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영화 100년] 박노식 도발에 장동휘는 술병을 들었다
<15> 활극 같은 삶을 산 충무로 액션배우 영원한 용팔이 박노식 '팔도 사나이'서 주연같은 조연… 폭행 등 물의도 큰형님 장동휘 '돌아오지 않는 해병'서 과묵한 분대장역으로 스타 반열에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들을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영화배우 박노식이 액션 연기를 펼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72K 다이야를 찾아라'(1971)에서 장동휘(왼쪽)와 박노식이 연기호흡을 맞추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노식의 자서전 ‘뻥까오리 백작’(1995)에 실려 있는 일화이다. 유현목 감독의 ‘카인의 후예’(1968)로 대구 로케이션 촬영을 나가던 중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날 촬영을 마친 배우 김진규(1923~1998), 장동휘(1920~2005), 박노식(1930~1995) 세 사람은 기분을 내어 금호관광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술자리를 가졌다. 흥이 도도히 오르자 박노식이 입을 열었다. “두 형님들, 날 싸가지 없는 놈이라 욕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보시오.” 눈을 빛내며 두 선배를 매섭게 바라보던 박노식은 말을 이었다. “이번 대종상은 나가 꼭 타야 쓰겄는디, 형님들이 양보하쇼. 그리고 형님들이 암만 몸부림쳐도 말입니다잉. 이 영화에서 역할로 보나 비중으로 보나 나의 연기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아예 단념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잉.” 취중에 실수로 내뱉은 말이라 넘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김진규는 후배의 주정이라 여겨 웃으며 받아넘겼다. 그러나 장동휘는 그러지 못했다.
신경을 건드리는 박노식의 말에 정색한 그는 “그래, 너 혼자 다 해먹어라.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라 쏘아붙였다. 취기가 한껏 오른 박노식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타라면 누가 못 탈까봐 그러십니까? 그런데 이렇게 큰 놈의 새끼 보셨습니까?” 말대꾸에 뇌관이 폭발한 장동휘는 탁자 위의 술병을 들어 박노식의 머리를 후려갈겼고 결국 싸움에 불이 붙었다. 한국 액션영화 1세대를 대표하는 두 배우가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맞붙은 사건으로, 1968년 4월 22일 오전 1시쯤의 일이었다. 실제 인생에서도 마초이즘을 관철하며 살아온 ‘싸나이’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보여준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카인의 후예’에서 백발의 머슴 도섭 영감을 연기한 박노식은 본인의 말 그대로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차지하고야 만다. 영화배우 박노식. 한국일보 자료사진 액션배우 박노식은 폭력 등으로 여러차례 구속되며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삶 그 자체가 액션이었던 박노식 배우 주현은 박노식의 아들 박준규와 출연한 방송에서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셔서 경찰서 유치장에 자주 들어가셨는데, 촬영있을 때마다 후배들이 가서 모셔오고, 끝나면 다시 유치장으로 모시고 갔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늘 혈기방자했던 박노식은 실생활에서도 주먹다짐으로 종종 물의를 빚었다. ‘김약국의 딸들’(1963) 때는 만취해서 숙소에서 신성일을 구타했고, 심야에 촬영을 마치고 해장국집으로 가던 중 경찰 검문소의 바리게이트를 지프로 들이받는가 하면, 청와대 수위를 폭행하거나 검찰청 현판을 떼다가 유리창을 모조리 깨부수는 등의 물의를 빚어 서대문 형무소를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경험을 영화에 반영해 ‘인간 사표를 써라’(1971)나 ‘집행유예’(1973)를 직접 감독하는 등 유쾌하면서도 괴짜스러운 일면도 갖고 있었다. ‘마도로스 박’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던 박노식은 1960년대 후반에 소위 ‘다찌마리’ 영화나 ‘대륙물’(만주 웨스턴)이 주종을 이루던 한국 액션영화의 전성기를 풍미했던 배우 중 한 사람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연기에 눈을 떠 대전의 악극단에서 활동하던 그는 연극 ‘나그네 설움’의 주연을 하던 중 우연히 ‘피아골’(1955)을 연출한 이강천 감독의 눈길을 끌었고 전쟁영화 ‘격퇴’(1956)로 영화계에 발을 들인다. 훗날 각인되는 싸움꾼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박노식의 초창기 경력에는 ‘눈물’(1958)이나 ‘느티나무 있는 언덕’(1958)과 같은 멜로 드라마가 많았다. 다수의 멜로에 출연하며 주연급 배우로서의 입지와 명성을 얻었지만 박노식은 불만이었다. 천성적으로 싸움꾼이었던 그로서는 피가 끓듯 넘치는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발산할 수 있는 액션 영화가 절실했던 것이다. 영화 '돌아온 팔도 사나이'(1969)에서 박노식이 의리의 사나이 용팔이를 연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성격파 캐릭터 용팔이의 탄생 박노식에게 액션 배우로 변신할 기회를 준 건 ‘한국 액션영화의 대부’ 정창화 감독이었다. 단역이었지만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에서 주인공 황해를 배신하는 부하 역을 사정을 해서 얻어낸 것이다. 이 기회에 존재감을 각인시키고 싶었던 박노식은 하얀 양복에 하얀 장갑으로 차려 입고 촬영장에 들어가, 황해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을 온 몸을 더럽혀가며 처절히 연기했다. 2분 정도 분량이 될 예정이었던 이 장면은 10분으로 마무리되었고 액션배우 박노식의 신고식이 되었다. 신상옥의 ‘벙어리 삼룡’(1964)에서 성격파 악역의 면모를 한껏 과시한 박노식은 신경균의
‘마도로스 박’(1964)과 임원식의 ‘배신자 상하이 박’(1965)에 이르러 본격적인 액션배우의 길로 접어든다. 김두한의 일대기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극화한 김효천의 ‘팔도 사나이’(1969)에서 박노식은 전라도에서 서울로 막 상경한 건달 용팔이 역으로 열연한다. 바지저고리 한복 차림에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촌스럽지만 인정넘치는 주먹 용팔이는 ‘하얀 수염’(1974), ‘방범대원 용팔이’(1976) 등으로 1970년대 극장가를 휩쓸었고 ‘돌아온 용팔이’(1983)까지 이어져 박노식 배우 인생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다. 용팔이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돌아온 팔도 사나이’(1969)에선 조연이었던 용팔이가 아예 주인공으로 승격될 정도였다. ‘돌아온 팔도 사나이’에 이어 임권택 감독의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내린다’(1971)에 출연한 박노식은 건달생활을 청산하고 새 인생을 살려고 노력하지만 종국엔 과거에 발목잡혀 주먹 세계로 돌아오는 장르적 인물의 전형성을 창조해낸다. 영화 '특공대와 돌아오지 않은 해병'(1970)에서 장동휘가 열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재생'의 장동휘. 한국일보 자료사진
◇속정 깊은 큰형님 이미지의 장동휘 박노식의 반대 극점에 섰던 이가 장동휘였다. ‘팔도 사나이’에서 장동휘가 연기하는 호는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차림으로 등장해 종로 거리의 패권을 두고 도전한 용팔이를 한 방에 쓰러뜨린다. 임자를 제대로 만났음을 뼈저리게 느낀 용팔이는 형님으로 모시겠다며 넙죽 큰 절을 한다. 그런 용팔이를 호는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면서 “좋은 동생이 생겼구나”는 말과 함께 식구로 받아들인다.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내린다’에서도 장동휘가 맡은 조폭 우두머리 장대규는 박노식이 연기한 전쟁고아 강민을 거두어 키운 아버지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범하고 속 깊은 큰 형님. 선 굵은 배우 장동휘의 캐릭터 성격이 극명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1962년 김지미와의 간통 혐의로 옥고를 치른 최무룡(1928~1999)이 출감하자마자 먼저 찾은 곳이 장동휘의 집이었다는 일화는 장동휘의 인물됨됨이를 능히 짐작케 한다.
인천 태생으로 중국 극단 칠삼조에 들어가 연기 생활을 한 장동휘는 광복 후 귀국해 1957년 ‘아리랑’(1926)을 리메이크한 김소동의 동명 영화로 데뷔했다. 나운규가 맡았던 영진 역을 꿰 찰 만큼 그의 연기력은 널리 인정받았고, 임권택의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에서 일본 헌병대장, 김기영의 누아르 ‘아스팔트’(1964)에서 형사에게 복수하고자 다이너마이트를 몸에 두른 악역으로 카리스마를 과시했다. 배우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건 이만희 감독과의 만나면서부터였다. 스릴러 ‘다이얼 112를 돌려라’(1962)를 계기로 합을 맞춘 장동휘는 전쟁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에서 과묵한 분대장 역을 맡아 스타의 반열에 오른다. 영화에서 분대장은 얼핏 무뚝뚝하고 엄격해 보이지만, 실은 병사들의 고통과 애환을 잘 헤아리고, 속정이 깊은 만큼 내면적인 고뇌 또한 깊은 인물로 그려진다. 허장강(1925~1975)이나 황해(1921~2005) 등과 더불어 악역의 인상이 강했던 장동휘가 자신만의 캐릭터를 획득하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죽인 자의 딸을 거두어 키우는 ‘암살자’(1969)의 킬러나 이두용의 ‘경찰관’(1978)에서 부하를 소중히 대하는 파출소장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 뒤 장동휘는 한국전쟁 영화의 단골 배우가 되어 ‘창공에 산다’(1968), ‘대전장’(1971)에도 얼굴을 내비치게 된다.
박노식이 외면으로 감정과 에너지를 뿜어내는 활화산과 같은 배우였다면, 장동휘는 반대로 뜨거움을 내면으로 집어삼키는 휴화산과 같은 배우였다. 이만희의 ‘검은 머리’(1964)나 ‘암살자’ 등에서 잘 드러나듯, 장동휘의 연기에는 과장된 표정과 작위적인 동작을 배제한 채 작고 미세한 흔들림만으로 공기를 장악하는 우아한 미니멀리즘이 있었다. 그러나 무수한 아류작을 쏟아낸 협객물의 한 철이 지나가면서 장동휘는 차츰 영화계에서 설 자리를 잃어갔다. 한국영화 산업은 불황으로 빠져들었고, 트렌드 역시 호스티스 영화와 청춘 영화로 재편되고 있었다. 의리의 사나이들, 큰 형님들의 세계는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