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 : FM 98.1 (07:0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미래희망연대 김을동 의원
- 90년 도올 글, 이슈화 싫어 참아왔다 - 김두한 키운 조모가 김 장군의 부인 - 외손녀 주장 위氏, 검사하자니 잠적 - 위氏, 보훈처 조사결과 가짜로 밝혀져 - 도올 사과 없을땐 법적대응도 고려 [장군의 손녀 논란] 김을동 "DNA 검사하자" 도올 김용옥 교수가 1990년에 신동아에 쓴 기고문이 20년이 넘은 지금 다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다. 김두한은 부모를 모르는 고아이고 선천적으로 싸움꾼이다. 서울로 올라와 거지 왕초에게 붙들려서 거지소굴에서 컸다. 단언컨대 김좌진의 신화는 김두한의 성장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런 글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김좌진 장군은 우리나라 역사에 남는 독립운동가고요. 또 김좌진 장군의 손녀이자 김두한의 딸인 김을동 의원은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죠. 만약 도올 교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의 역사기록도 부정하는 일이 되는 건데요. 최근 김을동 의원이 도올 교수에게 공개적으로 사과를 요구하고 나서서 지금 논란이 커지고 있습니다. 오늘 화제의 인터뷰에서 미래희망연대 김을동 의원을 직접 연결을 해 보죠.
◇ 김현정> 2일에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말씀을 꺼내신 거예요. 그런데 20년이 넘은 지금에 와서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내신 이유는 뭔가요?
◆ 김을동> 지금 EBS 도올 특강, ‘김용옥의 중용’이라는 프로그램이 중단될 조짐이 보이자 이게 무슨 외압에 의한 일반적인 방송중단이라며 도올이라는 학자가 이슈가 됐고, 그동안의 도올의 행적들을 제가 봐오면서 ‘아, 드디어 정말 올 것이 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도올이 전 국민을 상대로 평생교육을 담당하는 EBS의 강사로 적합한 인물이냐 생각했을 때, 여러 가지 언행들은 학자나 지성인으로서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사실을 왜곡하기도 하고 편향된 인물이고, EBS프로그램의 강사로서 부적합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단적인 사례가 바로 제 가족사와 관련한 도올의 발언이기 때문에 좀 쉽게 이해하라고 발표하게 된 것입니다.
◇ 김현정> 1990년 그 당시에는 해명을 왜 안 하셨어요?
◆ 김을동> 그때 당시 20년 전에는 별로 부각이 안 됐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명예훼손죄로 고소할까도 생각 했었지만 저도 한때 그(도올 교수)를 존경했었던 적이 있고요. 그때 당시에는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전되지 않아서 ‘이렇게 소문나다가 말겠지’ 하고 참았었습니다.
◇ 김현정> 그때는 또 탤런트였기 때문에 좀 그런 게 부담스럽기도 했었겠어요?
◆ 김을동> 부담스럽기도 했고요. 그리고 이를테면 저희 아버지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임이 너무나 분명한데, 오히려 해명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 김현정> 이슈화가 되면 오히려 웃기는 일이다?
◆ 김을동> 독도가 우리 땅인데요. 일본 사람들이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거랑 뭐가 다르겠습니까?
◇ 김현정> 그러니까 아버지 김두한 전 의원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확실하다는 말씀이신데요. 확실한 근거를 요구한다면 제시할 수 있는 게 있습니까?
◆ 김을동> 물론이죠. 우선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도올의 주장이 말이 안 되는 게 우리 증조할머니께서 우리 아버지(김두한)를 찾은 나이가 13살입니다. 그때부터 할머니 슬하에 있었어요.
◇ 김현정> 그런데 고아로 알려졌었는데요?
◆ 김을동>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를 낳아준 어머니는 서울에서 살다가 8살 때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그냥 여기서 계셨고, 할머니는 우리 할아버지(김좌진 장군)를 따라서 만주로 가 계셨어요. 만주로 가서 독립 운동하는 그 근처에서 계시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서울로 오셨어요. 서울에 와서 손주를 찾으신 거죠.
◇ 김현정> 그때 어머니하고 손주하고 그럼 같이 있었던 것 아닌가요? 서울에 같이 살고 계셨던 거 아니에요?
◆ 김을동> 같이 있던 그 생모가 제 아버지(김두한) 8살에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청계천 다리 밑에서 그냥 걸식을 하면서 사셨던 거예요.
◇ 김현정>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서울에서 어머니하고 아들인 김두한 전 의원이 같이 살았던 거고요. 만주에서는 김좌진 장군하고 부인이,즉 할머니가 함께 사신 거고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김두한 전 의원은 혼자 고아로 자라다가.... 할머니가 만주에서서울로 돌아오신 뒤에 찾은 거예요. 그게 아버지 나이 13살인 거네요?
◆ 김을동> 그렇죠. 그때 할머니는 두 살 때까지 아버지를 보고 왕래를 하셨으니까 나중에 9년, 10년 만에 만난 거죠.
◇ 김현정> 그런데 9년 만에 만났는데 얼굴을 알아보셨대요?
◆ 김을동> 그게 아니라 그때 당시에 할머니가 계셨던 그 주위 일가친척, 뭐 있는 사람들 다 있지 않습니까? 떨어졌다고 해서 8년 동안의 모든 관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김현정> 그렇군요. 김좌진 장군의 외손녀 위연홍 여사도 지금 한국에 사시는 거죠?
◆ 김을동> 그 사람이 가짜라고 판명이 됐습니다.
◇ 김현정> 가짜라고요? 지금 외손녀 위연홍 여사는 다들 독립유공자로 알고 있는데....
◆ 김을동> 이것도 사실 이번 기회에 밝혀야 되겠어요. 그 사람이 만약에 정말로 자기가 자신이 떳떳하고 진짜라면 서울의 김을동이라는 사람이 탤런트로서 어느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알 텐데, 저 사람이 왜 나를 찾지를 않고 엉뚱하게 기자들한테 얘기를 해서 이렇게 하느냐... 저 사람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 국가보훈처에다가 문제제기를 전부 다 사람들이 했어요.그래서 보훈처에서 중국 현지에다가 사람을 파견해서 모든 그 사람의 주장에 대해서 탐문수사를 다 했어요.
◇ 김현정> 그게 언제입니까?
◆ 김을동> 그게 벌써 몇 년 전 됐죠. 그래서 해서 그 사람이 허무맹랑한 근거로 했다는 것을 국가보훈처에서 알고 보고를 했어요.
◇ 김현정> ‘김좌진 장군의 외손녀 위연홍 여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은 가짜다’라구요?
◆ 김을동> 네, ‘조작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 보고가 됐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그러면 간단하지 않느냐, 막말로 그 사람이 그렇게 당당하다면 나한테 와서 같이 머리카락 하나만 뽑아도 솔직히 밝혀질 텐데 안 나타나는 이유가 뭐냐” 그 사람이 그 후로 영원히 나타나지 않았어요, 오늘날까지. 그런데 그 사람이 언론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히려 반대로 유전자 검사를 내가 안 했다고 하더라고요.
◇ 김현정> 제가 지금 알고 있기로도, 위연홍 여사가 유전자 검사를 하자고 김을동 의원에게 제안했는데 그걸 김을동 의원이 거절했다, 이렇게 알고 있는데요....
◆ 김을동> 그게 반대입니다.
◇ 김현정> 보훈처에 저희가 이걸 확인을 해 봐도 이건 가짜라고 나오는 거죠?
◆ 김을동> 보훈처에서, 국가보훈처에서 확인을 했고 지금 현재는 그때의 파견을 했던 역사학자들 이런 사람들이 지금 계십니다.
◇ 김현정> 알겠습니다. 혹시 말이죠. 신문에 있는 사진 외에 어떤 다른 근거, 즉 김좌진 장군이 대대로 물려주신 유품, 가보 같은 것도 가지고 계십니까?
◆ 김을동> 저희 할아버지가 17살에 전부 다 집에 있는 가산 다 나눠주시고 혼자 망명을 하셨지 않습니까? 중국으로 넘어가셨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유품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요. 단지 독립군들이 어딘가 출두를 하실 때는 꼭 숟가락은 갖고 다니신답니다. 어디 가서 밥은 먹어야 되니까요.. 그래서 할아버지의 숟가락 한 벌이 유일하게 김좌진 장군의 유품으로 저한테까지 물려내려오고 있습니다.
◇ 김현정> 그럼 가족에게만 쓴 편지라든지 메모라든지 이런 것은 없고요?
◆ 김을동> 그런 거 없죠. 그때 당시에...
◇ 김현정> 그렇다보니 이렇게 더 여러 가지로 곤란을 겪고 계시는 거 같습니다?
◆ 김을동> 이 세상에서 할머니가 청맹과니입니까? 더군다나 저희 집안이 어떤 집안입니까? 그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13살짜리였는데. 그때에 무슨 어떤 어린아이가 “나는 장군의 손자요” 하며 나섰겠습니까? 이게 우리가 볼 때 상식적으로 생각이 안 됩니다, 상식적으로라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도올이 학자로서 인간으로서 조그마한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 자신이 무책임하게 내뱉은 이 잘못된 정보를 스스로 수정하고 가족사를 무참하게 난도질당한 저희 집안에 대해서 진심 어린 사과를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만약에 아니면 근거 자료를 내놓든가.
◇ 김현정> 만약 사과를 안한다면 이게 오래된 일이지만 법적으로 문제 삼을 생각까지도 있으신건가요?
◆ 김을동> 만약에 법적으로 가능하다면, 지금 어차피 이렇게 얘기가 커진 마당에 할 수 있으면 하고 싶습니다.
◇ 김현정> 저희가 도올 김용옥 교수에게도 요청을 했습니다만, 그쪽에서는 답변을 주지 않았습니다. 김을동 의원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화제의 인터뷰를 진행을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김두한1918년 5월 15일 ~ 1972
김좌진 (1889.11~1930.1)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6일간 지속됨)
1930년 1월 박상실에 의해 암살당함.
일본 천황의 생일을 맞아 조선일보가 내놓은 사설을 보자면... " 천황폐하의 생일을 맞아 모든 신하와 백성이 경축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것이다...천황폐하께서 옥체가 건강하시니 실로 황공하고 경할뿐이다...앞으로 충성과 의를 다하여 일념으로 천황폐하와 일본제국에 보답하겠다 " 라고 되있다...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고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고 일본에 충성하며 부역하던 극악한 매국역적 신문으로 일본 총독부의 철저한 검열에 의해 기사를 송고하던 시절이었으며
청산리 대첩이 1920년 10월 일어난 이후 김좌진 장군에 엄청난 현상금이 걸려있던 시절로 국내의 독립군 연결조직과 군자금 모금책등을 검거하기 위해 일제가 혈안이 된 시점이었다.
다음은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한 직후 (1930년 1월 암살당함) 북로군정서의 잔존세력이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함경북도등지에 주제소등을 습격하던 당시의 시절에 실린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기사이다.
김계월(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기사에 따라 추정한 출생연도 - 1904,5년생)
설명
(1) 김옥균 1851.1.23∼1894.3.28, 1884년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 망명.1894년 3월 홍종우에 의해서 암살되다. (2) 김좌진 1889.12.16∼1930.1.24, 1920년 10월 청산리 대첩, 1930년 1월 박상실에 의해서 암살되다.
(3) 김두한 1918.5 ∼1972.11.21
김두한이 스스로 말하길:
"나의 조부는 고균 김옥균이다. 나의 부친은 백야 김좌진이다. 나는 당대 세도가 당당했던 이른바 명문 안동김씨의 서족이다.", "내가 일곱살때 세계전사상 희귀한 청산리대첩이 있자 일경은 즉각 외조부님과 모친을 투옥했다. 그래서 나는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리고 열살되던 해에 불망의 독립군 대장인 부친의 별세를 전해듣고 울었다."
김두한의 주장----
김좌진이 김옥균의 양자로 들어갔음.
7세때 청산리 대첩 발발 외조모 모친이 투옥 되어 고아됨, 그로부터 3년후 10세때 부친 김좌진 별세함.
하지만
김옥균은 일본에1884년부터 망명중이었고 1894년 일본에서 암살당함, 김좌진은 1889년 충남홍성에서 태어남. 따라서 김좌진이 김옥균의 양자로 들어갔다는 주장은 날조된 거짓말.
김두한은 1918년생. 청산리대첩때 김두한 나이는 3세여야 함. 따라서 7세때라는건 날조된 거짓말.
김좌진 장군이 별세한때는 청산리 대첩 발발 10년후인 13세때여야함. 따라서 청산리 대첩 발발 3년 후인 10세에 김좌진이 별세했다는 주장은 날조된 거짓말.
이외에도 조선총독부가 만들어낸 기생모친이 맘에 결렸던지
김두한은 상궁의 딸이라는 해괴한 여인을 등장시킴. 그 여인이 김두한의 생모라고 주장.
그럼 상궁은 딸을 1880년 말~1890년 대에 낳았어야 함. (김두한과 나이차를 따져보면 상궁의 딸 김계월은 1904,5년 이전 출생이어야 함)
하지만
그래...그냥 백번 양보해서 그래 그 무슨 상궁이라고 쳐도
조선 시대에 궁에 일단 들어가면 상궁이든 뭐든 궁녀는 죽어서야 궁 밖을 나옴. 상궁이 저 시기에 딸을 낳았다는건 있을수 없는 일.
그래 더 백번 양보해서 1910년 국권 강탈후 나라가 망해 궁궐의 궁녀를 밖으로 내보내면서 상궁이 밖의 사람이 되서 1910년 후에 딸을 낳았다고 쳐도 그럼 상궁의 딸은 1918년에 기껏해야 몇 살 인데... 그때 김두한이 출생했다니.
김좌진은 18세에 자기집의 모든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해방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이후 일찌감치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투신을 하였으니 오랜세월 고향과는 멀리 떨어져 연락이 두절이 되었었죠. 김좌진 장군은 일본의 끈질긴 추적과 일본이 이간질한 독립운동세력간 갈등속에, 암살범의 총에 맞아 죽을 때까지 자기에게 김두한이라는 아들이 있는지 조차 몰랐습니다. 사실 김두한은 김좌진의 친아들이 아닙니다. 충남 홍성출신인 김좌진과는 달리 김두한은 개성,서울출신의 고아였습니다. 자기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김두한은 어려서부터 거지들과 어울려다니면서 거지생활로 유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김두한은 민족주의자로서 일제와 뒷골목에서 맞선 영웅이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김두한은 일본깡패두목 하야시와 라이벌로 맞서 대결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실제 그 당시 김두한은 하야시와는 라이벌관계라기 보다는 조직폭력계에서 서로 상호 공생하는 형님 아우하는 사이였습니다. 거기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하야시가 일본사람이 아니고 조선인 이었다는 것입니다.
평안북도 출생인 선우영빈은 어릴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야쿠자의 계열 조직 '시미즈 구미'에서 활동했고 조선으로 돌아와 야쿠자 오야붕이 되었습니다. 일제시대 당시 조선 경성에 있던 일본 야쿠자 오야붕이 바로 '하야시'이며 본래이름은 '선우영빈'으로 역시 처세술에는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조선인이면서도 출세를 위해 거물급 일본인의 총애를 받으며 수양아들로 들어가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키웠던 인물입니다. 일본 야쿠자의 창시자 도루야마 마쓰히로(두산만)는 일본 총리대신도 눈치를 볼정도의 거물인데, 그 두산만의 직계 제자인 고노에의 사위가 하야시(선우영빈)입니다. 조선정무총감(국무총리), 총독부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하야시의 위세와 영향력은 김두한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컸다고 합니다.
하야시는 김두한과 종종 술자리도 같이했으며 김두한에게 큰 액수의 용돈도 선뜻 주곤 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아직 생존하는 김두한의 친구 김동회가 회고하는 내용입니다.
하야시는 김두한과 (김두한이 창설한) 반도의용정신대의 부하들이 징용위기에 처했을때에는 총독부에 영향력을 행사해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하야시의 나이는 김동회,김두한의 7~8살 위였으며 하야시의 신뢰를 받은 김동회는 혼마치칸의 살림에 관여했고 김두한은 재정위기에 몰렸을 때에도 하야시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김두한의 육성 증언 테이프엔 "하야시와 의형제로 지냈고 매달 1000원씩 받았다" 는 내용이 들어 있으며 생존당시 동아방송 대담프로그램에 출연해 "하야시를 형님으로 모시며 형제관계를 맺었다"고 두 사람의 공생관계를 시인하기도 했습니다. 선우영빈은 해방후 대한건설협회의 이사직을 맡을 정도로 출세를 하였습니다.
김좌진 장군 후손이라는 후광으로 한국에서 유명세와 위세를 떨치고 정치판까지 진출해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김을동은 김좌진 장군의 진짜 후손이 확실한 분이(대부분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그러하듯) 한국 국적도 얻지 못하고 밑바닥 생활을 전전 한다고 함.
■ 방송 : FM 98.1 (07:0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미래희망연대 김을동 의원
- 90년 도올 글, 이슈화 싫어 참아왔다 - 김두한 키운 조모가 김 장군의 부인 - 외손녀 주장 위氏, 검사하자니 잠적 - 위氏, 보훈처 조사결과 가짜로 밝혀져 - 도올 사과 없을땐 법적대응도 고려 [장군의 손녀 논란] 김을동 "DNA 검사하자" 도올 김용옥 교수가 1990년에 신동아에 쓴 기고문이 20년이 넘은 지금 다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다. 김두한은 부모를 모르는 고아이고 선천적으로 싸움꾼이다. 서울로 올라와 거지 왕초에게 붙들려서 거지소굴에서 컸다. 단언컨대 김좌진의 신화는 김두한의 성장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런 글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김좌진 장군은 우리나라 역사에 남는 독립운동가고요. 또 김좌진 장군의 손녀이자 김두한의 딸인 김을동 의원은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죠. 만약 도올 교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의 역사기록도 부정하는 일이 되는 건데요. 최근 김을동 의원이 도올 교수에게 공개적으로 사과를 요구하고 나서서 지금 논란이 커지고 있습니다. 오늘 화제의 인터뷰에서 미래희망연대 김을동 의원을 직접 연결을 해 보죠.
◇ 김현정> 2일에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말씀을 꺼내신 거예요. 그런데 20년이 넘은 지금에 와서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내신 이유는 뭔가요?
◆ 김을동> 지금 EBS 도올 특강, ‘김용옥의 중용’이라는 프로그램이 중단될 조짐이 보이자 이게 무슨 외압에 의한 일반적인 방송중단이라며 도올이라는 학자가 이슈가 됐고, 그동안의 도올의 행적들을 제가 봐오면서 ‘아, 드디어 정말 올 것이 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도올이 전 국민을 상대로 평생교육을 담당하는 EBS의 강사로 적합한 인물이냐 생각했을 때, 여러 가지 언행들은 학자나 지성인으로서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사실을 왜곡하기도 하고 편향된 인물이고, EBS프로그램의 강사로서 부적합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단적인 사례가 바로 제 가족사와 관련한 도올의 발언이기 때문에 좀 쉽게 이해하라고 발표하게 된 것입니다.
◇ 김현정> 1990년 그 당시에는 해명을 왜 안 하셨어요?
◆ 김을동> 그때 당시 20년 전에는 별로 부각이 안 됐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명예훼손죄로 고소할까도 생각 했었지만 저도 한때 그(도올 교수)를 존경했었던 적이 있고요. 그때 당시에는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전되지 않아서 ‘이렇게 소문나다가 말겠지’ 하고 참았었습니다.
◇ 김현정> 그때는 또 탤런트였기 때문에 좀 그런 게 부담스럽기도 했었겠어요?
◆ 김을동> 부담스럽기도 했고요. 그리고 이를테면 저희 아버지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임이 너무나 분명한데, 오히려 해명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 김현정> 이슈화가 되면 오히려 웃기는 일이다?
◆ 김을동> 독도가 우리 땅인데요. 일본 사람들이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거랑 뭐가 다르겠습니까?
◇ 김현정> 그러니까 아버지 김두한 전 의원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확실하다는 말씀이신데요. 확실한 근거를 요구한다면 제시할 수 있는 게 있습니까?
◆ 김을동> 물론이죠. 우선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도올의 주장이 말이 안 되는 게 우리 증조할머니께서 우리 아버지(김두한)를 찾은 나이가 13살입니다. 그때부터 할머니 슬하에 있었어요.
◇ 김현정> 그런데 고아로 알려졌었는데요?
◆ 김을동>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를 낳아준 어머니는 서울에서 살다가 8살 때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그냥 여기서 계셨고, 할머니는 우리 할아버지(김좌진 장군)를 따라서 만주로 가 계셨어요. 만주로 가서 독립 운동하는 그 근처에서 계시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서울로 오셨어요. 서울에 와서 손주를 찾으신 거죠.
◇ 김현정> 그때 어머니하고 손주하고 그럼 같이 있었던 것 아닌가요? 서울에 같이 살고 계셨던 거 아니에요?
◆ 김을동> 같이 있던 그 생모가 제 아버지(김두한) 8살에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청계천 다리 밑에서 그냥 걸식을 하면서 사셨던 거예요.
◇ 김현정>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서울에서 어머니하고 아들인 김두한 전 의원이 같이 살았던 거고요. 만주에서는 김좌진 장군하고 부인이,즉 할머니가 함께 사신 거고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김두한 전 의원은 혼자 고아로 자라다가.... 할머니가 만주에서서울로 돌아오신 뒤에 찾은 거예요. 그게 아버지 나이 13살인 거네요?
◆ 김을동> 그렇죠. 그때 할머니는 두 살 때까지 아버지를 보고 왕래를 하셨으니까 나중에 9년, 10년 만에 만난 거죠.
◇ 김현정> 그런데 9년 만에 만났는데 얼굴을 알아보셨대요?
◆ 김을동> 그게 아니라 그때 당시에 할머니가 계셨던 그 주위 일가친척, 뭐 있는 사람들 다 있지 않습니까? 떨어졌다고 해서 8년 동안의 모든 관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김현정> 그렇군요. 김좌진 장군의 외손녀 위연홍 여사도 지금 한국에 사시는 거죠?
◆ 김을동> 그 사람이 가짜라고 판명이 됐습니다.
◇ 김현정> 가짜라고요? 지금 외손녀 위연홍 여사는 다들 독립유공자로 알고 있는데....
◆ 김을동> 이것도 사실 이번 기회에 밝혀야 되겠어요. 그 사람이 만약에 정말로 자기가 자신이 떳떳하고 진짜라면 서울의 김을동이라는 사람이 탤런트로서 어느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알 텐데, 저 사람이 왜 나를 찾지를 않고 엉뚱하게 기자들한테 얘기를 해서 이렇게 하느냐... 저 사람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 국가보훈처에다가 문제제기를 전부 다 사람들이 했어요.그래서 보훈처에서 중국 현지에다가 사람을 파견해서 모든 그 사람의 주장에 대해서 탐문수사를 다 했어요.
◇ 김현정> 그게 언제입니까?
◆ 김을동> 그게 벌써 몇 년 전 됐죠. 그래서 해서 그 사람이 허무맹랑한 근거로 했다는 것을 국가보훈처에서 알고 보고를 했어요.
◇ 김현정> ‘김좌진 장군의 외손녀 위연홍 여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은 가짜다’라구요?
◆ 김을동> 네, ‘조작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 보고가 됐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그러면 간단하지 않느냐, 막말로 그 사람이 그렇게 당당하다면 나한테 와서 같이 머리카락 하나만 뽑아도 솔직히 밝혀질 텐데 안 나타나는 이유가 뭐냐” 그 사람이 그 후로 영원히 나타나지 않았어요, 오늘날까지. 그런데 그 사람이 언론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히려 반대로 유전자 검사를 내가 안 했다고 하더라고요.
◇ 김현정> 제가 지금 알고 있기로도, 위연홍 여사가 유전자 검사를 하자고 김을동 의원에게 제안했는데 그걸 김을동 의원이 거절했다, 이렇게 알고 있는데요....
◆ 김을동> 그게 반대입니다.
◇ 김현정> 보훈처에 저희가 이걸 확인을 해 봐도 이건 가짜라고 나오는 거죠?
◆ 김을동> 보훈처에서, 국가보훈처에서 확인을 했고 지금 현재는 그때의 파견을 했던 역사학자들 이런 사람들이 지금 계십니다.
◇ 김현정> 알겠습니다. 혹시 말이죠. 신문에 있는 사진 외에 어떤 다른 근거, 즉 김좌진 장군이 대대로 물려주신 유품, 가보 같은 것도 가지고 계십니까?
◆ 김을동> 저희 할아버지가 17살에 전부 다 집에 있는 가산 다 나눠주시고 혼자 망명을 하셨지 않습니까? 중국으로 넘어가셨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유품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요. 단지 독립군들이 어딘가 출두를 하실 때는 꼭 숟가락은 갖고 다니신답니다. 어디 가서 밥은 먹어야 되니까요.. 그래서 할아버지의 숟가락 한 벌이 유일하게 김좌진 장군의 유품으로 저한테까지 물려내려오고 있습니다.
◇ 김현정> 그럼 가족에게만 쓴 편지라든지 메모라든지 이런 것은 없고요?
◆ 김을동> 그런 거 없죠. 그때 당시에...
◇ 김현정> 그렇다보니 이렇게 더 여러 가지로 곤란을 겪고 계시는 거 같습니다?
◆ 김을동> 이 세상에서 할머니가 청맹과니입니까? 더군다나 저희 집안이 어떤 집안입니까? 그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13살짜리였는데. 그때에 무슨 어떤 어린아이가 “나는 장군의 손자요” 하며 나섰겠습니까? 이게 우리가 볼 때 상식적으로 생각이 안 됩니다, 상식적으로라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도올이 학자로서 인간으로서 조그마한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 자신이 무책임하게 내뱉은 이 잘못된 정보를 스스로 수정하고 가족사를 무참하게 난도질당한 저희 집안에 대해서 진심 어린 사과를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만약에 아니면 근거 자료를 내놓든가.
◇ 김현정> 만약 사과를 안한다면 이게 오래된 일이지만 법적으로 문제 삼을 생각까지도 있으신건가요?
◆ 김을동> 만약에 법적으로 가능하다면, 지금 어차피 이렇게 얘기가 커진 마당에 할 수 있으면 하고 싶습니다.
◇ 김현정> 저희가 도올 김용옥 교수에게도 요청을 했습니다만, 그쪽에서는 답변을 주지 않았습니다. 김을동 의원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화제의 인터뷰를 진행을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김두한1918년 5월 15일 ~ 1972
김좌진 (1889.11~1930.1)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6일간 지속됨)
1930년 1월 박상실에 의해 암살당함.
일본 천황의 생일을 맞아 조선일보가 내놓은 사설을 보자면... " 천황폐하의 생일을 맞아 모든 신하와 백성이 경축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것이다...천황폐하께서 옥체가 건강하시니 실로 황공하고 경할뿐이다...앞으로 충성과 의를 다하여 일념으로 천황폐하와 일본제국에 보답하겠다 " 라고 되있다...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고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고 일본에 충성하며 부역하던 극악한 매국역적 신문으로 일본 총독부의 철저한 검열에 의해 기사를 송고하던 시절이었으며
청산리 대첩이 1920년 10월 일어난 이후 김좌진 장군에 엄청난 현상금이 걸려있던 시절로 국내의 독립군 연결조직과 군자금 모금책등을 검거하기 위해 일제가 혈안이 된 시점이었다.
다음은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한 직후 (1930년 1월 암살당함) 북로군정서의 잔존세력이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함경북도등지에 주제소등을 습격하던 당시의 시절에 실린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기사이다.
김계월(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기사에 따라 추정한 출생연도 - 1904,5년생)
설명
(1) 김옥균 1851.1.23∼1894.3.28, 1884년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 망명.1894년 3월 홍종우에 의해서 암살되다. (2) 김좌진 1889.12.16∼1930.1.24, 1920년 10월 청산리 대첩, 1930년 1월 박상실에 의해서 암살되다.
(3) 김두한 1918.5 ∼1972.11.21
김두한이 스스로 말하길:
"나의 조부는 고균 김옥균이다. 나의 부친은 백야 김좌진이다. 나는 당대 세도가 당당했던 이른바 명문 안동김씨의 서족이다.", "내가 일곱살때 세계전사상 희귀한 청산리대첩이 있자 일경은 즉각 외조부님과 모친을 투옥했다. 그래서 나는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리고 열살되던 해에 불망의 독립군 대장인 부친의 별세를 전해듣고 울었다."
김두한의 주장----
김좌진이 김옥균의 양자로 들어갔음.
7세때 청산리 대첩 발발 외조모 모친이 투옥 되어 고아됨, 그로부터 3년후 10세때 부친 김좌진 별세함.
하지만
김옥균은 일본에1884년부터 망명중이었고 1894년 일본에서 암살당함, 김좌진은 1889년 충남홍성에서 태어남. 따라서 김좌진이 김옥균의 양자로 들어갔다는 주장은 날조된 거짓말.
김두한은 1918년생. 청산리대첩때 김두한 나이는 3세여야 함. 따라서 7세때라는건 날조된 거짓말.
김좌진 장군이 별세한때는 청산리 대첩 발발 10년후인 13세때여야함. 따라서 청산리 대첩 발발 3년 후인 10세에 김좌진이 별세했다는 주장은 날조된 거짓말.
이외에도 조선총독부가 만들어낸 기생모친이 맘에 결렸던지
김두한은 상궁의 딸이라는 해괴한 여인을 등장시킴. 그 여인이 김두한의 생모라고 주장.
그럼 상궁은 딸을 1880년 말~1890년 대에 낳았어야 함. (김두한과 나이차를 따져보면 상궁의 딸 김계월은 1904,5년 이전 출생이어야 함)
하지만
그래...그냥 백번 양보해서 그래 그 무슨 상궁이라고 쳐도
조선 시대에 궁에 일단 들어가면 상궁이든 뭐든 궁녀는 죽어서야 궁 밖을 나옴. 상궁이 저 시기에 딸을 낳았다는건 있을수 없는 일.
그래 더 백번 양보해서 1910년 국권 강탈후 나라가 망해 궁궐의 궁녀를 밖으로 내보내면서 상궁이 밖의 사람이 되서 1910년 후에 딸을 낳았다고 쳐도 그럼 상궁의 딸은 1918년에 기껏해야 몇 살 인데... 그때 김두한이 출생했다니.
김좌진은 18세에 자기집의 모든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해방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이후 일찌감치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투신을 하였으니 오랜세월 고향과는 멀리 떨어져 연락이 두절이 되었었죠. 김좌진 장군은 일본의 끈질긴 추적과 일본이 이간질한 독립운동세력간 갈등속에, 암살범의 총에 맞아 죽을 때까지 자기에게 김두한이라는 아들이 있는지 조차 몰랐습니다. 사실 김두한은 김좌진의 친아들이 아닙니다. 충남 홍성출신인 김좌진과는 달리 김두한은 개성,서울출신의 고아였습니다. 자기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김두한은 어려서부터 거지들과 어울려다니면서 거지생활로 유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김두한은 민족주의자로서 일제와 뒷골목에서 맞선 영웅이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김두한은 일본깡패두목 하야시와 라이벌로 맞서 대결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실제 그 당시 김두한은 하야시와는 라이벌관계라기 보다는 조직폭력계에서 서로 상호 공생하는 형님 아우하는 사이였습니다. 거기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하야시가 일본사람이 아니고 조선인 이었다는 것입니다.
평안북도 출생인 선우영빈은 어릴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야쿠자의 계열 조직 '시미즈 구미'에서 활동했고 조선으로 돌아와 야쿠자 오야붕이 되었습니다. 일제시대 당시 조선 경성에 있던 일본 야쿠자 오야붕이 바로 '하야시'이며 본래이름은 '선우영빈'으로 역시 처세술에는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조선인이면서도 출세를 위해 거물급 일본인의 총애를 받으며 수양아들로 들어가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키웠던 인물입니다. 일본 야쿠자의 창시자 도루야마 마쓰히로(두산만)는 일본 총리대신도 눈치를 볼정도의 거물인데, 그 두산만의 직계 제자인 고노에의 사위가 하야시(선우영빈)입니다. 조선정무총감(국무총리), 총독부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하야시의 위세와 영향력은 김두한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컸다고 합니다.
하야시는 김두한과 종종 술자리도 같이했으며 김두한에게 큰 액수의 용돈도 선뜻 주곤 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아직 생존하는 김두한의 친구 김동회가 회고하는 내용입니다.
하야시는 김두한과 (김두한이 창설한) 반도의용정신대의 부하들이 징용위기에 처했을때에는 총독부에 영향력을 행사해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하야시의 나이는 김동회,김두한의 7~8살 위였으며 하야시의 신뢰를 받은 김동회는 혼마치칸의 살림에 관여했고 김두한은 재정위기에 몰렸을 때에도 하야시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김두한의 육성 증언 테이프엔 "하야시와 의형제로 지냈고 매달 1000원씩 받았다" 는 내용이 들어 있으며 생존당시 동아방송 대담프로그램에 출연해 "하야시를 형님으로 모시며 형제관계를 맺었다"고 두 사람의 공생관계를 시인하기도 했습니다. 선우영빈은 해방후 대한건설협회의 이사직을 맡을 정도로 출세를 하였습니다.
김좌진 장군 후손이라는 후광으로 한국에서 유명세와 위세를 떨치고 정치판까지 진출해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김을동은 김좌진 장군의 진짜 후손이 확실한 분이(대부분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그러하듯) 한국 국적도 얻지 못하고 밑바닥 생활을 전전 한다고 함.
첫댓글 물꽃남자님 근거제시 하라그래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헐~~~
진짜 애국자의 후손이 타국서 전전긍긍한다는 사실은 많은 국민이 아는 사실...
그 누구도 저분들을 모시고 올사람은 없는 건가요
기득권이 친일후손인 이상 어렵습니다...
피검사 하면 나올껄 ㅡ왜 안할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피검사했으면 새누리 의원이 아니죠;;
남의 가족사를 제3자가 논한다는거 자체가 코미디지만
다 떠나서
줄 한번 잘못서면 사람하나 쓰래기 되는거 한순간이군요
인터넷이 무서운게 이거죠
김을동은 잘 나가잖아요~
깡패집안
지 아들 메니저 월급 국민 세금으로 주시던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