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모두 억척스럽게도 살아왔어 / 솜처럼 지친 모습들 / 하지만 저 파도는 저리도 높으니 / 아무래도 친구, 푸른 돛을 올려야 할까봐."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이 80년대 중반의 새로운 질풍노도의 역동적인 선동이었다면, 내성적인 두 청년으로 이뤄진 '시인(市人)과 촌장(村長)'이 제시한 앨범 <푸른 돛/사랑일기>는 머릿곡 <푸른 돛>이 은유하듯이 이 도도한 흐름의 아기자기한 내면 풍경이다.
그러나 그 내면 풍경은 새털 구름 같이 날렵하지만 팽팽하기 이를 데 없는 긴장감으로 응축돼 있다.
그 긴장의 음악적 주인공은 바로 기타를 맡고 있는 함춘호이다. <비둘기에게>와 <떠나가지마 비둘기>에서 몽환적으로 미끄러지는, 또는 <고양이>의 서주와 간주에서 보여주는 투명한 어쿠스틱 기타의 악절은 90년대에도 조동익 밴드의 일원이자 일급의 세션 기타리스트로 자리잡게 되는 그의 위치를 결정짓는 것이다.
함준호 |
하덕규 |
함춘호와 짝을 이루는 싱어송라이터 하덕규는 1983년에 솔로 앨범을 내놓은 바 있지만 그의 시대를 맞기 위해선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그러는 중에도 그는 남궁옥분이 불러 알려진 <슬픈 재회>와 양희은의 80년대 걸작 <한계령>을 만듦으로써 허무주의적인 울림으로 가득한 또 하나의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재능을 알리기 시작했다.
진지한, 그러나 무겁지 않은 이 기타리스트와 싱어송라이터의 만남 뒤엔 나중에 '조동진 패밀리'로 불리게 되는 음악가들의 숲이 있었다.
조동진은 이 앨범이 넘어서고자 하는 그림자를 눈에 보이지 않게 제공하는 은자였으며, 그의 동생인 베이시스트 조동익은 이들의 충실한 음악적 동료였다.
이들은 본능적인 연대와 신뢰를 바탕으로 거품 같은 시장의 논리로부터 자신의 음악적 태도를 보호했다.
그리고 이 '비폭력적인 저항'의 태도는 자신의 음악 토대인 서구 대중음악의 문법을 토착화하는 음악적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비둘기'라는 화두가 전면에 깔린 이 비상한 앨범은 포크와 발라드, 록, 사이키델릭, 그리고 극히 부분적으로는 퓨전에 이르는 서구 대중음악의 자생적 토착화 과정을 진지하게 보여준다.
위태롭게 여겨질 정도로 섬세한 (그래서 80년대 후반에 이르면 기독교의 지평으로 날아가 버렸는지도 모르지만) 하덕규의 노래말 포착과 선율의 구성 감각은 함춘호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완벽하게 벼려진다.
특히 앞면의 <고양이>와 뒷면의 <매>는 이들이 도달한, 아니 이 시대의 싱어송라이터들이 도달한 가장 지순한 경지이다.
시인과 촌장은 '아름다움'이 화장을 하고 거리로 나서는 풍속도 안에서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찾아 폐허의 뒷골목을 걸어가는 음유시인의 뒷모습이다. 그리고 이들이 찾아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바로 뒷면의 <풍경>에서 가장 단조로운 선율과 화성으로 응답하듯이 "모든 것들이 제 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