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哲人)의 정치
플라톤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녀야 할 최상의 모습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아레테(arete)라고 불렀다. 그러면 어떤 상태가 사람이나 사물이 가장 훌륭한 상태라고 할 수 있을까?
플라톤은 이 세상을 현상계와 이데아(idea)라는 두 세계로 구분했다. 현상계는 말 그대로 우리가 밥 먹으며 잠자고 하는 현실 세계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세계다. 그런데 이데아계는 고정되어 불변하는 세계다. 진리를 품고 있는 불변의 세계다. 감각으로 알 수 없는 그런 세계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없고 오직 이성으로만 파악되는 그런 세계다. 이데아는 육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통찰되는 사물의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를 가리킨다.
현실에 있는 삼각형이나 아름다운 꽃들은 모두 불완전하지만, 이데아의 세계에는 완전한 삼각형의 이데아와 아름다움의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정삼각형을 그린다고 생각해보자. 과연 완전한 정삼각형을 그릴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여 그것은 불가능하다. 비슷하게 그릴 수는 있겠지만 완벽한 정삼각형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 변의 길이가 똑같아야 하는데 그리는 순간 오차라는 것이 발생한다. 아무리 정확하게 그리려 해도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그린 정삼각형은 실제로 정삼각형이 아니다. 이것이 현상계다.
그럼 완전한 삼각형은 어디 있나? 우리의 머릿속에 있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정삼각형이라는 관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관념의 세계가 바로 이데아다. 모든 완전한 사물은 이데아계에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진리를 알려고 하지 않고 살아간다. 현상계에 눈이 멀어 허겁지겁 살아간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 이를 깨우치려고 한다. 그럼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람들이 동굴 속에 갇혀 있다. 사람들은 사지가 묶여서 뒤를 돌아볼 수조차 없다. 사람들의 뒤에는 횃불이 있고, 또 그 앞에는 높은 담이 있다. 그리고 담 뒤에는 어떤 사람들이 사물이나 동물들의 모형을 가지고 왔다 갔다 한다. 그래서 묶여 있는 사람들은 횃불에 비친 사물의 그림자만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 동굴 속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보는 그림자의 세계를 진짜 세계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사슬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동굴 밖으로 나갔다. 동굴 밖을 나간 이 사람은 눈이 부셔서 처음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물들과 동물들을 직접 보게 된다. 달과 별도 보고 나중에는 태양까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자신이 동굴 속에 본 것들은 진짜 사물들이 아니라, 사물들의 그림자였단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사람은 다시 동굴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기 옆에 묶여 있던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 네가 지금 보고 있는 거 단지 그림자야. 진짜는 저렇지 않아. 밖에 나가면 내가 보여줄게.”
그러자 이를 듣던 사람이
“야 이 새끼야, 저게 안 보이냐? 저렇게 생생한데 어떻게 그림자일 수 있냐?”라고 말했다.
그리고 풀어주었는데도 동굴 밖으로 나갈 생각을 안 했다. 동굴 밖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동굴 안은 가짜 세계이고, 동굴 밖은 진짜 세계이다. 동굴 안은 현실의 세계이고 동굴 밖은 이데아의 세계다. 동굴 안은 인간의 감각으로 느끼는 가시계(可視界), 동굴 밖은 인간의 이성으로 감지하는 가지계(可知界)입니다.
플라톤의 주장이 무엇이냐 하면, 감각으로 느끼는 세계는 가짜 세계이고 이성으로 인지하는 이데아의 세계가 진짜 세계라는 것이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 줄 알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이데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넉넉하더라도 나라가 어지러우면 고통스런 삶을 살게 된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을 담은 책이 ‘국가’라는 것이다. 국가라는 공동체는 여러 계급으로 나누어지는데, 생산자 계급, 전사 계급, 통치자 계급이 그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통치자다. 참된 통치자는 자기의 이익이 아니라,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실제로 이런 능력을 가진 통치자를 찾는 것은 무척 힘든다. 통치자의 이데아를 깨닫고 실현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철학자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철인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른바 철인정치(哲人政治)를 주장한 것이다. 철학자야말로 이데아를 이해하고 훌륭한 국가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상대주의적인 진리를 주장했던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절대주의적인 진리를 주장한 것이다.
현상은 우리의 감각으로 알 수 있고, 이데아는 이성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수학을 강조하였다. 계산하는 것은 감성이 아니라 생각하는 이성이기 때문이다. 즉 이성은 이데아를 이해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의 세계와 그것을 탐구하는 이성의 힘을 강조하는 서양철학의 주류를 형성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각주(脚註)다라고 한 연유가 거기에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너무 눈앞의 현상에만 몰입되어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동굴에 갇힌 사람들처럼 눈앞에 보이는 그림자가 진짜인 줄 알고 속으면서 사는 건 아닐까? 가끔은 차가운 이성으로 본질을 생각하면서 뒤도 돌아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 사회를 이끌고 있는 정치인들도 작은 현상의 세계에만 이끌려 이전투구하는 것은 아닐까? 플라톤은 철인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때의 철인은 현재의 뛰어난 경륜가요 현명한 사람이다. 자기의 이익을 버리고 넘어서는 현대의 철인이 생각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아레테를 그려 본다.
첫댓글 '아레테(arete)'라는 멋진 말을 처음 들어봅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이랬으면 참 좋겠습니다.