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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한승원과 정채봉, 남지심의 경우
1980년대는 국내 정치사상 간과할 수 없는 격동의 시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민주화 이행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 열사의 사망, 그리고 5 · 18 광주민주화항쟁으로 인해 정치적인 혼란과 함께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어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문단의 판도는 월남전, 노사분규, 운동권, 분단(한국전쟁 후일담) 문제 등의 모티프소설이 주목받으면서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때였다. 이때의 문단의 모 평론가는 1980년대의 소설은 소설가가 쓰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써준 것이라도 말할 정도로, 많은 작가가 역사적, 사회적 상상력으로 소설을 쓰던 시대였다. 이런 속에서 한국 불교소설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불교 상상력의 결실인 소설들이 속속 창작되었다. 정채봉의 〈오세암〉(1983), 한승원의 〈아제아제 바라아제〉(1985)와 〈극락산〉, 남지심의 〈우담바라〉(1988), 최인호의 〈길 없는 길〉(1989), 그리고 문학아카데미에서 엮은 ‘불교테마 명작소설 모음집’ 《극락산》에 수록된 김문수의 〈만종(晩鐘)〉, 윤후명의 〈검은 숲 흰 숲〉, 김상렬의 〈춘설(春雪)〉, 황충상의 〈불의 집에서〉, 이원규의 〈미로(迷路)의 빛〉, 노명석의 〈돌불〉, 정찬주의 〈쥐방울꽃〉, 정채봉의 〈오세암〉과 한승원의 〈극락산 Ⅰ,Ⅱ〉 등 많은 작가들이 불교 소재 소설을 써내고 있어 어찌 보면 이 시대가 한국 불교소설의 절정기라는 자리매김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정채봉과 한승원, 남지심의 장편소설을 중심으로 하여 탐색하려 한다. 한편 최인호의 《길 없는 길》은 1989년 〈중앙일보〉에 3년 동안 연재를 시작하여, 1993년에 ‘샘터’에서 출간됐고, 2002년에 전 4권이 ‘여백미디어’에서 출간되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고 다음 기회에 살펴보려 한다.
1. 비구니 구도소설 한승원의 〈아제아제 바라아제〉
한승원(韓勝源)은 원체험 공간인 장흥, 그 바다를 공간적인 배경으로 그곳에 뿌리를 박고 있는 사람들의 애환과 한(恨)의 문제를 생명원리로 다루어온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원체험 공간인 포구와 다산성 여인을 소설 속에 설정하여 한국의 토속적인 여인의 한(恨)을 생명의 극복 의지로 표상하는 소설을 쓰는 한편, 그 생명성을 불교의 구도소설(求道小說)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소설이 비구니 소설인 〈아제아제 바라아제〉(1985)와 〈극락산〉(1989)이다. 전자의 장편소설은 임권택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고, 1997년에는 전 3권(고려원 간)으로 출간되었다. 후자의 소설은 1981년에 〈극락산〉이 발표되었고, 연작 소설인 〈극락산 2〉는 이듬해인 1982년에 발표되었으며, 1989년에 앞서 언급한 ‘불교테마 명작소설 모음집’ 《극락산》에 소개되었다.
한승원의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두 비구니 진성과 청화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구도소설이다. 이 소설의 제목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의 앞 2구절이다. “가자. 가자. 피안으로 건너가자.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가자. 가서 깨달음을 얻자.”라는 뜻이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의 도반(道伴) 되기를 권유하는 말이다. 자리행(自利行)만이 아니라, 이타행(利他行)을 권유하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대승불교적 사상을 엿보게 하는 구절이다. 초월적인 이상세계를 꿈꾸는 여인 진성은 승가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구도승이라 할 때, 청화는 퇴속하여 세속의 삶을 통해 참다운 인간의 길을 가려 하는 여인이다. 진성이 상구보리(上求菩提)를 지향하는 비구니라 한다면, 청화(순녀)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이타행을 중시하는 여인인 셈이다.
이 소설은 ‘깨달음을 얻어 가는 길(구도)’을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유의 소설을 ‘구도소설’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성장해 가면서 삶의 오묘한 진리를 터득해 나가는 것이 구도입니다. 구도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귀한 공부입니다. …… 혼자 산중이나 골방이나 깊은 연구실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터득한 깨달음의 보석, 장사를 하면서, 농사를 지으면서, 환자를 치료하면서 얻은 깨달음의 보석을 혼자서만 간직하고 사는 것은 앞에서 말한 인색한 부자하고 다를 것이 없습니다. 깨달음의 보석을 얻었으면, 올바른 삶의 지혜를 깨닫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탐욕스럽게 살아가는 가엾은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 소설은 자기가 구도의 길에서 얻은 깨달음의 보석을, 깨닫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슬프게 살고 있는 사람들과 어떻게 나누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위의 인용문을 볼 때 작가의 의도는 비구니 진성보다는 파계승인 청화의 삶이 진정한 구도의 길임을 천명하고 있다. 청화의 열정적인 생명력과도 같은 애욕과 세상을 향한 삶에의 의지를 묘사하고 있는데, 미망 속에서 방황하는 중생의 모습이 투사된 청화를 통해서 진흙 속의 꽃 같은 구도의 길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구니들의 절 청정암에는 은사 스님인 은선과 비구니 진성과 그리고 계를 받지 못한 행자승 순녀가 산다. 순녀는 생부를 고등학생 때 처음 만나게 된다. 그때의 아버지 모습은 스님이었다. 어머니와 오빠와 같이 살고 있지만, 그녀는 그 사실에 큰 상처를 받고 산다. 아버지의 입적, 대학 실패로 자원입대한 오빠, 그 속에서 그녀는 새로 부임한 국어 선생 현종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인 현종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지켜볼 뿐이다. 그러던 중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가기 위해 기차역에 갔다가 그 역 대합실에서 우연히 현종과 마주치게 된다. 그 인연으로 두 사람은 함께 여행길을 떠나고, 그 여행길에서 순녀는 현종이 상처했음을 알고 그의 여자가 되기를 결심한다. 그러나 방학이 끝난 후 이 둘의 관계가 학교에서 풍문으로 떠돌게 되자 현종은 학교를 그만둔다. 이에 따라 순녀는 아버지가 아닌 또 다른 남자로부터 큰 상처를 받게 되어 절에 몸을 의탁한다.
한편, 진성은 대학 공부를 하기 위해 절을 떠났으나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은선 스님이 있는 청정암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방학 때 청정암으로 돌아온 진성은 청화라는 법명을 얻은 순녀를 만나게 된다. 진성은 박현우라는 남자 때문에 절에서 쫓겨나는 것을 지켜보며 순녀를 비웃지만, 내면의 갈등으로 생긴 미망으로 인해 방황할 때마다 그녀를 떠올린다. 이에 은선 스님이 만행 중 중생의 아픔과 고난을 함께하지 않은 자신을 꾸짖자, 진성은 은선 스님의 마음속에는 속세에서 방황하는 청화를 더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밖에서 눈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청화가 돌아오고 있다고 진성은 생각했다. 문이 살며시 열리고 그림자 하나가 방으로 들어왔다. 몰려 들어온 눈빛에 방 안은 어슴푸레했다. 청화는 도둑처럼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선 스님의 기침 소리가 들려 왔다.
진성은 일어나 앉으면서 청화에게 옆자리에 누우라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청화가 다가와서 앉았다. 청화의 몸에서 찬바람이 날아왔다. 남자의 냄새가 났다.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있다가 이제야 돌아온 걸일까. 아주 가버리지 않고 왜 다시 돌아왔을까.
이제 청화한테는 어떤 벌이 더 내려질까. 은선 스님이 다시 기침을……
은성 스님은 청화의 파계를 예감했고 진성도 눈치채게 된다. 세상으로 나온 순녀(청화)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남편 박현우가 순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를 유기하고 떠나자 그녀는 낙도에 있는 병원에서 간호사로 봉사한다. 과중한 업무 속에서 그녀는 때로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면서도 성실하게 일한다. 그러던 중 환자 수송차를 운전하는 송 기사와 결혼하게 되지만 그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다. 폭설이 쏟아지는 어느 밤, 은선 스님의 열반을 지키기 위해 순녀는 청정암에 돌아온다. 은선 스님은 열반하면서 상좌들에게 순녀(청화)도 자신의 귀한 상좌라는 말을 한다. 순녀와 둘이 남겨지자 은선 스님은 청정암에 버려졌었다는 아이가 지금 어디서 키워지고 있는지를 알려 주고 열반에 들어간다. 순녀는 그 아기가 자신의 아이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아기를 데려다 키워 왔던 윤 보살은 청화에게 그 아이가 죽었다고 전한다. 은선 스님의 다비식 불길이 사그라진 다비장에서 사리를 찾던 진성은 은선 스님의 유골을 품에 감추는 순녀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빈정댄다. 이튿날 순녀는 《반야심경》을 중얼거리며 청정암을 떠난다.
진성은 맹렬한 불 소리 속에서 들려 오는 은선 스님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달마 스님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느냐?”
그 말에 진성은 속으로 항의하듯 대꾸했다.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달마의 얼굴에 있는 수염을 하필 ‘수염’이라고 이름하여 부릅니까? 그것이 비늘이라 하면 어떻고, 손톱이나 발톱이나 코딱지라고 하면 또 어떻습니까? 저는 어찌하여 스님께서 하필이면 좌탈입멸했다고 우기려 했을까요? 모든 것은 허위이고 스님께서 한 줌 재로 변한다는 것만 진실입니다. 스님은 어찌하여 저의 만행을 우습게 여기시고, 순녀의 방황과 미망을 그렇듯 값지게 받아들이셨습니까? 스님이야말로 달마 스님의 수염에만 매달려 사시다가 그 수염과 함께 한 줄기 연기로 돌아가시는 것이 아닙니까?”
은선 스님의 노여워하는 목소리가 진성의 정수리를 때렸다.
“대학에서 네년은 넝마주이같이 알음알이만 한 구럭 지고 왔구나. 이년아, 새벽달을 보아라. 그 아래에서 여우가 된 네년의 넋이 울고 헤맨다.”
그것은 만행하고 돌아온 뒤의 무슨 말끝엔가 은선 스님이 소리쳐 꾸짖은 말이었다. 진성은 다시 항의하듯 대꾸했다.
“몇 억겁 동안 축생지옥을 헤매더라도 저는 스님을 죽이고 또 죽일 겁니다.”
위의 인용문은 다비식에서 진성이 은선 스님을 원망하며 자신의 구도에 대한 다짐과 독백을 하는 모습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달마의 수염과 진성 자신의 만행과 청화의 방황과 미망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점이다.
달마의 수염은 송 대의 임제종 양기파 스님인 혹암의 화두인 “서쪽에서 온 달마 스님은 왜 수염이 없을꼬?”의 선문답이다. 일반적으로 달마 그림에서는 달마 수염을 풍성하게 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염이 없을꼬?”라고 묻는 것은 본질을 드러내기 위한 역설적 표현이다. 역설은 논리적인 모순 관계로서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편이다. 현상과 본질은 모순적 관계를 이룰 수 있음을 암시하는 선문답이다. 또한 달마의 수염이 있든 없든, 또는 그 수염이 어떠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성의 만행과 청화의 방황과 미망도 그 나름의 깨달음을 위한 구도임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의 수행 방식은 저울질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님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각자의 방식으로 “가자. 가자. 피안으로 건너가자.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가자. 가서 깨달음을 얻자”로, 그곳에 닿으면 그만이라는 수행 방편의 동일화를 암시한다.
2. 한승원의 〈극락산〉과 ‘불교테마 명작소설 모음’ 소설들
‘불교테마 명작소설 모음’이라는 타이틀로 문학아카데미가 출판한 한승원 외 지음 《극락산》(1989)에는 한승원의 〈극락산 1, 2〉와 8명 소설가의 단편소설이 묶여 있다. 이들 소설은 불교적 소재를 차용하여 분단 문제(〈극락산〉과 〈쥐방울꽃〉), 운동권 문제(〈불의 집에서〉), 월남전 모티프(〈미로의 빛〉), 광주 민주화 투쟁 모티프(〈쥐방울꽃〉), 그리고 타 종교와의 갈등 문제(〈검은 숲 흰 숲〉) 등을 다루고 있다. 주제들 간의 교호는 이루어지지만 온전한 구도소설이라고도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김문수의 〈만종(晩鐘)〉은 불교의 표상적 사물인 범종 소리의 경건함을 깨우침의 위한 계시의 소리로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김상렬의 〈춘설〉은 수행자의 세속과의 만남으로 인한 수행의 갈등을 극렬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노명석의 〈돌불〉은 수행자의 고뇌와 참회, 파계를 극적일 만큼 참혹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소설로서 주목된다. 특히 정채봉의 〈오세암〉은 동심의 세계와 해탈의 참 의미를 환기해주고 있어 주목된다. 이 작품들 중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불교소설은 정채봉의 〈오세암〉과 한승원의 〈극락산 1, 2〉이다.
정채봉의 〈오세암〉은 동심과 불심을 그린 소설이다. 서사구조에서 수직과 수평의 서사가 잘 직조된 동화이다. 수직적 서사구조는 불교설화의 창작적 수용이라는 측면에서이고, 수평적 구조는 동심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이다. 동심의 수용이라는 수평적 구조의 제 계기들이 이 소설의 줄거리인 만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① 거지 남매는 수만 마리의 하얀 나비 떼처럼 날리는 포구에서 때 지난 나물국 빛 승복을 입은, 그리고 머리씨만 머리에 뿌려진 스님과 만난다. ② 스님은 거지 남매와 대화하는 동안 아이들의 무색무취한 마음에 감복한다. 사람들의 기복에 부처님은 귀찮은 것이다. 또는 누나의 댕기를 잡아당기는 바람의 손자국, 발자국, 초롱에 넣은 흰 구름, 돌부처님 입김으로 피어난 꽃 등에 대한 동생 길손이의 사물에 대한 인식에 놀라며 그들을 절로 데려간다. ③ 절에 살게 된 거지 남매 중 동생 길손이는 골방에서 연꽃을 떠받치고 서 있는 보살(탱화)을 보게 되고 그 탱화를 엄마로 생각하며 얘기를 나눈다. ④ 길손이를 절에 남겨 두고 겨울 양식과 땔감을 구하러 하산한 스님은 폭설로 한 달 스무날을 산 밑 마을에 묶여 있다가 관음사에 오르게 된다. ⑤ 굶어 죽었으리라 생각한 길손은 관음봉 여인(탱화 속의 보살=길손의 엄마)의 젖과 유희로 생부처가 된다. ⑥ 그로 인해 봉사였던 누나 감이는 눈을 뜨게 되고 때아닌 꽃이 피어나며 산짐승들은 관음봉으로 치닫는다. ⑦ 도를 얻은 길손의 장례식날 사람들은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성대한 다비식을 거행하나 감이는 연기되어 사라지는 동생 길손을 붙들어 달라고 운다.
이처럼 〈오세암〉의 이런 서사 골격을 통해서 불교 교리와 교호되면서 그 효과를 배가시킨다. 그 수직적 구조를 완인(完引),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⑧ “부처님 눈에는 바람이 보여?” “그럼 보이구말구.” ……“마음의 눈을 뜨고 계시니까. ……사람한테는 수많은 눈의 창문이 있단다. ……그러나 공부를 열심히 하면 하나하나 창문이 열리거든. 그 맨 안쪽 마지막 창까지를 연 분이 부처님이란다…….”
⑨ “흰 구름을 넣어 가지고 가는 거야. 요 앞날 개울에서 건져 왔거든.”(물 초롱에 담은 구름)
⑩ “누나, 꽃이 피었다. 겨울인데 말이야. ……저기 저 돌부처님이 입김으로 키우셨나 봐.”
⑪ “앉아 있기만 하면 뭣해/ 벽에 뭐가 있어? 솜다리꽃 하나도 피우지 못하구서.”(같이 놀아 주지 않고 면벽참선하는 스님에게 말하는 길손의 대사)
⑫ “이 어린아이는 곧 하늘의 모습이다. 티끌 하나만큼도 더 얹히지 않았고 덜하지도 않았다. ……꽃이 피면 꽃아이가 되어 ……바람이 불면 바람아이가 되어 바람과 숨을 나누었다. 이 아이는 이제 부처님이 되었다.”(탱화 속 여자의 대사)
⑬ “스님, 파랑새가 날아가고 있어요. ……모든 게 보여요. 햇빛도 보이고 스님도 보여요. 마루 위에 잠이 들어 누워 있는 길손이도 보여요.”(눈을 되찾는 감이의 대사)
⑭ “저 연기 좀 붙들어 줘요. 저 연기 좀 붙들어 줘요…….”
어린 사내아이 길손의 입을 빌려 개진한 ⑧의 득도를 위한 하나의 수행 방편 제시와 ⑬의 감이의 개안(開眼)은 불교 교리의 근간과 멀지 않다. 현상이나 사물의 본체를 접하기 위해서 눈[目]의 열고 닫음이 아니라 마음[心]의 엶이 있다는 수행 방편과 걸림의 벽을 깨뜨림으로써 무아(無我)의 차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⑨의 물초롱에 담은 구름과 ⑩의 돌부처의 입김으로 피어난 꽃, ⑫의 탱화 속 보살상의 대사는 선(禪)에서 의미하는바 자연과 자아의 일여를 대변하는 말이다.
선에서의 절대경은 만물과 나를 주객미분의 구체적인 생명으로 일체화하는 데서 성립한다. 불교와 문학은 이 점에서 만난다. 사물의 자기화, 직관에 의한 자기 투영 내지는 시화가 불교의 제법 실상에 대한 달관과 상통하는 것이 그것이다. “꽃이 피면 꽃아이가 되”고 “바람이 불면 바람아이가 되어 바람과 숨을 나누는” 이 동화에 나타난 만법일여(萬法一如)의 경지는 해맑은 동심을 그리는 동화 세계에 그 가능성이 있음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동심 불교소설에서 오도(悟道)의 환희경을 묘사한 부분은 위의 인용이다. 길손의 오도 열반을 〈오세암〉에서 삽화로 구조하고 있는 것은 이적의 신비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기적이라는 현상은 감동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선의 논리는 기존의 고착된 질서를 파기하고 이론적, 합리적 사고를 초월하는 데서 성립한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은 기존의 의식적인 존재에서 파생되기보다는 이를 부정하고 철저히 깨뜨리는 파괴된 상태에서 오게 된다. 세상의 때나 티끌이 묻지 않은 아이들의 마음은 이를 실현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구체화는 은유와 상징으로 표상한다. 아이들과 눈과 마음은 선에 근접하는 은유와 상징을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안다.
이 동화의 데뉴망(매듭풀기, 혹은 대단원이라는 뜻의 프랑스 말 denouement )의 대사인의 “저 연기 좀 붙들어 줘요.”라는 감이의 절규는 동생 길손의 죽음=연기=제행무상이라는 등식 관계를 자연스럽게 성취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수레바퀴가 부단히 굴러가듯 한순간의 정지도 없이 생멸변화한다는 제행무상을 〈오세암〉은 결말에서 암시한다.
이렇듯 정채봉의 〈오세암〉은 불교사상을 수직의 축으로, 동심의 공간을 수평적 축으로 하여 유기적 조직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다. 이 불교소설이 내설악의 오세암에 얽힌 불교설화(근대 불교계의 실화라는 말도 있음)를 근간으로 하여 쓰인 소설이라는 점에서 새삼 주목된다. 자료의 불충분과 필자의 게으름, 그리고 공부의 얄팍함으로 이 자리에서 그것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서사의 골격은 불교설화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섯 살짜리 아이의 득도 이야기 중 탱화의 설정과 죽음을 가져오게 한 폭설로 막힌 산길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리고 주요인물의 설정과 배경이 되는 공간의 설정도 그렇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불교문학 성립의 또 다른 가능성, 그 국면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어린이를 위한 불교소설은 구전으로 전래된 고대의 설화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오세암〉이 보여준바 근세사적인 인물의 설화를 문학에 수용함으로써 시간적 간극에서 오는 거리감을 해소할 수 있다는 점, 그로 인해 감동의 폭을 밀착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크다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득하여 잡히지 않는 불교사상을 어렵지 않게 동화라는 장르에 수용할 수 있다는 점, 더욱이 위에서 개진된 바처럼 특수성으로 인해 보다 효과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나칠 수 없다.
한승원은 〈극락산〉을 1981년에 발표한 뒤 그 이듬해 〈극락산 2〉를 발표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대로 불교테마 명작소설 모음집에 〈극락산 1, 2〉를 묶어 소개했다. 이 소설은 한국전쟁 중 부모를 잃고 극락산 자락 외가 마을을 찾아 할머니와 함께 어렵게 사는 남매 이야기이다. 누이인 순덕과 동생인 만수가 외할머니 품 안에 안겨 편안하게 살려고 하나 그곳 사람들은 이들의 안식을 허락하지 않아 역사적인 외적 폭력과는 관계없이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의 안식처는 외할머니이다. 할머니의 신앙이 그들의 안식처이다.
이 소설의 요체는 극락암에 새겨진 부처 좌상 그 무릎에 새겨진 문고리 없는 문이 상징하는 극락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극락암은 암자가 아닌 극락산 정상에 자리한 바위굴이다. “굴 안쪽 벽에는 부처님의 좌상이 불록하게 새겨져 있었고, 왼쪽 무릎 옆에는 자그마한 문짝 두 개가 새겨져 있었다. 흔히 마을에서 볼 수 있는 대문 모양의 그 문에는 빗장도 문고리도 없”는데도 “외할머니는 흐르는 땀을 훔칠 사이도 없이, 부처님 앞에다가 가지고 온 것들을 차려놓고 촛불을 밝혔다. 무릎을 꿇고 앉았다. 순덕이를 불러서 옆에 앉히고, 자기가 하듯이 따라 하라고 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고 입속으로 수수백 번을 외라고 했다. 그러면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극락세계엘 가게 될 뿐만 아니라, 장차 그녀가 공부를 잘하는 것은 물론 시집을 좋은 데로 가게 된다”고 말하곤 빌고 또 빌었다.
기도를 마친 외할머니는 부처님 무릎 옆에 새겨진 문을 가리키면서
“저것이 극락으로 가는 문이란다.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불공을 정성껏 드리면 죽은 다음에 저 문을 열고 나갈 수 있게 된단다. 이 굴 주변에는 극락을 가고자 하는 귀신들이 수없이 몰려들어 있단다. 나도 죽으면 저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고 말했다.
벽에 부조된 부처님이 얼굴은 여느 절에서 볼 수 있는 황금빛 부처님의 그것 같지가 않았다. 조각 솜씨가 거칠고 조잡했다. 얼굴은, 끝이 뭉툭하고 운두가 절구공이처럼 길게 드높은 코뿐인 듯싶을 만큼 그게 가장 힘있게 강조되어 있었다. 반쯤 감은 눈에 입술은 얇고 귓밥은 길게 처져 내렸다. 머리 뒤쪽에는 해 모양의 둥근 테가 있고 그 양 옆으로 쪽박 크기만 한 칠성님들이 새겨져 있다.
이 인용문을 주목할 때 할머니의 사상은 토속 불교이다. 초기 한국불교는 토속신앙을 수용하여 발전한 기복신앙으로 우리 할머니들이 믿었던 신앙 형태이다. 신이 없는 불교를 신이 있는 불교로 토착화시키면서 산신각을 세웠고, 기원 신앙으로 발전시켰다. 위의 인용문에서 황금빛 부처의 후광 옆에 새겨진 “쪽박 크기만 한 칠성”은 도교에서 온 것으로 탐랑성군, 거문성군, 녹존성군, 문곡성군, 염정성군, 무곡성군, 파군성군 등 칠원성군을 의미한다. 이들이 하는 일은 자손들에게 복을 주고(탐랑), 거문은 장애와 재난을 없애주고(거문), 업장을 소멸시켜 주고(녹존), 욕구하는 바를 모두 얻게 해주고(문곡), 여러 가지 장애를 없애주고(염정), 복덕을 주고(무곡), 파군은 장수하게 해주는 일을 해준다. 그러나 극락의 문을 열어주는 일은 부처만이 해줄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불교와 칠성신앙을 혼동해서 섬겼던 우리 민족의 아낙네 모습을 이 소설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기존 불교 소설과는 다른 변별성을 지닌 작품이다.
3. 남지심의 〈우담바라〉 재조명
남지심의 〈우담바라〉는 제1부 ‘도다가의 종’(1987)을 시작으로 제2부 ‘비구니길’, 제3부 ‘마니주를 찾아서’, 제4부 ‘황금 전당’(1991)까지 5년에 걸쳐 집필된 장편소설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600만 부가 팔린 밀리언셀러로 영화화까지 된 소설이기 때문에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소설이다. 특히 3,000년 만에 한 번 피는 전설의 꽃 ‘우담바라(優曇婆羅)’를 소재로 한 이 작품에 대한 관심은 당대의 어떤 소설보다도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부처상에 핀 꽃이, 혹은 바위틈에 핀 꽃이 우담바라가 아닌가 하는 진위 논란이 수차례 야기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단의 관심이나 평단의 평가는 유예되었다.
그러다가 2015년에 ‘현대불교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어 재조명의 필요성을 부가한다. 이때의 심사평은 “부처님 말씀이나 경전을 거의 인용하지 않으면서 불교의 정수와 현대적 의미를 가장 잘 형상화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꾸준히 불교소설 창작에 전념해온 작가의 작품을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는 이 작품에 대한 평가와 함께, 소설가 남지심이 《여성동아》에 〈솔바람 물결소리〉로 등단한(1980) 이후, 40여 년 동안 부단히 써왔던 작품들이 불교를 소재로 한 소설들이었던 점을 인정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40여 년 동안 불교소설을 써왔고 밀리언셀러로 독자들의 관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문단에 광범위한 평가를 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필자도 졸고 〈현교적(顯敎的) 불교소설의 한 전형〉(《불교문예》 1999)이라는 글을 발표한 바 있지만 이 소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라고는 할 수 없다.) 불교문학이라는 특수성 때문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담바라〉에 대한 종교적 상징성과 불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신비의 꽃 ‘우담바라(산스크리트어: उडुम्बर uḍumbara)’의 상징성을 “불경에서 여래(如來)나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나타날 때 감득의 복덕으로 꽃이 핀다. 그래서 묘음(妙音)을 듣는 것은 이 꽃을 보는 것과 같고, 여래의 32상을 보는 것은 이 꽃을 보는 것보다 백만 배나 더 어렵다”고 하는 것처럼 불교적인 접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지심은 《우담바라》 제1부 〈도다가의 종〉을 출간하면서 이렇게 토로한다. “우담바라는 3천 년 만에 한 번씩 핀다는 전설적인 꽃이다.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3천 년의 세월이 걸려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3천 년이라는 세월은 꼭 시간적인 개념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시간 속에 담긴 뜻을 상징적으로 설명한 말일 수도 있다. 3천 년 만에 한 번씩 핀다고 해서 우담바라가 반드시 천상의 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길가에 피어 있는 패랭이꽃도 엉겅퀴꽃도 한 송이의 우담바라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나는 강하게 가지고 있다. 그래야만 우담바라가 나와, 나를 포함한 우리와 관계 지어질 수 있어서”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시간 속에 담긴 뜻을 상징적으로 설명”한 것이라는 말과 “우담바라가 반드시 천상의 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길가에 피어 있는 패랭이꽃도 엉겅퀴꽃도 한 송이의 우담바라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이라는 말이 주목된다.
또한 제2부 〈먼 비구니 길〉에서는 “나는 엉뚱하게도 구도자(求道者)의 모습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속진에 묻혀 사는 내가 구도에 목숨을 던진 구도자의 모습을 그려보겠다고 덤비는 자체가 언감생심 터무니없는 욕심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 역시 무슨 업력(業力)인지 나로서 알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 “내가 그린 비구니 모습도 ‘장님 코끼리 더듬기’였음을 솔직히 자인한다. (……) 작가가 한 작품을 완성한 후 많은 독자로부터 공감받기를 바라는 것은 작가다운 욕심일 것이다. 그것은 외로운 작업에 대해 위로받고 싶어지는 가장 인간다운 열망인지도 모르겠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는 〈법보신문〉의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생을 살아갈 답이 없으면 삶의 의미가 없었어요. 인생이 뭔지 알아야 했는데 몰라서 방황했어요. 답을 찾고자 애를 많이 썼어요. 스승을 만나려 했고, 책도 많이 읽었지요. 그러다 우연인지 숙연인지 ‘화엄경의 세계’를 만났는데 답이 여기 있었어요. 바로 ‘십지품’에 나오는 보살의 완성 과정에 몸과 마음이 빨려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이전에도 남지심은 〈불교신문〉에서도 “화엄경의 세계 그 안에 있는 십지품을 읽을 때 견성한 보살이 환희지를 거쳐 이구지, 발광지, 염혜지, 난승지, 현전지, 원행지, 부동지, 선혜지, 법운지를 넘어 성불에 이르는 장엄한 여정을 보는 순간 천지에 향내가 가득 차면서 나 자신이 허공 위로 높이 솟구쳐 오르는 감동과 함께,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답이 보살의 삶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라고 기고하면서 〈우담바라〉를 쓰면서 구도적인 삶을 살았음을 시사한 바 있다.
소설 〈우담바라〉의 서사 구조는 오채련과 한태서 부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많다. 융, 최길성, 백족 화상(담시), 지효 스님(현지), 용화 보살봉두, 송강, 동화와 동미 남매 등이다. 이들이 《화엄경》 〈십지품〉에 등장하는 보살들처럼 얽혀 수평적 혹은 수직적으로 서사구조를 형성한다. 그러나 메인 스토리의 골간은 오채련과 한태서 부부,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융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출가자든 재가자든 그 나름의 성실한 삶을 통해 인연으로 얽혀진 갈등과 고뇌를 해소한다. 특히 융의 깨달음을 위한 삶에 동참한다. 그 동참의 한 방편은 원효의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 일심으로 돌아가서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한다)’ 사상처럼 무애행(無㝵行)을 통해서이다. 특히 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최길성이 백족 화상에게 던진 담론인 현대물리학과 불교의 연관성 문제이다.
“불교의 경전 중에서 특히 화엄경은 장엄한 교향곡과도 같습니다. 교향곡 속엔 수많은 음표가 있어 높고 낮음과 길고 짧음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을 소리로 드러내어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은 연주자들입니다. 화엄경의 진리도 이와 같습니다. 화엄경은 우주의 진리를 담고 있지만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 주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 그 진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 불교가 미래 종교로 남기 위해서는, 미래인들에게 지속적으로 불교의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도(道)와 과학을 한 그루의 나무로 접목시키는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도인인 동시에 위대한 과학자여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로 담론해야 할 부분으로 남긴다. 구도의 표상도인 ‘심우도’와 고대 중국의 음양철학과 물리학의 상보성 원리 등의 연관성을 이 소설 속에서 탐색해야 하기 때문이다. ■
유한근
시인 · 문학평론가. 동국대 국문학과, 동 대학원, 명지대 대학원(박사)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평론) 당선 등단.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교수 역임. 시집 《사랑은 흔들리는 행복입니다》 평론집 《현대불교문학의 이해》 《인간, 불교, 문학》 등 저서와 논문 다수. 만해불교문학상, 문학평론가협회상, 동국문학상, 월산문학상 등 수상. 현재 《인간과 문학》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