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대니 리, 유럽프로골프투어 조니워커 클래식 최연소 우승
뉴질랜드 교포인 아마추어 이진명(19 대니 리)이 유럽프로골프투어 조니워커클래식에서 우승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이진명은 22일 호주 퍼스의 바인스리조트CC(파72)에서 끝난 대회 최종라운드에서 5언더파 67타를 쳐 합계 17언더파 271타로 정상에 올랐다. 이진명은 만 18세213일로 유럽투어 최연소기록으로 우승한 것.
9살 때 부모를 따라 뉴질랜드로 이주한 이진명은 2008년 US아마추어골프선수권에서 18세1개월의 나이로 우승해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의 최연소 우승 기록(18세7개월)을 경신했었다./아시아투데이
[2007년] 노무현 대통령 열린우리당 탈당 의사 공식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22일 정세균(丁世均) 의장 등 열린우리당 새 지도부를 초청, 만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열린우리당 탈당 의사를 공식화했다. 이달 말까지 탈당 절차를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이로써 열린우리당 창당(2003년11월11일) 3년3개월 만에 노 대통령은 당을 떠나고, 당은 여당 지위를 잃게 됐다. 그러나 이 자리는 고별의 자리이면서도 ‘결별’의 자리가 아니었다. 노 대통령은 당의 성공을 축원했고, 당 지도부는 국정 지원을 강조했다. 탈당하는 대통령이 당 지도부를 불러 식사를 하는 형식부터가 이례적 이었다. 오간 말들도 ‘언젠가 다시 만나리’ 계열이었다.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출범 자체가 역사적 의의가 있고, (남은) 역사적 과업이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열린우리당이 계속해서 성공해 나가고 잘 되길 기원한다”고 했다. 이어 “(2월14일) 전당대회가 무사하게만 치러졌으면 하고 기원했는데 스페인에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는 보고를 받고 기뻤다”고 했다. 정세균 의장은 “전당대회를 통해 앞으로도 대통령이 하시는 일을 잘 뒷받침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면서 “대통령이 당적을 갖고 있든 아니든 우리는 참여정부 성공을 책임져야 하는 책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또 “항상 마음 써주시는 대통령께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격려와 지도 바란다”고 했다. 이날 만찬은 예정시간을 35분 넘겨 2시간5분 동안 포도주를 곁들여 진행됐다. /조선
[2007년] 미국 역대 최고갑부는 록펠러
← 록펠러(1884)
국부(國富)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따지면 미국 역사상 최대 갑부는 누구일까. 경제주간지 포천은 22일 미국 국내총생산(GDP)에 대한 개인 자산의 비율을 시대별로 산출한 결과, 19세기 석유재벌 존 D. 록펠러(Rockefeller)가 사망 당시인 1937년 GDP의 1.54%에 해당하는 14억 달러를 보유, 미국 역사상 가장 부자였다고 보도했다. 10위권 인사 중 유일한 생존자인 빌 게이츠(Gates)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의 재산은 820억 달러로 현재 미국 GDP의 0.66%를 차지해, 5위를 기록했다. 철도건설업과 금융·해운업 등 다양한 업종을 거느렸던 코넬리어스 밴더빌트(Vanderbilt)가 GDP의 1.15%인 1억5000만 달러로 위, 모피 무역업자 존 제이콥 애스터(Astor), 은행가 스티븐 지라드(Girard)가 3, 4위였다. /조선
[2006년] ‘홍도야 우지 마라’ 가수 김영춘씨 별세
← '홍도야 우지 마라'의 가수 김영춘(본명 김종재).
'홍도야 우지 마라'의 가수 김영춘(본명 김종재)씨가 22일 밤 10시께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김씨의 유족은 "10개월 전 교통사고를 당하셨는데 연세가 많아 그 후유증으로 병원에서 투병하셨다"고 밝혔다.
1918년 경남 김해 출생인 그는 1937년 김해농고를 졸업하고 1938년 콜롬비아 레코드 전속가수로 데뷔했다. 김영춘의 첫 데뷔곡은 그해 11월에 발표한 '항구의 처녀설'(처녀림 작사, 김송규 작곡, 김영춘 노래, 콜럼비아 40838)이며, ‘홍도야 우지 마라’ ‘바다의 풍운아’ ‘버들잎 신세’ ‘항구의 사랑’ ‘동트는 대지’ 등의 대표곡을 남겼다.
김영춘이 불렀던 가요작품들은 대히트곡 ‘홍도야 우지마라’를 비롯하여 ‘항구의 처녀설’ ‘국경특급’ ‘당신 속을 내 몰랏소’ ‘북국천리’ ‘동트는 대지’ ‘나그네 황혼’ ‘청춘마차’ ‘장장추야’ ‘희미한 달빛’ ‘향수천리’ ‘타향에 운다’ ‘버들닢 신세’ ‘인정사정’ ‘남국의 달밤’ ‘비연의 청춘항’ ‘유랑써커쓰’ ‘항구의 항등’ ‘포구의 여자’ ‘잘 있거라 인풍루’ ‘청노새 극장’ ‘타향사리 목선’ ‘사막의 환호’ ‘0바다의 풍운아’ ‘사륜마차’ ‘항구야 잘 있거라’ ‘동아의 여명’ ‘아류산 천리’ ‘목란의 자랑’ ‘의주에 님을 두고’ ‘성황당 고개’ ‘항구의 전야’ 등 30여곡이 전부이다.
워낙 ‘홍도야 우지마라’ 한 곡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기 때문에 김영춘의 다른 노래들은 상대적으로 묻혀버리고 만 듯하다. ‘홍도야 우지마라’는 원래 남일연이 불렀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란 노래의 뒷면에 실렸는데, 이곡보다 오히려 뒷면의 곡이 대히트곡이 되었고, 이로써 김영춘은 콜럼비아레코드사의 대표가수 자리에 올랐다.
일제말 김영춘은 이규남, 송달협, 이화자, 박향림 등과 함께 버라이어티쇼에 출연하지만 생활은 힘들고 곤궁하기만 했다. 그 누구도 찾는 이 없는 가수 김영춘의 노후는 한없이 쓸쓸했다.
[2006년] ‘열하일기’ 한글 필사본 새로 발견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한글 필사본(사진)이 새로 발견돼 22일 공개됐다.
권두환 서울대 교수(인문대 학장·국문학)가 이날 공개한 필사본은 <연암열하일긔>라는 제목에 254쪽 분량으로, 유일한 한글 번역본으로 알려져온 명지대 소장본보다 4배쯤 양이 많다. 정본이 없는 가운데 지금까지 최대치로 여겨지는 번역본(이가원 역)의 6분의 1 수준이다. 때문에 당대 서민들의 언어 생활을 잘 보여준다고 권 교수는 설명했다.
이 필사본은 경성제국대학과 도쿄제국대학에 재직했던 한국어 연구의 대가 오구라 신페이(소창진평·1882∼1944) 교수가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상권 150쪽, 하권 104쪽으로 돼 있고 각각의 표지에 ‘熱河記 乾(열하기 건)’, ‘熱河記 坤(열하기 곤)’이라고 적혀 있다.
권 교수는 “현대에 나온 이가원 선생의 <연암일기> 번역본이나 북한 번역본과 비교해도 훨씬 우리 어투에 맞다”며 “번역투를 완전히 버리고, 눈높이를 낮추면서도 이처럼 우아한 언어로 썼다는 것에 감탄할 뿐”이라고 말했다. /한겨레
[2005년] 영화배우 이은주(李恩宙) 자살
← 이은주
1980.11.16 ~ 2005.2.22
드라마 <불새>,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주홍글씨> 등에 출연해 인기를 얻었던 영화배우 겸 탤런트 이은주(25)씨가 22일 오후 1시10분께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자신의 아파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는 이날 새벽 6시까지 함께 사는 오빠,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방에 들어갔으며, 오후 1시가 넘도록 인기척이 없는 것을 이상히 여긴 이씨의 오빠가 옷방에 들어가 보니 이씨가 숨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씨의 유서에는 “엄마 미안해. 일이 너무 하고 싶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다. 돈이 있음 좋은데, 돈을 벌고 싶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으며, 이씨가 쓴 것으로 보이는 “엄마 미안해, 사랑해”라는 혈서도 발견됐다. 또 이씨의 노트에는 “인간사도 이제 지겹습니다. 자존심도 바닥을 쳤고 더이상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런 모습 더이상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벌써 2월이 중순으로 가고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고 있습니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 이은주씨가 남긴 유서
주변 사람들은 이씨가 지난해 10월 개봉한 <주홍글씨> 이후 연기활동을 쉬고 있었으나 지난해 말 식사를 거의 하지 않고 잠도 잘 못 자는 등 심한 우울증 증세를 앓았다고 한다. 12월 들어 스포츠센터에도 나가고 청룡상 시상식에서 노래를 부르는 등 호전되는 모습을 보였으나 새해 들어 증세가 심해지면서 최근 “연기 활동이 너무 힘들어서 더 못할 것 같다”는 말을 주변 사람에게 해왔다는 것이다.
지난 3일에는 분당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상담을 받으며 “만사가 귀찮고 기억력·집중력이 떨어지고 밥맛이 없다. 하루에 1시간밖에 못 잤다”고 호소했으며, 2주일치 우울증 완화제와 함께 치료 권유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인추모단 차승재 대표(싸이더스 대표)는 자살 동기와 관련해 “자기 직업에 대한 고민의 강도가 다른 연기자들보다 더 강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씨의 정확한 자살 경위와 동기 등을 조사 중이며, 이씨의 주검은 분당 서울대병원에 안치됐다.
이씨는 1997년 텔레비전 드라마 <스타트>로 데뷔했으며 99년 드라마 <카이스트>에서 인기를 얻은 뒤 영화 <송어>(99년)에 출연했다. 그 뒤 <오! 수정> <번지점프를 하다> <태극기 휘날리며> <주홍글씨> 등에 출연하며 인기 여배우로 위치를 굳혔다.
[1987년] 팝 아트 운동의 창시자 앤디 워홀 사망
← 팝 아트 작가 앤디 워홀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이 1987년 2월 22일 사망했다. 소수의 ‘가진 자’ 혹은 ‘고급 대중’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미술이 ‘일반대중’에게까지 참여의 문이 넓혀진 것은 전적으로 앤디 워홀의 공로였다. 그의 팝아트가 선보이기 전까지 서양미술은 고급스럽고 난해한 추상표현주의가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워홀이 이루어 낸 미술의 대중화는 그가 선택한 작품의 소재에서부터 비롯된다. 콜라병, 수프 깡통, 가루비누 통, 마릴린 먼로같은 대중스타 등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중적 이미지들은 일반인들에게 ‘낯익은 것들’이라는 인상을 줌으로써 일반인들로 하여금 자신들도 이제는 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문화주체라는 느낌이 들게 한 것이다.
미국의 체코 이민2세로 태어난 워홀은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내며 늘 스타를 동경했다. 대학시절에는 교수들로부터 ‘가장 장래성 없는 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백화점 점원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그는 상업예술가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뉴욕으로 진출, 광고그래픽 초상화 삽화 등 닥치는대로 일거리를 맡았다.
고상한 예술가들이 고집하는 전통적 예술관을 뒤집고 상업예술에 집요하게 매달린 끝에 그는 마침내 현대미술사에 한 획을 그으며 자신이 그토록 부러워했던 스타들보다 더 유명한 ‘대중스타’의 자리에 올라섰다. 워홀에 대한 미술계의 평가는 ‘미술의 지평을 넓혔다’는 찬사와 ‘지나친 상업주의’ 라는 비난이 동시에 쏟아졌다./조선
[1979년] 세인트루시아, 영국으로부터 독립
1502년 콜럼버스가 발견하였으며 ‘세인트루시아(Saint Lucia)’라고 명명되었다. 그후 1605년과 1638년 영국인(人)에 의한 이민이 시도되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이어 프랑스인에 의한 이민이 시작되었다. 그후 두 나라가 서로 영유대립·항쟁을 되풀이하여 40년 동안 14회의 쟁탈전이 벌어진 끝에 1814년 파리조약의 체결에 의해 영국령(領)으로 결정되어 영국이 직접 통치하였다. 영국 통치가 시작되고 150년 후인 1967년 3월 세인트루시아는 영국으로부터 외교와 방위의 일부를 제외한 내정자치권을 획득하고 영국령 서인도 연합주의 한 주(州)가 되었다. 그후 1978년 12월 영국의회가 그 독립을 승인하여 이듬해 2월 (22일) 영국연방의 일원으로 정식 독립하였다. /naver
[1973년] 미국-중국 공동성명(북경-워싱턴에 연락사무소 설치 합의)
미국은 과거 적대국가와 외교관계를 건립할 때 일반적으로 연락사무소를 먼저 설립한다. 이를테면 1972년 (2월 21일) 미국 대통령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 이듬해에 베이징과 워싱턴에 연락사무소가 설립됐다. 양국이 대사급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6년이 지난후인 1979년이었다. 1994년 10월에 달성한 ‘조미제네바합의’에서도 평양과 워싱턴에 각각 서로의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최종 대사급외교관계를 건립한다고 명확하게 언급했다.
[1886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광고 등장
← 1886년 2월 22일, 독일계 무역상사 세창양행이 한성주보에 게재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광고 ‘덕상 세창양행 고백’
1886년 2월 22일 한성순보의 후신인 한성주보 제4호에 ‘덕상(德商) 세창양행(世昌洋行) 고백(告白)’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광고가 등장했다.
광고주 세창양행(世昌洋行)은 독일 함부르크에 본사를 둔 무역상으로 홍콩을 중심으로 중국의 상해와 천진, 일본의 고베(神戶), 그리고 인천에 지점을 두고 동양 방면으로 무역업을 하고 있던 터였다. 광고는 한문으로 게재됐고, ‘덕상(德商) 세창양행(世昌洋行) 고백(告白)’이라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세창양행은 ‘누구에게나 친절히 대하겠고, 정직한 상거래를 하겠으며 세창양행의 상표를 확인하고 물건을 산다면 잘못이 없을 것’ 이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광고’라는 용어 대신 ‘고백’으로 표기하면서 자사의 신용과 상표를 소비자들에게 널리 알리려 했다.
한편, 세창양행의 ‘고백’이 실리고 있던 같은 해 6월 31일 한성주보 제22호에 일본 상인들의 국한물 혼용 광고 두 건이 동시에 실렸다. 이들 광고는 국한문 혼용으로 게재됐고 ‘광고’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세창양행의 ‘고백’광고와 구별된다.
세창양행의 광고는 동년 7월 5일자 제23호까지 약 6개월간에 걸쳐 게재됐고 한성주보는 개화문명에 앞장을 서서 그 사명을 다하다 누적된 적자운영을 감당하지 못하고 1888년 7월 7일 2년 6개월 만에 폐간됐다. 이후 1896년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한 뒤부터 광고가 정기적으로 게재되기 시작, 1910년 국권피탈 후부터 19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민간지가 발간될 때까지 10년간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가 된 매일신보가 유일한 우리말 신문으로 광고매체 역할을 했다./조선
[1847년] 부에나비스타 전투 발발
← 테일러, Mathew B. Brady가 찍은 은판사진
1847년 2월 22일 미국과 멕시코가 텍사스 합병을 둘러싸고 벌인 멕시코 전쟁 중 몬테레이 근처에서 부에나비스타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미국은 멕시코시티를 점령함으로써 멕시코 전쟁에서의 승리가 확실해졌다. 1847년 2월 21일 멕시코군의 진격 소식을 듣고 미군은 부에나비스타 농장 근처 라앙고스투라로 이동했다. 다음 날부터 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지휘하는 미군과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장군이 이끄는 멕시코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23일 멕시코군은 1,5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그해 4월 산타 안나 장군은 세로고르도 전투에서 윈필드 스콧 장군이 이끄는 미군에게 또다시 패배했다. 부에나비스타 전투의 승리로 명성을 얻은 테일러는 1848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브리태니커
[1788년]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출생
← 쇼펜하우어(1855)
1788년 2월 22일 태어남 / 1860년 9월 21일 죽음 "정신에 있어 의지력이란 눈뜬 절름발이를 어깨에 태우고 가는 힘센 장님과도 같다."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는 실존철학과 프로이트 심리학에 큰 영향을 끼친 독일의 철학자이다. 1819년에 주요 작품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를 발표했는데, 칸트와 고대 인도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이 책에는 인식론, 자연철학, 미학, 윤리학 등에 대한 그의 견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칸트의 물자체란 다름아닌 의지라고 보았으며, 맹목적 의지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이라고 믿었다. 또한 예술이나 종교적 금욕 및 자선을 진정한 해방의 수단으로 간주했다. 염세주의의 바탕이 된 이 사상은 이후에 별다른 변모나 발전이 없었다. 1820년 그는 베를린대학교에서 교수자격을 취득했지만, 헤겔과 공공연히 경쟁하다가 결국 교수직을 내놓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그의 사상은 철학 고유의 영역에서보다 문학, 음악 등의 분야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브리태니커
[1732년]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 출생
← George Washington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 2. 22 - 1799. 12. 14). 버지니아 주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워싱턴은 버지니아 민병대의 부대장으로 있던 시절부터 부당한 통치에 대한 거침없는 항쟁을 하였다. 당시 유럽 열강의 식민지로서 수탈의 대상이었던 신대륙 이주민의 불만은 크게 고조되어있었다. 결국 1767년 제정된 불평등한 조세법인 타운센드법을 반대함으로써 식민지 의회가 해산되자 무력충돌로 번지게 되었다. 두 차례의 대륙회의에서 본국에 대한 무력항쟁을 결의 한 후 위싱턴이 독립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절대적인 무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은 뛰어난 리더쉽을 발휘 요크타운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독립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승리 후 1787년 헌법제정회의가 열리게 되었고 새로 제정된 헌법에 따라 워싱턴은 1789년 대통령에 당선되고 같은 해 4월 30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취임 후 워싱턴은 국내 세력 간 단합을 이끌어 내었고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펴 건국 초기의 미국을 안정적인 기반위에 올려놓았다. 두 번의 임기를 끝으로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전통의 수립을 위해 본인 스스로 더 이상의 대통령직을 사양하였다.
[1403년] 바람둥이 제왕 프랑스의 샤를7세 출생
예술과 문학을 후원하며 평화를 사랑했던 프랑스의 왕 샤를 7세(Charles VII, 1403.2.22 ~ 1461.7.22). 비록 끊임없는 염문을 뿌리고 다녔던 바람둥이 왕이었다 할지라도 그가 통치했던 기간은 프랑스 군주제도의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잉글랜드-부르고뉴 동맹에 이어 1420년에 체결된 트루아 조약에 의해 한때 프랑스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샤를 7세는 부왕이 서거하자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규합해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계속되는 잉글랜드-부르고뉴 동맹과의 전쟁동안 어려운 제정상태와 더불어 불리한 전황은 그를 더욱 어렵게 몰고 갔다. 샤를 7세는 꾸준히 평화협상을 벌였지만 여의치 않았고 급기야 1428년경 오를레앙에서 포위당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던 순간 1429년 샤를은 잔 다르크라는 시골 소녀를 만나게 되었고 이후 그의 모든 것은 변하기 시작하였다. 잔 다르크를 통해 새로운 힘과 사기를 되찾은 샤를의 군대는 연전연승하였고 결국 프랑스 땅에서 영국을 몰아내며 샤를 7세의 왕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국민들은 그의 정통성을 인정하였으며 오랫동안 외세의 점령당했던 한을 군주에 대한 무한한 충성으로 풀었다. 절대적인 지지를 한 몸에 받은 샤를 7세는 제도와 군사를 정비하여 자신의 왕권을 더욱 공고히 다졌고 노르망디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대한 성공적인 원정을 마무리하며 오늘날의 프랑스 영토 대부분을 확정지었다.
그 밖에
2009년 인도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 제81회 아카데미 8개 부문 석권
2007년 주가 사상 최고치
2007년 공정위, 정유4사 2년6개월 조사 끝에 '70일 담합' 소비자 2400억 피해 밝혀
2007년 정대영 블로킹 9개 여자배구 최다기록
2007년 실사단 맞은 대구 "2011 우리가!"
2007년 첫 여성 전투기 편대장 ‘화려한 비행’ 박지연 대위
2007년 서울 시내버스 총파업 결의
2007년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 민족사관고등학교 찾아 영어 토론
2007년 '하늘이시여' 작가 임성한씨 12살 연하 PD와 지난 1월말 결혼
2007년 이탈리아 프로디 내각 총사퇴
2007년 서울시, 맑은 서울 2010 대책 발표
2007년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 집유
2006년 정진석 서울대교구장이 새 추기경에 임명
2006년 필리핀 군, 장교 14명의 쿠데타 음모 적발 발표
2006년 남궁련 전 대한조선공사 회장 별세
2003년 SK 최태원 회장 특가법 혐의로 구속
1999년 일본 NTT 도코모 ‘i모드’ 출시
1996년 12.12사건 관련 박준병 의원 등 3명 구속
1980년 한국-나이지리아, 국교수립
1980년 정부, 모스크바올림픽 불참결정
1979년 국제탁구연, 평양세계탁구대회에 남북한 단일팀구성 거부
1977년 농진청, 볍씨 이리327호 육종에 성공
1974년 충무 앞바다서 YTL함 침몰로 159명 익사
1974년 여자탁구, 서독 국제오픈대회서 우승
1972년 동독, 서베를린 시민의 동독 방문 허가
1967년 인도 수하르토가 전권 장악
1966년 프랑스, 나토서 탈퇴의사 발표
1964년 미국, 소련 에코위성중계로 첫 우주교신 성공
1958년 통일아랍공화국 발족
1958년 미국, 영국간 유도탄기지협정 조인
1958년 신민법 공포
1957년 한일 억류자 상호석방 합의
1955년 국군예비사단 창설
1949년 캐나다의 프랑스계 미생물학자 데렐 사망 - 박테리오파지의 발견자
1938년 일본, 육군특별지원령 공포
1933년 일본, 남양군도 영유성명
1925년 짧은 체온계를 발명한 영국의 의사 올벗 사망
1913년 스위스 언어학자 소쉬르 사망
1903년 영국, 티베트와 수교통상조약 성립
1875년 프랑스 화가 코로 사망
1857년 독일 물리학자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 출생
1848년 프랑스 2월혁명 발발
1836년 다산 정약용 선생 별세
1810년 미국 소설의 아버지 찰스 브라운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