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 381 (10권 9. 김홍신. 펌글)
* 차라리 나를 데려가세요 *
여름이 유난히 길었다.
작년만 해도 불경기니 불황이니 하면서도 그런대로 숨 쉴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은주 누나는 새벽부터 밤늦도록 불황 타개를 위해 경황 없이 살았고,
나는 고집스럽게 외출을 삼가한 채 책 보는 재미로 이 여름을 넘기려고 했다.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나가 돌아다니기가 싫어졌다.
사람들은 악이 바쳤는지 모지락스런 낯이었고 매일매일 신문 속의 극렬한 낱말들과 속 좁아터진 사건들만 보게 되었다.
날씨 탓일까?
아니면 정국의 열기와 불황과 먹고 사는 일의 빠듯함과 실업자의 누증 때문에 이 여름이 더 무더워 보이는 걸까?
그도 아니면 인간의 욕심이 너무 지나쳐서 생기는 욕심의 열기 때문일까?
어느 날은 한 권, 또 어떤 날은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책 읽는 재미와 공부하는 재미를 점점 깨닫기 시작했다.
다혜가 만리타국으로 공부하러 달려간 걸 이제사 이해할 것 같았다.
은주 누나 말마따나 허송세월할 게 아니라 대학원 공부나 해볼까?
차츰 그런 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그건 엄청난 변화였다.
공부를 한다거나 시험을 치른다는 게 얼마나 지겨운 노릇인지,
이 세상에서 그런 낱말만이라도 없애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엊그제 같았다.
몇 해 전엔가 자동차 운전면허 시험을 보면서 이것이 내 일생에서 마지막 시험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차라리 굶어죽으면 죽었지 시험을 보아서 무엇이 되거나,
시험을 치러 인생을 윤택하게 되는게 있더라도 나만은 빠질 결심이었다.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뜬금 없이 대학원 전화번호를 확인하고는 전화를 걸었다.
"죄송합니다만, 대학원 시험이 언제 있습니까?"
나는 꽤나 정중하게 물었다.
"11월 중에 있을 예정인데 날짜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시험 과목은요?"
"전공하고 영어 두 과목에 면접이 있습니다."
"시험 안 보고 입학하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에이, 여보쇼...."
나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전공과 영어라....
마음 먹은 김에 학원에나 나갈까, 아니면 공부에 도가 튼 녀석을 데려다가 개인교습을 받을까.
궁리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설마 과외수업 받았다고 잡아가지는 않겠지.
공부 잘하는 녀석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녀석들이 얼마나 배꼽을 쥐고 웃어댈까도 생각했다.
내가 새삼스럽게 공부를 하겠다고 과외 선생까지 모셔놓고 하루 종일 책을 파면 애들이 무슨 난리라도 난 줄 알겠지.
어떤 녀석은 다혜와 학벌 맞추려고 그러는 줄 알 테고,
또 다른 녀석들은 오래 살다 보니 장총찬이도 별 수 없더라고 지껄이기도 하겠지.
상관 말자!
나는 내뱉듯이 말했다.
이번 여름에 족히 칠팔십 권의 책을 읽고 느낀 것은 그동안 내가 얼마나 미련하게 살았나 하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과외 선생을 물색하느라고 전화통에 매달려 한나절을 보냈지만 신통한 녀석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러던 참에 일하는 계집애가 손님 왔다고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전화질하느라고 초인종 소리도 듣지 못했던 것이었다.
"누구냐?"
"여자지 누구예요."
"임마, 너 지금 질투하냐?"
"헹!"
계집애가 입을 비죽 내밀고 내려갔다.
찾아올 만한 여자가 없다는 생각으로 내려갔다.
계집애가 심심해서 장난질이라도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혜련이었다.
계집애가 토라질 만도 하다 싶었다.
화사한 차림새가 무대의상 같았고 그 세련된 맵시며 뛰어난 용모가 우리 집에 영 어울리지 않았다.
계집애가 아마 놀란 듯했다.
"웬일이오?"
"요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지나가던 길예요. 꼼짝도 않고 지내는 것 같아서...."
"올라갑시다."
혜련이는 계집애의 눈치를 살피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배운가 보죠?"
계집애가 내 뒤통수에 대고 비꼬듯 던진 말이었다.
"나도 모르겠다."
"차는요?"
"주고 싶은 거 줘라."
"맹물에다 고춧가루나 듬뿍 넣어 줄까 부다."
혼잣소리였지만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여자들은 젊으나 늙으나 뛰어나게 예쁜 여자를 보면 이해 상관 없이 질투를 느끼는 것 같았다.
다른 여자가 찾아왔다면 그렇게 투덜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긴 뛰어나다는 한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세상의 질투를 받기 마련인 게 인간의 속성인 것,
혜련이의 생김새도 그랬지만 화사한 차림과 세련된 자태가 계집애의 비위를 상하게 한 것 같았다.
"맘대로 해라."
그렇게 말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차리고 다니면 괜히 미움받는다는 걸 알아요. 오늘은 이렇게 차리고 나설 일이 있어서 그랬으니 이상하게 보지 마세요."
내가 이층으로 올라가자 분위기를 눈치 챈 혜련이가 먼저 턱을 짚고 나섰다.
"무슨 날요?"
"축하 받고 싶어서 왔어요."
"무슨?"
"내 생일이거든요. 저녁에 파티가 있는데, 파트너 해 주실래요?"
"축하는 하지만 파트너는 사양하겠소."
혜련이는 샐쭉한 표정으로 대꾸 없이 앉아 있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내가 그녀의 파트너가 될 까닭이 없는데도 그녀는 일방적으로 청을 넣었다가 혼자 샐쭉해진 것이었다.
"다혜 때문인가요?"
한참 만에 혜련이가 물었다.
"빤히 알면서...."
대꾸하기 싫어 이렇게 말했다.
"다혜의 병명이 뭔지 아세요?"
"별거 아닌 모양입니다. 그냥 피곤해서.... 좀 쉬면 된다고 하던데."
"그럼, 어느 누가 내 병은 이렇소 하고 내보일 여자가 몇이나 되겠어요? 안 그래요?"
가슴 뜨끔한 소리였다.
"무슨 병이오?"
꽤 침착한 표정으로, 내 뜨끔한 가슴을 보이지 않으려고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지난번에 말했죠. 괜히 종합진찰을 받거나 입원하는 건 아닐 거라고.
또 내가 병명을 알아내는 건 쉽지만 알아내려고 노력하지는 않을 거라고요."
"말의 앞뒤가 다르잖아요?"
"질투라고 생각하세요. 나도 여자예요. 보기 싫은 사람이라도 생일을 축하해 달라면,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따라가 주는 게 신사의 도리라고 생각했어요."
"난 신사가 못 돼요."
일부러 잘라말했다.
"아닌 줄이야 진작에 알았어요. 숙녀에게 그러는 법이 아녜요."
서먹서먹한 순간에 계집애가 찻잔을 들고 올라왔다.
계집애의 눈꼬리가 별로 달가운 기색은 아니었다.
차탁 바닥에 소리 나게 내려놓고 내려가는 뒤통수가 꽤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이게 뭐예요?"
찻잔 뚜껑을 연 혜련이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내가 얼른 들여다 보았다.
계집애의 심통이 찻잔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맹물에 고춧가루를 듬뿍 넣은, 아까 농담으로 했던 바로 그 심통스런 차였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손님 대접 치곤 좀 너무하셨네요."
혜련이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이해는 좀 해 주십쇼. 저 나이에 이렇게 화사하고 예쁘고 맵시나는 여자를 봤으니 심통이 날 만도 하잖아요."
"이해는 해요."
"생일 선물이 이래서 안 됐소만.... 아름다운 것도 때로는 죄가 된다는 걸 아십쇼."
"큰 공부 했네요."
내 말이 별로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여자가 남보다 빼어나다 보면 괜히 트집 잡히기 마련이고,
생긴 것만 가지고 멀쩡하게 미움을 받거나 질투 받는 게 소갈머리 없는 세상 사람들 인심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인박복이라 했는지 모른다.
"내가 듣기론 다혜가 별로 아픈 데가 없는 걸로 알았어요. 얘기가 나왔으니 터놓고 합시다."
궁금증이 가라앉지 않아 견딜수가 없었다.
얘기를 듣고 보니 혜련이 말에 일리가 있었다.
별거 아니라면서 입원까지 해 가며 정밀검사를 받아야 할 까닭이 없을 것 같았다.
여유 있는 사람들이 쉴겸해서 건강을 체크하기 위해 건강진단을 받는 것은 알지만,
다혜가 몰래 귀국해서 병원에 입원한 까닭이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병원 집 딸이니까 뭔가 알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예요. 병원 집 딸이지 의사는 아니니까요.
난 오히려 의사는 싫어해요. 일러달란다고 함부로 일러 줄 의사도 없어요."
"그럼 아까는 왜 아는 척했소?"
"여자의 질투심이라고 말했잖아요."
시치미를 딱 떼는 눈치였다.
"어떤 것이든 좋아요. 다혜가 아프면 나나 혜련씨도 도와야 할 입장이 아닙니까."
"설사 안다고 쳐요. 연적을 돕는 여자를 봤나요? 영화나 소설책에선 물론 있겠죠.
지난번에 분명히 난 총찬씨한테 고백을 했어요. 나는 자존심도 없는 줄 아세요?
칼을 물고 죽겠느냐, 자존심을 지키겠느냐 하면 차라리 칼 물고 죽을 만큼 나도 자존심이 보통은 넘는 여자예요.
내가 아니꼬워도 전화하고 만나자고 조르고.... 그런 여자가 아녜요. 총찬씨한테만 그렇게 됐어요.
어떤 때는 내가 생각해도 분통이 터져요. 그러나 나도 오기라는 게 있어요. 나는 승부를 걸었어요.
쉽게 물러나진 않아요. 난 지금까지 누구한테 져본 적이 없어요. 이번엔 더더구나 질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