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프랑스를 떠올릴 때 함께 다가오는 가장 매력적인 낱말 중 하나는 ‘레지스탕스’였다. ‘레지스탕스’는 폭압적인 나찌의 파시즘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자유의 정신을 상징한다. ‘아우쉬비츠’가 집단 학살의 악마적인 비인간성을 상징하는 것과 사뭇 대비된다. 말하자면, ‘레지스탕스’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주체적인 인간이고자 하는 결단과 투쟁을 상징한다. 사르트트(Jean Paul Sartre, 1905-1980)는 이 레지스탕스의 중심에 선 철학자다. ‘레지스탕스’는 사르트르에게 자유가 어떻게 목숨 이상으로 인간에게 근본적인가를 체험케 했다.
사르트르는 1905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2세 때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아버지 없는 어린 시절을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에게서 ‘아버지’는 이미 결정 나버린 과거가 열려 있는 미래를 얽어매는 것을 상징했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에 대한 이 같은 사르트르의 해석은 그의 주된 철학책 『존재와 무』의 내용을 압축해서 은유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르트르는 1924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거기서 전후 프랑스 지성계를 이끈 레이몽 아롱, 조르쥬 캉기엠, 모리스 메를로-퐁티를 만났다.
특히 메를로-퐁티는 사르트르와 함께 전후 프랑스 지성계를 대변하는 저널 《현대》지를 공동으로 편집하게 된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모두 현상학자로서 또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때로는 같은 길을, 때로는 서로 엇나간 길을 걷기도 하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지성계를 주도하게 된다. 1929년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한 사르트르는 같은 시험에서 2등을 한 시몬느 드 보봐르를 만나 세계적으로 세간에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한 계약 결혼을 했다. 이 유별나고 자유로운 동거 관계는 1980년 당시 미학 문제에 골몰하던 사르트르가 생을 마감함으로써 함께 마감하게 된다.
2. 사르트르의 저작들
사르트르는 1936년 최초의 철학 논문 「자아의 초월성」과 함께 철학책 『상상력』을 연이어 발표하고, 1937년 소설 『벽』에 이어 1938년 유명한 첫 장편 소설 『구토』를 출간했다. 『구토』에는 현상학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투로 주인공 로캉탱의 일상적인 의식이 묘사되어 있다. 『구토』에는 인간의 의식을 완전히 벗어난 사물의 모습, 인간의 의식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물의 모습, 다른 인간의 의식에 완전히 사로잡혀 사물화된 인간의 모습, 사물의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인간의 모습 등이 그려져 있다. 1939년 『정서론에 관한 소고』를 출간하면서 전쟁에 가담한 사르트르는 1940년 6월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투옥된 뒤 1941년 4월 민간인임이 밝혀져 석방된다. 석방된 뒤 저항 단체 <사회주의와 자유>를 조직해 활동했다. 그런 가운데 1943년 드디어 그의 주저 『존재와 무』를 출간했다. 이 책은 사르트르를 단번에 위대한 철학자의 대열에 들게 했다. 같은 해 희곡 『파리떼』도 발표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뒤 사르트르는 《현대》지의 창간 주필을 맡으면서 또 하나의 장편소설 『자유에의 길』을 발표하고 이듬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유물론과 혁명』, 『무덤 없는 죽은 자』를 발표했다. 특히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사르트르는 서구의 전통을 규정해 온 기독교적 인간관과 본질주의적 인간관을 비판하고, 인간이란 각본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배우처럼 반드시 어떠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고 행동해 나감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위한 각본을 만들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열려 있는 존재 즉 실존임을 역설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은 여기에서 참뜻을 얻는다.
사르트르는 1947년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현실 참여로서의 문학 행위를 강조했다. 이듬해 <민주주의와 혁명>이란 단체를 결성하고 그 뒤 공산주의 진영과 끊임없는 협조와 대립의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정치에 관한 대담』(1950년), 『공산주의자와 평화』(1952-53년), 『방법론 문제』(1957년) 등을 발표한 사르트르는 1960년 또 하나의 큰 철학책 『변증법적 이성 비판』 제 1권 “실천적 총체의 이론”을 출간한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실존철학과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통일하려 한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 이론을 기본으로 삼고 특히 ‘총체성’ 개념을 바탕으로 삼아 역사 상황에서 개인의 주체적 혁명 실천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추적한다. 그 뒤 사르트르는 1980년 숨을 거둘 때까지 많은 저술과 정치 사회 활동을 수행한다.
사르트르는 철학, 문학, 예술, 정치, 사회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종합적 지성의 힘을 왕성하게 발휘한 불세출의 거장이었다. 특히 1964년 노벨 문학상의 수상을 거부한 것은 그의 매력을 드높였다. 20세기 프랑스 지성을 들먹일 때 사르트르가 그 중심에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구조주의가 프랑스의 지성계를 장악하기 시작할 무렵 이제 사르트르의 지성적 위력은 쇠퇴의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3. 사르트르의 사상
사르트르의 사상은 두 권의 철학책, 1943년에 출간한『존재와 무』와 1960년에 출간한『변증법적 이성비판』이 유명하다. 이 두 권의 책에 담긴 그의 사상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존재와 무』의 기본 사상들
사르트르의 철학은 실존철학으로 통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강력한 개인적 주체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역사가 잘못 진행되어 사회 전체가 갑자기 온통 아무런 희망도 없는 어두움으로 가득 찰 때 누구나 절망에 빠지기 쉽다. 믿을 곳이라고는 전혀 없고 완전히 모든 가능성이 차단되어 버린 것을 느낄 때, 그러나 나의 내면에서부터 그러한 절망의 상황을 결코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낄 때,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사르트르의 실존 철학은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철학이다. 그러니까 사르트르의 철학은 일종의 저항의 철학이다.
그와 같이 사회가 온통 자신의 가능성을 박탈하기라도 하면서 무의미하게 치달을 때, 자기 자신 외에는 믿을 곳이 없는 긴급한 사태가 발생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은 그렇다면 과연 내가 믿고자 하는 나 자신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주저 『존재와 무』는 바로 이러한 나 자신을 가장 깊은 곳에서 찾아내고자 하는 책이다.
가. “나는 부정성을 부정하는 힘이다.”
사르트르는 헤겔의 변증법에 영향을 받는다. 헤겔의 변증법 중 유명한 장치는 부정의 부정이다. 즉 A는 A 아닌 것이 아닌 것임으로써 성립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나에게 고통을 주는 절망적인 사회의 상태를 부정성이라 부르고, 이를 부정하는 자가 바로 나라고 역설한다.
단지 판단의 대상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고통을 겪거나 투쟁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는 현실, 또한 그 내적인 구조상 그것이 존재하는 하는 데 필수조건인 것처럼 부정을 담고 있는 현실, 그러한 현실은 무수히 많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부정성이라 부르기로 한다.(『존재와 무』)
사랑하는 애인이 변심할 때, 거래처에서 거짓말을 하여 혐오감을 느낄 때, 뭔가 계획을 잘못 세워 헛고생을 하고 후회될 때, 사업하다 부도가 나 절망을 빠졌을 때, 힘 있는 자가 나를 강압적으로 몰아세워 불안할 때, 심지어 어쩌다가 지갑에 돈이 달랑 떨어져 위급함을 느낄 때 등, 사르트르가 부정성이라 부르는 현실 상황은 너무나 많다. 그럴 때 우리는 쉽게 ‘아! 어쩌다 내가 이 지경이 되었나.’ 하고서 자신에 대해 물음을 던지게 된다. 그러다가 그 물음은 나 자신으로부터 주어진 현실 상황에 대한 것으로 바뀐다. 그러다가 때로는 결국 삶의 현실이란 본래 이렇게 부정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단정하게 된다.
철학자는 항상 근거를 묻는다. 철학자인 사르트르는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이 부정성으로 나타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다. 그 답으로 사르트르는 우리의 내면이 본래 부정하는 힘의 원천인 무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대단히 어려운 말이다. 우리가 무라니 도대체 말이 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의 핵심을 이해하는 셈이다.
부정적인 현실은 누구에게 부정적인가? 바로 나에게 부정적이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주어진 현실을 부정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현실이 부정적인 상태로 존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정하는 힘이 나에게 있는 것 아닌가. 히틀러의 파시즘이 정치적인 억압을 가하면서 다가올 때 그러한 억압을 부정적인 현실 즉 거부되어야 할 현실로 규정하는 나의 힘이 없이는 내가 어떻게 그것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할 수 있겠는가. 사르트르는 히틀러의 파시즘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을 각자의 정신적인 내면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나. “나는 무다.”
사르트르는 부정성의 근거를 부정하는 나의 힘에서 찾고, 부정하는 나의 힘을 내가 뭔가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작용 즉 무화 작용에서 찾는다. 그리고 내가 무화 작용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본래 무이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말한다.
분명히 우리는 모든 부정의 근거를 내재(內在)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무화 작용(無化作用)에서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절대적 내재에서, 순간적 의식의 순수한 주관성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무로 만드는 근원적인 작용을 발견해야 한다.(『존재와 무』)
우리는 주체성이니 자아니 하는 말을 많이 한다.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자아를 발견하여 실현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우리의 주체성과 자아가 위대한 것은 그것이 일체의 것들을 부정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체의 것들이 나를 규정하기 위해 달려들 때, 예컨대 부모가 나를 자식이라 해서 당신들의 희망을 나에게 심어 넣으려 할 때, 국가가 나를 국민이라고 해서 국가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윽박지를 때, 그러니까 도대체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자꾸만 어쩔 수 없이 외부로부터 나를 일정하게 규정해서 ‘나의 존재’를 결정해버리려 할 때, 그 모든 규정들이 참된 나 자신이 아니라고 거부하고 부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실존 사상이다.
바로 그렇게 나를 규정하려 하는 일체의 것들을 부정함으로써 나는 존재하는 일체의 것들로부터 초월할 수 있고 또 그럼으로써 나는 절대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 이른 주체가 바로 실존이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제인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은 이같이 우리 각자의 주체가 본래 그 어떤 본질적인 규정마저도 거부하는 데서 진정으로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삶 속에서는 바깥에서부터 주어지는 힘들은 끊임없이 나에게 다가와 나를 규정하려 한다. 그래서 실존을 확보하고자 하는 나는 끊임없이 부정의 힘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부정의 힘을 발휘하는 중심이 바로 무이고, 따라서 실존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나의 근거는 바로 무인 것이다.
다. “타인은 지옥이다.”
사르트르는 타인들이 그들의 목적을 위해 나를 일정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자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타인들이란 나에게서 부정의 힘을 앗아가려 하고 나에게서 초월의 힘을 앗아감으로써 나를 물건처럼 만드는 본질적인 경향을 지닌 것으로 본다. 즉 타인들은 끝내 나의 실존을 방해하고 나의 자유를 앗아가는 쪽으로 힘을 발휘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타인을 나의 지옥이라 표현한다. 오늘날 요구되는 공동체적인 삶을 구성하는 데 대단히 불량스런 생각이긴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히틀러의 파시즘이 유럽 전역을 뒤덮고서 각자의 참된 삶을 파괴할 때, 타인들의 시선이란 항상 나를 감시하고 나를 고발하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러한 악마적인 시선들을 원리적으로 파괴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확대한 것이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하는 사르트르의 사상이라 할 수 있다.
2) 『변증법적 이성비판』의 사상
내용이 아주 방대한 사르트르의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혁명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사상을 담고 있다. 사르트르는 많은 글들을 통해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비판하지만, 그 근본적인 의도에는 적극적으로 찬동한다. 특히 혁명의 필요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사상에 적극적으로 찬동한다.
이 책은 사르트르의 실존 사상과 마르크스의 계급 혁명론을 조화롭게 가져가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그러니까 서로 지옥의 관계인 나와 타인의 관계를 극복함으로써 참다운 계급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진정으로 혁명에 나설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가. “혁명은 인간의 초월성에 입각해 있다.”
혁명은 미래 지향적인 것이고 혁명을 위한 행동 역시 미래 지향적인 것이다. 결국 역사의 혁명적인 동력은 자연 법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초월성에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르트르는 변증법이란 그 어떤 방향에서도 결코 결정론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사르트르는 혁명 및 혁명적 실천을 어떻게 푸는가가 문제가 된다. 『존재와 무』에서 그는 개인이 역사적 환경과 맺는 관계는 유물론과 통상 대립된다고 말한다. 고된 노동을 하는 노동자의 경우 고통이 없을 수 없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역을 넘어선 대안적인 생활 방식을 향해 자신을 과감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개척해 나가야 한다. 말하자면 그러한 고통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제 그러한 상황을 과감하게 바꾸고자 노력할 때 비로소 노동자의 고통은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노동자의 인간 현실은 지금 그가 어떠하다는 데 있지 않고, 그러한 자신을 거절하는 데 있다.”라고 말한다. 진정한 노동자의 모습은 혁명적으로 행동하려고 결단하고 또 혁명적으로 행동할 때 성립한다는 것이다. 『존재와 무』에서 역설한 부정과 초월의 사상이 그대로 노동자에게 적용되고 있다. 즉 실존으로서의 노동자를 주장하는 것이다.
나. “참다운 집단은 개인적인 주체성에 근거한 결속체다.”
주체성에는 개인의 주체성과 집단적인 주체성이 있을 수 있다. 마르크스의 계급의식은 곧 집단적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주체성을 강조한다. 공산주의자로서의 사르트르가 어떻게 이 둘을 하나로 통일시키는가가 중요하다.
사르트르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이른바 ‘변증법적 유명론’이라 부를 수 있는 쪽으로 해석해서 자기 나름의 입장을 취한다. 이는 전체 사회란 ‘총체화하는 개인들’, 혹은 특수한 의미-기획에 참여하고 있는 개인들의 다양함을 통해서만 존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혁명 집단의 주체성도 개인에게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바로 그런 점에서 사르트르의 혁명론은 구체성을 띠게 된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사회적인 관계에 대해 크게 계열체적 관계와 집단적 관계를 구분한다. 이는 『변증법적 이성 비판』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된다. 여기에서 이제 나와 타자 간의 충돌은 크게 존재론적인 함의를 갖지 못한다. 아예 사회적 존재를 끌어 들인다. 물론 아무런 근거 없이 사회적 존재를 그냥 끌어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한 사람이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일하는 것을 볼 때, 더욱이 그들을 노려 볼 때, 그 사람의 눈에는 그 두 사람은 하나의 일관된 정합성을 이룬 최초의 사회적 단위가 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부터 인간 모임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다.
그러면서 사르트르는 두 가지 인간 모임을 들먹인다. 하나는 계열체(séries)다. 이는 사물들의 모임처럼 서로 연대할 이유가 없이 자아들이 부정적인 끈으로 엮어져 있는 원자적인 모임을 말한다. 또 하나는 집단(groupe)이다. 이는 공동 이해와 공동 전망을 갖고서 각자의 주체적인 의지를 한데 결집시켜 참다운 결속체다. 전자를 외면성에 근거한 물리적 분자(molecule)라 일컫고, 후자를 내면성에 근거한 사회적 분자라 일컫기도 한다. 『변증법적 이성비판』은 이 두 가지 인간 모임의 변환과 조합을 분석하는 데 거의 모든 지면을 다 쓰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계열체가 집단으로 발전하는가를 아는 것이다. 이에 대한 사르트르의 해답은 변화 불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불가능하다는 데에 들어 있는 부정성을 부정하는 것 즉 부정의 부정이다. 계열적 모임 상태에서는 나의 처지를 변화 불가능하다고 여기는데, 바로 이러한 나의 처지가 변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질적 비약을 이룰 때 계열체는 집단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 제 3자의 시선 때문에 예컨대 고용자의 시선 때문에 나와 함께 일하는 타인즉 다른 노동자의 목적이 곧 나의 목적이 되고 이것이 확산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용해되어 거대한 개인처럼 움직이게 될 때, 집단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용해된 집단’(groupe en fusion)이 된다는 것이다.
혁명이 성공하고 난 뒤, 감격과 결의, 정의감과 동지애를 버리지 않고 공동 존재를 영속적으로 보존할 것을 맹세하고 이를 공공연하게 공표함으로써 자유롭게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단계에 이르면, 이 용해된 집단은 무정형적인 유동성과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일컬어 ‘약정적 집단’(groupe assermenté)이 된다. 그러나 잘못하여 집단이 자발성을 포기하고, 그에 따라 창조적 실천을 관행으로 전락시키고, 집단 자체가 중요하게 떠오르면서 통수자 한 사람을 중심으로 위계적인 질서를 갖춘 ‘조직된 집단’(groupe organisé)으로 된다. 이 마지막 단계의 집단에서는 노동이 소외로 이어지기 일쑤라는 것을 사르트르는 강조한다. 여기에서 사르트르는 은근히 혁명의 비극적인 순환을 엿보고 있는 게 아닌가 여겨진다.
4. 정리
실존적 주체를 강조하는 사르트르의 사상은 1950년 대 말 “주체는 죽었다.”라는 묘한 말로 대변되는 구조주의가 득세함으로써 상당 부분 퇴색하게 된다. 더욱이 1968년 이후 구조주의를 잇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대거 등장해 사르트르가 좋아하는 총체성의 변증법을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사르트르의 실존 사상은 더욱 힘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를 현실에 맞게 바꾸는 데서는 상당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신자유주의에 의거해 자본주의 사회가 세계화되면서 교묘한 방식으로 인간 개개인의 욕망들을 관리하고 이용한다. 이른바 ‘영악한 자본주의’ 세상이 된 것이다. 이에 대한 저항으로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분자 혁명’이란 것이 있는데, 이것은 개개인이 자기가 속한 구체적인 현실 상황에서 자본주의적인 악영향에 의한 욕망의 지배 구조를 깨나가자는 것이다. 이를 위한 혁명적인 힘을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 할 때, 사르트르의 실존적 혁명 사상은 나름대로 의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요컨대 사르트르의 실존 사상은 주어진 잘못된 현실에 저항해 나가는 원동력을 획득하고자 할 때에는 전략 전술적으로 대단히 긴요한 것이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실존 사상은 모든 현실을 한꺼번에 부정하려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편으로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쪽으로 기울 수도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