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서 3 · 1운동이 차지하는 비중과 위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3 · 1운동을 기점으로 독립운동의 양상은 질적 · 양적으로 크게 변화했다. 무엇보다 독립운동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민주 공화제 성격의 국가 수립의 토대를 마련하는 서막을 열었다는 점에서 큰 성과라고 평가할 만하다. 또한 소수 지식인 집단이나 특정 단체의 운동을 넘어서 다양한 계층과 전 연령층이 국권수호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며 민족적 대단결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만세운동 자체는 물론이고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역사적 의미도 지닌다.
3 · 1운동이 향후 독립운동의 방향설정과 조국 광복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는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들의 공헌과 희생이 뒷받침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국가적 예우는 단순히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독립유공자 포상 정책은 그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숭고한 뜻을 기리는 것으로부터 나아가 국민통합을 이루고 국가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상징적 장치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에 대한 예우와 함께 국가가 나서서 당사자와 유족에게 보훈(報勳)을 책임지는 일은 국가를 위한 일에 신뢰를 하고 임할 수 있는 애국심을 함양시키고 사회통합을 이룰 수 있게 하는 제도적 장치가 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불교계도 독립운동가에 대한 사례를 발굴하여 그들의 공적을 기리고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이 절실히 필요하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를 위해 희생했다는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겠지만, 불교인으로서 핍박받는 민족의 인권과 자유를 위해 헌신한, 일종의 위법망구의 정신으로 불법을 실현한다는 종교성의 관점에서도 숭고한 정신을 본받고 계승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주적 근대 종단의 성립에 불교도의 독립운동이 끼친 영향을 고려하면, 불교계 독립유공자들은 현 조계종단 건립의 일등공신이 된다. 당연히 불교도로서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 널리 알릴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 글은 그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사전 작업 정도라고 볼 수 있다. 현재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불교계 인물들을 조사하여 그들의 공적을 검토하는 동시에, 앞으로 드러나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는 중요성을 상기시킬 수 있는 작업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1. 불교계 독립운동의 개요와 성격
일반적으로 ‘독립운동’이라 하면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민족적 노력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일종의 식민지 해방운동이다. 그렇다면 불교계의 독립운동은 불교계가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 항거했던 일련의 운동들을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불교계 독립운동의 개념과 범주를 직접적인 항일투쟁과 간접적인 저항과 극복이라는 이원적 구도로 나누어 설명한 바 있다. 여기에서 간접적인 저항과 극복이란 사찰령 철폐운동, 사법개정운동, 본말사 제도 부정, 일본불교화의 거부 등, 조선불교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찾고자 했던 모든 노력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조선불교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했던 불교계 자체 운동들도 넓은 의미에서 독립운동의 범주로 보는 것이다. 일제의 불교 정책에 대항하여 그 부당함을 주장하고 조선불교의 독립성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식민지 지배를 극복하기 위한 ‘독립운동’의 한 범주로 보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간접적인 범주에 속하는 불교계 독립운동 사례는 현재 독립유공자 서훈 과정에서 고려 대상에 들지 못하며, 국가 보훈의 관점에서 일반적인 독립운동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 불교계 독립운동의 전체 개요와 성격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직접적인 항일투쟁과 관련한 불교계의 독립운동은 먼저 대한제국 말기 의병전쟁에 개인적으로 참여한 사례가 확인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1차 자료가 충분하지 못한 실정이다. 의병전쟁과 관련한 불교계의 역할과 활동에 대해서는 자료의 발굴과 보다 진전된 연구가 필요하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본격적인 항일투쟁은 일제강점 이후 1920년을 전후한 시점에 활발히 진행되었다.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사건은 1918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법정사(法井寺) 항쟁이다. 법정사 항쟁은 주지 김연일(金連日)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해 일어난 무력투쟁이다. 법정사의 승려들을 중심으로 지역주민 700여 명이 규합하여 서귀포 중문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여 불태우고 일본인 상인들을 공격했던 사건이었다. 이 일로 총 66명이 체포되어 31명이 징역형을 받았고, 2명은 재판 중 옥사하였다. 특히 주동자 김연일이 징역 10년, 선봉대장 강창규(姜昌奎)가 징역 8년을 선고받는 등, 이는 3 · 1운동의 민족대표들이 받았던 형량보다도 훨씬 무거운 것이었다. 그만큼 법정사 항쟁은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도 충격적인 것이었고, 독립운동 진영의 입장에서도 향후 큰 반향을 불러올 수 있는 강한 파급력을 보인 사건이었다. 또한 불교계가 보여준 독립운동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투쟁이기도 했다.
3 · 1운동은 불교계 독립운동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을 수 있다. 주지하듯 한용운과 백용성은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리고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만세시위는 한용운의 지도와 당부를 받은 중앙학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다.
1919년 2월 28일 밤 한용운의 집에 모인 신상완, 백성욱, 김상헌, 정병헌, 김대용, 오택언, 김법린, 박민오 등의 학생들은 한용운으로부터 그간 비밀리에 추진되어 온 3 · 1만세운동의 소식을 접하고, 독립선언서 수천 부를 받아들고 나와 범어사 포교당에서 후속의 일을 모의하였다. 다음 날 그들은 탑골공원에서 선언서를 배포하며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이후 각자의 연고 사찰로 내려가 지방 학림 학생들과 지인들을 포섭하여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한용운과 백용성을 비롯한 만세시위 주동자 일부는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을 피할 수 없었다. 이처럼 불교계 3 · 1운동은 민족대표 한용운, 백용성을 중심으로 해서 그들을 따르는 중앙학림과 지방학림의 젊은 승려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3 · 1운동 이후의 독립운동은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지역에서의 항일단체 참가, 군자금 모금 등의 후방 지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상해 임시정부에의 참여는 신상완, 백성욱, 김법린 등 중앙학림 계열과 월정사 출신의 이종욱 등이 임정 요인으로 참여하거나 국내 특파원으로 잠입하여 활동한 내용 등이 기본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1919년 11월 상해에서 발표된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이하 〈승려선언서〉)와 항일투쟁을 하기 위해 계획된 ‘의용승군제’ 등의 내용이 불교계가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전개한 독립운동 사례로 연구되고 있다.
〈승려선언서〉는 12명의 승려가 7천의 승려들을 대표하여 일본의 식민지 지배통치 세력에 대항해 조국이 해방되는 순간까지 혈전으로 대항할 것을 다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2명의 승려는 가명을 썼기에 전모를 알 수 없지만, 여러 사정을 종합했을 때 오만광은 오성월, 김축산은 김구하, 지경산은 김경산, 김동호는 김상호로 추정된다. 선언서는 백초월, 신상완, 이종욱 등이 작성했다고 비정하고 있으나, 정확히 누가 작성했는지 확인해줄 결정적인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의용승군제는 신상완이 구상한 승군 조직이었다.
대한승려연합회 회장이 임시의용승군 총장이 되고, 조직기구로 승군을 총괄하는 충령부 산하에 비서국, 참모국, 군사국, 사령국 등을 두어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의용승군제는 신상완이 검거됨으로써 무산되었다. 한편 상해임시정부에서의 활동은 3 · 1운동 활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진행되었다. 만세시위 직후 신상완 등의 청년 승려들이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별개로 김봉율, 박달준, 강재호, 박영희 등의 청년 승려들은 만세시위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거나 독립운동 단체와 연결되었다. 임시정부와 각종 항일단체에 가담한 이들 청년 승려들은 이후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으는 일에 주력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법정사 항일투쟁과 3 · 1운동, 임시정부 및 항일단체에 가담하여 펼친 독립운동들은 일제강점 이후 불교계가 전개한 직접적인 항일투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법정사의 항일투쟁을 제주도 지역에 국한한 독립정신의 발로로서 제한적으로 이해한다면, 불교계 전체의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3 · 1운동에 참가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용운과 백용성의 민족대표로서 활약, 중앙과 지방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청년 승려들의 활동은 상해임시정부와 각종 독립운동 단체에서의 활약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될 수 있었다. 직접적인 항일투쟁은 이렇게 3 · 1운동에 영향을 받고 1920년대 초 · 중반을 시대적 배경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다음으로 간접적인 저항과 극복에 해당하는 사례 중 가장 두드러진 사항으로는 1910년대 초반의 임제종 운동과 사찰령 철폐를 주장한 청년운동, 그리고 자주적 종단 건설을 지향한 운동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운동들은 일본 불교로의 귀속과 일제의 불교 정책에 저항하여 조선불교의 자주성을 표방하면서 진행되었다는 성격을 지닌다.
임제종 운동은 원종의 종정 이회광이 일본의 조동종과 맹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 소식을 접한 박한영, 진진응, 김종래, 한용운 등이 조동종과의 맹약을 매종(賣宗) 행위라 비판하며 규탄대회를 개최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임제종은 임시종무원 및 중앙포교당을 설립하고 원종에 대응할 만한 조직을 갖추는 등 조선불교의 전통과 자율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임제종 운동은 일본불교화에 저항했던 점, 총독부에 의해 강제로 임제종 간판을 내려야 했던 점, 향후 불교청년 운동과 자주적 종단 건설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점 등을 고려하면, 단순히 일시적인 보종(保宗) 운동적 차원을 넘어 독립운동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충분하다.
사찰령 철폐 운동은 1920년에 창립된 조선불교청년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청년회는 불교계 현실의 본질적 문제점이 사찰령임을 간파하고 2천여 명의 연서와 함께 사찰령 철폐를 주장했다. 이러한 청년운동이 결과적으로 성공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일제강점 이후 처음으로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목소리를 공식적으로 부르짖었다는 점에서 교계 안팎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은 불교청년들의 사상과 활동이 결국 자주적 종단의 건설 운동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929년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의 개최와 그로부터 만들어진 종헌(宗憲)과 종회(宗會)의 설립은 전 조선 사찰과 승려를 자주적으로 통할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여기에 종헌 실행 철저를 기하기 위해 제기된 사법개정 운동도 추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사찰령을 철폐하지 못한 현실과 본산 주지들의 비협조는 자주적 종단 건설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 후반 총본산 건설 운동과 1941년 조선불교 조계종 또한 일제 불교 정책의 테두리 안에서 진행된 결과라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일제 정책에 저항하여 자주적 종단 건설이라는 움직임 자체는 넓은 의미에서의 독립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그 과정에서 점철된 협력과 순응의 단면은 오늘날 많은 논쟁거리와 비판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도 연구자 입장에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일제 식민지에서의 종단 건설은 분명히 자주적 성격을 도출할 수 있지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체제 구축의 관점에서는 비판의 소지가 있는 양날의 검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외에 종단 건설과 관련한 이중적 모순성과는 별개로 한국불교의 전통수호 노선을 걸었던 선학원 계열의 자주화 운동도 간접적인 독립운동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일본불교화를 저지하기 위한 대처식육 반대 운동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례들을 통해 그 시기와 대응양상 등을 정리해 보면, 불교계 독립운동의 전반적인 특징과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제주도 법정사 항쟁을 예외로 한다면, 불교계의 직접적인 독립운동은 3 · 1운동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불교계 독립운동이 3 · 1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얘기가 된다. 둘째, 만세시위,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 단체에서의 활동 등 구체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한 주체는 대부분 청년 승려 개인들과 청년회와 같은 특정 단체였다는 점이다. 이 점은 기존 연구들에서도 많이 지적되는 것으로, 종단이나 교단 혹은 본산 차원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한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식민지 체제하에서 교단이나 종단 체제의 구축이 일제 당국에 긴밀한 협조 속에서 가능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종단이 전면에 나서서 독립운동을 하는 건 어려운 조건이었을 수 있다. 반면, 근대 교육의 세례를 받은 청년 승려들은 불교뿐 아니라 국가의 자주독립을 보다 비판적 관점에서 고민했던 세대였다. 어쩌면 불교청년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셋째, 적어도 1930년대부터는 불교계의 직접적인 항일투쟁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1930년대 총동원체제 속에서 전쟁 준비에 돌입한 일제의 상황으로 인해 국내항일운동의 여건이 마련되기 어려웠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불교 내적인 면에서 이해해 보자면, 1920년대 후반 조선불교 선교양종 종헌이 만들어지면서부터 불교청년을 비롯한 교계 전반에 자주적 종단 건설에 대한 지향이 형성된 것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생각된다. 즉 당시 불교계 독립운동이 앞에서 살펴본 간접적인 양상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항일투쟁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선 종단 건설을 위한 일제와의 일정한 타협에서 오는 항일정신의 쇠퇴라는 비판적인 견해도 가능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넷째, 간접적인 독립운동이라고 이해한 여러 사례는 일제의 비합리적 불교정책과 일본불교화에 대응한 전통수호라는 관점에서 이해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주적 종단 건설이라는 근대 지향적 목표가 투영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근대 불교의 최대 목표는 종단의 건설이었다. 조선시대 선교양종이란 종명은 존재했지만, 제도적 차원에서 불교 포교와 교세 확장을 인정받은 공식 종단의 형태가 아닌 과거부터 이어온 명분에 불과했다.
기독교 및 일본 종파불교의 한국 진출과 선교 활동을 지켜본 조선불교는 사회적 진출을 꾀했고, 전국 사찰과 승려를 통제하며 불교의 대중화와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기관으로 종단의 형태를 지향했다. 이른 시기 원종의 창립이나 그에 맞서 설립된 임제종 모두 미흡하지만 종단의 형태를 취했다는 점이 이를 잘 대변한다. 하지만 종단 설립은 일제의 간섭과 조정에 의해 묵살되었고, 자주적 종단 설립을 방해하는 사찰령을 철폐하기 위한 운동이 일어났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불교는 독립운동에 참여함으로써 국가와 민족에 기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고, 그로부터 문명사회에 부합하는 최적의 근대 종교라는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독립운동이라는 시대적 · 민족적 과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불교는 분명 한 자리를 차지했고, 전통과 근대를 아우르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냈다. 비록 종단 차원의 거국적 지원과 항쟁의 모습은 미약했지만, 미래를 짊어진 청년 승려들의 진취적 기상과 냉철한 사고는 불교가 해방 후 식민지 잔재를 극복하고 종단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2. 불교계 독립유공자 서훈과 공적
이번 장에서는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불교 인물들에 대한 현황을 토대로 불교계 독립운동 양상과 해당 인물들의 공적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앞서 살펴본 불교계 독립운동 사례가 실제 오늘날 독립유공자 선정에 어떻게 적용되었고, 그 과정에서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것이다. 우선, 독립유공자 현황을 토대로 불교 독립운동의 실제를 파악해 보자.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敍勳)이 최초로 개시된 것은 1962년이다. 그리고 3년 뒤인 1965년부터 보훈(報勳)이 개시되었다. 현재 독립유공자 포상의 훈격은 5등급의 건국훈장과 그밖에 건국포장 및 대통령 표창을 포함한 7개 등급으로 나뉘어 있다. 1990년대 이전까지의 포상은 부정기적으로 실시되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3 ·1절과 광복절을 중심으로 거의 매년 포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광복 50주년이 되는 1995년에는 대대적인 포상이 기획되었고, 기존에 신청에 의해서만 진행되던 포상은 점차 정부 주도로 이루어진 발굴에 의해 진행됨으로써 독립유공자 선정 확대에 커다란 전기가 마련되었다. 일반적인 포상 범위는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해방 이전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한 사실이 있는 분(애국지사) 또는 그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분(순국선열)이 해당되었다.
2019년 1월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총인원은 15,180명이다. 이 중 불교계 독립유공자는 104명으로 집계된다. 지난 1999년에 임혜봉이 조사한 현황은 36명이었고, 최근인 2017년에는 이동언이 94명의 명단을 보고한 바 있다. 1999년에 비해서 대략 60여 명이 증가하고 2017년보다 10명이 증가한 것은 조사 당시 누락되었던 인원과 새롭게 선정된 인원이 합쳐진 결과이다. 2017년 이후로 새로 선정된 불교 인물은 2018년에 강태하 1명뿐이다. 이때 수정, 보완된 내용은 제외 1명(박노영), 추가 11명(강춘근, 강태하, 권청학, 김명규, 박광, 신철휴, 이강률, 이만직, 이정수, 임만규, 조계성)이다. 제외시킨 박노영은 중앙학림 학생들과 함께 3 · 1만세운동에 참가한 중앙학교 출신의 박노영(박민오의 이명)과는 다른 사람이다. 동명이인인 관계로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추가된 11명 중 강춘근, 강태하, 조계성은 법정사 항쟁으로 서훈을 받았다. 권청학은 동화사 만세운동, 이강률, 이정수, 임만규는 쌍계사 만세운동, 신철휴는 해인사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의열투쟁에 투신했다. 박광(朴洸)은 활동 당시를 불교와 연관 지어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는 1909년부터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고, 1913년부터는 중국 안동현에서 곡물 무역상을 하며 독립운동가에게 자금을 조달하는 등 독립운동의 거점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10여 년 동안 지속적인 모금 활동과 지원을 담당한 공로가 인정을 받았다. 1930년대 귀국한 이후의 행적은 자세하지 않지만, 어떤 연고인지는 몰라도 만해 한용운과 친분을 이어나갔던 것 같다.
또한 해방 이후 《한용운전집》을 간행하는 준비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불교와 깊은 인연을 이어나갔다. 만해와의 연결고리가 분명히 확인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불교계 독립운동의 한 사례로 추가하였다. 마지막으로 김명규는 동래고보 만세운동에 참가한 인물이고, 이만직은 충남 홍성 출신의 승려로 의병활동을 한 인물이다. 이 둘은 1999년에 조사된 36명 중에 들어 있지만, 2017년도의 명단에는 누락되었다. 불교 인물이 아니었던 것인지 분명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선행연구에서 승려로서 독립운동을 한 사례로 서술된 만큼 다시 추가하였다.
그럼 104명의 불교계 독립유공자 명단을 토대로 독립운동의 양상과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자. 먼저 시기별 포상 인원은 위의 〈표-1〉과 같다.
서훈이 최초로 개시된 1962년의 2명은 3 · 1운동 민족대표였던 한용운과 백용성이다. 위의 통계는 최종 결과만을 나타낸 수치로서, 1960~80년대 최초로 서훈을 받은 이가 1990년대 이후 훈격 조정에 의해 상위 훈격으로 상향조정된 결과를 반영한 것이다. 1990년에 서훈된 인원이 많은 이유는 이와 같이 이미 서훈됐던 인원을 상향조정한 결과가 합쳐졌기 때문이다. 반면 1995년도에 25명으로 가장 많은 인원이 서훈되었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광복 50주년을 계기로 정책적인 상황이 반영된 결과로 이해된다.
위 표에서 불교계 독립유공자는 1990년대에 가장 많이 서훈된 것으로 확인되지만, 사실 전체 인원은 2000년대 이후 상당한 증가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계 유공자 중 약 70%에 가까운 인원이 이미 2000년대 이전에 서훈된 이래 점차 감소하는 상황은 오늘날 불교계가 독립유공자 선정기준을 잘 파악하여 그에 맞는 자료 발굴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현재 독립유공자로 선정되기 위해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1. 최소 6개월 이상 독립운동을 하였거나, 그로 인하여 3개월 이상 옥고를 치른 분으로 그 활동이 조국 광복에 기여했다고 인정될 만한 적극적인 공적이 있어야 한다.
2. 독립운동 공적이 당시 발행된 원전자료에서 확인됨을 원칙으로 한다.
3. 작고 시까지 행적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
부록으로 제시한 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인원은 대다수가 징역을 살았거나 순국한 사람들이었다. 즉 그들에 대한 판결문이나 행형기록 등의 원전자료가 존재하고, 확실한 공적을 인정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와 같은 행형기록이 기준이 되며, 그 외에는 당시 발행된 신문이나 잡지, 독립운동 단체의 명부나 기관지, 군자금 납부 영수증 등의 개인 자료 등에서 공적을 인정받아야 한다. 독립유공자 선정에 일제의 기록문서가 이렇게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는 점은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공적 심사 기준이 이렇다면, 앞 장에서 간접적인 독립운동으로 살펴본 불교계 자체의 자주적 운동들은 그것이 설사 사찰령이라는 일제 정책을 철폐하고자 한 운동일지라도 심사 대상에서 논의될 여지가 없게 된다. 따라서 간접적인 운동 양상은 어디까지나 광의의 독립운동 범주에서 의미 부여만 가능할 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재로선 명확한 공적을 설명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를 발굴 · 수집하는 일에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독립유공자 포상 훈격별 비율을 살펴보면 다음 〈표-2〉와 같다.
애족장을 받은 인원이 가장 많은 51명으로 절반 가까이 된다. 반면 독립장 이상을 받은 인원은 6명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장을 받은 이는 한용운이고, 대통령장을 받은 이는 백용성이다. 어느 누구의 희생이 더욱 가치 있는 것이라고 계량적인 수치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구분은 공헌과 희생의 정도에 따라 당사자나 유족에게 보상과 예우를 달리 적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전체 인원 대비 불교 유공자의 비율이 1%도 채 안 된다는 점에서 앞으로 보다 적극적인 사례 발굴과 함께 자료 수집이 활발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공적에 따른 운동계열별 인원 현황을 살펴보자. 가장 많은 계열은 국내항일로 절반에 가까운 51명이며, 다음으로 3 · 1운동이 36명이다. 두 계열을 합치면 87명으로 전체 약 83.7%를 차지한다. 그 외에는 위의 〈표-3〉과 같은 계열들이 있다. 이 장에서는 가장 많은 두 계열에 대한 특징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3 · 1운동은 말 그대로 만세운동 등에 참가한 공적을 인정받은 경우이다. 중앙학림 학생이 서울에서 참여한 만세운동 이외에 각 지방 사찰을 중심으로 전개한 만세운동 사례는 범어사, 동화사, 표충사, 쌍계사, 해인사, 봉선사 등이 있다. 먼저 범어사 만세시위의 경우 총 12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김상기, 김영규, 김재호, 김한기, 박영환, 박정국, 손군호, 양수근, 윤상은, 정성언, 지용준, 황만우가 그들이다. 범어사 만세운동은 명정학교(明正學校)와 지방학림 학생들이 주동이 되고, 불교계 지도층이 배후 비밀 참모가 되어 일으킨 학생의거였다. 참모 역할을 했던 김법린, 허영호 등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3월 19일 동래시장 남문 부근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시위로 일경에 검거되어 재판을 받은 사람은 무려 34명에 달했다. 이때 김법린은 경계망을 피해 상해로 망명하였다.
동화사 만세운동으로 서훈된 이는 권청학, 김문옥, 이기윤 등 3명으로 이들은 모두 지방학림 학생들이었다. 중앙학림 학생 윤학조는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거행된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재적사찰인 동화사로 내려와 지방학림 학생들에게 궐기할 것을 종용했다. 그 결과 지방학림 학생 전원은 3월 30일 대구 남문시장에서 만세시위를 단행했다. 이에 호응한 군중은 3천 명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이로 인해 검거된 이는 모두 9명으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표충사 만세운동으로 서훈된 이는 반봉갑, 반봉출, 오학성, 이강조, 이장옥, 이찰수, 장만식, 장인식 등 8명이다. 이 중 오학성, 이장옥, 이찰수는 표충사 승려임이 확인되고, 나머지는 지역 농민인 듯하다. 3월 20일 통도사 승려 50명이 표충사로 와서 비밀회합을 하고 거사를 모의하여, 4월 4일 대룡리에서 열리는 단장 장날에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거사 당일 장터엔 5천 명이나 되는 군중이 집결하여 만세를 연호하며 시장을 돌았다. 급기야 헌병주재소를 습격하기에 이르자 출동한 헌병들에 의해 군중은 해산되었다. 이때 검거된 이는 주동 인물 이하 364명에 달했으며, 그중 71명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쌍계사 만세운동으로는 이강률, 이정수, 임만규 등이 서훈되었다. 먼저 쌍계사 승려 김주석 등이 4월 6일 화개리 시장의 장날에 만세시위를 거행했다. 그러나 일경의 탄압으로 주동 인물들이 검거되며 해산하였다. 다음 장날인 4월 11일에는 이강률 등이 더 큰 거사를 일으켜 쌍계사 만세운동을 이어나갔다. 서훈된 3명은 쌍계사 불교청년들로 추정된다.
해인사 만세운동으로 서훈된 이는 강재호, 최범술이다. 이들 외에도 해인사의 김봉률, 박달준, 이고경 등은 국내항일로, 변진설은 학생운동으로, 신철휴는 의열투쟁으로 각기 선정되었다. 김봉률과 박달준, 신철휴의 경우는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만주와 간도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와 의열단 등에 입단하여 활동한 이들이다. 이들은 이후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국내항일로 서훈된 이들 중에는 이들처럼 3 · 1운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사찰들의 만세운동은 모두 경상도 지역에 해당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들 사찰 외에 굳이 만세운동이 아닌 다른 운동계열로 서훈을 받은 경우의 관련 사찰로는 건봉사, 법주사, 봉선사, 석왕사, 안정사, 양화사, 오봉사, 옥천사, 은선암 등이 있다. 3 · 1만세운동으로 서훈이 이루어진 관련 사찰들이 대부분 경상도 지역에 편중되어 있다는 것은 경남 3본산인 범어사, 통도사, 해인사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성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 할 수 있겠다.
한편 국내항일로 서훈을 받은 51명 중 31명은 제주도 법정사 항쟁과 관련한 인물들이다. 법정사 항쟁으로 서훈 받은 이들이 불교 독립유공자 전체의 30%를 차지하고 있는 점은 이 항쟁이 갖는 독립운동사적 · 불교사적 의미를 짐작게 한다. 그리고 국내항일 계열에서 군자금 및 각종 기금 모집과 관련해 활약한 이들은 김기출, 김명규, 김봉률, 박달준, 송세호, 신지찬, 조경규 등이 있다. 이 중 송세호는 월정사 승려로서 이종욱과 함께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 건봉사 승려 정남용은 이종욱, 송세호와 함께 대동단에 관여하여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망명시키려 하다가 실패하여 투옥된 인물이다.
그 외 국내항일 계열에서 눈길을 끄는 이는 백초월과 김법린이다. 백초월은 3 · 1운동 직후 지리산 영원사에서 서울로 올라와 중앙학림에 독립운동단체인 민단본부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로 전달했다. 이후 그는 청년 승려들이 임시정부와 연계활동을 하는 데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김법린은 만세운동 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특히 임정의 독립운동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하여 갑신정변부터 1910년까지의 사료를 수집해서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이후 파리 유학을 다녀와서는 만당 활동 등을 이어나갔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피체되기도 했다.
현재 독립유공자의 반수 이상은 일찍이 2000년대 이전에 서훈을 받은 이들이다. 운동계열은 단일항목으로는 3 · 1운동(만세시위)이 가장 많았고, 국내항일 중에는 군자금 및 각종 기금 모집이 상당수를 차지했으며, 의병, 의열단 등의 공적들이 뒤를 이었다. 이를 통해 보더라도 독립유공자에 서훈되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항일운동의 행적이 있어야 하고, 이를 증명할 객관적인 자료의 존재가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맺음말
일찍이 독립유공자에 선정되었던 이종욱, 허영호, 박영희, 차상명은 2008년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등재되자, 2010년 서훈이 취소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독립유공자 선정 요건에서 세 번째 ‘작고 시까지 행적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항목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종욱은 3 · 1운동 직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국내 연락을 책임지고 군자금을 모으는 등 명백한 독립운동 공적이 있었다. 허영호, 박영희, 차상명 또한 중앙학림 및 지방학림 학생으로서 만세시위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인물들이다. 식민지 말기 종무총장(지금의 총무원장)을 역임한 이종욱의 경우가 그렇듯, 이들은 대체로 당시 종단의 건설과 운영에 참여하게 되면서 부일협력자라는 낙인을 받게 되었다. 식민지 하에서의 종단 운영은 당국에 협력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이종욱은 종단을 대표하는 승려였다. 객관적 자료의 지표는 친일의 이미지를 쏟아낼 수밖에 없다.
이종욱의 독립유공자 서훈이 취소된 후 출간된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욱》은 당시의 친일행적이 ‘위장’이었다는 항변을 담고 있다. 이 주장의 근거는 많은 독립운동가와 스님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다. 여기에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유형적 자료의 객관성은 얼마나 보장되는가? 증언이나 인터뷰의 내용은 주관적인 것인가?’라는 물음에 반문하는 것이다. 즉 겉으로만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며, 오늘날 구술사의 중요성이 증가하고 있듯 증언이나 인터뷰의 객관성도 인정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증언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사실관계를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튼 많은 이들의 증언 자료에 의해 이종욱은 겉으로는 일제에 협력하는 척하면서 은밀히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여전히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이종욱의 평가가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 지켜볼 일이다.
2000년대 이후로도 불교계 독립유공자는 꾸준히 선정되고 있다. 하지만 그 이전 시기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적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필자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2015년 이후로 불교계 독립유공자는 작년(2018)에 1명만이 선정됐을 뿐이다. 다만 계류 중인 몇 건의 서훈 신청은 확인된다. 불교계는 2015년에 광복 70주년을 맞아 숨은 독립운동 주역으로서 만당 비밀결사 활동과 군자금을 지원한 우봉 스님(1898~1953, 속명 이창규)에 대한 서훈을 추진한 적이 있다.26)
또 임제종 운동 및 전통 수호운동 등에 앞장섰던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1870~1948)과 오성월(吳惺月, 1865~1943)도 각기 선운사와 부산 금정중학교에서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해놓은 상태이다.27)그러나 아직까지 모두 선정되지 못하고 있다. 이 외에도 3 · 1운동 당시 만해와 밀약을 나누고 선학원의 창건과 조선불교 선종의 창종에 정신적 기둥이었던 만공(滿空, 1871~1946)이 총독부에서 벽력같은 할(喝)을 외쳤던 ‘선기발로(禪機發露)’ 사건은 불교 독립운동의 범주에서 다룰 수 있다.28) 또한 범어사 불청동맹 간부로서 비밀 지하조직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글을 써서 돌린 일로 투옥된 바 있는 범어사 승려 김어수(金魚水, 1909~1985)의 항일운동29)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만공이나 김어수와 같이 잘 알려지지 않은 사례들에 대한 발굴 노력도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글의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불교계 독립유공자들은 국가에 공헌이 있을 뿐만 아니라, 현 조계종단 건립의 일등공신으로 칭송할 만하며, 그렇기에 종단 차원에서 적극적인 발굴 작업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도 몇몇 친일 자료의 발견으로 서훈이 취소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객관적 자료의 수집과 구술 자료의 검증을 철저히 보완하여 불교계 독립운동의 실상과 자랑스러운 역사를 간직해 나갈 수 있도록 정진해야 할 것이다. ■
김성연 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원. 동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일제하 불교 종단의 형성과정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자산 운영과 한계〉 〈1910년대 불교 근대화론과 종교적 지평의 확대〉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성립과 활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