종 범죄들과 그당시 극심한 간첩들의 파괴공작을 방지하여 국가를 안정화하는데 크게 기여한 제도입니다. 그 당시 주민등록제도를 실시한 것은 매우 빠른 것이며, 아직까지도 많은 국가가 주민등록제도 조차 실시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2. 전국적인 조직폭력배 소탕
1950년대 한국은 수많은 조폭들이 활개를 치며 국민들을 괴롭히는 국가였습니다. 인권을 강조한 419 민주정부에서도 거의 솜방망이처벌을 집행하여 대부분의 조직들은 건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516후에 혁명위원회를 발족시켜 전국적인 조폭소탕전을 벌였으며, 서울에서만 무려 2천명 이상, 전국에서 수천명의 조폭을 검거하여 두목들에 사형을 집행하는 등 엄벌을 집행하고, 많은 조폭들을 도로건설과 탄광개발 등에 투입해서 국가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치안을 확립했습니다. 이는 독재가 다 나쁜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인권팔이 민주주의 보다 공익에 도움이 된다는 간접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3. 최초로 의료보험제도 실시
불완전한 시작이었으나, 이것도 후진국 치고는 대단히 앞서간 시스템이었습니다. 미국 같은 나라들은 의료보험제도가 안되고 민간 보험에 의존하는 까닭에 병원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나와서 돈 없는 이들은 끙끙 앓다 죽는 케이스가 많았습니다.
4. 대대적인 산림 육성으로 세계4대 조림성공국 반열에 오름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나무를 베어 연료로 사용하였다. 그 결과 조선중기 이후로 거의 모든 산이 민둥산이 되어 홍수, 가뭄 등 많은 재난의 원인이 되었다.
박정희는 식목일을 제정하고 전국적인 식목행사를 실시하여 광야와 같던 국가를 푸르른 숲의 나라로 바꾸어 4대 조림성공국이라는 세계의 극찬을 들었다. 석탄, 원자력 등의 자원개발로 저렴한 에너지원을 공급함으로써 국민들이 나무를 베지 않게 만들었다는 이유도 큽니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도 민둥산입니다.
5. 경부고속도로 등 대대적인 고속도로 사업으로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만듦
다른 후진국들도 마찬가지겠으나 한국은 교통이 극악할 정도로 불편한 나라였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도로로 2주정도가 소요되었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도로여건은 물류이동과 경제발전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었습니다.
한일협정에서 일본으로부터 3억달러(1달러를 1300 W으로 계산시 약 3900억원 => 2023년 현재가치로 19조원 이상 )의 큰돈을 받았는데, 그 중 일부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보상금액으로 적은 것이라는 비난도 있으나, 배상 못받은 것에 비하면 잘한 것입니다. 일본이 더 적게 준대도 우리가 거부할 입장은 아니었거든요.
김영삼, 김대중 등 모든 야당정치인들은 돈있으면 가난한 사람이나 줄 것이지 차도 없는 나라에서 부자들이 놀러갈 도로나 만든다고 비판하며 고속도로 착공식에서 방해시위를 한 것은 잘 알려진 사건입니다. 이것은 경제성장의 비전이 전혀 없었던, 당시 민주화세력들의 근시안과 어리석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튼 경부고속도로는 전국을 1일생활권으로 만들었으며 급속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6. 소양강댐 등 여러 댐으로 홍수 방지 및 가뭄 극복하여 한국사 최초로 치수에 성공
조선중기 이후로 수백년 동안 한국은 최빈국 수준의 가난한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그 이유 중에는 자급자족형 농업정책이 있었는데, 농사만 짓는데도 불구하고, 봄 · 가을 가뭄과 여름 홍수로 농작물이 흉년이 들 때가 많아 풍요롭기는 커녕 하루 세끼 먹기도 힘든 때가 많았습니다. 이는 물부족국가에서 일부 저수지를 제외하곤 치수가 거의 되지 않았던 까닭이 큽니다. 박정희는 소양강댐 · 안동댐 등 전국에서 10개 이상의 댐을 만들어 단군 이래 최초로 치수에 성공한 지도자가 되었는데, 완벽하진 않으나 농업용수 확보와 홍수조절, 전기 발전 등으로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댐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개발독재시대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더 이상 댐들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데, 현재는 민주주의를 강조하므로 주민들이 결사반대하면서 땅값을 크게 부르면 강제수용을 통하여 땅을 매입하기 힘듭니다.
7. 제주도를 종단하는 516도로 개통 및 국제관광지 프로젝트 시작
8. 농촌 진흥과 국민의 근면 자조 정신을 일깨운 새마을운동 실시
당시는 서울도 가난했으나. 농촌은 초가집으로 도배된 빈민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세계 최빈국의 가난한 현실과 도박과 알콜중독 등으로 인한 패배주의에 빠져있던 국민들에게 적극적인 마인드를 세뇌하여
하면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잘살아보세 등의 긍정적 자신감을 심어주었으며, 새마을운동을 통한 마을 개조와 초가집 · 판잣집 등의 주거여건을 개혁하였고, 건축자재 대량생산으로 많은 건설회사들을 성장시켰습니다.
이를 두고, 민주세력들은 월급도 주지 않는 강제동원이었다고 비난하지만, 중요한 점은 국민들의 생활을 크게 업그레이드시켰다는 것입니다. 만약 댓가를 지급하려고 했으면 국가에 돈이 없어 결국 실패했을 것입니다. 우리보다 잘 살던 라오스, 캄보디아, 필리핀 등은 아직도 옛날 판잣집에서 사는 이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9. 자동차산업 육성
모든 전문가들 조차 반대하던 자동차산업이 이토록 크게 성장한데는 박정희의 육성정책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현대>의 노력이 제일 크지만, 만약 박정희가, 나름 경제를 위한답시고 반대했다면 자동차산업은 시작도 못하고 파산했을 겁니다.
10. 통일벼 등의 녹색혁명으로 보리고개 극복 및 식량자급 성공
한국은 조선중기 이후로 매년 보리고개 때마다 30~50만명 이상 굶어죽던 대단한 식량난의 국가였습니다. 오죽했으면 "진지드셨습니까"가 인사말로 쓰일 정도였습니다. 박정희는 통일벼 등을 적극 개발하여 세종대왕도 못했던 식량의 자급에 성공하였으며 단군이래 최초로 보리고개를 완전 극복했습니다.
11. 화교 상인 억압하여 국가 부의 유출을 방지
한국경제는 1950년대까지 화교(중국인)들이 상당 부분을 장악한 상태였습니다. 50년대의 한국은, 현재 원화 가치로 10억원정도만 있어도 수천평 정도는 우습게 살 수가 있었는데, 그 정도의 자금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많았고, 그들이 땅을 사고 투자를 하여 다시 지역과 경제를 장악하는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었으며, 그러한 와중에서 한국인들은 그들에 종속되어갔습니다. 이것을 걱정한 박정희는 화교들의 재산권과 투자를 철저히 억압한 결과 화교들의 남한경제 장악을 막았으며, 한국인에 의한 자본 축적을 가능케 했던 것입니다.
(현재도, 캄보디아,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많은 국가들이 화교들에 의해 경제가 장악돼 있음 )
12. 한일협정 체결에 성공하여 댓가로 얻어낸 막대한 청구비로 1960년대
경제발전의 토대를 닦음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당시 받았던 3억달러는 현재가치의 19조원에 해당합니다. 또한 2억달러의 차관을 빌렸습니다 . 5억달러를 현재돈의 가치로 환산하면 31조원 정도 됩니다. 이것으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좌파 민주세력들은 처음엔 한일협정에 반대하더니 나중에는 댓가로 받은 돈이 너무 적다고 비난하더군요.
( 물론 이명박처럼 당시 한일협정에 반대하다가 나중에 우파로 변신한 사람도 있음 ) 더 받으면 좋겠지만, 일본이 더준다는 보장도 없고, 그 정도 받은 것도 잘 한 것이죠.
13.철강산업을 육성시켜 세계적 규모의 철강업체의 기반을 닦음
포항제철도 많은 민주세력들의 근시안적 반대 속에 박정희의 의지로 관철되었습니다.
14. 선박 불모지에서 선박 육성 계획을 통해 세계적 조선산업의 기반을 닦음
15. 농업이 아닌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여 경제개발의 기틀을 다짐
전세계에서 자원 없는 수많은 국가들이 실패하는 공업화를 박정희는 성공했습니다.
오늘날 좌파세력들은 박정희의 공로 보다 노동자들의 노력이 더 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수출드라이브와 공업화정책을 통해 대기업을 육성하고, 그 대기업들이 노동자들에게 기술을 전수하여 숙련공을 만들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합니다. 가령, 기업들이 용접공을 뽑지 않는데 사람들이 용접을 배우겠습니까? 차라리 농사기술이나 익히려 할 것입니다. 노동자타령은, 박정희를 깎아내리기 위한 억지에 불과합니다.
16. 원전과 수력발전으로 막대한 전력을 저렴하게 공금하여 한국기업들의 경쟁력 강화와 원가절감에 기여
한국이 고도성장을 했던 데 커다란 기여를 한 것이 저렴한 전기였습니다. 박정희 전에는 한국보다 잘 살던 라오스, 캄보디아, 필리핀,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아직도 빈번한 정전에 시달리곤 합니다. 박정희는 원전 등으로 전기를 대량생산하여 안정적으로 공급함으로써 기업들의 생산성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17. 안팎의 극심한 반대에도 효자산업인 반도체전자공업의 기초를 놓음
한국을 먹여 살리는 반도체는 삼성 이병철회장의 결단으로 시작되었지만, 역시 많은 전문가들의 반대에 부딛혔습니다. 만약, 박정희가 반대했다면 시작도 못하고 좌초했을 것입니다. 박정희는 이병철과 독대 후 반도체를 적극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8. 북한에 비해 열세인 국방력에도 전국가적인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여 철통같은 국가안보를 실현시킴
70년대까지 대체로 남한은 북한에 비해 군사력이 열세였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전방위적인 국방정책으로 국가안보를 유지했습니다. 70년 대선에 나와서 박정희와 피말리는 경쟁을 했던 김모 후보는 대선에서 600만 예비군 철폐를 공약으로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남한의 국방은 크게 흔들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박정희는 적극적인 예비군 정책을 유지했으며 월남전쟁으로 미국이 약해진 시기에도 북한의 오판을 막았습니다.
19. 오일쇼크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략적 중동진출로 토목 · 항만 · 건설 분야에서 상당한 외화를 획득함
변변한 기술도 없는 나라가 외국에서 대규모공사를 따낸다는 것은 사실 기적에 가까운 업적입니다.
20. 경제개발5개년의 계속된 성공으로 유럽의 100년에 걸친 성장에 버금가는 발전을 19년만에 실현 시키므로써 한강의 기적을 만듦
박정희는 본인이 경제에 일자무식함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여 농업에서 공업으로의 전환을 추구했으며, 강력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수출드라이브로 세계가 극찬하는 급성장을 이루어냈습니다.
1960년까지 1인당 GNP가 1년에 79달러에 불과하던 세계 최빈국 수준이었던 남한은, 1979년에는 1인당 GNP가 1693달러로, 19년 동안 무려 2140%의 고도성장을 실현시킵니다. ( 이는 자원없는 국가로는 기적의 성장률로써, 중공이 80년에 자본주의를 적극 수용하여 급성장 하기 전에는 세계 최고의 성장률이었습니다 )
거지국가가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외국에서 돈과 기술을 빌려오고, 공장들과 도로와 항구를 만들었으며, 동시에 저렴한 전기를 공급하고 저렴한 노동력을 유지하는 등의 다차원적인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김영삼과 김대중을 비롯한 거의 모든 민주세력들은 산업화와 수출정책을 강하게 비판했었습니다. 그들은 공장과 고속도로 지을 돈이 있으면 국민에게 나눠주고, 수출 대신 농업 발전에 투자하라고 비난했습니다.
1970년 대선에서 김대중은 수출형 산업화에서 수입대체형 산업화로 바꿀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수출하지 말고, 수입품이나 자체 생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수출을 해야 외화를 벌어오는 것이며, 수입품도 필요하니까 수입하는 것인데, 자전거도 못만드는 나라가 무슨 기술로 수입품을 대체하겠습니까. 어불성설입니다.
물론, 김대중이 나중에는 IMF를 극복하는데 커다란 공헌이 있다는 점은 상당히 높이 평가하지만, 70년에 대통령이 되었다면, 근시안으로 나라를 쫄딱 말아먹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경제발전은, 좌파들의 주장처럼 그리 쉬운 게 아닙니다.
아무튼 박정희가, 매년 30만명씩 굶어죽던 보리고개를 극복하고 경제발전 시키지 못했더라면, 지금도 많은 나라처럼 거지국가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좌파들과 그들에 세뇌당한 국민들은, 김일성의 학정은 일체 모른 체 하면서도, 민족을 절대가난에서 구원한 박정희의 업적을 깎아내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첫댓글 Good!!
<프레이저 보고서 >
한국 경제를 살린건 박정희가 아닌 케네디 정권, 평생
군대 짭밥만 먹은,, 박정희가 경제를 어떻게 알겠어요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Pf7SVROOAA4
백년전쟁 영상 1분30초쯤부터 박정희 증언이 나옴,
대법원판결 :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 제재는
부당하다며?, 원심을 깨고 고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fqg2DWX1UuA
박정희는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죄를 씌워 많이 죽였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71420&cid=43667&categoryId=43667
인혁당사건 : 무고한 사람 8명한테 간첩죄를 뒤집어 씌워 대볍원 판결 나자마자 죽임,
박근혜
인혁당사건에 대한,사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수없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608SIRInLIA
뉴스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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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냉전 상황에서 한국경제 성장을 미국이 지원했지만, 경제성장의 디테일한 계획들은 박정희와 경제관료들이 집행한 것입니다. 가령, 박정희 자신이 고속도로나 포항제철은 경제성이 없다고 포기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경제성장률은 훨씬 떨어지겠죠.
혁명당 사건은 죄가 없는 이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잘못이긴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공산주의를 공부하는 동아리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사실들이 요즘의 관점에선 죄라고 할 수는 없으나, 수많은 간첩들 속에 늘 공산침략의 위협에 시달리던 그 당시에는 잠재적인 적군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죠. 법에 없다고 그런 세력들 다 풀어주면, 월남처럼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불안하면 법규에 없더라도 국가안보를 지켜야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혁명당사건은 현재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혁명당 사건 주동자 중의 하나였던 김배영은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북한으로 월북했으며 나중에 다시 간첩으로 남한에 파송됩니다. 또한 주동자중의 하나였던 박범진(의원)은, 민혁당사건 멤버들이 노동당 입당선서를 했으며 실제로 북한의 지령을 따르고 남한반란을 추구하는 조직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사형은 지나친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카더라 통신이네요.
어떤 주장을 하실때는 님 주장에 맞는 객관적인 증거를 대고 주장을 하세요
그래야 신뢰가 가지요,, 지금은 유튜브 가짜뉴스가 넘쳐나는 세상 이잖아요
박정희는 친일파에 빨갱이에, 독재자에 온갖 못된 짓은 다한자라고 수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하다못해 자신의 딸인 박근혜 보다 어린 여학생들까지
강간을 한 놈이니까요
...현대판 채홍사였던.. 중정의전과장 박선호 증언 ...
<궁정동 박정희 주색파티에 드나든 여인 100명도 넘어>
여자 선정작업은 “주로 주간지 표지 사진이나 TV시청에서 시작 됐다” 며
대상 선정이 끝나면 주로 궁정동에서 가장 가까운 내자 호텔로 불러냈다
1979년 10·26 당일 오후 5시20분쯤 가수 심수봉은 내자호텔 커피숍에서,
H대학생 신재순은 프라자호텔에서 각각 궁정동으로 인도됐다”고 전했다.
궁정동 드나든 여인에 대해. “ 1979년겨울 배우, 탤런트가 대부분 이어서
저기 걸린 달력에 나온 미녀 모두가 안가를 다녀갔다”.. 진술 하기도 했다
출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