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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과연 미국은 미래를 내다 본
의도적인 투자였나?
글,편집: 묵은지
오늘날 미국은 강대국(强大國)으로서 드넓은 영토(領土)를 바탕으로 그에 걸맞는 탄탄한 경제(經濟)와 군사력(軍事力)을 갖추고 어지간한 나라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위용(威容)을 떨치며 세계를 호령(號令)하고 있습니다. 국력(國力)이 막강(莫强)하다보니 그 국민들의 자부심(自負心) 또한 대단해서 세계 어디를 가도 일등 국가 국민으로 대접을 받는, 그래서 묵은지의 생각에도 엄청 부러운 나라라고 여겨집니다. 더불어 역사(歷史)도 짧은 미국이란 나라가 어떻게하여 커다란 땅덩어리를 소유하게 되었으며 또한 그러한 대국(大國)이 되기까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궁금함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미국이란 나라가 상상도 못할 엄청난 땅투기를 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독립(獨立)전쟁 이후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치열한 전쟁도 치루기는 하였지만 상당 부분의 넓은 영토는 거의 흥정과 매매(賣買)로 얻었다는 사실로 알고보니 미국은 땅투기 국가였다?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습니다. 땅투기는 한때 우리나라의 강남(江南)지역에서 복부인(福婦人)들의 전유물(專有物)이었던 시절도 있었긴 합니다만 그 훨씬 이전인 과거의 미국에서 국가적(國家的)으로 투기가 이뤄지고 있었다니 묵은지가 보기에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물론 미국이 오늘날 이처럼 넓은 대륙위에서 강대국의 위치(位置)에 우뚝 서 있을수 있었던 것이 단순히 땅투기 만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국제무대(國際舞臺)에서의 선진강국(先進强國)으로서 나름대로 역할(役割)을 하며 힘을 기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외적(對外的)으로 국가의 힘이 될 바탕이 영토라 한다면 미국이 소유(所有)한 넓은 영토는 강력한 힘의 국가로서 상당히 든든한 배경(背景)으로 작용(作用)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1776년 7월 4일, 영국의 식민지(植民地) 아래 있었던 동부(東部)의 13개 주(州)가 과도한 조세정책(租稅政策) 등에 반발(反撥)을 하여 식민지에서 독립을 하고자 서로 모여 필라델피아 '인디펜던스' 홀에서 독립을 선언(宣言)하면서 역사가 새롭게 전개(展開)되었습니다. 미국은 영국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토 분쟁(分爭)중이던 프랑스의 비밀지원(秘密支援)을 받아 민병대(民兵隊)를 조직, 7년 여에 걸쳐 영국군(英國軍)과의 독립전쟁을 치뤄 승리를 이끌어냈습니다.
미국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세계의 여론(與論)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상대로한 독립전쟁을 승리(勝利)로 이끌어 냈으며 결국 1783년 '파리조약(條約)'으로 미국의 독립을 인정(認定)받았고 1787년 '필라델피아 대표회의(代表會議)'에서 미국 헌법(憲法)을 제정(制定)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로부터 2년 뒤 독립전쟁 당시에 독립군(獨立軍) 총사령관(總司令官)으로 활약(活躍)을 하였던 이른바 미국 건국(建國)의 아버지라 일컫는 '조지 워싱턴'이 만장일치(滿場一致)로 초대(初代) 대통령(大統領)에 취임(就任)하였습니다. 하지만 초반부터 13개 주로 이뤄진 주정부(州政府) 위주(爲主)의 지역정치(地域政治)문제는 전체를 다스려야할 연방정부(聯邦政府)의 강력(强力)하고 힘있는 통합적(統合的)인 정치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뉴욕', '뉴저지', '노스 캐롤라이나', '뉴 햄프셔', '펜실베니아', '델라웨어', '코넷티컷', '로드 아일랜드', '조지아', '메릴렌드', '사우스 캐롤라이나', '매사추세츠', '버지니아' 등 이렇게 모여진 13개 주는 지방(地方)의 주정부(州政府)가 먼저 수립(樹立)되고 나중에 연방정부(聯邦政府)가 들어서는 누가봐도 외내형적(外內形的)으로 틀이 제대로 짜여지지 못한 모습으로 출발(出發)을 하였습니다. 연방정부의 권한(權限) 역시 극히 제한적(制限的)이었으며 실질적(實質的)인 권한은 거의 주정부에서 행사(行事)를 하고 있어 이것이 나중에 지역(地域) 이기주의(利己主義)에 휘말려 이른바 남북전쟁(南北戰爭)인 비극(悲劇)의 내전(內戰)으로 치닫는 결과를 초래(招來)하기도 하였습니다. 어쨌던 그와중에도 미국은 1803년 '루이지애나' 를 프랑스로부터 1500만 달러에 사들였는데 이때는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유럽전쟁에 막대한 자금(資金)이 필요했던 시기(時期)로 절묘한 타이밍을 잡았던 것입니다. 이로써 미국은 종전의 두배가 넘는 영토를 확보하며 대국(大國)을 향한 팽창주의(膨脹主義)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후에도 미국은 영토확장(領土擴張)에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내전(內戰)인 1861년의 남북전쟁이 일어나기전까지 기회만 나면 땅을 넓히는데 열을 올렸습니다. 1819년엔 스페인으로부터 아름다운 휴양지(休養地)가 있는 '플로리다'를 사들였고 1845년과 1846년에는 '텍사스'와 '오리건' 을 병합(倂合)하였으며 1848년에는 '캘리포니아'를 2년 간의 전쟁을 통해 멕시코에게 할양(割讓)을 받았고 1853년에는 또다시 남부(南部) 캘리포니아 땅의 나머지 일부(一部)를 멕시코로부터 매입(買入)을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미국은 자신들의 내전인 남북전쟁이 일어나기도전에 이미 북아메리카 대륙(大陸)에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까지 밀쳐내고 동서(東西)로는 태평양(太平洋)과 대서양(大西洋)에 이르고 남북(南北)으로는 캐나다와 멕시코를 국경(國境)으로 하는 광활(廣闊)한 영토를 확보(確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광대(廣大)한 미국은 지역 이기주의(利己主義)라는 새로운 문제를 낳게 되었는데 상공업(商工業)이 발달한 북부와 목화(木花) 등을 재배(栽培)하는 농업(農業)을 위주로하는 남부의 입장차로 결국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노예 해방' 을 표방(標榜)한 북부와 턱없이 모자라는 인력(人力)을 노예로 충당(充當)하기 위한 남부와의 충돌(衝突)은 참혹(慘酷)한 내전을 피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1861년에 4월 12일 남군(南軍)이 사우스 캐롤라이나 찰스턴항에 있는 북군의 '섬터(Sumter)'요새(要塞)를 포격(砲擊)으로 시작된 전쟁은 1865년 4월 9일에 남부의 패배(敗北)로 종전(終戰)이 되기까지 무려 60여 만명의 병사(兵士)들을 죽게하고 수많은 민간인(民間人) 사상자(死傷者)와 엄청난 경제적(經濟的) 손실(損失)을 입으며 막(幕)을 내렸습니다. 미국은 드넓은 영토로 인한 다양한 환경(環境)속에 계층(階層)의 이익(利益)을 추구(追求)하는 자신들이 하나로 통합(統合)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들만의 고충(苦衷)을 비극(悲劇)의 내전으로 몸소 체험(體驗)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남북전쟁이 종전되고 전쟁의 참상(慘狀)으로 사회 전체가 침체(沈滯)되어 있던 미국은 2년 뒤인 1867년, 또다시 미국이란 나라가 대단하다는 것을 실감(實感)하게 만든 큰일이 일어나는데 미국 역사에서 대단한 횡재수(橫財數)가 발생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라는 한반도의 7배나 되는 엄청난 땅덩어리를 사들인 것으로 그것도 미국이 러시아에 지불(支拂)한 땅값은 위 사진의 수표(手標)와 같은 불과 720만 달러 였습니다. 어떻게해서 이런 기막힌 일이 벌어졌는지 그때나 지금이나 묵은지는 참 알다가도 모를일이 국제정세(國際政勢)라고 생각합니다. 알래스카는 극한(極寒)의 땅으로 당시에는 그 가치(價値)가 별로 알려지지않은 미지(未知)의 땅덩어리였습니다. 처음 1741년 러시아의 '베링' 대령(大領)이 이끄는 탐사대(探査隊)에 의해 발견(發見)된 땅으로 처음에는 해달(海獺)을 사냥하여 양질(良質)의 모피(毛皮)를 구하여 돈을 벌려는 목적(目的)이었으며 그당시 관례상(慣例上) 소유권(所有權)은 러시아에 있었습니다.
베링대령은 탐사후 귀국(歸國) 도중에 대원(隊員)들과 함께 배가 표류(漂流)하는 바람에 숨졌는데 당시 베링대령이 항해(航海)한 아시아와 알래스카 사이의 해협(海峽)을 베링대령을 기리기 위한 그의 이름을 따 '베링 해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알래스카는 그후 러시아의 무분별(無分別)한 해달의 남획(濫獲)으로 멸종(滅種)에 이르게되자 알래스카를 쓸모없는 땅으로 여기며 관심조차 두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영국과 사이가 좋지않은 러시아는 캐나다에 주둔(駐屯)하고 있는 영국군이 언제 알래스카로 쳐들어 올지 몰라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있었으며 러시아는 때마침 크림전쟁의 뒤끝으로 극심(極甚)한 재정난(財政難)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낌새를 안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國務長官)인 '윌리엄 슈워드(William H. Seward)'는 미국처럼 영국을 공동(共同)의 적(敵)으로 삼고있는 러시아와의 친분(親分)을 내세워 알래스카 매입을 위해 적극적(積極的)으로 뛰어들어 그의 끈질긴 노력으로 세기(世紀)의 거래(去來)로 일컫는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매입을 성사(成事)시킨 것입니다. 이리하여 미국은 1867년 10월 18일 드디어 알래스카 '시트카(Sitka)'의 총독관저(總督官邸)앞에서 미국과 러시아 양측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할양식을 거행(擧行)하였습니다.
이는 미국에게는 향후(向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준 횡재였으며 러시아로서는 두고두고 후회하게 만든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내에서 알래스카를 매입하는 일을 모두 찬성(贊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국 의회(議會)나 국민들의 여론마저도 대부분 본토(本土)에서 멀리 떨어진 못쓰는 땅을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살 필요가 있느냐며 반대(反對)의 여론으로 들끓었으며 심지어는 이런 상황(狀況)을 '슈워드의 바보짓거리' 라며 조롱(嘲弄)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류의 비난(非難)과 구박(驅迫)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니 30년뒤인 1897년에 알래스카는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 내었습니다. '유콘(Yokon)'강가에서 무진장(無盡藏)한 금광(金鑛)이 발견되면서 알래스카는 일약(一躍) 황금(黃金)의 땅으로 떠올랐고 수많은 광부(鑛夫)와 채굴꾼들은 일확천금(一攫千金)의 꿈을 안고 동토(凍土)의 땅인 알래스카로 몰려들기 시작하였으며 알래스카는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발전의 발판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알래스카를 개발하면서 1967년에는 '프루도만(Prudhoe Bay)'에서 많은양의 석유(石油)가 묻혀있는 유전(油田)이 발견되었고 1977년에는 알래스카 유전지역(油田地域)인 '노스슬로프'에서 태평양 연안(沿岸)의 항구(港口)도시인 '발데즈(Valdez)'까지 장장 1,280km의 송유관(送油管)이 개설(開設)되어 하루 200만 배럴의 원유(原油)가 수송(輸送)되고 있습니다. 태평양 연안의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인 시애틀에는 슈워드의 업적(業績)을 기리기 위한 그의 동상(銅像)이 세워져 있는데 1909년 시애틀 전(全) 시민(市民)들이 자발적(自發的)인 모금(募金)을 통해 '발룬티어 파크(Volunteer Park)'에 동상을 세웠습니다. 이는 슈워드의 알래스카 매입 후 골드러시가 터지며 알래스카로 가는 길목 역할을 했던 시애틀에도 커다란 발전을 가져와 오늘날 유통(流通)의 도시(都市)가 되는 기반(基盤)을 다진 것을 감사(感謝)하는 뜻으로 세운 것입니다. 또한 세월이 흐를수록 알래스카는 미국에게 계속하여 새로운 지하자원과 환경적 자원을 제공(提供)하는 엄청난 국익을 가져다주고 있으며 세계 2차 대전 이후의 예측(豫測)하지 못했던 동서 냉전(冷戰)의 시대(時代)가 도래(到來)하면서 알래스카의 중요성(重要性)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과거의 우호적(友好的)이었던 러시아와의 관계는 이념적(理念的)인 대립(對立)으로 적대관계(敵對關係)가 되었고 알래스카는 미국으로서는 전략적(戰略的)으로 매우 중요한 군사지역(軍事地域)이 되었습니다.
미국은 러시아와 세계의 패권(覇權)을 놓고 대립하는 경쟁국(競爭國)으로 알래스카는 전략적 요충지(要衝地)가 되었으며 러시아를 향해 공격(攻擊)및 방어용(防禦用) 미사일을 집중(集中) 배치(配置)하고 있는 지금도 본토의 방위체제(防衛體制) 전초기지(前哨基地)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렇게 미국에 엄청난 국익(國益)을 주고있는 알래스카는 1959년 1월에 미국의 49번째 주로 미연방(美聯邦)에 정식으로 편입(編入)이 되었습니다.
알래스카의 지명(地名)이나 상호(商號)에는 유난히 슈워드(Seward)라는 단어(單語)가 많습니다. '슈워드 하이웨이'나 '슈워드 항구' 등 작은 상점(商店)의 상호까지에도 흔하게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그만큼 역사가 흘렀어도 슈워드가 알래스카에 끼친 영향력(影響力)이 어느정도 였는가를 짐작케 하는 산 증거(證據)들입니다. 지금도 알래스카는 매년 3월 마지막 월요일을 '슈워드의 날'로 정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지난 1867년 3월 30일에 있었던 슈워드와 러시아간의 매입 계약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쨌던 미국은 지금까지 수많은 땅투기에 힘입어 엄청난 국익을 누려온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묵은지가 그들에게 솔직히 부러운 것은 정치적(政治的)인 소신(所信)입니다. 미래(未來)를 내다보는 안목(眼目)도 있으려니와 정적(政敵)들의 무수한 반대에도 굳센 자기의지(自己意志)와 소신을 굽히지 않고 결단을 내리는 슈워드의 결단력은 요즘 우리 정치인들의 말바꾸기나 얕은 속내가 비치는 행태(行態)에 짜증스럽기까지 한 것을 생각하면 진짜 부럽기만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언제쯤 슈워드와 같은 안목있고 지혜롭게 소신을 펼치는 지도력(指導力)을 갖춘 능력의 위정자(爲政者)가 나타나 진정(眞正)으로 나라의 앞날을 위해 노력해주는 든든한 모습을 볼 수 있을런지...꿈에라도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