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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촬영을 위해 뉴욕으로 떠났던 엘르 뷰티 디렉터가 두꺼운 검정 뿔테 안경을 쓴 모습으로 돌아왔다. 갑작스러운 안구 통증으로 낯선 이국 병원에서 ‘각막이 심하게 손상되었다’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10여 년간 굳건히 렌즈를 써온 탓으로 한참 동안 서랍 안에 묵혀두었던 뿔테 안경의 테는 좀 많이 두꺼웠다. 얼굴의 상당부분을 뒤덮는 안경을 쓰고, 원피스를 입은 채 여전히 뾰족구두를 또각거리며 난감해하던 그녀는, 오히려 꽤 트렌디해 보였다. 이렇게 시력보정을 위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안경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요즘 부쩍 많아졌다. 스타일리스트 이선희 역시 얼마 전 편집매장 ‘쿤’에서 빅터 앤 롤프의 뿔테 안경을 구입했다. ‘기분 전환이 되고, 노메이크업의 다크 서클을 가려주며, 무엇보다 사람이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고 뿔테 안경의 매력을 열거하며, 그녀는 거의 한 달이 넘게 도수 없는 뿔테 안경을 쓰고 다녔다. 지난 겨울, 알렉산더 맥퀸이 캣워크에 검은 사각의 뿔테 안경을 쓴 모델을 내보냈을 때에도 그것은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를 재현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해 보였다. 물론 각 패션지마다 뿔테 안경이 유행이라고 소개되기도 했지만, 그건 단지 잘 빠진 메탈 안경태의 소재가 뿔테로 바뀐 것에 불과했다. 지난 연말 시상식에서도 많은 남자 연예인들이 검은 사각의 뿔테 안경을 썼지만, 그저 샤프한 느낌에서 많이 벗어나 있지 않았다. 정작 우리의 기억 속에 뿔테 안경으로 각인되어 있는 이들은 ‘매끈한’ 느낌과는 거리가 있다. 1960년대 흑백사진부터 최근의 컬러 사진까지 고집스럽게 뿔테 안경을 쓰고 있는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은 그나마 완고하고 견고해 보이는 이미지를 주었으나 동시에 까탈스러운 결벽증 환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유명한 영화 의상 스타일리스트 이디스 헤드, 영화 감독 우디 알렌은 더 오묘한 느낌이었다. ‘육봉달’ 같은 개그맨의 분장으로나 쓰일 법한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 모습에선 천재적인 사회 부적응자와 같은 인상을 지워낼 수 없었다. 이런 아티스트 같은 이미지 때문에 보통의 사람들이 뿔테 안경을 쓰면 한 소리 듣기 마련이었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는 더 심해서 사감선생이라며 놀림을 받았고, 소개팅 같은 자리에 뿔테 안경을 쓰고 나간다는 것은 못난 남자친구를 숨겨두고 엄마에게 등 떠밀려 맞선에 나간다는 시나리오가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난 가을, 겨울부터 패션계에서는 ‘미망인 룩’이니 ‘고딕 룩’이니 하며 블랙의 엄숙함과 절제미에 찬사를 보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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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곧 ‘살랑살랑 봄바람에 여자들의 옷도 하늘하늘’이라는 일간지의 구태의연한 제목처럼, 굳이 자신의 여성스러움을 포장해 보이지 않고서도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는 방법이 많아졌다는 이야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시폰 블라우스나 화사한 패턴의 원피스 등을 선보이며 보다 여성스러워진 구찌에서조차 첫 다섯 명의 모델들에게 검은 뿔테 안경을 씌워놓았고, 소니아 리키엘의 쇼에서도 신부의 베일을 쓴 모델이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등장했다. 그리고 얼마 전 전지현이 빅터 앤 롤프가 썼던 것과 꼭 같은 뿔테 안경을 구입했다! 만약 빅터 앤 롤프의 멋진 컬렉션을 보지 못한 이들이라면 뿔테 안경을 쓰고 나란히 차렷 자세로 등장하는 이들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을지도 모른다. 이들에게 붙는 ‘천재적’이라는 수식어를 떼어 버리면 그들의 진지한 표정과 뿔테 안경의 조합은 매우 ‘우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터 앤 롤프의 뿔테 안경이 순식간에 팔려 나간 것은, 그들의 천재성에 대한 경외 따위의 심오한 이유에서가 아니다. 단지 그 안에서 재미있는 유머 코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만화 캐릭터가 아주 비싼 브랜드의 티셔츠 위로 올라오는 건 예삿일이고, 설운도의 반짝이 재킷이 아주 시크한 스팽글 재킷으로 변모한다던가, 도로시의 빨간 구두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준다. 그 유쾌함과 재기발랄함을 눈치챈 몇몇 스타들과 패션 피플들의 얼굴 위에는 보통보다는 조금 더 두껍거나 알이 큰 뿔테 안경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안경이 ‘접근금지, 무지 예민하고 까탈스러움’이라는 무언의 표지판처럼 보이지 않으려면 남자는 살짝 드레스업하는, 여자는 살짝 드레스다운하는 센스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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