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기념물 제183호 함안 군북 지석묘군이 있는 동촌리 일대는 동쪽은 북데미산, 남쪽은 상데미산, 그리고 서쪽은 백이산으로 둘러 싸여진 분지(盆地)이다. 동촌리 들판은 가운데가 약간 솟은 구릉상 평야로 옛날에는 하천이 서쪽 산밑으로 흘러 남강에 이르렀다. 남강이 홍수에 의해 범람하면 동촌리에서 1km정도 북쪽에 위치한 소포리(小浦里)까지 물에 잠겼다고 한다. 동촌리 들판은 남강 제방이 없던 옛날에 군북 지역에서는 홍수피해가 없는 평야지대임을 짐작하게 한다.
우리나라 지석묘는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 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上石)을 올려놓은 탁자식(北方式)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놓은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南方式)으로 구분된다. 동촌리와 덕대리에 걸쳐있는 함안 군북 지석묘군은 모두 남방식이다.
동촌리 지역에서는 모두 27기로 함안 지역에서는 제일 많이 분포되어 있다. 1987년부터 실시한 경지정리 작업으로 인해 상당수의 고인돌이 원위치를 이탈해서 매몰되거나 파괴되었다. 동촌리 정미소 부근에 있던 지석묘는 경남발전연구원에서 발굴하여 유물을 수습하였고, 지석묘는 함안 박물관에 복원하기로 했다고 한다.
함안 군북 지석묘군은 원래의 위치에 그대로 있는 것이 16기, 이전된 것이 10기, 땅에 묻힌 것이 1기로 파악되고 있다. 전체적인 안내판은 신창마을 제26호 지석묘 앞에 있다. 함안군청의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재 관리 행정은 사촌리 선돌이나 명관리 지석묘 앞에는 금속으로 된 관리번호에 훼손을 금지하는 문구까지 들어있지만, 정작 지정문화재인 함안 군북 지석묘군은 개별 안내판이 없어 답사하는데 아쉬움이 따른다.
동촌 마을 입구에서 신창마을로 오면서 처음 만나는 3기는 도로와 일렬로 논 가운데 있다. 보호울타리는 없고 지석묘 위에는 녹슨 철사뭉치가 올려져 있으며 충격에 의해 깨진 흔적도 보였다.
참담한 마음을 안고 발길을 옮기니 이번에는 도로와 논 사이에 있는 지석묘 1기는 쓰레기를 태운 불에 익어 색깔이 퇴색해 변해있고 옆에 있는 다른 1기는 거의 매몰되어가고 있었다. 조금 발걸음을 옮기면 신창동 새동네마을 남쪽에 위치한 지석묘가 있는 곳에 속칭 풍호대(風乎臺)라 하는 느티나무가 있다. 풍호대 부근에 3기의 지석묘가 있는데 수년 전에 주발형과 고배형의 토기가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고 한다. 현재 2기는 벽돌 울타리 구석에 엉킨 것처럼 서로 기대 있고 1기는 정자나무 아래 콘크리트 평상에 약간 매몰되어 발판 역할을 하고 있다.
10m쯤 걸음을 옮기면 넓은 들판에 밉지 않게 보존되고 있는 3기가 남북 방향으로 논 가운데 있고 그중 1기는 길다란 논둑사이에 있다. 함안 지역에서 발견된 지석묘 중에서 성혈(性穴)의 수가 가장 많은 것으로 파악된 지석묘는 신창마을 노인정 부근 민가 마당에 있는 제26호이다. 이 지석묘의 덮개 돌(上石)에 새겨져 있는 성혈은 모두 398개로 크기와 모양이 다양하고 성혈과 성혈을 서로 연결하여 전체적으로 보면 천문도(天文圖)나 암각화(岩刻畵)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성혈을 만든 이유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풍년 농사와 많은 자식을 낳을 수 있기를 기원하는 종교적 의미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신창 마을 회관을 나서 낮은 돌 담장 마을길로 들어서면 쇠로 만들어진 높지 않은 솟대 1개가 서있다. 마을 노인의 말에 의하면 마을의 지형이 배(船)형상이라 액운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솟대는 원래 나무로 제작되어 왔으며,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지연(地緣)을 바탕으로 마을의 안녕·태평과 생업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서 공동으로 행하는 신앙의 일종이다. 솟대란 장대 위에 새가 앉아 있는 신간(神竿)을 말하는데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양하다. 솟대는 삼한시대의 소도(蘇塗:삼한시대에 하늘에 제사지낸 지역의 명칭)에서 연유했다고도 하지만 현재는 장승과 함께 마을 입구에 서 있어 마을의 액을 막아주는 기능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